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대반격(2)
#15
아벨을 여기로 데려온 것은 겨우 보름 전의 일이었다.
종자 보관소의 존재를 깨닫고 망령의 바다로 사전 답사를 온 날이었다.
근처에서 반짝거리는 마나가 보이길래 뭔가 하고 들어가 봤는데 집채만한 얼음 기둥 안에 이 자식이 들어 있었다.
‘구질구질하기도 하지.’
사람보다는 개껌에 가까운 몰골이었지만 놀랍게도 숨은 붙어 있었다.
거인과 싸우다 죽었다고 르탄시에가 말했었는데 어찌어찌 도망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아벨을 살리기로 결정했다.
칼로 썰어서 꺼내다가는 실수로 죽여버릴 것 같아서 나바르도제에게 얼음을 녹여 줄 것을 부탁했다.
‘엘시아라도 살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문득 엘시아가 그리워졌다.
저항군이 제대로 된 기반을 마련한 것도 죽어가던 아벨을 연명시킬 수 있던 것도 그 엘프가 메뉴얼을 남겨 놓은 덕이었다.
평생의 은인이자 삶의 이유던 카인을 잃었음에도 그녀는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해 노력했다.
눈앞의 개새끼와는 다르게.
아벨은 아직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
호박색 눈동자가 좌우로 뒤룩거리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비교적 멀쩡한 얼굴은 아버지와 판박이었다.
참 우스운 상황이었다.
눈앞의 유리관은 원래 세상에서 아버지가 들어가 있던 장소였으니.
‘이런 것까지 닮을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다만 아벨의 상태는 나와 만났을 당시의 아버지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다.
목 아래는 전부 끔찍한 흉터로 뒤덮인 채였다.
지저분하게 뜯겨 나간 왼팔과 오른쪽 다리 아래로 괴사한 살점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쓰이는 각양각색의 대롱이 그의 몸 곳곳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 자가···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
나바르도제가 중얼거렸다.
진홍색 머리카락이 잔불처럼 가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필사적으로 화를 억누르고 있음을 눈치챘다.
사실 얼음을 녹여 달라는 부탁을 할 때도 굉장한 죄책감이 들었다.
모든 자식을 잃은 원흉.
참척의 고통을 겪게 만든 아벨은 당장 찢어 죽이고 싶은 대상일 테니까.
옆으로 다가간 내가 그녀의 손을 쥐었다.
“······고맙구나.”
나바르도제가 내 손을 맞잡았다.
부드러운 한편 엄청나게 뜨거웠다.
거칠어졌던 호흡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사방을 훑어보던 아벨의 시선이 드디어 내게 고정되었다.
“그 멍청이와 빼다 박았군. 너 카인의 자식인가?”
“엉. 맞아.”
“정말이었나···숨겨 놓은 자식이 있을 거라 짐작은 했었는데 아직까지 살아 있었을 줄이야.”
아벨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이쪽 세상에서는 아버지가 의도했던 대로 나와 누나의 정체가 마지막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그딴 저주를 10개씩이나 몸에 박아 놨는데 몰라야지.
아벨이 말을 이었다.
“왜 죽이지 않은 거냐.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무슨 꿍꿍이지?”
“눈치가 빠르네. 죽기 전에 해줘야 할 일이 있거든.”
“뭐라?”
“우리는 거인의 왕을 죽일 거야. 놈들의 근원이라는 것도 이참에 부숴버릴 생각이니까 협조해.”
나는 그냥 시원하게 말해 버렸다.
아벨은 밀랍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 버렸다.
몇 초가 지났을까.
“···후흐.”
“웃어?”
“흐흐흐···왕을 죽일 거라고?”
갑자기 아벨이 큭큭거리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음산한 저음을 흘리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젖히며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흐하하! 네가 왕을 잡겠다고!”
악당답게 호쾌한 웃음이었다.
몸이 들썩거릴 때마다 상처에서 피가 울걱울걱 뿜어져 나왔다.
나는 묵묵히 웃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아 너무 웃었군. 그래도 정보력 하나는 인정해 주마. 어떻게 거기까지 알아냈지?”
“나는 평행세계에서 왔거든. 참고로 그 세상의 너는 나름 성공했어. 완벽하게는 아니었지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참으로 가엾구나. 나조차 성공하지 못한 걸 네놈들 따위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응.”
“크흐흐 정말로 죽기 전에 웃음을 주려고 깨운 모양이구나. 그따위 헛된 희망을 품었기에 구질구질하게 목숨을 이어나가고 있는 거겠지. 질 나쁜 희극이 따로 없어.”
