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대반격(9)
#22
“알아냈다고? 이렇게 빨리?”
“그래···완벽하지는 않지만”
아벨이 끄덕였다.
너무 집중했는지 코피가 아직도 줄줄 흐르고 있었다.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은 그가 말을 이었다.
“예전에 지도를 만들 때 이 사막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여긴 제국보다 열 배는 거대한 모래사장이야.”
“젠장 열 배라고?”
“놀랄 것도 없다. 애당초 이 행성은 우리가 온 곳보다 수백 배는 큰 별이니까. 우주를 누비는 정복자들에게 어울리는 고향이라 생각하지 않나?”
아벨이 클클거렸다.
나와 일행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륙도 아니고 별의 수백 배라니 그딴 크기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가 지평선 너머로 턱짓했다.
“근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저 방향으로 계속 가면 된다. 하지만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어.”
“사소한 문제라. 뭐지?”
불길함이 엄습했다.
절대로 사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속도로 날아가면 오 년 정도 걸릴 거다. 물론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씨발 .”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참고로 끼니와 수면도 모두 오르세의 등 위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빌어먹을 별의 크기가 수백 배는 된다는 말에서부터 불안하더라니.
나는 주먹을 움켜쥔 채 되물었다.
오 년은 안 돼. 더 빨리 가는 방법은 없냐?
있다.”
다행이네. 대책이 없었다면 댁을 여기서 걷어찰 생각이었거든. 어서 말해봐.
오 년이면 내 자식이 다섯 살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어림도 없지 씨발.
평행세계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는데 아장거리며 나온 꼬맹이한테 ‘이 아저씨는 누구에요?’ 따위의 소리를 들을 생각은 절대로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도 아데샨이 보고 싶어서 돌아버릴 지경인데.
잠시 뜸을 들이던 아벨이 입을 뗐다.
“놈들의 도시를 거쳐서 가는 거다.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지”
“도시? 대머리 새끼들도 그런 게 있어?”
“그래.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지만 실존한다. 주요 시설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구성되어 있지. 나도 직접 가본 적은 없다만 별의 곳곳을 잇는 차원문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아벨은 놈들이 차원문을 활용해서 광대한 공간을 돌아다닌다 설명했다.
기동력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안 그래도 날갯짓으로 커버하기에는 너무 별이 크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다.
“좋아. 그럼 바로 가자고. 어디로 가면 되는데?”
“위다.”
아벨이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나를 비롯한 일행이 따라서 고개를 들었다.
창백하고 기분 나쁜 구름이 꾸무럭거리고 있었다.
점령당했던 우리 별보다 수백 배는 더 밀도가 높아 보였다.
이따끔씩 구름 군데군데가 밝게 점멸할 때마다 대머리 종족의 그림자가 엇비치고 있었다.
“구름층을 뚫고 올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난다. 구름으로 이루어진 수평선이 존재하는 곳이지. 거기에 도달하는 순간 육안으로 도시를 볼 수 있을 거다.”
“가는 도중에 대머리 산적떼가 덮쳐올 확률은?”
“너는 피를 흘리며 바다를 헤매는 주제에 상어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느냐?”
“그건 그렇지. 하아···내 팔자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면 돌파를 선언한 주제에 비양심적인 발언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좀 편하게 가면 어디가 덧나나.
기왕 이렇게 된 거 빨리 해치워 버리는 편이 나았다.
나는 발밑의 비늘을 앞꿈치로 두드렸다.
“오르세. 괜찮겠어?”
【무슨 의미지?】
“아니 왜···본격적으로 놈들 소굴로 들어가는 건데 무서울 수도 있잖아. 걱정돼서 물어봤지.”
【하 어이가 없군. 감히 내게 그따위 모욕을 주다니!】
오르세가 웃었다.
검붉은 불길이 이빨 사이로 새나왔다.
격양된 목소리가 사막 위로 울려 퍼졌다.
【네가 잠을 청하기도 전에 도착해 있을 거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목도해라!】
네 장의 날개가 폭발하듯 펼쳐졌다.
