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S01
내 이름은 로난이다.
정확히는 로난 데 발투레.
세상을 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귀족이 되는 바람에 요상망측한 성이 붙어 버렸다.
황제 아저씨는 좋아했지만 나는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혓바닥 재활치료 하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인지.
땅문서에나 적혀야 할 단어를 이름 앞에 붙이는 발상은 어떤 멍청이 머릿속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됐으니 그냥 로난이라 불러 주면 좋겠다.
“······뇌를 탈수기에 넣고 돌리는 것 같군.”
글쓰기가 멈췄다.
나는 만년필을 뒤집어 머리를 긁적였다.
책을 읽기만 할 때는 몰랐는데 작문이라는 건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방문 너머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너무 힘드시면 지금이라도 대필 작가를 찾아볼까요?”
“됐어. 이건 내가 직접 해야 의미가 있는 거니까. 나는 멋진 어른으로 남고 싶거든.”
“확실히 그게 제일 좋기는 하죠. 손주 분도 틀림없이 좋아할 거에요.”
내 편집자···아니 편집자를 자칭하는 에르제베트 데 아칼루시아였다.
손주를 운운하는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나도 기쁘기는 하다만 저 아가씨는 뭐가 그리 좋은지 모르겠다.
어쨌든 아데샨의 피가 섞였으니 신난다는 건가.
“그래서 너는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거냐?”
“당연히 오늘치 원고를 받을 때까지죠. 시간은 많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그게 여명 마탑주가 할 말이냐? 어련히 알아서 쓸 테니까 불쌍한 늙은이 괴롭히지 말고 들어가라.”
“얼굴에 주름살 하나 없는 분이 늙은이는 무슨. 그리고 손주 분이 태어날 때까지는 저도 휴가거든요~”
길게 늘리는 목소리가 얄미웠다.
새삼 시간의 위력이 느껴졌다.
언제나 목욕하는 고양이처럼 예민하던 아가씨가 저리도 넉살이 좋아질 줄이야.
손 끝에서 돌아가던 만년필이 멈췄다.
“손주····”
생각이 많아지는 단어였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심란함을 더한다.
나는 조금 있으면 할아버지가 된다.
노인의 범주에 속하기에는 아직 어린 편이었지만 아들놈이 시원하게 과속을 해버린 덕이었다.
“그러고 보니 로난 님이랑 아데샨 언니도 과속이었죠. 이것도 유전인가? 참 신기하네.
시끄러워 인마.
에르제베트의 말대로였다.
부모였음에도 뭐라 나무랄 수 없는 이유였다.
지금 아들과 며느리는 제도 종합병원에서 출산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입원한 터라 며느리가 이렇게 아픈 건 전부 당신 때문이라 외치며 내 아들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더럽게 아플 텐데. 녀석 고생 좀 하겠군.’
서론이 길었다.
어쨌든 이게 바로 내가 팔자에도 없는 글쓰기에 매진하는 이유였다.
곧 태어날 손주놈에게 직접 쓴 책을 선물해주고 싶어서.
두고두고 다시 읽어도 될만한 좋은 이야기가 하나 있거든.
“그럼 어디 써 보실까····”
나는 다시 만년필을 쥐었다.
칼보다 훨씬 가벼운 도구였지만 체감되는 묵직함은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격언이 이래서 나온 걸까.
오각형의 촉이 원고지에 닿는 순간이었다.
“로난 님.”
“왜 그래?”
“힘내세요. 잘 쓸 수 있을 거에요.”
“헹 당연하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미인의 응원은 언제나 힘이 난다.
만년필이 원고지 위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청혼하기 전날 밤에 벌어진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방금 갸웃거린 댁을 이해한다.
아무리 길게 잡아봐야 24시간이 안 될텐데 그동안 뭐 대단한 일을 겪었다고 책을 쓰냐 싶겠지.
하지만 장담한다.
내가 그때 겪은 건 틀림없는 모험이었다.
감히 대모험이라 칭할 수 있다.
날개 달린 대머리들과 전쟁을 벌이고 다른 별까지 날아가본 내가 하는 말이니 믿어도 좋다.
“내 영원한 동반자인 성검 린을 걸 수도······알았다. 안 걸테니까 징징 울리지 좀 마.”
촌스러운 등장인물 소개는 생략하겠다.
어차피 대부분은 아는 얼굴일 테니까.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서점에 널려 있는 로난 전기를 참고하시라.
대부분은 저열한 각색으로 난자당한 불쏘시개지만 엘시아가 쓰고 알리브리헤가 검수한 판본만큼은 꽤 나쁘지 않다.
