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60. 검과 별(5)
#A60
야자수를 스치는 바람이 따스했다.
슬슬 단풍이 들기 시작한 제도와 달리 아랫지방의 땅은 아직 여름에 머물러 있었다.
남부에서 제일가는 대도시 만티카의 광장은 오늘도 분주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언데드가 말살된 것이 어제부로 확인됐습니다! 칠스톤행 마차 오늘부터 정상 운행합니다!”
“자 자 지금 마차 따위가 중요한게 아니지요! 호외입니다! 호외!”
“어머. 이 기사 진짜야?”
평소에도 바쁜 곳이었지만 오늘은 한층 더 분위기가 들떠 있었다.
빵모자 쓴 판매원들이 뿌려 대는 전보가 행인들의 발길을 멈춰세우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서 검은 머리카락의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 이걸로 끝! 다리 좀 내밀어 보거라.”
“에?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내의 손에는 여자아이의 다리가.
정확히는 그렇게 착각할 만큼 현실적인 의족 한 짝이 들려 있었다.
“버 벌써 완성이라구요?”
함께 자리에 있던 소녀의 아버지도 당혹성을 흘렸다.
눈으로 작업 과정을 지켜봤음에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내가 의족 하나를 뚝딱 만들어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30분이 되지 않았다.
딸아이의 신체를 측정하는 데 걸린 시간까지 포함해서.
“그래. 뭘 그리 놀라나? 여기 빠르다고 써 있잖나.”
사내가 검지로 위를 가리켰다.
큼직한 간판에는 [팔이나 다리 날개 만들어 드립니다. 빠르고 정확함.] 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문구가 붓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건···그렇습니다만.”
“걱정 말게. 절대로 대충 만들지 않았으니. 어서 다리!”
“네 네에!”
소녀가 조심스레 오른다리를 내밀었다.
아버지가 입술을 짓씹었다.
뭉개진 그녀의 무릎 아래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싱글거리던 사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괴로웠지. 이제 안심해라.”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주문처럼 읊조리며 소녀의 다리에 의족을 부착하기 시작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부착을 마친 사내가 다시 쾌활한 웃음을 지었다.
“좋아! 끝! 이제 한 번 멋지게 걸어 봐라!”
“어? 다리가···?”
통증은 전혀 없었다.
소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분명 의족인데 감각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힘을 주자 작은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우와.”
소녀가 입을 틀어막았다.
이번에는 환상통이 아니었다.
사내가 새로 만들어 붙인 다리는 완벽하게 신경이 이어져 있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가 걸음을 내디뎠다.
절뚝거리며 걸어가던 그녀가 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빠 이거 봐요! 제가 걷고 있어요!”
“세 세상에···!”
소녀의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얼어 있었다.
주름진 눈시울이 붉어졌다.
딸은 비틀거리면서도 빠르게 균형을 잡아 가고 있었다.
자그마한 얼굴에는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작업을 마친 사내가 손을 툭툭 털어냈다.
“배우는 게 빠르군. 역시 애들이야.”
“저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평생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야 할 줄 알았는데···!”
“흐흐 기술이 삶을 자유롭게 하는 법이지.”
그는 딱따구리처럼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하나뿐인 딸이 다리를 잃은 것은 강령술사 키어사지의 언데드 거병 사태 때문이었다.
살아 있는 시체에게 물린 다리는 그대로 썩어들어갔고 목숨을 잃고 싶지 않다면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
로난과 아셀이 나서준 덕에 빠르게 사태가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남부 곳곳에는 소녀와 같은 피해자가 남아 있었다.
지옥 같던 나날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소녀의 아버지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흐윽 감사합니다···원하시는 게 있다면 뭐든지 드리겠습니다.”
“뭐든지라? 그 말 감당할 수 있겠나?”
“그 그럼요! 뭐든지 말씀하셔도 됩니다. 제 하나뿐인 보물을 구해주신 분인걸요···!”
그는 정말로 뭐든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쓸개라도 빼서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내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문득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소녀가 사내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저기 이거 아저씨 드릴게요.”
“음?”
“제 친구에요. 엄마가 만들어 준 거. 제일 좋아하는 동화책에 나오는 용용이에요.”
고사리같은 손에는 작은 드래곤 인형이 쥐어져 있었다.
헝겊과 솜으로 만들어진 드래곤은 날개가 네 장인 블랙 드래곤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싹수 없는 눈매를 보니 누구를 모델로 했는지는 자명했다.
인형을 만지작거리던 사내가 픽 웃었다.
“인기 좋은걸. 꼬맹이.”
“네?”
“아니다. 이런 귀한 걸 주다니 내 고맙게 받으마.”
