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대반격(10)
#23
빛이 쏟아졌다.
오르세의 꼬리가 구름층을 빠져나왔다.
여지껏 본 적 없던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오르세를 제외한 모두가 벙쪄 버렸다.
초현실적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온갖 진풍경을 봐온 내 기준으로도 손에 꼽을 만한 장관이었다.
거대한 공백을 중심으로 두 개의 구름 바다가 위아래로 마주보고 있었다.
“세 세상에···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놀랍군.”
【크하하하! 봤느냐···헉 애송아! 허억···이게 나의 힘이다!】
오르세가 웃어젖혔다.
역시 무리했는지 호흡이 거칠어진 채였다.확실히 이건 굉장한 업적이었다.
나는 역시 오르세 님이야말로 최고의 드래곤이라는 말을 기계적으로 뇌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꼴에 고등 종족을 자칭하려면 이 정도 미적 감각은 있어야지.”
장담한다.
이건 색채 없는 세상에서 연출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일 터였다.
우리가 아는 파란 하늘은 없었지만 두 구름층의 간격이 너무 멀어서 그냥 위에 있는 구름층이 하늘처럼 보였다.
두 개의 운해는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평행선을 그리며 시력이 허락하는 한계까지 뻗어 있었다.
“·······”
우리는 여기가 적진이라는 것도 잊은 채 그 장관을 감상했다.
한결 서늘해진 바람이 폐부를 휩쓸었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오르세였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면 되나. 저 빛나는 곳인가?】
“···아아 그래. 저기다.”
아벨이 끄덕였다.
외계의 하늘에는 이미 한번 와 봤던 사람마저도 홀리는 마력이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뻗어 오르세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구름 바다 저 멀리 기이한 빛무리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저기가 놈들의 도시다. 나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신중한 진입을 권장하지. 로난 네놈이라면 느낄 수 있을 거다.”
“엉. 더럽게 많기는 하네.”
나는 혀를 차며 주억거렸다.
거리가 엄청났음에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 빛 부근에 엄청나게 많은 대머리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일단 올라오면 알아챌 수 있을 거라는 말은 이런 뜻이었나.
“뭐 그런데 별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 정면 돌파 말고 좋은 작전 있는 사람?”
나는 일행을 둘러보며 물었다.
솔직히 저 수준이면 나도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차원문에 도달하기까지 도대체 몇 놈을 죽여야 할까.
새파란 피가 속옷까지 적셔들 생각을 하니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기다려 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내 이럴 줄 알았지.”
역시 내 팔자는 고생할 팔자인 듯했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정면 돌파를 지시하려던 차였다.
“빠 빠르게 길을 찾는다면···가능할 것 같기도 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제 마법으로 놈들의 인식을 저해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사실 저항군에 들어온 이후로 계속 연구했었거든요. 물론 굉장히 까다로운 마법이라 자칫하면 풀리고 지속시간도 짧을 테지만···흠흠.”
“···인식 저해라고?”
르탄시에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우리는 모두 벽돌로 머리를 맞은 표정이 되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세상에 천재는 아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앞에 있는 날다람쥐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대주교가 되기 전부터 이미 악명 드높은 마녀였다.
판타시온이 되물었다.
“확실한가?”
“네. 잠깐만 시간을 주세요. 일단···오르세 님은 인간으로 폴리모프 하셔야 해요. 몸집이 너무 크면 감당이 안 되거든요.”
【흥미롭군. 마법사.】
오르세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확실히 이건 나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그냥 쳐들어 가도 어떻게든 되기야 하겠지만 거인들의 도시라는 존재 자체가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좋아. 진행시켜.”
****
『침입자가 있다. 척살조를 투입하라.』
『어리석은 자들의 혼을 별빛의 도가니에 담궈라.』
하늘 한복판에서 거인들의 대화가 울려 퍼졌다.
언제나 나를 흥분시키는 중저음도 하도 많이 들었더니 슬슬 익숙해지려 하고 있었다.
르탄시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여 역시 좋은 생각이 아니었어····”
그녀는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우리와 대머리들과의 거리는 채 스무 걸음도 되지 않았다.
그 둘을 제외하고도 많은 거인들이 우리의 곁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끝이야···끝이에요···우린 다 죽을 거에···읍!”
“조용히 좀 해 이 겁쟁아.”
보다 못한 내가 르탄시에의 입을 막았다.
숨이 막힌 그녀가 팔다리를 바동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입을 다물거라는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손바닥을 치웠다.
“파하···!”
“기껏 성공해 놓고 들킬 일 있냐? 잘만 하고 있구만 대주교까지 해본 사람이 뭐 이런 걸로 쫄고 그래?”
“하 하지만 이런 경험은 없었단 말이에요. 모두의 목숨이 제 손에 달려 있다 생각하니 긴장이 돼서···우욱.”
르탄시에가 헛구역질했다.
