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61. 검과 별(6)
#A61
아셀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해가 중천에 떠오른 정오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흙먼지가 부옇게 올라오고 있었다.
며칠 전 제국 서부의 황야에서 괴물이 날뛰는 것 같다는 신고가 다수 들어왔다.
착각으로 인한 신고야 가끔 들어오고는 했지만 수십 개가 한번에 터진 것은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상공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아셀이 경악했다.
“세 세상에. 이게 뭐야?!”
괴물이나 화산 폭발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허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황량했던 광야는 뭐라 말할 수 없이 복잡한 지형으로 변해 있었다.
산처럼 거대한 야수가 날뛰었다 해도 믿어질 광경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정말로 괴물이 나타난 건가?’
아무도 살지 않는 지역이라 천만다행이었다.
직경이 수십 길게는 수백 미터에 이르는 균열이 황야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분화구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구멍도 다수 있었다.
유성우라도 쏟아진 건가 싶었지만 운석 충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몇 개의 균열은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어찌나 깊은지 정오의 볕 아래에서도 밑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사막화된 모래가 검은 균열 속으로 쏟아지는 광경은 꼭 황금빛 폭포를 연상케 했다.
“저 흔적은···!”
일순 아셀의 눈이 커졌다.
그는 고도를 낮춰 새카만 균열로 다가갔다.
가까에서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검은 균열은 헤아릴 수 없게 깊이 파인 것이 아닌 공간 자체가 찢어진 흔적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알기로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자이파 님.”
명백한 자이파의 오러였다.
그렇다면 이 끔찍한 지형 파괴는 자이파가 무언가와 전투를 벌인 흔적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그것도 환골탈태를 거쳐서 젊어진 자이파에게 이토록 힘을 쓰게 한단 말인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아셀은 먼저 주변에 부상자가 있는지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그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레이더 역할을 하는 마나의 파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황무지 전역을 뒤덮고도 남는 레이더는 그 어떤 마법사와 비교해도 우월한 성능을 자랑했다.
“찾았다.”
과연 아셀은 순식간에 생존자를 찾아냈다.
생명 신호는 계곡이라 해도 믿어질 만큼 깊고 넓은 균열 아래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아셀은 최고 속력으로 그에게 날아갔다.
이동하는 중에 파괴된 지형을 복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균열의 단면은 비누를 썬 것처럼 매끈했다.
깊게 들어갈수록 비릿한 피 냄새가 짙어지고 있었다.
머지않아 생존자의 앞에 당도한 아셀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마 맙소사!”
****
“알로긴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아···자네인가? 들어오게나.”
나비로제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널찍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테리어 자체는 썩 고풍스러웠지만 곳곳에 전시된 병장기들이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큼직한 벽난로 앞.
흔들의자에 앉은 노인이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나. 검성.”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나야 뭐 늘 똑같다네. 그나저나 자네도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검성씩이나 되는 사람이 뭘 그리 정중하게 구는가.”
노인이 클클거렸다.
사막처럼 갈라진 목소리에서는 감출 수 없는 노련함이 묻어났다.
한때 검의 제전을 관장했던 장로 알로긴이었다.
일반적인 늙은이의 것보다 훨씬 더 자글자글한 주름이 그의 연배를 방증하고 있었다.
“예를 갖출 만한 분이니까요.”
“한낱 늙은이일 뿐일세. 성검이 주인을 찾아간 날 내 직책은 의미를 잃었어. 저 면면의 나열도 내가 죽음으로서 마침표를 찍겠지.”
알로긴이 턱짓했다.
그가 바라보는 벽면에는 장로를 역임했던 자들의 초상화가 줄지어 걸려 있었다.
알로긴을 제외한 초상화에는 모두 하얀 꽃이 달려 있었다.
“내가 제일 먼저 갈 줄 알았는데 수명이라는 건 참 모를 일이더군. 이제 미련도 없는데 뭘 이렇게 오래 살려두는 지 모르겠다네. 자네처럼 젊음을 되찾았다면 또 모르겠지만.”
“장로님도 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검성의 자리까지 오르셨지 않았습니까.”
“아니···나는 도달할 수 없네. 자네가 부순 벽은 내겐 너무 멀어. 원하는 계절에 머무르는 특권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닐세.”
알로긴은 수염을 매만지며 웃었다.
패배주의적 체념이 아닌 객관적인 인지였다.
노력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 역시 소싯적에는 나비로제 못지않게 거친 삶을 살아왔지만 그녀처럼 강해지지 못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괜히 불안해진 나비로제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가 알로긴의 영혼을 소진시키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만 웃으라고 말하려던 차였다.
“그래도 기쁘다네. 자네가 다시 검성이 되는 것도 보고 말이지. 이것도 오래 살았으니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후우···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오늘이 지나고도 검성으로 남아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응? 자네답지 않게 왜 그리 자신이 없······아아 그래. 자이파 그 친구가 참전한다고 했었지.”
알로긴이 손가락을 튕겼다.
과연 나비로제가 확언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자이파 터르겅.
나비로제에게 처음으로 패배의 쓴맛을 알려준 괴물은 얼마 전 환골탈태의 경지에 이르렀다.
만약 지금의 그녀를 꺾는 자가 나온다면 그 호랑이밖에 없을 터였다.
시계를 확인한 나비로제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슬슬 가시죠. 부축해 드릴까요?”
“됐네 이 사람아. 아직 내 힘으로 걸을 수 있어. 대소변도 못 가리는 늙은이 취급하면 곤란해.”
알로긴이 흔들의자에서 뛰어내렸다.
원래 짜리몽땅하던 키는 세월을 거듭하며 더욱 줄어든 채였다.
