2-26. 시해
#26
이렇게 재회할 줄은 몰랐다.
거진 4년만에 보는 면상이었다.
예상 외로 원래 세상에서 만났을 때와 겉모습이 별반 차이가 없었다.
“더럽게 크구만.”
그냥 크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아무리 고개를 젖혀도 한 눈에 전신을 담을 수 없었다.
다른 거인은 놈의 검지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근원을 모시는 제단 따위는 주먹질 한 방에 부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덟 장의 날개가 거센 폭풍을 일으키며 인근의 구름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있었다.
“쫄지 마. 이미 한 번 잡아 봤잖아.”
칼자루를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미세하게 진동하는 검신은 린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겨울의 뿔에서 정체불명의 시선을 느낀 뒤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응. 나도 알아.”
린이 대답했다.
확실히 만만치 않은 상대기는 했다.
지금껏 대적해 온 대머리들과는 격이 다르다.
거인 종족 전체와 이 놈 하나가 싸운다면 나는 왕이 승리하는 쪽에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간발의 차로 멸종의 위기를 벗어난 거인들이 부산스레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왕이시여.』
『친히 강림하시다니···!』
당장 눈앞의 대검이 남다른 격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는 그저 벽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흉구는 내 검기를 막았음에도 생채기만 나는 데 그쳤다.
물론 직접 검으로 베는 것과 검기를 날리는 건 천지차이였지만 거인의 무기가 파괴되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그때는 이름도 못 들었네. 너는 존함이 어떻게 되냐?”
능청스레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팔을 뻗었다.
콰아아아!
집채만한 손바닥 안쪽에서 새하얀 광선이 터져 나왔다.
“싸가지 없는 새끼.”
시야를 온통 가리는 규모였다.
나는 피하지 않고 칼날을 수직으로 세워 대응했다.
반으로 찢어진 광선이 하늘을 삼 등분으로 갈랐다.
나뉘어도 지름이 십 미터가 넘는 빛줄기는 닿은 존재를 모조리 분해해 버렸다.
『······!』
『아···』
못해도 대머리가 백 명은 죽은 것 같았다.
광선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랫사람의 목숨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걸 보니 별로 좋은 왕은 아닌 듯했다.
광선이 끊어지는 즉시 대검이 날아들었다.
“이크.”
넓게 횡으로 들어오는 베기였다.
나는 다리는 바닥에 고정한 채 허리만 뒤로 젖혔다.
칼날이 콧잔등을 스치며 지나갔다.
한 박자 늦은 검풍이 불어닥치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
반경이 수 km에 이르는 초승달이 하늘에 떠올랐다.
이번에도 셀 수 없이 많은 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피가 터지고 토막이 난 시체들이 떨어졌다.
초승달은 푸른 꼬리를 끌며 지평선까지 미끄러졌다.
“적당히 해 이 자식아!”
나는 용수철처럼 몸을 구부렸다 피면서 왕에게 도약했다.
다시금 대검의 찌르기가 쇄도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회피를 성공하자 놈의 자세가 잠시 흐트러졌다.
거리가 좁혀졌다.
위험을 직감한 놈이 뒤로 빠지는 순간이었다.
스각!
한 박자 빠르게 휘둘러진 내 검격이 놈의 오른쪽 안구를 베었다.
“아자!”
『윽.』
쾌재를 외쳤다.
놈이 처음으로 신음을 흘렸다.
벌어진 눈동자에서는 푸른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대머리 킹의 피를 마신 칼날이 타오르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기분이 어때 애꾸. 이제 좀 진지해질 의향이 생겼나?”
『미물 주제에.』
왕이 두 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주변의 거인들이 모두 내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
“하아···하아···노 놈들이 물러가요!”
“제기랄···커윽 우리는 산 건가?”
르탄시에가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아벨이 검으로 몸을 지탱하며 쓰러졌다.
마지막까지 거인들의 폭격을 막아낸 그의 몸은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과열되어 있었다.
