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대반격(6)
#19
“히야···그새 엄청나게 잘 꾸몄네요. 몰라보겠네.”
“후후. 매일 있는 의식이 더 즐거워졌으면 해서 시작했단다. 이제는 썩 근사해졌지.”
나바르도제가 눈웃음쳤다.
그녀는 인간 상태에서 뿔만 머리 위로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화단에 시선을 둔 채 끄덕거렸다.
“대단해요 누님. 진짜로.”
형형색색의 들꽃이 아름다웠다.
따뜻한 햇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푹신거리는 흙을 밟고 있자면 여기가 실내인지 외부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초록색 잔디로 뒤덮인 공간의 중심에는 큼직한 돌덩이가 부유하고 있었다.
“내가 뭘 했다고. 전부 너와 세계의 심장···아니 세니엘 덕이란다.”
제가 뭘 했다고요. 저 돌멩이도 누님이 아니었으면 진짜 돌에 그쳤을 거에요.
더는 황량했던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본부 깊숙한 곳에 자리한 세니엘을 모시는 전당은 이제 황궁의 정원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세니엘이 지속적으로 뿜어 내는 생명력과 나바르도제의 태양 마법은 인공적인 구조물조차 자연의 일부로 만들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아 끌며 본인이 가꾸어낸 생명을 자랑스레 소개했다.
이제 둘이 있을 때 손을 잡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나란히 걸음을 맞춰 산책하던 와중이었다.
“그래서···정말 침략자들의 세상으로 가는 거니?”
나바르도제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결행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녀를 돌아본 내가 주억거렸다.
“네. 슬슬 끝을 봐야죠. 승기는 확실히 우리가 잡았지만 뿌리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놈들은 계속해서 몰려올 거에요.”
“응···나도 그게 맞다고 생각한단다.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솔직히 너무 걱정되는구나.”
나바르도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맞잡은 손에 힘이 더해졌다.
우려가 뚝뚝 묻어나는 눈빛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친다면 아마도 이런 느낌이 아닐까.
“에이 또 그러신다. 괜찮다니까요?”
“그래도····”
“어차피 전부 싸워 본 상대에요. 대머리 왕은 조금 빡세긴 하지만 절대로 못 잡을 놈은 아니고요. 설마 저를 못 믿는 건 아니죠?”
나는 내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과장된 몸짓을 해서라도 그녀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익살스러운 행동을 본 나바르도제가 설핏 미소지었다.
“믿는단다. 세상 누구보다.”
“크크 그렇게 나오셔야죠. 게다가 저 혼자 가는 것도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그것도 그렇지. 설마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와 간부들과 손을 잡을 날이 올 줄은···네가 아니었다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야.”
그녀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기는 했다.
원래 세상에서는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찢어 죽인 버러지들과 공동 전선을 펼치게 되다니.
별안간 나바르도제의 뿔이 짧게 점멸했다.
“음. 준비가 다 되었다는구나. 아벨 그 자가 정말로 약속을 지킬 줄이야.
“저는 설득의 귀재니까요. 출발하죠.”
“빠뜨리고 가는 건 없니? 몸 상태는? 역시 조금 미뤄도 되는데. 너무 서둘렀다가 일을 그르치는게 아닌지···”
“걱정 마셔요. 다 체크했으니까.”
웃으며 손사래쳤다.
솔직히 챙길 것도 별로 없었다.
간단하게 먹고 마실 식량 칼 한 자루만 있으면 됐지 뭘.
그래. 그렇구나.
나바르도제가 복잡한 미소를 머금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오늘의 그녀는 약간 우울해 보였다.
공간 이동 마법이 시전되기 직전이었다.
“로난.”
“네?”
“침략자들이 완전히 사라지면···너는 떠나는 거니?”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으음. 글쎄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모른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대머리 킹을 죽인 다음에는 아카샤라는 놈을 잡아야 하거든요. 기억나죠? 그 미친 요술쟁이. 균열도 더는 안 생기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그 자식을 잡아야 끝나는 문제라···다음 세계로 넘어가는 방법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고요.”
