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대반격(3)
#16
나바르도제와 헤어지고 두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어지간한 산보다 큰 절벽의 빗변을 어슬렁거리며 오르고 있었다.
좌우로 펼쳐진 낭떠러지가 아찔하다.
먼발치에서 들려오는 파도성이 가공할 높이를 실감케 했다.
과연 헤이란과 망령의 바다를 통틀어 가장 높은 땅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걷다가 큼직한 바위 하나를 뛰어넘는 순간이었다.
“뭐야 벌써 다 왔네?”
시야가 탁 트이며 수평선이 펼쳐졌다.
진청색 바다가 오후의 햇살 아래 뒤척이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달리 물 위에는 크고 작은 유빙 수천 개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목련을 잘게 찢어서 뿌린 것 같았다.
파도와 함께 물결치는 모습이 경쾌하다.
“역시 바다는 파래야지.”
불쾌한 빨간색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쌀죽처럼 희멀겋던 하늘 역시 푸르름을 되찾았다.
정화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인근의 뿌리를 파괴하고 세니엘의 생명력을 흡수한 지역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처럼 원래의 색채로 돌아오고 있었다.
“후우우우우····”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채운다.
소금기 머금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묵직하게 헝클어트린다.
잠시 참았다가 뱉어내자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정말로 내가 알던 바다였다.
“엇차.”
나는 천천히 절벽 끄트머리로 걸어갔다.
아데샨이 봤다면 졸도할 짓거리였지만 절경을 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더는 걸음을 내디딜 곳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제자리에 걸터앉았다.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절벽이라 아래를 내려봐도 땅은 보이지 않았다.
“어때 여기도 괜찮지 않수?”
질문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든 말든 나는 말을 이었다.
“원주민들이 겨울의 뿔이라 부르는 곳이에요. 바다를 향해 뻗은 꼬낙서니를 보면 꽤 잘 지은 이름이라는 걸 알 수 있죠. 징벌병 동기 몇 놈은 겨울의 좆이라 지껄였는데···사실 모양만 따지고 보면 그쪽이 아주 조금 더 닮았기는 해요.”
특히나 위로 휘어진 모습이 오묘했다.
나는 낄낄거리며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확실히 술도 담배도 경치가 좋은 곳에서 빨아줘야 제 맛이 난다.
나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항아리를 무릎 사이에 내려 놓았다.
“과묵하시기도 하지. 아니면 너무 멋있어서 말을 잃으셨나?”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곱게 갈린 뼛가루는 말을 할 수 없다.
백색을 띠는 항아리의 표면에는 ‘카인’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원래는 님버튼에 가려 했는데 너무 심각하게 박살났더라구요. 대머리 새끼들을 탓해야지 어쩌겠어요. 여기도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니까 양해해 줘요.”
항아리를 톡톡 두드리자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간을 쪼개 가며 여기까지 온 것은 줄곧 미뤄왔던 장례.
정확히는 산골(散骨)을 위해서였다.
마음만 먹으면 오 분도 안 걸려서 완등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천천히 걸어서 올라왔다.
“그나저나 참 정성스레도 새겼네. 누님도 아버지를 좋아했나 봐요.”
카인의 이름은 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바르도제가 적은 게 분명했다.
자세히 보니 이름 아래에도 뭐라 자그맣게 문장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지금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섬세하면서도 유려한 것이 다른 사람의 필체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힌 채 문장을 따라 읽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젠장.”
엘시아가 남긴 글귀였다.
어째 눈에 익나 했더니 종자 보관소의 메뉴얼과 똑같았다.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양심적으로 한 명이라도 살아 있었어야지.”
때를 놓친다는 것은 참 개똥 같은 일이다.
잃고 잊어버린 것들이 떠오르는 것은 여유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항아리의 뚜껑을 열자 뽀얀 뼛가루가 드러났다.
“참 기분 이상하네···직접 묻은 사람의 뼈를 뿌린다는 건.”
나는 연기를 뱉으며 중얼거렸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쪽 세상의 카인은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는 나를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이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느냐 묻는다면 나는 그냥이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언젠가는 원래대로 돌아올 거에요.”
나는 뼛가루를 한 움쿰 쥐어들었다.
“불의 어머니와 세니엘이 있는 한···애초에 그렇게 설계된 세상이니까요.”
쭉 팔을 뻗은 뒤 손을 펼쳤다.
“이상한 곳으로 끌려와서 처음에는 솔직히 좀 거지 같았는데····”
가루가 쏟아졌다.
때마침 불어온 바닷바람이 아버지를 데려갔다.
분골이 보이지 않게 될 무렵에 혼잣말했다.
“이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나름대로.”
진심이었다.
요즘 들어 자꾸 여기에 온 것이 아주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색채가 돌아온 하늘과 바다.
생존 외에도 신경 쓸 여유가 생겨서 비로소 울고 웃을 수 있게 된 사람들.
임종을 기다리던 세계가 살아나는 모습은 내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한다.
“아 그렇다고 여기 쭉 머무르겠다는 건 아니에요. 나도 내 인생이 있으니까. 손주는 보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원래 세상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데샨이 보고 싶다.
얼굴을 못 본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쪽 사람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갑자기 실종된 나를 찾아 헤매고 있을까?
아니면 어딘가로 훌쩍 여행을 떠났거니 하고 하던 일이나 계속하고 있을까?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워낙 제멋대로 살았으니.
“그래도 할 만큼 하고 떠날 테니까 걱정 마세요.”
한번 휘말린 이상 좌시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뼈를 쥐었다.
슬슬 미래에도 유의미한 도움이 되고 있겠지.
