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62. 검과 별(7)
#A62
“어떻게····”
슐리펜이 당혹성을 흘렸다.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것은 분명 로난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자이파를 대신해서 나타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검성 결정전에 출전하라 권유했지만 한 번도 수락한 적이 없는 녀석인데.
불현듯 객석에서 굵직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지 말고···설명을 좀 해주면 안 되겠나? 내가 보기에는···쿨럭 쿨럭. 사소한 일이 아닌 듯 하다만.”
“아. 폐하.”
정겨운 음성이었다.
로난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웬 다 죽어가는 노인 한 명이 황제 옆에 앉아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화장실이라도 다녀온 것 같았다.
슐리펜은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슐리펜 데 시니반 그랑시아가 선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 맞아. 로난···아니 로난 데 발투레도 뵙습니다. 어음 선제님을요. 오랜만에 하려니까 헷갈리네 이거.”
로난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여튼 궁중 예법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엉망진창인 인사를 본 사람들이 경악했다.
노인의 정체는 다름아닌 전대 황제 발론 44세였으니.
무례에도 불구하고 선제는 태연한 웃음을 흘리며 손사래쳤다.
“뭘 그렇게 격식을 차리나···이제 황제도 아닌 늙은이에게···쿨럭! 쿨럭!”
“뭐야 괜찮아요?”
“당연히 아니지만 걱정 말게. 마땅히 이래야 하는 나이니까. 장담컨데 내가 이 자리에서 죽어도 꽃다운 연배에 요절하셨다고 슬퍼하는 자는 없을 게야.”
발론 44세가 클클거렸다.
그 모습을 본 로난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과거 황궁에서 자신에게 여명패를 수여하던 때와는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머리카락은 온통 하얗게 세었고 피부를 뒤덮은 주름은 고목의 나이테만큼이나 촘촘했다.
목은 또 어찌나 가늘어졌는지 왕관을 지탱할 힘도 없어 보였다.
“황궁에서 궁녀들이랑 틀린 그림 찾기나 하실 것이지 왜 이런 추운 곳까지 오셔가지고는····”
로난이 혼잣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왁 놀래키면 그대로 자연사할 것 같았다.
정확히는 심장 마비겠지만 저 나이쯤 되면 뭘로 죽어도 자연사였다.
가늘게 좁혀진 시선이 바로 옆에 있는 황제에게 향했다.
“폐하····”
“왜 왜 짐을 보는 겐가? 짐과 대신들은 몇 번이고 말렸다네.”
눈이 마주친 발론 45세가 기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쉰에 가까운 연배가 되어서야 제위를 물려받은 사내는 로난을 좀 걸끄러워했다.
워낙에 선제와 가깝게 지내기도 했고 로난이 거인들을 도륙하는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탓이었다.
제국에 누구보다 큰 기여를 해 준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솔직히 약간 무섭다고나 할까.
“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폐하.”
“크흠 자네 눈매는 너무 매섭단 말이지. 나도 모르게 무슨 죄를 지었나 생각하게 된다네.”
“폐하같은 성군이 그러실 리가 있겠습니까. 불손을 사죄드릴테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그렇게 나오면 짐이 뭐가 되나. 왜 이럴 때만 예법이 완벽한 게야.”
발론 45세가 당혹성을 흘렸다.
대장군에게 남편을 좀 말리라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로난은 낄낄거리며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이래나 저래나 현 황제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콩 심은데 콩이 나는 것처럼 훌륭한 군주였던 아버지를 외모로나 능력으로나 똑 닮아 있었다.
부부 동반 사냥도 몇 번 했으면서 뭘 저리 불편해하시는지 참.
선제가 말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일인가. 자이파 그 친구는 어디 가고 자네가 온 게야?”
“아아···정말로 별 건 아니고. 대련이 너무 격해진 탓이에요.”
“대련?”
“예. 엊그제였나 아들하고 캐치볼을 하고 있는데 자이파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한 판 붙자더군요. 몸도 근질근질했겠다 간만에 노친네 솜씨 좀 보려고 응했죠. 그런데 세상에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졌지 뭐에요.”
당시를 떠올린 로난이 엄지를 쳐들었다.
환골탈태한 자이파와의 대련은 근래 한 체험 중에서 가장 짜릿하고 뜻깊은 시간이었다.