아벨이 다시 웃었다.
과학 실험에나 쓰일 표본 신세가 된 주제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제파악을 한 번 시켜 주려던 찰나.
“나바르도제. 자식들은 잘 있나?”
“···뭐?”
“네 일족은 상당히 잘 버텼지. 설마 놈들을 해치울 줄은 몰랐다. 자식 농사는 실패했지만 너만큼은 오래 살아온 나잇값을 하는구나.”
나바르도제에게 시선을 돌린 아벨이 지껄였다.
피딱지가 눌러붙은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상황을 미처 중재하기도 전이었다.
【네놈이 감히!】
나바르도제가 노호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머리카락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나와 맞잡고 있지 않은 손이 아벨을 향해 쏘아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던진 내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로난···!】
“미안해요.”
【놔라. 죽여야 한다. 저놈이 감히 내 아이들을···】
“욕보였죠. 알아요. 저도 당장 갈아 마시고 싶지만 지금은 참아야 해요.”
나는 팔에서 힘을 풀지 않고 속삭였다.
나바르도제의 손은 그새 불꽃에 휩싸인 채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아벨은 유리관과 함께 녹아 버렸을 터였다.
【아이 들을····】
숨 쉬기가 어려웠다.
가슴에 폐를 짓눌려서만은 아니었다.
분노에 사로잡힌 그녀의 몸은 불에 달군 쇳덩이를 연상케 했다.
‘내가 실수했군. 괜히 데려왔어.’
아팠지만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울 테니까.
나바르도제의 팔이 천천히 내려갔다.
“미안해요.”
“나 나는····”
나바르도제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시선을 피했다.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그녀가 메인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미안 미안하다. 이래서는 안 됐는데····”
“아니에요. 사과하지 마세요.”
“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내가 요즘 왜 이러는지···눈물이 멈추지를 않는구나.”
“당연한 반응이에요. 그냥 흘려보내요. 참으면 그게 병이 되는 거에요. 자연스럽게 내보내 버려요.”
나는 나바르도제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무슨 말로도 그녀가 지금 느끼는 비참함을 묘사할 수 없을 터였다.
자식을 죽인 원수를 구하는 데 일조한 것으로 모자라 욕보인 것까지 살려놔야 한다니.
내 기분 역시 최악으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우리를 보고 있던 아벨이 툭 내뱉었다.
“촌극은 끝났나?”
비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나바르도제를 놓아준 내가 유리관을 마주보고 섰다.
앞에는 온갖 버튼과 계기판이 붙어 있는 기계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검은 버튼을 눌렀다.
아벨과 이어진 대롱 몇 개가 빛나기 시작했다.
불현듯 놈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크학!”
“어이. 아벨.”
“크윽···으으으···!”
아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표현이 올바를 터였다.
여유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터질 듯이 붉어진 채였다.
꽉 오그라든 발가락이 그가 느끼는 고통을 대변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
“주제 파악을 좀 해. 씨발새끼야.”
“끄아악!”
나는 연달아 버튼을 눌렀다.
딸깍 소리가 날 때마다 아벨의 몸은 물에서 막 꺼낸 새우처럼 퍼덕였다.
엘시아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함을 느낀다.
이런 잡다한 요소까지도 번역해서 적어 뒀을 줄이야.
설명서에 쓰인 바로는 [이용 가치가 있는 상대를 심문하는 방법]이라는데 참으로 지금 상황에 적절한 기능이었다.
죽이지 않고 전신의 세포가 불타는 기분을 준다니 역시 미래 기술이란 대단해.
“나는 지금 당장에라도 니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은 사람이야. 대머리 군단한테 윤간당하고 도망친 놈이 그것도 담담하게 죽기는 무서워서 셀프 아이스크림이 된 새끼가 뭐가 어쩌고 어째?”
“크흐으···으으···!!”
“현실을 직시해. 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어. 아버지와 너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던 부하들을 배신했음에도 실패했지.”
“네놈이···크흑 나에 대해서···”
“닥쳐. 원래 의도했던 결과라거나 열등 종족에게 어울리는 결말이라 자조하며 딸딸이 칠 생각은 하지 마. 나는 니 새끼의 진짜 목적도 알고 있으니까. 대머리 새끼들의 근원을 훔쳐서 이 별의 사람들을 강제로 변화시킬 생각이었잖아.”
“그걸 어떻게···! 크아아악!!”
아벨이 고개를 쳐들었다.