참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무랄 수는 없었다. 염력과 초 고도의 인식 저해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으니.
“이 페이스대로만 가자. 잘 하고 있어.”
“우우···네에.”
격려를 받은 르탄시에가 훌쩍였다.
나를 비롯한 다섯 명은 전적으로 그녀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인식 저해 마법은 성공이었다.
대머리들은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는 우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후우···후우····”
물론 조금이라도 소란을 피웠다가는 마법이 깨지기에 주의해야 했다.
르탄시에는 큰 소리를 내거나 무언가를 부수는 순간 끝이라 경고했다.
그녀의 염력은 우리를 공중에 떠올린 채 차원문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도시의 중심부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아벨의 말대로라면 이미 도시에 진입했다는데 어째 건물 같은 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혼잣말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군. 마법이 풀리면 꽤 위험하겠는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인마. 얘 또 긴장해서 토하면 어쩌려고.”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나저나 아무리 외곽이라 해도 너무 심심한 거 아니냐. 도시라면서 무슨 집 하나 없어?”
솔직히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거인들은 어떤 집에 살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보이는 것이라고는 구름과 저 멀리서 뿜어져 나오는 빛 뿐이었다.
“상식과는 다르다고 말했을 텐데. 별이 수백 배 넓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예의상 이정표 정도는 설치해 둬야지. 우리 동아리 훈련장도 이렇게 황량하지는 않았···음?”
투덜거리던 도중이었다.
저 멀리 이질적인 물체가 시야에 포착되었다.눈이 가늘게 좁혀졌다.“공?”거대한 구체가 공중에 떠 있었다.
필레온 아카데미의 건물을 세 개 정도 합친 듯한 크기였다.
정체불명의 구체는 놀랍게도 흰색이 아닌 검은색을 띄었다.아벨이 눈썹을 으쓱였다.
“아하. 창고로군.”
“창고라고? 저게?”
“그래. 가장 흔한 시설이지. 유일하게 본 적이 있는 건물이다.”
“흥미롭네···르탄시에 한번 가 보자.”
“저 저기를요?!”
르탄시에가 기겁했다.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주먹을 쥐어 보여줌으로서 그녀의 불만을 일축시켰다.
우리는 머지않아 구체 앞에 도착했다.
가까이서 보니 압도적인 크기가 한층 더 실감되었다.
“거 더럽게 크네. 도대체 뭘 저장해 두는 거야?”
애초에 이 새끼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데 뭘 넣어 두는지가 의문이었다.
나는 구체를 쓰다듬었다.
거인들의 두피처럼 맨질한 표면은 육각형의 얇은 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백만 어쩌면 수천만 개의 판이 정밀하게 맞물린 채 하나의 거대한 구를 이루고 있었다.
꼭 벌집 같다는 생각을 하던 와중이었다.
– 살려주세요.
“에잇 깜짝이야.”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른 르탄시에가 나를 돌아보았다.
“바 방금! 들었어요!?”
“···나도 들었다.”
【젠장 어떤 버러지가 안에 숨어있는 거냐.】
나만 들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아벨은 큭큭거리며 영문 모를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조심스레 얼굴을 가져다 대자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기서 내보내 줘.
– 괴로워!
– 이제 그만 죽게 해 주게···제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구체의 표면 혹은 내부에서 고통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문득 나는 대머리들의 생태를 떠올려 냈다.
잘 생각해 보면 그 새끼들도 무언가를 먹기는 했다.
이 시설의 용도가 창고라면 저장하는 건 설마····
“영혼?”
“눈치채는게 빠르군. 정답이다.”
아벨이 클클거렸다.
구체에서 손을 뗐음에도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 그럼 이게 전부 다?!”
【역겹군.】
르탄시에가 경악했다.
오르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슬프게도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육각형의 판은 전부 지성체의 영혼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씨발.”
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우리는 모두 얼어붙은 채 구체에서 들려오는 절규를 들었다.
멸망한 세상에서 내가 알던 사람은 모두 이 꼴이 됐을 터였다.
누나.
아셀과 마르야.
슐리펜과 에르제베트도···비통에 찬 울음소리는 잊었던 기억을 끄집어 내는 효능이 있었다.
‘좋지 않아.’불현듯 첫 번째 삶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종말의 20일.
세 명의 거인이 강림한 이후의 시간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대장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는 멈출 수 없었다.
가족과 친구 본인의 목숨까지.
대머리 삼형제는 사람들이 소중하다 생각하는 모든 것을 앗아갔다.
아직도 생생하다.
언제나처럼 구호 작전을 치르고 온 날이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짬밥으로 뭐가 나올지 생각하던 와중에 갑자기 달려온 군우병이 내 고향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누나.”
아하유테의 짓이었다.
군우병은 님버튼이 로마이라 산맥과 함께 소멸했다고 전했다.
그 순간 한평생 귀찮기만 여겨지던 누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너는 내 보물이라는 말과 함께.