이제 정말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바람이 선선한 노을녘.
전후 복구 작업이 한창인 제도의 외곽.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
“아셀. 나 결혼한다.”
“뭐 뭐 뭐라고?! 케엑!”
옆에서 술을 홀짝거리던 아셀이 경악했다.
계집애 같은 비명은 언제 들어도 고막에 착착 감긴다.
이 난쟁이와 나는 마을 다섯 개 분량의 폐허를 처리한 뒤 쉬고 있었다.
잔해가 치워진 공터에는 작은 텐트와 모닥불만 놓여 있었다.
치이익!
아셀의 코와 입에서 뿜어져 나온 맥주가 모닥불에 뿌려졌다.
“가 갑자기 결혼이라니···아데샨 선배님이랑?”
“그럼 누구겠냐? 얘가 큰일날 소리를 하네.”
“으에에! 아 아팟!”
나는 아셀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행히도 아데샨은 보이지 않았다.
하마터면 사이좋게 심문을 당할 뻔했다.
나 말고 어떤 년이 또 신부 후보에 올라 있냐고 탈탈 털었겠지.
원체 화를 안 내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부분에서만큼은 대법관이 되었다.
“하아···십년감수했네. 어쨌든 내일 청혼할 거야. 식은 졸업식 이후에 올릴 거고. 어디서 할 지는 아직 안 정했어.”
“그 그렇구나···그런데 너무 빠르지 않아? 우린 아직 졸업도 못했는데····”
“확실히 그런 감이 없지 않아 있지.”
“그 그런데 왜?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라도 있어?”
아셀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한번 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업 시간이 끝나서 현장은 텅 비어 있었다.
고요한 폐허와 숲.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쩍새 울음소리.
불씨를 튀기며 타오르는 모닥불.
음 듣는 귀는 없는 것 같군.
“야. 이건 너만 알고 있어라. 나랑 아데샨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는 특급 기밀이니까.”
“뭐 뭔데···?”
나는 아셀을 바짝 끌어당긴 뒤 속삭였다.
“애가 생겼거든.”
“허억.”
아셀의 눈이 커졌다.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 심장에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새하얀 얼굴은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애 애가 생겼다는 말은···그러니까···”
“나 아빠 됐다고. 젠장.”
나는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쭉 빨고 내쉬자 새하얀 연기가 흩어졌다.
아버지가 된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언제나와 같은 아침.
함께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 주는데 갑자기 아데샨이 입을 틀어막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소름이 쫙 올라왔다.
곧바로 병원에 갔다.
둘이 손을 잡고 기다리던 와중 문어처럼 생겨먹은 의사가 임신 소식을 알려 주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건 전쟁이 끝난 뒤로 처음이었지.’
아데샨은 아이처럼 폴짝거리며 기뻐했다.
너무 좋은 나머지 눈물도 펑펑 흘렸다.
아주 작게 ‘드디어.’라 속삭였던 것도 같은데 이건 내가 잘못 들은 것 같다.
나도 물론 기뻤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애초에 동거하는 내내 염두하던 일이었고 언젠가 둘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도란도란 살아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예상보다 조금 더 빨랐을 뿐.
“그 그렇구나···축하해 로난. 정말로.”
“고맙다. 솔직히 무섭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잘 되겠지. 너는 마르야랑 결혼 얘기 안 나왔냐?”
“응. 아직은···사실 모르겠어. 마르야가 나 같은거랑 결혼하고 싶어할까?”
“별 쪼다같은 생각을 다 한다. 오히려 빼려 들면 문제가 생길걸? 고 계집애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집에 놀러온 마르야와 아데샨이 수다를 떠는 것을 우연히 엿들은 적이 있었다.
굉장히 천박한 대화였던지라 기억에 남았다.
그때 처음 알았는데 여자는 남자와 달리 밤일을 대화 소재로 삼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알고 싶지 않은 정보까지 알아야 했지. 씨발.’
마르야는 자기가 그 튤립을(아셀의 애칭. 알고 싶지 않은 정보의 완벽한 예시다.) 어떻게 따먹었는지 깔깔 웃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어떤 부분은 징벌병 생활을 하면서도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저급하기 짝이 없었다.
신나는 음담패설의 막바지는 이제 슬슬 아이를 갖고 싶은데 뭐 방법이 없겠냐고 상담하는 것이었다.
‘가엾은 놈.’
어쩐지 아셀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분명 가혹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자기 머리보다 큰 가슴에 깔려서 보낼 나날이 눈에 선했다.
