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적백의 세계(5)
#07
“드디어 찾았다. 망할 것.”
감격의 순간이다.
내가 들어왔던 균열을 제외하면 첫 발견이었다.
거인도 너끈히 통과할 만큼 거대한 균열 하나가 눈앞에서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여기 도착하기까지 가벼운 해프닝이 있었지만 아무렴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었다.
“엇차.”
호를 그린 검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일대의 공간이 잠시 일그러지나 싶더니 균열이 들러붙었다.
확인차 손을 휘적여 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 이걸 어느 세월에 다 찾아 메우나.’
보람찬 일이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이제 고작 하나를 파괴했을 뿐이다.
새로 길들인 날다람쥐가 도와준다 해도 이 별은 너무 넓었다.
문득 숲 사이로 졸졸 흐르는 개울이 눈에 들어왔다.
바다와 같은 붉은 색이었다.
하얗게 센 나무 틈새에 있어서 그런지 유달리 잘 보였다.
“벌써 약한 소리를 하면 안 되겠지.”
그럼에도 해야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내 체념한 나는 개울 앞에 쪼그려 앉아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색깔이 색깔인지라 영 개운하지가 않았다.
마실 때도 찝찝하고 말이지.
“로난 님은···도대체 뭐 하던 분이세요?”
“엉? 뭐라고?”
불현듯 르탄시에가 나를 불렀다.
소매로 대충 얼굴을 닦은 뒤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인형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이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르탄시에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널브러져 있는 세 명의 거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부러진 나무를 깔고 누운 시체들은 모두 머리가 사라진 채였다.
깔끔한 절단면에서 푸른 피가 울걱울걱 샘솟는 중이었다.
아 난 또 뭐라고.
“말이 안 되기는 뭐가 말이 안 돼? 꼴랑 세 마리인데.”
“그 그 셋을 잡지 못해서 세상이 멸망했다고요!”
르탄시에는 하얗게 질린 채 기겁했다.
거인을 잡을 때마다 저런 반응이었다.
어디 마술 쇼의 관객으로서는 매우 훌륭한 태도였지만 슬슬 질려가고 있었다.
“이게 어디다 대고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 죽고 싶냐?”
“으악! 죄 죄송해요!”
“그리고 저 대머리들을 내가 불렀냐? 니들이 부른 거잖아.”
내가 팔을 슬쩍 들자 르탄시에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처음 만난 이후 한 번도 때린 적이 없다는 점이 유머라면 유머였다.
“앞으로는 훨씬 더 많이 올 거야. 여섯 장 달린 놈들부터는 좀 귀찮아지니까 알아서 잘 피해 다녀. 아니면 대머리 월드로 이동하는 마법을 개발하던가.”
“그 그럴 수가···차라리 일행을 더 늘리는 건 어때요? 놈들에게 대항하기도 쉬워지잖아요.”
“걸리적거려. 그리고 쓸만한 놈이 있어야 늘리던가 하지.”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로써 그녀와 동행하지 사흘이 지났다.
대머리 선왕을 언급한 도발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 증거로 하루 평균 다섯 명의 대머리가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나를 찾아오고 있었다.
아직 정찰대 느낌으로 보내는 거겠지.
덩칫값도 못 하는 찌질이들 같으니라고.
르탄시에가 웅얼거렸다.
“그래도···두 명 정도는 실력자였는걸요.”
“내 기준에서는 별 볼일 없었어.”
나는 그동안 뿌리 열 개와 균열 하나를 박살냈다.
이 잡듯이 뒤져야 나오는 균열과 달리 뿌리를 찾는 것은 굉장히 쉬웠다.
기본적으로 크기가 크고 송신탑에서 쏘아올리는 광선이 멀리서도 보였으니까.
열 개 중 여섯 개의 뿌리에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신도들이 갇혀 있었다.
“버러지들 같으니. 주제도 모르고 살려달라 비는 꼴이란.”
르탄시에처럼 부품으로 전락한 놈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자비를 구걸했고 나는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내 피를 마시거나 무기에 바르게 하면 거인을 타격할 수 있겠지만 세상을 팔아넘긴 호로새끼들에게 줄 피는 한 방울도 없었다.
르탄시에는 아무 대꾸도 못한 채 푹 고개를 숙였다.
“너처럼 대주교급이면 한번 고려해 볼게. 그나저나 마법으로 음식 좀 못 만드냐? 같은 것만 먹어서 슬슬 물리는데.”
“죄 죄송해요. 그런 마법은 없어서····”
“에잉 쓸데없기는. 대주교도 별 거 없구만.”
“······으흑.”
르탄시에가 주먹을 꽉 쥐었다.
바들거리는 꼴이 봐줄 만 했다.
하얀 나무들 틈새로 불어온 바람이 앞머리를 뒤집었다.
하늘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 것이 곧 해가 저물 것 같았다.
“야영하기 전에 움직이자. 마나가 회복되려면 멀었나?”