새하얀 수증기가 그을린 목덜미 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 것 같다.”
판타시온이 끄덕였다.
그 역시 만신창이가 된 채였다.
위엄 넘치던 뿔은 이제 평범한 수사슴과 다름없이 보일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그란 카파도키아에서 주워 온 양날도끼도 산산이 박살난 채 자루만 남아 있었다.
“이제 더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
거인들은 모조리 로난이 사라진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근원을 중심으로 모여든 그들은 너무 수가 많아서 각각의 개체가 아닌 하나의 거대하고 하얀 구체로 보일 지경이었다.
학처럼 머리를 쳐들고 있던 오르세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로난 녀석이 반은 성공한 모양이군. 왕이 내려왔다.】
“저 정말로 왕이···?! 어서 가세해야 하지 않을까요?”
【가세라고?】
오르세가 코웃음쳤다.
르탄시에가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자신과 같은 것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거인으로 이루어진 구체.
그 중심에서 퍼덕이는 여덟 장의 거대한 날개와 홀로 맞서 싸우는 검은 그림자.
오르세는 공포와 경외 신뢰가 균등하게 뒤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할 일은 끝났다. 놈을 믿도록 하자.】
****
『네가 어디까지 방만하게 굴 수 있을 것 같으냐.』
왕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굉장히 민첩했다.
놈은 근원을 몸으로 가로막은 채 육중한 검격을 쏟아 부었다.
획이 한 번 그어질 때마다 폭풍이 일어났다.
가세를 위해 접근하던 거인들은 대부분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 버렸다.
“염병 발판 좀 부수지 마라.”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발 디딜 곳이 없는 게 문제였다.
나는 반으로 갈라진 근원을 모시는 신전의 건물에 올라탄 채 싸우고 있었다.
근원이 있는 신전의 반대편은 대머리 왕과 부하들이 감싼 채 지키고 있었다.
자세를 바로잡은 내가 재차 도약했다.
“뒈져 버려!”
검과 검이 맞닿았다.
합을 나눌 때마다 벼락이 튀었다.
스가각!
불현듯 대검이 긋고 지나간 자리 위로 하얀 선이 그어졌다.
허공에 머무르는 곡선은 생전 처음 보는 빛을 내며 이글거리고 있었다.
“엉?”
뭔가 싶어서 힐긋거리던 와중이었다.
콰아아아아앙!
단번에 좁혀든 선이 폭발했다.
휩쓸린 거인들이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런 건 본 적이 없는데 원래 세상보다 많은 영혼을 흡수하면서 새로 습득한 기술 같았다.
내가 폭발을 빠져나오는 찰나였다.
우측 사선에서 피하기에는 늦은 참격이 들이닥쳤다.
아 이건 어쩔 수 없나.
최대한 몸을 크게 회전시키며 검격을 받아치는 순간이었다.
“크앗!”
공성추에 들이받힌 것처럼 몸이 날아갔다.
역시 체급이 있어서 그런지 큰 공격은 받아치기가 어려웠다.
알짱거리던 대머리 하나가 나를 몸으로 받아냈다.
『그대는···!』
“덕분에 살았다.”
그리 중얼거린 내가 놈의 가슴팍을 박차며 도약했다.
흉곽이 음푹 꺼진 거인이 피를 토하며 추락했다.
거리가 좁아졌다.
돌진하며 날린 참격이 왕의 옆구리를 긋고 지나갔다.
촤악!
푸르고 끈적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윽 네놈이····』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쉽게도 내장까지 베지 못했다.
곧바로 임전에 돌입한 내가 다시금 합을 겨루었다.
천둥이 포효하고 피가 튀었다.
이따끔씩 유효타가 나올 때마다 서로의 몸 위에 상처가 새겨졌다.
‘확실히 강해졌군. 빌어먹을 놈.’
턱까지 흐른 코피를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나도 여기 와서 붕붕 날아다니고 있었지만 성장을 방해받지 않은 이쪽 세상의 대머리 왕은 내가 죽였던 놈보다 훨씬 더 강했다.