애도 다섯 명쯤 낫지 않을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아셀이 눈을 반짝였다.
“지 진짜로?”
“그래. 자신감을 가져 인마. 너는 대마법사가 될 사람이잖아. 니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그 전쟁 때 다 죽었을 거라고.”
“그 그렇게까지는···헤헤. 고마워.”
“별말씀을.”
우리는 맥주를 한 모금씩 홀짝였다.
이마를 스치는 봄바람이 선선하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꽃이 피는 계절이 찾아온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내 눈과 같은 주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석양이라.’
석양을 보고 있자니 때 아닌 상념이 뇌리를 스친다.
아빠가 되는 것과는 또 다른 고민거리였다.
나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아셀을 불렀다.
“…야. 아셀.”
“응?”
“어떤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사람이 있어. 죽으면 기억을 유지한 채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운명이지. 만약 그 사람이 죽는다면 원래 있던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걸까?”
“으응? 갑자기 그게 무슨····”
아셀이 갸웃거렸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질문 치고는 너무 심도가 깊었다.
대장군은 세 번의 회귀를 거듭한 끝에 여기서 결말을 맞이했다.
허면 그녀가 죽은 뒤의 세상은 어떻게 된 걸까.
그녀와 함께 초기화되는 걸까?
아니면 죽은 뒤에도 존속하는 걸까?
나 답지 않은 고민이라는 걸 알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냥 못 들은 척 해달라고 말하려던 차였다.
“흥미로운 주제네···으음 내 생각에는 그 사람이 죽은 뒤로도 세계는 남아 있을 것 같아.”
“시간이 역행하면서 사라지는 게 아니고?”
“응. 과거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학게의 정설이거든. 아마 그 사람은 어릴 적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평행세계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커. 물론 이것도 초현실적인 이야기지만.”
“···평행세계? 처음 듣는 단어인데.”
“업계에서는 제법 유명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유사한 세상이 평행선상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지. 왜 기억을 유지한 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상상은 누구나 곧잘 하잖아? 그걸 논리적으로 파헤치는 과정에서 나온 가설이야.”
흥미 있는 주제여서 그런지 아셀은 말을 더듬지 않았다.
순간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가설이 맞다면 아데샨이 죽어 사라진 세상에는 절망적인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물론 확실한 것은 없었기에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렇구만. 고맙다.”
“헤헤 로난이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어. 평행 세계 이론에 대해서 더 알려줄까?”
“아니. 얼른 쭉 들이키고 잠이나 자자. 내일도 할 일이 산더미야.”
“앗 하긴 그렇지.”
아셀이 주억거렸다.
우리는 건배를 한 뒤 남아 있는 맥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치울 것도 고칠 것도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소매로 입가를 문지른 뒤 침낭에 들어갔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내일은 프로포즈도 해야 하니 더 일찍 일어나서 할당량을 끝내야 했다.
“아이고···고되다.”
문득 각자의 영역에서 뺑이치고 있을 면면이 떠올랐다.
아데샨은 사람이나 동물을 부려 짐을 나르거나 문서 작업을 한다.
마르야는 짐마차 위에서 쪽잠을 청하며 상단을 굴리고 있다.
슐리펜과 에르제베트는 각각의 가문을 지휘하고 브라움은 그냥 힘으로 떼우고 있을 터였다.
오필리아와 그림자 대공이 이끄는 흡혈귀들은 슬슬 깨어날 시간이었다.
걔네는 우리가 다 잠든 밤에 작업을 개시하니까.
“아벨 이 호로새끼가····”
갑자기 화가 났다.
이 고생은 전부 그 개자식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참회하면서 죽을 거였으면 복구도 해줄 것이지 똥만 질펀하게 싸지르고 튀다니.
주머니에 손을 넣자 아벨이 남기고 간 구체가 잡혔다.
만지면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져서 요즘은 습관적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주절거렸다.
“대장군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
“으음.”
눈을 떴다.
별로 가득 찬 밤하늘이 보였다.
아직 해가 뜰 기미는 없었다.
아셀은 침낭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더 일찍 깨고 말았다.
거의 꺼져 가는 모닥불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젠장.”
짜증이 치밀었다.
이대로 날밤을 지새우게 생겼다.
요 근래 한 번 깨면 다시 잠드는 것이 힘들어졌다.
걱정거리가 많아져서 그런 걸까.
갑자기 아빠가 된 걸로도 충분히 심란한데 평행세계 어쩌구 하는 이론이 더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그냥 망상이야.’
진지하게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걱정을 하느라 속을 썩이다니 노친네들이나 겪을 치매 초기 증상이었다.