회춘한 호랑이 선생님은 검은 벼락처럼 로난을 몰아붙였다.
새 무기인 단창 두 자루는 공간을 찢어발기는 송곳니였다.
결코 손속에 사정을 두며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고 로난은 간만에 진심이 되어야 했다.
“······설마 자이파가 죽었나?”
“무슨 그런 무시무시한 말씀을. 안 그래도 얼마 없는 친구인데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그냥 머리 좀 식히라고 시원한 땅 속에 박아 뒀습니다.”
승부가 난 것은 해가 완전히 저문 새벽이었다.
그는 맹렬한 힘겨루기 끝에 자이파를 계곡 깊숙이 처박고 기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굉장히 보람 있는 승리였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검성 결정전에 출전할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솔직히 그냥 도망가고 싶었어요. 저는 이래나 저래나 집에서 가족하고 시간을 보내는게 더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어디를 가도 검성 결정전에 자이파가 온다며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더라구요. 망할 늙은이 같으니.”
“그러니까 쓰러진 자이파를 대신해서 왔다는 거군.”
“그렇죠.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하게 됐어요.”
로난은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싸늘하게 얼어붙은 채였다.
비단 자이파가 출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환골탈태한 그를 꺾고 태연하게 나타난 로난 때문이었다.
“로난이라니···! 저 전쟁 이후 현역에서는 완전히 물러난 거 아니었나?”
“그러게 내가 뭐랬어. 세상을 구한 영웅이 약할 리가 없다고 했잖아. 이걸로 저능아 같은 실력 논란은 완전히 사라지겠군.”
“끝나자마자 기사 쓸 준비 해! 제국의 샛별과 영웅이 파르잔의 정상에서 격돌하다! 무조건 1면이다!”
로난은 새삼 자신이 참 얌전하게 살아왔음을 실감했다.
앉은뱅이가 몸을 일으켰을 때나 보일 법한 격한 반응이었다.
뭐 내가 바래서 이렇게 살아온 거기는 하지만.
불현듯 로난의 시선이 나비로제에게 향했다.
“좋아 보이네요. 역시 누님은 정상에 있을 때가 제일 멋있어요.”
“너.”
그녀는 경직된 채 로난을 내려보고 있었다.
어이가 너무 없으면 말도 안 나오는 법이었다.
로난은 피가 묻은 손을 보여 주며 혀를 빼물었다.
“아마 자이파는 못 올 거에요. 나도 다친 거 보이시죠? 아직도 손이 징징 울린다니까.”
“······상관없다. 그 멍청이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한 거니까. 승부에 진지하게 임할 생각은 있나?”
“당연하죠.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두는데 자이파를 대신해서 나왔다는 건 이 자리를 우습게 본다는 게 아니에요. 저도 일단은 칼잡이인걸요.”
별안간 로난이 칼자루를 두 손으로 고쳐 잡았다.
노을색 눈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검을 수직으로 세워 든 그가 나비로제와 알로긴을 향해 검례를 보냈다.
“당연히. 진지하게 임해야죠.”
“그렇다면 좋다.”
나비로제가 실소했다.
자신이 로난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매사에 장난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타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결코 우습게 보지 않는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야욕처럼 병신 같은 것만 빼고..
“저는 로난 데 발투레가 검성 결정전에 참가하는 것을 허가합니다. 알로긴 님은 어떠십니까?”
“나도 찬성일세. 오히려 이 편이 더 재밌을 것 같구먼.”
알로긴도 동의했다.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은 노인을 즐겁게 한다.
더군다나 로난이 칼 휘두르는 걸 보는 것은 최후의 전쟁 이후 처음이었다.
황제도 이 대결에 동의를 표했기에 이제 남은 것은 로난과 맞서야 할 상대 뿐이었다.
로난이 슐리펜을 돌아보았다.
몇 초를 침묵하던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의한다.”
“그렇게 나와야지.”
로난이 웃었다.
객석에서 우레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시합의 준비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각 마탑에서 온 정예 마법사들이 객석과 싸움터를 구분짓는 방어막을 설치했다.
이미 대화를 많이 나누었기에 황제와 검성의 연설은 생략되었다.
이릴이 폴짝폴짝 뛰며 외쳤다.