“에헤헤 소중하게 다뤄 주세요. 날개 만져주는 걸 좋아해요.”
소녀가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했던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이제 보니 앞니만 쏙 빠진 것이 개구쟁이 느낌이 물씬 풍겼다.
마지막으로 쁘띠 오르세를 안아준 그녀가 광장으로 달려갔다.
“고맙습니다아!”
소녀는 다시 한 번 배꼽인사를 했다.
달려가는 내내 오랜 친구와의 이별이 아쉬운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광장에서 놀던 또래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친구인 것 같았다.
어느새 깡총거리며 뛰는 것이 확실히 아이들은 배우는 것이 빨랐다.
인형을 바라보던 사내가 씩 웃었다.
“좋아. 이렇게 하지!”
“무 무엇을 받으실지 결정하셨습니까?”
“그래. 원래는 거금을 요구하려 했지만 이렇게 귀한 걸 받았으니 대부분은 삭감해 주지. 차액으로 동전 한 닢만 주시게나!”
“귀 귀한 거라니···설마 딸아이의 인형 말입니까?!”
“그럼 뭐겠나? 그나저나 다시 봐도 참 잘 만든 인형이군. 박음질 하나하나에 정성이 묻어나 있어.”
사내가 감탄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필멸자가 애착을 갖고 만든 물건을 아주 좋아했다.
소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싸가지 없는 풋내기를 모델로 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소장품 목록에 넣고 싶을 정도였다.
“하 하지만···고작 그걸로는···”
“어허! 나는 같은 말을 다시 하는 걸 싫어하네. 동전 한 닢이 아깝다는 건가 지금?!”
“그 그럴 리가요! 여 여기. 바로 드리겠습니다!”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녀의 아버지는 화들짝 놀라며 동전 한 닢을 꺼내 주었다.
은화인게 조금 마음에 안 들었지만 사내는 그러려니 하고 동전을 받았다.
“좋아. 이제 그만 딸에게 가보시게. 성장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 의족은 특제라서 주인의 몸이 자라면 함께 자라니까.”
“이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다니. 존함이라도···”
“난 바쁜 사람일세. 썩 가게나.”
사내는 냉랭하게 말을 끊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일순 당황했지만 그가 선의를 베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감사를 표했지만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녀의 아버지가 등을 돌렸다.
그 모습을 힐끔거리던 사내가 작게 주문을 읊조렸다.
소리 없이 공중에 떠오른 오르세의 인형이 소녀 아버지의 배낭으로 들어갔다.
지퍼가 멋대로 열리고 닫혔지만 그는 해당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아가씨. 그 녀석은 내 친구가 되기에는 너무 어려.”
사내가 혼잣말했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자리를 정리했다.
의족을 만드는데 필요한 장비는 거대한 트렁크 가방 하나에 전부 다 들어갔다.
정리를 마친 사내가 신문 파는 소년을 불러세웠다.
“호외입니다! 호외!”
“한 부 주게. 아까부터 어지간히도 신나 있더군.”
“에헤헤 빅 뉴스라서 말입죠···어라 이건 은화인뎁쇼?! 어디보자 거스름돈이-”
“그냥 자네 갖게나. 열정에는 보답이 따라야 하는 법이지.”
“가 감사합니다 선생님! 복 받으십쇼!”
그는 소녀의 아버지에게 받은 동전으로 신문을 샀다.
소년은 정수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허리를 접었다.
막 신문을 읽으려던 찰나였다.
“아까 그 애 귀엽던데요. 예의도 바르고요.”
“아아···봤나? 자네 말이 맞아. 나도 인간은 저맘때가 제일 귀엽다고 생각하네.”
“후후. 저 아이가 마지막이었나요? 간판을 내리셨네요.”
“그래. 남부에서 다친 사람들은 전부 구제했어. 이제 다음 장소로 이동해 봐야지.”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은발의 엘프 여인이 다소곳이 곁에 서 있었다.
다른 엘프들과 비교해도 유달리 긴 귀 루비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하여튼 열정적이라 좋네요. 알리브리헤.”
“자네도 만만치 않네 엘시아. 언데드에게 휩쓸렸던 지역을 그새 다 복구했다지?”
“건물이랑 길 지형뿐이지만요.”
“그걸 다라고 하는 걸세. 힘든 건 없었나?”
“네 뭐. 아이들이 워낙에 일을 잘 해줘서···아니야. 하나 있었네요. 오르세 녀석 무슨 불을 그렇게 크게 질러 놨는지···그걸 끄는 건 좀 힘들었어요.”
엘시아가 투덜거렸다.
구원자 카인의 오른팔이자 네뷸라 클라지에의 창립 멤버.