산책이라도 하면서 안정을 되찾아야 할 것 같았다.
막 걸음을 내딛으려던 차였다.
인적 없는 숲을 바라보던 내 시야에 ‘무언가’ 포착되었다.
“······뭐?”
유령이 내 목덜미를 핥았다.
오싹한 소름과 함께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라보던 방향으로 뛰쳐 나갔다.
아셀은 깨지 않았다.
모닥불은 눈 깜짝할 새 붉은 점으로 변했다.
그 ‘무언가’는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뇌까렸다.
어두운 숲 곳곳에 별모래처럼 반짝거리는 마나가 맴돌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 잡놈들의 흔적이었다.
분명히 말살했다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뛰다 보니 어느새 숲 한복판이었다.
자세히 보니 나무 몇 그루가 부러져있는 것이 보였다.
땅도 군데군데 파여 있는 것이 싸움이 벌어진 흔적이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됐어. 아직 여기 있다.’
칼자루에 손이 올라갔다.
적은 근처에 있었다.
본격적으로 추적에 나서려던 찰나였다.
콰직!
인영 하나가 눈앞의 나무를 부러뜨리며 튀어 나왔다.
“크윽!”
인영은 솜씨 좋게 낙법을 펼쳤다.
나무가 넘어진 자리로 달빛이 쏟아졌다.
일대의 어둠이 걷히고 나는 잠깐 숨 쉬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
인영의 정체는 사납게 생긴 엘프 여인이었다.
반짝거리는 마나가 그녀의 어깨 위로 새나오고 있었다.
늘씬한 팔다리는 월광 아래에서도 어둠에 휘감긴 채였다.
‘말도 안 돼.’
누구랑 싸우는 중이었는지 온몸이 만신창이다.
왼손에는 어둠으로 이루어진 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역시나였다.
그림자로 병장기를 만들어 내는 기술은 과거에 경험한 적이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바이디안 산맥에서.
사란테가 돌로 변해 버린 그 날 밤에.
붙어있던 입술이 드디어 떨어졌다.
“….브리기아?”
“뭣···넌 누구냐?!”
그제야 나를 본 브리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으로 죽인 네뷸라 클라지에의 지부장.
분명 내 손으로 죽인 작자인데 어째서인지 나를 전혀 모르는 눈치다.
그녀의 손끝이 꿀렁거렸다.
“에잇 비켜라!”
개인적으로는 이 미스터리를 파헤치고 싶었지만 브리기아는 통성명을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가시가 내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예전에 바이디안 산맥에서 본 것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공격이었다.
즉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마나를 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비틀며 가시를 피했다.
소리 없이 뽑힌 검이 반원을 그렸다.
서걱!
브리기아의 양팔이 공중에 솟구쳤다.
“아?”
브리기아의 눈이 커졌다.
벙찐 면상을 보니 팔이 잘려나간 것을 이제야 인지한 듯했다.
깔끔한 절단면에서 피가 솟구쳤다.
“다리도 잘라 놓는게 안전하겠지.”
캬아아악! 자 잠깐!
고통 어린 비명이 울려 퍼졌다.
물론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다만 다짜고짜 공격한 걸로 보아 이전과 진배없는 악당인 것 같았으니.
그녀의 다리를 노리고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로난 님. 기다리세요.]
“뭐?”
갑자기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후한 것이 제법 낯익은 목소리였다.
칼날은 브리기아의 허벅지와 종이 한 장 간격을 남기고 정지했다.
동시에 그녀가 날아온 방향에서 푸른 광선이 쏘아졌다.
빛줄기는 그대로 브리기아의 가슴을 꿰뚫었다.
“컥····”
콰르릉-!
천둥을 연상케 하는 폭음이 울려 퍼졌다.
전기 계열 마법이었다.
까맣게 그을린 브리기아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광선이 발사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 뭐야.”
여전히 칼자루는 쥔 채였다.
웬 사내가 달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머리카락 옆으로 자라난 귀가 브리기아만큼 길었다.
그는 머릿속에 들려온 것과 같은 음색으로 말을 걸었다.
“정말 오랜만이군요. 무슨 말씀부터 드려야 할지.”
“무슨···!”
사내의 얼굴을 본 나는 그대로 얼어 버렸다.
브리기아를 봤을 때보다 세 배는 강렬한 마비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제법 친한 사람이었으니까.
스스로 돌이 된 사내이자 세니엘의 사도.
하이엘프 사란테 레마티온이 검은 정장을 입고 서 있었다.
“사란테.”
“반갑습니다. 로난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