상당히 많이 죽이고 부쉈으니 이제 이쪽 세상에서 대머리를 끌어오는 것은 힘들어질 터였다.
바람이 부는 타이밍에 맞춰 손을 놓으려던 차였다.
“······!!!”
갑자기 소름이 쫙 돋았다.
쥐고 있던 뼛가루를 놓치고 말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내가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뭐야?”
항아리는 아슬아슬하게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분명히 느꼈다.
무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억···허억····”
어디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대머리 제왕이나 근원의 힘을 흡수한 아벨과는 완전히 달랐다.
유난히 손에 들러붙는 칼자루 바라보는 것만으로 베일 것처럼 형형해진 검신은 린이 긴장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지평선에 검을 겨눈 채 기다렸지만 기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씨발. 뭔데?’
짧지만 강렬한 악몽을 꾼 것 같았다.
등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발바닥은 뿌리를 내린 것처럼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린. 괜찮냐?”
“······소름끼쳐. 뭐였어?”
“나도 모르겠다.”
천천히 심호흡했다.
우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 했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자 경직됐던 몸이 좀 풀어졌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될 지는 모르겠지만)서둘러 하던 일을 해치우고 돌아가려던 차였다.
“감이 좋구나. 어떻게 눈치챈 거지?”
“엉?”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의외성은 있었지만 별로 놀랍거나 긴장이 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달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하얀 머리카락의 사내가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아벨?”
“묫자리로 안성맞춤인 장소군. 이제 빌어도 소용 없다. 감히 내게 그런 망신을 주고도 살아남기를 기대한 건 아니겠지.”
아벨이 스산한 웃음을 머금었다.
바지만 달랑 입은 그의 오른손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검 한 자루가 쥐어진 채였다.
피가 묻어 있지 않은 걸로 봐서는 다행히도 누군가를 죽이고 뺏은 건 아닌 듯했다.
그나저나 이 새끼 어떻게 한 거지?
팔다리가 다시 자라났네.
“치졸하긴. 거기서는 어떻게 기어나왔어?”
“나는 성운 교단의 주인이다. 그깟 잡동사니로 나를 가둬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곤란해.”
“변 한번 굵으시군.”
친절하게 설명해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놈이 무슨 수를 썼는지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벨의 입가에는 푸른 액체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아하.”
색과 점도로 미루어 보아 틀림없는 거인의 피였다.
그를 방증하듯 아벨의 어깨 위로는 몇 시간 전에 본 것보다 수십 배는 강렬한 반짝거리는 마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퍼즐이 맞춰졌다.
확실히 저거라면 팔다리가 돋아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피를 따로 빼돌려 놨었구만. 하긴 너 정도면 그걸 마셔도 버틸 수 있었겠네. 사지를 못 움직일 텐데 섭취한 걸 보면 입 안에라도 숨겨놨었냐?”
“···의외로 명석하군. 몸의 상처가 나으면 쓰려 했는데 멍청하게도 네놈들이 나를 회복시켜 주었지.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말이다.”
아벨이 클클거렸다.
원래 세상에서는 보여준 적 없는 전략이었다.
내게 방해받지 않고 연구를 하다 보니 이룩한 성과인 듯했다.
“그래···생각해 보면 너는 아버지와 친형제도 아니었지. 상처가 심해서 무조건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거인의 공격에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을 수도 있겠네.”
“정보력 하나만큼은 정말 쓸만하군. 아까울 정도야.”
“인정. 이건 내 불찰이다. 그딴 방법으로 나을 수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예상했던 탈출 시점보다 몇 주는 더 빨랐다.
상어는 지느러미가 잘려도 상어라는 걸까.
기대 이상의 결과를 보여준 피실험자에게 보상을 제안하려던 차였다.
“그럼 이제 죽어라.”
갑자기 아벨의 형체가 사라졌다.
방금 투병을 마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예리한 찌르기가 내 미간을 노리고 쇄도했다.
“거 참.”
아벨은 웃고 있었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봐서는 아까 보여준 대머리들의 머리통이 가짜라고 믿는 듯했다.
아니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했다고 여기거나.
하긴 갑자기 튀어나온 풋내기가 거인을 죽였니 어쩌니 떠들어 댄다면 나 같아도 못 믿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검끝이 살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아벨의 손목을 붙잡아 뒤로 비틀었다.
으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놓친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뭐···!”
“거 참. 이것도 분명 나쁘지 않은 실력인데.”
입맛을 다셨다.
아벨의 칼솜씨는 확실히 훌륭했다.
비정상적인 컨디션을 감안하더라도 내가 겨뤄본 검사 중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았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면 등에 칼침 한 방 정도는 맞았을지도 모른다.
‘아까 그건···정말로 뭐였을까.’
그럼에도 일말의 긴장감을 느낄 수 없는 이유는 자명했다.
한순간 스쳐지나갔던 시선은 여전히 내 골수에 남아 소름이 돋게 만들고 있었다.
아벨이 몸부림쳤다.
“빌어먹을 놔라!”
“그럴까?”
나는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손을 놓자 아벨은 어디에 들이받힌 것처럼 뒤로 튕겨나갔다.
거인의 피가 약빨이 남아 있는지 부러진 손목은 금새 원래대로 돌아왔다.
【네놈은 내가 반드시 죽여주마.】
아벨이 으르렁거렸다.
그의 검 위로 하얀 빛무리가 휘감기며 올라왔다.
마지막 전쟁에서도 봤던 기술이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버지 앞에서 삼촌을 두들겨 패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실 정신을 차리게 하려면 패는 걸로는 모자랄 듯했다.
미래 기술을 이용한 심문이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고문은 역시 클래식하게 가야지.
검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내가 아벨을 겨누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