“로난! 여보! 둘 다 힘내요!”
“에엑! 진짜로 압빠랑 삼촌이 싸운다고!?”
아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경악했다.
두 사람을 힐긋거린 로난이 입맛을 다셨다.
나도 그냥 집에 말하고 올 걸 그랬나?
자신만 가족의 응원을 못 받으니 뭔가 묘하게 서운했다.
“좋은 남편이자 아빠인가 보네. 제법인데.”
“흥.”
방어막 설치가 끝난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섰다.
들떠 있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그 자리를 채웠다.
바람소리만 들려오는 파르잔의 정상에서 나비로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시합을 개시한다.”
말이 맺히는 순간이었다.
슐리펜의 형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탐색전 따위는 없었다.
로난이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슐리펜은 자신의 코앞에 나타나 있었다.
“오.”
로난이 입을 둥글게 말았다.
예전과 비교하는 것이 실례일 정도로 민첩한 보법이었다.
검을 뽑을 틈은 없었다.
로난은 칼자루에 손만 올려둔 채 허리를 뒤로 젖혔다.
스각!
예리한 참격이 앞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괜찮은데.”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로난이 휘파람을 불었다.
길이는 짧았지만 닿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곧바로 상체를 일으키는 대신 오른쪽으로 몸을 뒤틀었다.
칼바람으로 이루어진 찌르기가 종이 한 장 간격으로 옆구리를 비껴 지나갔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공격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진지하게 임한다 하지 않았나?”
슐리펜이 읊조렸다.
상체를 일으킨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목을 노린 참격이 날아오고 있었다.
물러나면 회피할 수 있었지만 그는 후퇴하는 대신 지면을 박차며 도약했다.
콰콰콰콰콰콰!!
로난이 원래 있던 지점에서 세 개의 회오리가 솟구쳤다.
지면을 부수며 승천하는 바람은 휘말리는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한 걸음이라도 물러섰다가는 넝마가 되었을 터였다.
이 연격이 때려박히기까지 2초가 채 지나지 않았다.
슐리펜을 뛰어넘은 로난이 제비를 돌며 착지하는 순간이었다.
“응. 그랬지.”
“······?!”
푸확!
슐리펜의 어깨 위로 핏줄기가 솟구쳤다.
양이 제법 많은 것이 얕은 상처가 아니었다.
숨죽인 채 관전하던 이릴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여보!”
“아 압빠!”
슐리펜이 휘청거렸다.
갑작스러운 출혈로 현기증이 치밀었다.
검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로난이 툭 내뱉었다.
“그래서 진지하게 하고 있잖아.”
“······!”
슐리펜의 눈이 커졌다.
언제 베였는지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입 속살을 씹음으로서 정신을 다잡았다.
일단 거리를 벌리기 위해 물러나는 찰나였다.
파아아아!
로난의 검이 주홍색으로 물들었다.
거인들을 추락시킨 힘이 슐리펜을 잡아당겼다.
보법은 의미를 잃었다.
슐리펜을 눈앞까지 끌고 온 로난이 말을 이었다.
“너야말로 패 숨길 생각 하지 말고 까는 게 좋을 거다.”
로난이 읊조렸다.
응수할 틈은 없었다.
슐리펜은 검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카아아아앙-!
통렬한 금속음과 함께 그의 몸이 튕겨 나갔다.
“크윽!”
검격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철퇴로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훨씬 더 밀려나야 했지만 역풍이 그것을 막아 주었다.
슐리펜의 검신이 바람으로 변모하며 흩어졌다.
다시 자세를 잡은 그가 검격을 뿌렸다.
하늘조차 가를 듯한 검기 다섯 개가 저마다 다른 방향에서 로난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흠.”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날개가 달려 있지 않다면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지만 그는 애초에 피할 생각이 없었다.
주홍색을 띠던 검신이 이번에는 붉게 물들었다.
넓은 가르기가 원을 그렸다.
피를 닮은 검기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요격당한 슐리펜의 검기가 폭발하듯 흩어졌다.
파르잔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진 채였다.
모든 검기를 파훼한 로난이 심드렁하게 읊조렸다.
“겨우 이 정도로 자이파 영감쟁이랑 싸우려 한 거냐? 뭐 달라진 게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