“···네. 아직은 조금.”
“그래. 걷지 뭐.”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계속 공중 탐색을 하고 싶었지만 르탄시에도 마나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검을 휘두르니 허기가 졌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서 나뭇잎으로 감싼 육포를 꺼냈다.
모양은 평범했지만 일반적인 고기와는 달리 검푸른 색을 띠었다.
르탄시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으.”
“역시 배고프지? 너도 먹을래?”
“저 저는 됐어요!”
그녀는 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표정만 보면 내가 바퀴벌레라도 먹으라 시킨 것 같았다.
사실 역겨운 정도를 따지자면 엇비슷할지도 모른다.
이것도 넓은 의미로는 식인이라 볼 수 있었으니.
육포의 원자재는 거인의 살이었다.
“하긴 질릴 만도 하지. 어제 그 곤욕을 치뤘으니.”
“저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고요···우욱!”
르탄시에가 헛구역질했다.
어지간히도 트라우마가 깊게 새겨진 모양이었다.
비상 식량이라 속여서 먹인 고기 한 점은 르탄시에를 거의 죽일 뻔 했다.
그녀는 거인의 고기를 삼키는 순간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완전히 식도를 넘어가기 전에 토해내서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꼼짝없이 불귀의 객이 됐을 터였다.
“알았다. 그럼 다른 먹을 걸 찾아봐야겠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전부 나 편하자고 하는 일인데. 무엇보다 너는 아직 죽으면 곤란해.”
염력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르탄시에는 살려둔 값어치를 했다.나는 거칠게 육포를 물어뜯었다.
급하게 만든 물건이라 아직 육즙이 남아 있었다.
이건 뭐랄까···아주 끔찍한 건 아닌데 딱히 대체제를 찾을 수 없는 미묘한 맛이 났다.
지난 삼일간 거의 돼지 한 마리 분량을 먹었음에도 멀쩡한 걸 보면 역시 나만 괴물인가 보다.
“생명이 남아 있는 땅을 발견하기를 기대해야죠. 거기에는 먹을 게 분명 있을 거에요. 깊은 곳의 바닷물이 푸르던 것처럼.”
“기왕이면 저항군도 있으면 좋겠네. 거 얼굴 보기 더럽게 힘들어.”
“그러게요. 제가 마지막으로 소문을 들은 것도 벌써 삼 년이 지났으니···하아.”
르탄시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 자신감이 없는 눈치였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대머리 치하의 세계에서 삼 년이란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나는 빈 도화지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찾을 거야. 그나저나 하늘 색은 왜 안 변하냐? 하루종일 창백해가지고는.”
“저것도 뿌리 때문이에요. 대기 중에 특수한 성분을 살포해서 놈들이 온 곳과 비슷한 환경으로 만드는 거죠. 가끔 보이는 안개는 그 성분이 뭉쳐서 만들어진 거고요.
“어차피 생기만 쪽 빼먹고 버릴 놈들이 꼴값을 떠는구만. 귀찮아라.”
하늘이나 바다에서 파란색을 볼 수 없던 이유였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계속 걸었다.
야영을 할 때는 가급적 높고 탁 트인 곳에서 하는 게 좋았다.
누군가를 발견하기도.
누군가 우리를 발견하기에도 좋은 환경이었으니.
생명이 사라진 숲에서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풀벌레의 노래도 새들의 부산스러운 수다도 없는 적막.
사부작거리는 발소리만 남아 조용히 번진다.
딱!
불현듯 어젯밤의 대화를 떠올린 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 심심한데 근황 이야기나 마저 해 봐. 내가 누구까지 물어봤더라?”
“디디칸이라는 웨어울프에 대해 여쭤보셨어요. 저는 들어본 적 없다고 대답했고요.”
“맞아 그랬었지. 아까운 놈 같으니.”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나는 어제부터 르탄시에게 아는 사람들의 안부를 물어보고 있었다.
대부분은 비극이다.
원래대로라면 위대한 발명가가 됐어야 할 디디칸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역사의 홍수에 떠밀려 사라졌다.
추측하건데 동굴 거인이 폭주했을 당시에 죽었겠지.
스승인 도론과 함께.
“아까운 놈.”
투명 갑옷을 두드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뒷맛이 좋지 않았다.
여기는 아데샨이 실패한 세계.
이런 식으로 사라진 생명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럼 디디칸은 죽었고. 이번에는 누구 이야기를 들을까····”
“편하게 물어 보세요.
어지간히 영향력이 있던 자들이면 대부분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거물 몇 명을아시는 걸 보면 정말로 다른 세상에서 오신 건 아닌가 봐요.”
“시끄러워 인마. 으음······좋아 정했다.”
나는 들리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사실 마지막에 물어보려 했는데 매도 먼저 맞는게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후우- 숨을 길게 뱉어낸 내가 그녀의 이름을 읊었다.
“아데샨.”
“아 당연히 알고 있죠.”