“······그럼 아카샤를 잡기 전까지는 우리 세계에 있는 거구나?”
“뭐 그렇죠.”
가볍게 주억거렸다.
나바르도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가 읊조린 혼잣말이 의도치 않게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그래 아직 그 마법사가 남아 있었지…!”
목소리가 고양된 걸 보면 정말 잊고 있던 모양이다.
하긴 걱정이 상당하시겠지.
그런 괴물이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닌다 생각하면.
헛기침을 몇 차례 한 그녀가 말을 이었다.
“흐흠 잘 알았다. 정말로 별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단다. 응.”
“딱히 이상한 질문이라 느끼지는 못했는데요.”
“그 그랬니? 그랬다면 다행이구나.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원. 바로 출발하마.”
“괜찮아요? 얼굴이 좀 빨개진 것 같은데.”
나바르도제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관능적인 손가락이 허공을 튕겼다.
공간 이동 특유의 메스꺼움이 내 위장을 주물렀다.
딱!
시야가 잠깐 어두워지나 싶더니 완전히 다른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날씨 좋군.”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 차가웠다.
쾌청한 하늘 아래 싸라기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얗게 센 광야에는 백 명이 넘는 저항군이 모여 있었다.
임무에 투입되지 않은 전원이었다.
나를 발견한 르탄시에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히에에엑! 저 정말로 왔어요!
“늦었군. 나바르도제.”
그녀의 옆에는 인간으로 변한 오르세와 판타시온이 서 있었다.
이번 작전의 주역들이었다.
오르세는 눈을 띠껍게 뜨고 핀잔을 주는 걸 보니 오늘도 평소처럼 기분이 좋은 듯했다.
판타시온은 묵묵히 고개만 까닥였다.
덩치에 걸맞게 크고 화려한 뿔은 그를 논 한복판에 자라난 느티나무처럼 보이게 했다.
다들 좋아 보이네. 아벨은 어디 있냐?
저기다.
오르세가 턱짓했다.
과연 저항군이 에워싼 중심부에 새하얀 사내가 보였다.
팔짱을 낀 채 턱을 치켜들고 있는 것이 여간 도도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흥분한 사람들이 그에게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우우 쓰레기 녀석!
빌어먹을 놈 같으니. 명령만 아니었어도 바로 죽였을 텐데.
뭘 잘했다고 그렇게 의기양양한 거냐!
조금만 더 나간다면 뭐라도 던질 기세였다.
르탄시에나 판타시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인기였다.
매도의 폭풍이 몰아치는 중이었지만 아벨은 그러거나 말거나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친 새끼.
안방에서도 저런 표정은 안 짓겠다.
왔군. 바로 출발할 건가?
문득 아벨과 내 눈이 마주쳤다.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그제야 나를 발견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로난 님!
저 망나니를 좀 어떻게 해 주십쇼! 저게 죄를 뉘우친 사람의 태도입니까?!
지금에라도 계획을 취소해야 합니다.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서 해코지할 게 분명해요!
저항군은 대체로 나를 걱정했다.
아벨에 대한 그들의 불신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르탄시에와 판타시온과 달리 그는 직접적으로 대머리 군단을 강림시킨 장본인이니.
나는 웃으며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괜찮을 거에요.
하 하지만…!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죠. 만약 개수작을 부리면 제가 이 자식을 해체해서 고기를 한 점씩 나눠 드릴게요. 이제 안심하시겠어요?
허억.
면면이 굳어졌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다소 과격한 표현이었지만 이 정도는 말해 둬야 마음을 놓을 터였다.
아벨의 발밑에는 내가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기분 나쁜 마법진이 깔려 있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린다.