나비로제는 그가 착지와 동시에 자연사하지 않은 점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로의 방을 빠져나온 두 사람이 복도로 진입했다.
“그나저나 자네····”
“예?”
“참 고와졌군. 나도 소싯적에는 제법 아가씨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자네랑 비교하면 그냥 칼 휘두르는 똥자루였던 것 같아.”
환골탈태 전에도 아름다운 그녀였지만 지금은 말이 안 나오는 수준이었다.
특히나 단발로 자른 머리가 매우 잘 어울렸다.
누구 말을 듣고 잘랐냐 묻자 절친한 벗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네에게 친구가 있었다니. 놀랍군.”
“손가락 하나에 꼽을 정도는 되죠. 그리고 저는 원래 아름다웠습니다.”
“흐하하 그래. 그렇게 나와야 나비로제 양이지.”
“슬슬 웃음을 거두시지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아···알겠네. 내 인생 마지막 검성 결정전이군. 최선을 다해 지켜보겠네.”
“재수 없는 소리도 거두시고요.”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은 어느새 복도의 끝에 도달했다.
거대한 쌍여닫이문 너머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옷매무새를 다듬은 나비로제가 힘차게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앞머리를 젖혔다.
거대한 분화구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러분! 드디어 납셨습니니다!”
동시에 사회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과거 성검 탐색이 벌어졌던 성지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지금껏 전례가 없던 검성 결정전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객석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에 그들은 분화구의 가장자리에 늘어선 채 기다리고 있었다.
흩어져 있던 군중의 시선이 나비로제와 알로긴에게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마공학 확성기를 한 바퀴 돌려 잡은 사회자가 재차 소리쳤다.
“수십 년간 파르잔을 수호해 온 지고의 장로 알로긴 님! 그리고 다시 왕좌에 오른 뱀의 여제 검성 나비로제 님입니다!”
“와아아아아아!!!”
죽은 화산은 잠깐이나마 부활의 꿈을 이루었다.
격렬한 환호성이 분화구의 정상에서 터져 나왔다.
나비로제의 걱정과 달리 알로긴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쓰러지지 않았다.
대신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먼 길을 온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들 반갑소. 이번 검성 결정전의 심판을 맡게 된 알로긴이라 하오.”
“나비로제다.”
나비로제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에게는 따로 검례를 보냈다.
그들을 위한 의자는 성지가 한 눈에 보이는 명당에 마련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앉은 것을 확인한 사회자가 말을 이었다.
“이번 검성 결정전은 여러모로 전례가 없었습니다. 그랜드 서클이 아닌 파르잔에서 진행되는 것도 그렇고 마지막까지 남은 도전자가 두 명인 점도 그렇죠. 어느 한 명이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도전자는 여기서 승부를 치르고 검성에게 도전할 자를 정하게 됩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동요는 없었다.
검성에게 도전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명이었다.
이번 대결의 승자만이 검성에게 도전하게 될 터였다.
물론 승부는 공평해야 함으로 컨디션이 온전해질 때까지 집중 치료를 받을 예정이었다.
성지를 감싼 분화구 가장자리에는 두 개의 문이 나 있었다.
설명을 마친 사회자가 북측에 난 문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럼 첫 번째 도전자부터 입장하겠습니다. 슐리펜 시니반 데 그랑시아!”
환호와 갈채가 쏟아졌다.
부드럽게 열린 문 너머에서 훤칠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수려한 외모 검푸른 머리카락과 제복은 언제 봐도 고귀하다.
객석에서 까치발을 들고 있던 아리아가 두 손을 입가에 모아 소리쳤다.
“압빠! 힘내요!”
“폭풍을 부르는 검 불세출의 천재가 다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과연 지난번의 참패를 만회할 수 있을 것인가!”
슐리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극도의 집중 상태에 들어간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딸조차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푸른 시선은 대결 상대가 나타날 반대편의 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사실 진정한 결승전은 나비로제와의 승부가 아닌 지금일지도 모른다.
“이어서 두 번째 도전자 입장하겠습니다. 슐리펜 님 못지않게 유명한 분이죠. 북부를 휩쓰는 검은 선풍 수십 년 간 칭해지기를 역대 최강의 검성! 자이파 터르겅입니다!!”
아까와 못지 않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슐리펜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이파와 검을 맞대는 것은 과거 검성의 자리를 찬탈했던 이후 처음이었다.
천천히 대문이 열리며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흥을 깨서 미안하게 됐수다.”
“뭐?”
일순 객석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드러나는 윤곽은 자이파의 것이 아니었다.
수인보다 훨씬 작은 그림자는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그림자가 한 걸음을 더 내딛자 음영에 가려졌던 정체가 드러났다.
“응···? 저건 자이파가 아닌 것 같은데.”
알로긴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검은 머리카락과 노을색 눈동자.
이런 자리에서마저 칼자루를 톡톡 두드리는 낙천적인 몸짓.
나비로제가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어째서···!”
“여기도 오랜만이네. 그리운걸.”
로난이 휘파람을 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병장기가 별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드높은 하늘은 제도에서 볼 수 없는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운 풍경.
그리운 사람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시선이 슐리펜에게 고정되었다.
“잘 지냈냐. 도둑놈아.”
“로난. 왜 네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자이파는 오지 않아.”
로난이 입꼬리를 올렸다.
곳곳이 베이고 찢어진 것이 어디서 패싸움이라도 하고 온 듯한 몰골이었다.
슐리펜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놈. 설마.”
“시시콜콜한 건 넘어가자고. 지금 중요한 건 호랑이 영감님이 아닐 텐데?”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한때 파르잔의 존재 의의였던 성검이 소리없이 뽑혀 나왔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검의 끄트머리가 벗을 겨누었다.
“네 상대는 나다. 슐리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