르탄시에가 즉답했다.
각오는 되어 있었다.
나는 담뱃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제국의 대장군은 가장 까다로운 존재였어요. 마치 미래를 아는 것처럼 우리의 행동을 예측했었죠. 그 여자만 아니었어도 별의 도래는 훨씬 더 앞당겨졌을 거에요.”
“그랬겠지. 유능한 사람이니까.”
“네. 정말 몇 번이고 들킬 뻔했어요. 암살 시도는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죠. 별의 도래에 대해 발설할 시 죽는 금제를 신도들에게 걸어 두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계획이 까발려졌을 거에요. 망할 계집애. 어차피 죽을 거면서 성가시게 굴기는····”
르탄시에가 입술을 질겅였다.
격양된 말투를 보니 어지간히 까다로운 상대였던 모양이다.
빡!
묵묵히 경청하던 내가 그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악! 가 갑자기 왜 때려요!?”
“그 사람을 욕하지 마.”
“아 알았어요···죄송해요.”
르탄시에는 맞은 부위를 감싼 채 울먹거렸다.
사실 울고 싶은 건 나였다.
회귀자 아데샨은 내 아내 될 여자와는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존경해 마땅한 상관이었다.
···솔직히 조금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고.
머금고 있던 연기가 바람 속에 흩어졌다.
“대장군은 어떻게 죽었지?”
“장렬한 최후였죠. 그 여자···가 아니고 그분은 별의 도래까지 살아남아서 항전했어요. 제국군과 더불어 교단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거물들과 함께 맞섰어요.”
르탄시에는 제스처까지 사용해 가며 당시를 묘사했다.
마지막 전쟁은 내 첫 번째 삶과는 다른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아하유테가 아닌 니르바나가 상대였고 남아 있던 인원 또한 달랐다.
일치하는 것은 결과뿐이었다.
패배.
“······역시 그랬군.”
“어···괜찮아요?”
르탄시에가 갸웃거렸다.
무리도 아니었다.
나는 지금 평소에는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테니까.
알면서도 거지 같다.
대장군은 거인과의 전투 끝에 전사했다.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던 와중이었다.
“어라? 로난 님.”
“왜.”
“저기 불빛이 보여요. 뿌리 같은데요?”
별안간 르탄시에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충혈된 눈으로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나무 틈새 저 멀리 다섯 개의 불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좁히자 하늘을 향해 솟아난 거대한 손의 형태가 보였다.
“그러게.”
“잘 됐다. 오늘은 저거까지 부수고 야영하죠. 어때요?”
묘하게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대머리들에게 착취당한 르탄시에는 뿌리를 파괴하는 행위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영 마음에 안 드는 여자였지만 이런 이해관계만은 일치했다.
“그래. 날도 저물어 가니까.”
“네! 그럼 마나도 찼으니까 바로···”
르탄시에가 염력 주문을 읊으려던 차였다.
갑자기 목덜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거인과는 또 다른 느낌의 위협이었다.
누군가 있나 둘러보던 와중이었다.
콰아아아아앙!!
갑자기 뿌리 위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검붉은 화염은 손의 형체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하늘로 쏘아지던 광선들이 희미해졌다.
뒤늦게 밀려온 충격파가 우리를 덮쳤다.
“캬악! 무 무슨!”
르탄시에가 휘청거렸다.
잠시 누웠던 나무들이 반동과 함께 일어났다.
불길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이었다.
다시금 팔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
틀림없었다.
이건 내가 아는 기운이었다.
애써 흥분을 가라앉힌 내가 르탄시에를 불렀다.
“야. 날다람쥐.”
“허억···허억···왜 그러세요?”
“다시는 배신 안 한다고 맹세할 수 있냐?”
“갑자기요? 다 다 당연히 할 수 있죠!”
“좋아.”
말이 맺어짐과 동시에 그녀를 밀쳤다.
르탄시에가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이었다.
콰직!
하늘을 사선으로 가르며 날아온 무언가 그녀와 내 사이에 내리꽂혔다.
“허어어억!!”
르탄시에의 눈이 커졌다.
검은 창 한 자루가 땅 깊숙이 박혀 있었다.
방금까지 자신이 있던 자리였다.
이중 나선형으로 꼬인 창은 심야를 도려내어 만든 것처럼 짙은 흑색을 띄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갈비뼈로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하다니. 진짜 미친 새끼라니까.”
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중얼거렸다.
너무 반가워서 웃음이 실실 나왔다.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뒤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의 나무 위에 새카만 사내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어떻게 알아챈 거지?”
그가 중얼거렸다.
여러모로 인상적인 부분이 많은 사내였다.
눈은 붉고 머리카락은 허리에 닿을 만큼 길었다.
머리 위로는 두 개의 뿔이 나 있었다.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네.”
당연하게도 내가 알던 놈과는 차이가 좀 있었다.
검은 사내는 묵묵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부러진 한쪽 뿔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오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