여기가 적진이라는 생각 따위는 얇은 빵에 싸서 먹어버린 듯한 태도였다.
아무렴 상관없으려나.
내가 오르세의 등가시와 르탄시에의 목덜미를 동시에 붙잡는 순간이었다.
슈콰아아아악!
오르세는 검은 혜성이 되어 하늘로 솟구쳤다.
“히꺄아아아악!”
“참 쉬운 친구라니까. 오히려 좋아.”
르탄시에가 비명을 내질렀다.
내가 잡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날다람쥐가 되었을 터였다.
나머지 두 사람은 어떻게 그럭저럭 가시를 붙잡은 채 버티고 있었다.
구름층에 진입하기까지는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죽이는데.”
나는 주변의 풍경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반짝거리는 마나로 이루어진 구름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바다 위에서 맞이한 해무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오르세의 날개 뒤편으로 새하얀 구름길이 생기고 있었다.
끄아아악! 히아아악!
제법이군. 마룡.
아벨이 헛웃음쳤다.
가장 빠른 용이라는 나란소니아에 비견되는 속도였다.
아마도 이게 오르세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력일 터였다.
바람이 포효하고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사란테가 준 코트는 태풍 오는 날 계양한 국기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잠깐. 침입자가···』
『멈춰···』
주변에서는 대머리들의 목소리가 잠깐씩 들렸다 끊어지고 있었다.
우리의 존재를 감지는 했는데 너무 빨라서 따라잡지 못하는 듯했다.
‘이건 좀 꿀인데?’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아주 기분 좋은 빗나감이었다.
어차피 거인의 도시에서는 지랄 같은 모험을 하게 될 텐데 가는 길이라도 편하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래.
오자마자 그 염병을 떨었는데 사람이 숨 돌릴 시간도 있어야지.
눈을 감은 채 바람을 즐기던 와중이었다.
『엡실론이 그대들을 심판한다.』
“뭐?”
갑자기 머리 바로 위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일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날개 여섯 장 달린 대머리가 우리를 향해 강하하고 있었다.
“저 새끼는.”
심지어 낯이 익은 면상이었다.
다른 대머리보다 확연하게 큰 덩치 몸 곳곳에 새겨진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신.
여섯 장의 날개만큼이나 위압적인 네 개의 팔.
틀림없었다.
사막에서 우리를 기습한 놈들의 우두머리였다.
네 개의 손에는 번갯불처럼 번득이는 검이 각각 한 자루씩 쥐어져 있었다.
“하···씨발····”
아무튼 바람 질 날이 없었다.
내가 칼자루를 잡아당기려던 차였다.
묵묵히 버티고 있던 판타시온이 등가시를 연달아 박차며 도약했다.
“사슴.”
요격 마법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거구는 이미 오러로 두 배 이상 부푼 채였다.
양날도끼를 두 손으로 움켜쥔 그가 팔을 휘둘렀다.
뮈이이익-!!
빛의 해일을 양단한 것과 같은 일격이었다.
내 피가 발라진 도낏날은 놈의 방어막을 단번에 찢어발기며 파고들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카아아앙-!!
검과 도끼가 부딪히며 파열음이 작렬했다.
벼락이 치는 듯한 폭음과 함께 판타시온이 튕겨 나갔다.
커억!
코뿔소 떼에 치인 것 같았다.
자신을 엡실론이라 소개한 거인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대로 추락한 판타시온이 구름에 삼켜지기 직전이었다.
파 판타시온!”
르탄시에가 팔을 뻗었다.
낙하하던 거구가 허공에 정지했다.
그는 인양되는 다랑어처럼 천천히 구름 위로 끌어올려졌다.
“세상에···!
괜찮아요?!”
“크으···!”
간발의 차였다.
보이지 않는 손이 판타시온을 붙들고 있었다.
르탄시에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그는 사막까지 떨어져서 처박혔을 터였다.
판타시온 가슴팍은 불에 데인 것처럼 그을려 있었다.
르탄시에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네가 감히!”
정신을 집중한 그녀가 두 팔을 뻗었다.
염동력의 회오리가 엡실론을 향해 쏘아졌다.