역대 최강의 정령사 중 한 명인 그녀는 알리브리헤와 함께 세상을 떠돌며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먼 남부까지 찾아온 것도 키어사지라는 삼류 악당 때문이었다.
언데드 군단이 벌인 패악질을 뒷수습하기 위해서.
아이러니하게도 아셀과 오르세가 만들어 놓은 인공 계곡(지옥처럼 타오르는)을 처리하는 게 가장 힘들었지만.
“하하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어지간히 불길이 거셌나 보군. 우리 검은 용의 불은 끈적하지. 그 애송이도 발전하고 있구만.”
“다음부터는 적당히 좀 하라고 해 주세요. 참 아까부터 주변이 시끄럽던데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안 그래도 확인하려 했다네. 어디보자····”
알리브리헤가 신문을 펼쳤다.
과연 큼직하게 강조된 문장이 많았다.
지면을 훑어보던 그가 눈썹을 으쓱였다.
“오호라. 자이파 터르겅이 검성의 자리에 다시 도전한다는군.”
“어머 자이파가요? 하긴 환골탈태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했었죠.”
“그래. 저번에 참패한 슐리펜도 재참전한다더군. 비약적인 깨달음을 얻을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생각하네만···혹시 모르지. 애들은 워낙 빠르게 자라고 배우니까.”
알리브리헤가 주억거렸다.
아마 이번에도 참패할 가능성이 크지만 그 슐리펜이라 기대가 되었다.
재능 하나만큼은 로난이나 아벨과 어깨를 견줄 만한 사내였으니.
너무 조급하게 굴지 않아도 좋으련만.
엘시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기대되네요. 제도에 잠깐 들러서 보고 올까요?”
“그건 힘들 것 같군. 내 생각에는 이게 진짜 빅 뉴스인걸.”
“뭔데요?”
“이번 검성 결정전은 파르잔에서 열린다는군. 왜 검의 제전이 열리던 곳 있잖나.”
“네에에?! 파르잔에서요?”
엘시아의 귀가 뒤로 젖혀졌다.
제도의 그랜드 서클이 아닌 다른 곳에서 검성 결정전이 진행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 장소가 파르잔이라니.
로난이 성검을 찾아내기 전까지 검의 제전이 열리던 장소였다.
“그래. 황제가 바뀌니 전통도 바뀌려나 봐. 이건 나도 꼭 가보고 싶구만.”
“가면 되죠! 어차피 할 일도 다 했잖아요!”
“좋아. 그럼 길도 먼데 바로 출발하지.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보실까····”
알리브리헤가 신문을 접었다.
불현듯 그의 동공이 바늘처럼 가늘게 좁혀졌다.
폴리모프를 해제하고 본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목덜미에 비늘이 솟구치는 것을 본 엘시아가 기겁했다.
“자 잠깐! 진정해요! 아무리 보고 싶어도 그렇지 당신답지 않게 왜 그래요?”
“······아아. 여긴 도시 한복판이었지. 미안하네.”
“당신보다 하이란을 타고 가는게 훨씬 더 빨라요. 하이란!”
“음?”
알리브리헤가 뭐라 의문을 제기하기도 전이었다.
엘시아의 외침과 동시에 하늘에 거대한 마법진이 드리웠다.
집채만한 독수리 한 마리가 마법진과 구름을 찢으며 강하했다.
“휘요오오옷!”
“꺄아아아악! 뭐 뭐야!?”
갑작스러운 강풍이 광장에 휘몰아쳤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천막 달린 상점이 패러글라이드가 되어 날아가고 모든 여인의 머리카락은 채찍이 되어 주변 사람들의 면면을 후려쳤다.
휘요옷!
멋지게 선회한 하이란이 늙은 용과 엘프의 앞에 착륙했다.
“······말린 게 그거 때문이었나?”
“응? 그럼 뭔 줄 알았어요? 아아! 걱정하지 마세요. 인식 저해 마법을 걸어놔서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니까.”
엘시아가 해맑게 웃었다.
알리브리헤는 뭐라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오래 살다 보면 어딘가 둔감해지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아닐세. 어서 출발하자고.”
“네! 빠르게!”
엘시아는 서커스에서나 볼 법한 점프를 선보이며 하이란에 올라탔다.
알리브리헤도 그녀를 따라 탑승했다.
바람의 황태자가 멋지게 날아올랐다.
당연하게 아까와 같은 광풍이 불어닥쳤다.
상점이 날아가고 비명이 울려 퍼지고 머리카락 채찍이 희생자를 만들었다.
“파르잔이라. 엄청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말일세.”
엘시아가 웃었다.
알리브리헤도 따라서 웃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다 좋았다.
이런 날도 있는 법이지.
투명한 가을볕이 구원자의 뜻을 계승하며 살아가는 두 대간부를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