– 지랄하지 마! 산맥이 사라지다니 그게 말이 돼?!
– 지 진짜입니다 상병님! 제가 왜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 닥쳐 씨발. 나는 안 믿어.
나는 즉시 탈영해서 현장으로 달려갔다.
짬을 똥구멍으로 처먹은 헌병대를 따돌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나는 생에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렸고 사흘이 걸릴 거리를 하루도 안 되어 주파하는 데 성공했다.
허나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숭어가 잡히던 강도 소담스러운 오솔길도 우리 남매가 태어나서 자란 추레한 오두막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거대한 구덩이만이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을 삼켜 대고 있었다.
– 누나.
– 이릴?
– 이릴 누나.
아무리 누나의 이름을 불러 봤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찢어진 옷가지나 부서진 가구 등.
이따끔씩 보이는 마을의 흔적이 절망감을 더해 주었다.
나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사라진 누나를 찾아 헤맸다.
젖은 흙을 맨손으로 파헤치다 쓰러지고 깨어나면 다시 땅을 파냈다.
누이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챙기고 싶어서.
유감스럽게도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쓸데없는 기억이.”
이를 악물었다.
수면 위로 떠오른 기억이 심장을 뛰게 했다.
여기 있는 판 하나하나가 누나와 다를 바 없었다.
행복했던 언제나처럼 일상을 영위하던 아마도 훨씬 더 늦게 죽을 수 있던 사람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이 칼자루로 향하던 차였다.
“잠깐 멈춰라!”
아벨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동시에 굉음이 작렬했다.
콰아아아앙!!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숨을 몰아 쉬는 판타시온과 구체 깊숙이 박혀 있는 양날 도끼가 눈에 들어왔다.
르탄시에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파 판타시온! 도대체 무슨 짓을!”
“······미안하다.”
큼직한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도낏자루를 움켜쥔 손이 바르르 떨려오고 있었다.
고개를 떨군 그가 메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
“멍청한! 어차피 근원을 부수면 모두 해결되는 문제인 것을!”
아벨이 앞머리를 움켜쥐었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린 채였다.
거인들의 시선이 쏠린 것을 확인한 그가 판타시온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제 어쩔 거냐 빌어먹을 사슴아! 근처의 모든 대머리가 우리를 봤을 거다. 기껏 르탄시에가 마법으로 파훼법을 내놓았는데 이딴 식으로···”
“아냐. 잘 했어.”
나는 아벨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그리고 판타시온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자세한 건 들어 봐야 알겠지만 이 사슴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모양이었다.
자업자득이라 불쌍하지는 않았지만.
“그럴 수 있지. 좆같을 수 있어.”
다만 그의 분노에는 공감했다.
도낏날의 양 옆으로 하얀 빛이 새나오고 있었다.
액체처럼 뭉친 채 꾸무럭거리던 빛무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기억이 난다.
근원을 파괴했을 때도 저런 게 나왔었다.
분명 갇혀 있던 영혼들이 해방되는 현상이었다.
『침입자다. 어느 틈에 들어온 거지?』
『엡실론을 쓰러뜨린 검사가 있다. 증원이 필요하다.』
『요람이 일부 파손되었다. 유실되는 자원을 확보하라.』
주변에서는 거인들이 부산스레 떠들어 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인식 저해 마법은 풀린 것 같았다.
행태로 보아 몇 분이면 바글바글하게 몰려들 터였다.
여기는 놈들의 도시니까 충원도 훨씬 더 빠르겠지.
판타시온에게서 몸을 돌린 내가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반성한다. 오히려 내가 잠깐 초심을 잃은 것 같네.”
“초심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냐.”
“별 거 아냐.”
칼집을 빠져나온 성검이 빛을 뿌렸다.
내 감정에 호응했는지 검신이 고속으로 진동하는 중이었다.
당연하다.
이런 꼴을 보고 열받지 않을 사람은 없다.
남의 영혼을 두고 자원이라니 씹새끼들이 적당히 해야지.
“후우.”
칼자루를 두 손으로 옮겨 잡은 내가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물 흐르듯 부드러운 가르기에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구체 위로 새하얀 수평선이 그어졌다.
호를 그린 칼날이 정지했다.
콰아아아앙!
영혼으로 이루어진 구체가 반으로 갈라졌다.
“무슨!”
아벨이 경악했다.
구체의 내부는 영혼을 가공해 만든 패널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절단면을 따라 미끄러진 반구가 구름 아래로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콰콰콰콰!
드넓은 절단면 위로 수백만 개의 영혼이 일제히 솟구쳤다.
“너.”
과즙이 터져 나오는 오렌지처럼 상쾌한 광경이었다.
판타시온의 눈이 커졌다.
거인들의 목소리가 세 배 정도 커졌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
요 근래 나는 확실히 초심을 잃었었다.
검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내가 놈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칼잡이가 써는 걸 귀찮아해서는 안 되는데.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