온갖 괴상한 재료들을 요구하더니 그걸로 그린 모양이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내가 눈치를 주자 오르세와 판타시온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르탄시에는 판타시온의 옆구리에 끼워진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히에에! 이거 놔요 판타시온! 저한테 왜 그러는 거에요!
우리는 죄인이다. 피로 지은 죄는 피로 씻아야지.
으흐…으흐흑.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제 발로 걸을 테니까 놓아 주세요.
결국 체념한 르탄시에가 터덜터덜 걸어왔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우리 다섯 명은 모두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저항군 최상위권의 강자들.
제일 강한 나바르도제는 남아서 세니엘과 본부를 지키는 역할이었다.
그럭저럭 준비가 된 것 같았다.
나바르도제는 일렬로 늘어선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큼직한 눈동자는 여전히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그녀와 마주본 내가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그럼 불의 어머니여. 축복을 내려주시길.
…..그래.
나바르도제가 미소지었다.
미리 하기로 합의해 둔 것이었다.
단순한 보여주기식 행사는 아니었다.
아데샨과 두 번의 인생을 함께해온 나는 장군의 사열이나 치하가 집단의 사기를 얼마나 북돋는지 알고 있었다.
의외로 눈치가 제일 빠른 것은 판타시온이었다.
나를 따라 꿇어 앉은 그가 뿔로 르탄시에를 쿡쿡 찔렀다.
아윽 저도 알아요!
르탄시에도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오르세와 아벨이었다.
당연히 오르세는 죽을 것처럼 싫어했지만 주변을 둘러싼 그의 부하들이 입모양으로 부추기고 있었다.
대장 축복을 받으셔야죠.
“흥.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걱정 말거라.네가 소중하게 여기는 건 모두 지켜줄 테니까.”
나바르도제가 웃음지었다.
오르세는 뭐라 더 말하려다 말고 성을 내듯 머리를 숙였다.
이게 그의 최선이었다.
예를 표하는 오르세라니 오래 살다 보니 별 꼴을 다 보는군.
야.
아벨은 유일하게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눈치를 줘도 묵묵무답이었다.
하 씨발 삼촌….
본인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둘이나 있음에도 이러는 걸 보면 그냥 원래 이런 새끼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얌마.”
“한심하군. 나는 고개 따위 숙이지 않는다.”
아벨이 조소했다.
주변의 반응이 격해졌다.
당장 끌어내서 죽여 버리라는 외침이 산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화를 억누르지 못한 누군가 화살을 쏘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했다.
내가 한숨을 내쉬며 칼을 뽑으려던 차였다.
“크헉!”
갑자기 아벨이 앞으로 넘어졌다.
팔짱을 낀 채로 넘어져서 안면이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정말 아파 보였다.
한순간 야유를 퍼붓던 사람들이 잠잠해졌다.
바닥에서 얼굴을 빼낸 아벨이 으르렁거렸다.
“르탄시에 네년이 감히···!”
“부끄러운 줄 아세요. 정말.”
르탄시에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이야기했다.
전 보스의 행실이 어지간히도 쪽팔린 듯했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푸흡.”
그 꼴을 본 나바르도제가 실소를 터트렸다.
나도 덩달아 낄낄거렸다.
솔직히 존나 웃겼는데 참고 있었다.
바닥에 얼굴 모양이 그대로 찍혔는데 저걸 보고 어떻게 안 웃어.
끔찍하던 분위기가 확 누그러졌다.
나바르도제가 말했다.
꼭 돌아와야 한다. 알았지?
당연한 말씀을.
나는 그리 말하며 머리를 숙였다.
뜨거운 손바닥이 내 정수리에 얹어졌다.
자애로운 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희들을 축복한다. 부디 삿된 침략자들을 멸하고 세상에 평화를 되찾아 주기를.”
잔잔한 축복이 퍼져 나갔다.
태초의 불이 지닌 온기가 몸에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궁시렁거리던 아벨이 주문을 영창했다.
발치의 마법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다섯 명이 하얀 광채로 뒤덮였다.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