부하 대머리들은 이제 끼어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진형만 갖추고 있었다.
카아아앙-!
검을 나눈 우리가 길항하며 튕겨 나갔다.
곧바로 달려나가려던 내가 제자리에 멈춰섰다.
들불처럼 난폭하게 굴던 왕이 가만히 서 있었다.
“후우···뭐 하냐?”
『……선왕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나.』
“뭐야···지금 상황에서···헉 그딴 게 궁금해?”
『고하라.』
하여튼 사고를 이해할 수 없는 종족이었다.
어차피 이길 거라 생각하는 건지 원.
턱을 긁적이던 내가 중지를 쳐들었다.
싫다. 씹새야.
『뭣이?.』
귀찮아. 그리고 원래 세상에서 이미 말해줬어. 같은 설명을 굳이 두 번씩 할 필요는 없잖아?
애초에 대머리 새끼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한 말이었을 뿐이다.
내가 친절하게 냉동 보관된 선왕과 세니엘에 대해서 설명해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왕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감히···나를 기만한 대가를 치르리라.』
어디 해 봐.
놈에게 침을 뱉었다.
여덟 장의 날개가 단번에 펼쳐졌다.
모든 것을 휩쓰는 광풍이 터져 나왔다.
나는 바닥에 검을 박아넣으며 몸을 지탱했다.
근원을 모시는 신전을 제외하고 반경 수 km내에 있는 모든 것이 바람에 휩쓸려 날아갔다.
크으으…!”
피로 절여진 코트가 미친 듯이 펄럭였다.
곧이어 왕의 머리 위로 하얀 입자가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빛의 무구 수백 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대검보다 약간 작거나 비슷한 크기였다.
왕이 내게 검지를 뻗는 순간 그 모든 무기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오. 시발.”
이건 좀 빡셌다.
눈앞이 밝아졌다.
신전이고 지랄이고 단번에 날려 버릴 기세였다.
뭔가 비장의 수가 필요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내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래. 더는 돌아갈 곳도 없어.”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위기를 직감한 린이 요란하게 웅웅거리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 공격으로 발판은 모조리 파괴될 터였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제야 좀 긴장감이 느껴졌다.
“후으으으읍····”
무기들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계획을 수립한 내가 지반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빛이 가까워졌다.
동시에 덮쳐든 빛의 창이 신전의 반쪽을 흔적도 없이 부숴 버렸다.
발판이 소멸했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돌아갈 수 없기에 여기서 어떻게든 끝을 내야 한다.
“대머리.”
나는 혜성처럼 솟구치는 내내 검을 휘둘렀다.
앞을 가로막는 무기와 거인들이 실시간으로 수백 토막이 나며 붕괴되고 있었다.
어느순간 앞이 탁 트이며 왕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기가 승부수였다.
나는 발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쾅!
검기가 폭발하며 날아가던 내 몸이 한 차례 더 가속했다.
찰나 공간 이동에 흡사한 감각이 느껴졌다.
아득히 멀리있던 왕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퍼어어엉!!!
소닉붐이 등 뒤에서 터져 나왔다.
『뭐····』
“좆같은 임금님 놀이는 여기서 끝이다!”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나는 내 안의 벽 하나가 깨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느려진다.
황급히 대검을 치켜드는 왕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인식되었다.
주변의 모든 요소가 하나하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건····’
가끔씩 느껴지던 감각이 극대화된 것 같다.
반짝거리는 입자 수십억 개가 주변을 수놓고 있었다.
왕은 내가 죽을 때까지 방금의 공격을 쏟아부을 생각이었던 듯했다.
괘씸하지만 용서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제는 과거의 일이니까.
유일하게 제 속도로 움직이던 검이 호선을 그렸다.
왕의 두꺼운 목 위로 푸른 선이 그어졌다.
놈을 스치듯이 지나간 내 눈앞에 하늘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스각-!
선이 벌어지며 왕의 머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