물론 몇 초 견디지 못하고 다시금 몸을 뒤틀었다.
나바르도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물은 어느새 그쳐 있었다.
이걸로 조금은 기분이 풀리면 좋으련만.
나는 버튼을 누른 채 말을 이었다.
“네 방식은 글러먹었어 아벨. 사람들은 스스로를 멸망시키지만 다시 일어나기도 해. 아버지와 너는 그들을 지켜보는 데서 그쳐야 했어.”
“네가···! 애송이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전부 안다니까. 영양가 없는 대화는 이쯤 하고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자.”
아벨이 깨어난 이상 한시가 아까웠다.
아데샨이 있었다면 정신 장악 한 방으로 해결될 일이었지만 불행히도 이 세계에는 그녀가 없었다.
버튼에서 손가락이 떨어졌다.
간신히 고통에서 벗어난 아벨이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헉···!”
“다시 말할게. 우리는 대머리 제왕을 죽이고 근원을 파괴할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그쪽으로 가는 통로를 열어 줘야 해.”
“웃기지도···않는군.”
“싫으면 때려쳐도 돼. 대신 나는 네가 죽을 때까지 이 버튼을 누를 거야. 아마 돌 같은 걸 눌러놓고 떠나서 다시는 안 돌아오겠지.”
나는 검지로 버튼을 톡톡 두드렸다.
아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자식마저 흠칫거리는 걸 봐서는 정말로 끔찍한 고통인 듯했다.
“그리고 너는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해. 완치를 위해서는 혈육의 피가 필요한데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거든. 기왕 죽을 거라면 좋은 일을 하고 조금은 덜 뜨거운 지옥으로 가라.”
행실을 고려할 때 천국은 무리였다.
여기까지 몰아붙였으면 슬슬 하이라이트로 넘어가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나바르도제에게 윙크를 보냈다.
신호를 알아챈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천장에 새카만 차원문이 열렸다.
거대하고 둥그런 무언가 와르르 쏟아졌다.
하나의 크기가 사람만 한 덩어리에는 모두 이목구비가 붙어 있었다.
많이도 모았군.
“이건.”
“내 컬렉션이지.”
아벨의 눈이 커졌다.
수북히 쌓인 것은 모두 거인의 머리였다.
나를 비롯한 저항군은 그간 뿌리와 균열을 파괴하며 만났던 놈들의 수급을 차곡차곡 쌓아왔다.
“참고로 말하는데 가짜 따위는 아니야. 우리는 이제 놈들과 대등하게 맞서 싸울 수 있어.”
“어떻게···이런 일이.”
아벨이 말을 더듬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훨씬 더 많은데 장소가 좁아서 더 안 꺼냈다는 걸 알면 기절하겠군.
“너는 형에게 토라진 동생일 뿐이야. 실패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그리고···”
유리관은 이제 거인의 머리로 완전히 에워싸인 채였다.
맨질하고 하얀 두피 수십 개가 아벨의 벙찐 면상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한번 더 말해 주었다.
“아버지는 너를 마지막까지 동생이라 생각했어.”
“······!”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다.
두꺼운 대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나는 나바르도제와 손을 잡고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녀는 지상에 가까워질 즈음이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고생 많았다. 아이야.”
“누님도요.”
“미안하다. 뜨거웠지?”
나바르도제가 내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옷감이 열을 받아 변질된 것을 지금에야 발견한 듯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따뜻했어요.”
“후후 너도 참···왜 아데샨 그 아이가 너를 골랐는지 알겠구나.”
“누님은 어때요 괜찮아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단다. 헌데 저 악인이 정말로 마음을 바꿔서 우리를 도와줄까?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구나.”
“그러기를 바래야죠. 이대로만 해도 세상은 되찾을 수 있겠지만 뿌리를 뽑지 못한다면 결국 역사가 반복될 뿐이에요.”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다 했다.
고문이 통할 놈이 아니었기에 가능성은 마음 자체를 돌리는 것 뿐이었다.
아벨이 협조만 해 준다면 훨씬 일을 편하게 끝낼 수 있을 터였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만.
“올라가서 조금 쉬겠니? 같이 낮잠이나 청하자꾸나.”
“정말 솔짓하지만···오늘은 안 될것 같아요. 계획했던 일이 있거든요.”
진심으로 아쉬웠으나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날씨가 좆같기로 유명한 망령의 바다에서 이토록 맑은 날은 드물었으니까.
나바르도제가 갸웃거렸다.
“해야 할 일?”
“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뗐다.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아버지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