급류를 연상케 하는 무형의 에너지는 이중 나선 형태로 꼬이며 그 위력을 더했다.
“허어. 제법이군.”
아벨이 감탄했다.
충분히 그럴 만 했다.
저 기술은 거인조차 피를 토하며 쓰러지게 만드는 르탄시에의 필살기였다.
문제는 상대가 보통 대머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충돌의 순간이었다.
엡실론이 두 개의 검을 교차하며 회오리를 막아냈다.
『오만한 미물이여.』
굉음이 작렬했다.
르탄시에는 계속해서 회오리를 쏟아냈다.
허나 빠른 속도로 정신력을 소모하는 그녀와는 달리 엡실론은 건재했다.
완전히 펼쳐진 여섯 장의 날개가 반동을 제어하고 있었다.
“이이익!”
『삿된 저항을 멈추고 소멸할지어다.』
대치가 이어지던 와중이었다.
엡실론이 남는 두 개의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회오리가 사 등분으로 찢어지며 십자 형태의 검기가 발사되었다.
“···아.”
눈앞이 밝아졌다.
르탄시에의 영창이 멎었다.
교차된 채 날아오는 검기는 필레온 아카데미의 본관을 단번에 자를 만큼 거대했다.
막을 방법 따위는 없었다.
오르세가 욕지거리를 뱉으며 회피기동을 시도하려는 차였다.
“좋아. 이 정도면 됐다.”
“로난 님?”
나는 르탄시에를 앞지르며 도약했다.
확실히 몸이 가벼워진 것이 체감됐다.
순식간에 간격이 좁혀지더니 엡실론의 검기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직 여섯 장은 버겁구만. 그래도 훌륭하다.’
싸움을 지켜 본 보람이 있었다.
르탄시에와 판타시온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해줬다.
여섯 장 짜리 앞에서 쫄지 않는 것만 봐도 차후에 충분히 활약할 여지가 있었다.
엡실론이 갸웃거렸다.
『어리석도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다니.』
“그건 너겠지 등신아.”
이해할 수가 없다.
쫄따구들 눈을 빌려서 봤을 텐데도 이런 판단이라니.
“날개가 여섯 개면 목숨도 여섯 개일 거 같냐?”
잡담을 나눌 여유는 없었다.
나는 묵묵히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수백 번의 참격이 허공에 그어졌다.
앱실론의 검기가 산산이 부서졌다.
콰장창!
잘게 조각나는 예기의 파편은 바람에 날리는 벚꽃처럼 아름다웠다.
『무슨.』
엡실론이 당혹성을 흘렸다.
하지만 내 차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검에 노을이 차오르며 전방을 밝혔다.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엡실론이 내 앞으로 끌려왔다.
기껏해야 세 걸음.
검을 휘두르면 닿는 거리에.
『이번에도···!』
엡실론은 반사적으로 몸을 빼려 들었다.
하지만 내 찌르기는 이미 교차된 검신의 중앙을 파고든 뒤였다.
빛으로 이루어진 칼날이 찰흙처럼 뭉그러졌다.
네 자루의 칼을 찢어발긴 성검이 엡실론의 목을 파고들었다.
『컥.』
유언치고는 소박했다.
검을 수직으로 올려 벴다.
수박이 잘리는 듯한 감촉과 함께 놈의 안면이 반으로 갈라졌다.
푸화악!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피가 얼굴을 적셨다.
“이렇게···쉽게.”
판타시온이 중얼거렸다.
큼직한 눈동자가 어울리지 않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다.
무력에 대한 순수한 감탄과 동경심만이 저런 눈빛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나는 염력에 매달려 있는 사슴에게 검지와 중지로 브이자를 지어 보였다.
뭔가 깨달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세상에.”
르탄시에가 입을 틀어막으며 경악했다.
아벨은 나를 무슨 숫제 괴물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엡실론의 여섯 날개가 뻣뻣하게 굳었다.
얼굴이 갈라진 대머리가 구름 아래로 추락했다.
내가 다시 오르세의 등 위에 착지하는 순간이었다.
“응?”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구름층이 흩어지며 환한 빛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