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57. 검과 별(2)
#A57
“아버지.”
“왜 그러냐. 아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나온 그는 란세와 캐치볼을 하는 중이었다.
투명한 가을볕이 공원을 적시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의 느티나무 아래에서는 아데샨과 에린 시타가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란세가 공과 함께 질문을 던졌다.
“그 아버지는 왜 검성에 도전하지 않으세요?”
“뜬금없는 질문일세. 너는 왜 전교 1등 안 하냐? 하기 싫어서?”
“그 그거랑 이건 다른 문제잖아요···! 내로라하는 검사라면 누구나 탐내는 자리인데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지금까지 대회 참가 자체를 안 하셨더라고요. 뭔가 이유가 있나 싶었죠.”
“뭔 이유가 있어. 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런 거지. 무섭기도 하고.”
“무섭다고요?”
“그래. 거긴 진짜로 검에 미친놈들만 나가는 곳이잖냐. 역대 우승자가 누구였는지 떠올려 봐.”
로난이 공을 받았다.
란세는 아버지의 말마따나 역대 검성의 면면을 떠올렸다.
슐리펜과 자이파 나비로제 폭류검 크로덴···확실히 하나같이 정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 아닌가?
란세가 뭐라 대꾸할 말을 찾던 와중이었다.
“슐리펜 자식이라면 몰라도 지금 검성은 나비로제 누님이잖아. 나더러 그 사람이랑 칼부림을 벌이라고? 우욱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다.”
로난이 구역질했다.
그는 나비로제가 다시 한 번 검성으로 등극하는 순간을 직접 관람한 사람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슐리펜의 폭풍검에 누님의 옷이 적당히 찢어지는 장면을 노리고 간 것이었는데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보고 말았다.
당시까지 로난은 그녀가 환골탈태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걸 모르는 채였으니.
나비로제와의 타이틀전에서 슐리펜은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끔찍했지. 나였으면 한 달은 집에서 못 나왔을 거야.’
승부라 칭하기에도 아까운 수준이었다.
나비로제는 만사를 꺼내기는커녕 검기조차 제대로 발현하지 않고 슐리펜을 제압했다.
대태도는 한 마리의 뱀이 되어 투기장을 휘저었다.
슐리펜의 각성 이래 한 번도 위용을 잃은 적 없던 폭풍검은 이렇게 나들이 가기 좋은 날의 산들바람으로 전락해 버렸다.
시합이 끝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비로제가 검을 집어넣었을 때 슐리펜은 바닥에 널브러져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로난은 그런 슐리펜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졌을 때는 모든 관객이 들을 수 있는 크기로 비웃어 주기로 작정하고 있었음에도.
‘한심한 자식. 누나도 보고 있었을 거 아냐.’
오히려 열불이 치밀었다.
그래서 잔뜩 흥분한 채 기사를 쓰고 있는 취재진에게 화풀이를 했다.
화풀이라기보다는 적법한 언론 통제라 해야 맞으려나.
아무리 이목을 끄는 게 중요해도 그렇지 헤드라인으로 [경악! 뱀의 여제에게 겁탈당한 폭풍!]은 조금 심하잖아.
쓰레기 같은 기사가 나가지 않도록 처리하는 것만이 그가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로난은 조금 힘을 주어 공을 던졌다.
자 받아라!”
어엇! 너무 높아요!
포물선이 드높았다.
허둥거리던 란세는 다리를 마나로 강화하며 뛰어올랐다.
멋진 캐치.
잘 단련된 사냥개를 연상케 하는 몸놀림에 주변에서 산책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제비를 돌며 착지한 란세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버지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미치겠네. 너는 나비로제 누님 수업을 들으면서도 그딴 말이 나오냐? 환골탈태라는 건 몸매랑 얼굴만 훌륭해지는 게 아니야 인마. 지금 대륙 검사 절반 정도는 누님이랑 검을 한 번 맞대는 것만으로 변실금에 걸릴 거다. 못해도 자이파 영감쟁이를 데려오지 않는 한 답이 없어요. 슐리펜이 기똥찬 깨달음을 얻거나.
“그 그건 알죠···하지만 아버지도 충분히 강하시잖아요. 왜 전에 했던 참관 수업 생각하면····”
“키어사지인지 사지마비인지 하는 놈 얘기라면 그만둬라. 걔는 농담이 아니고 내가 엉덩이 사이에 칼자루를 끼우고 싸워도 회를 칠 수 있는 머저리였으니까.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로난이 혀를 찼다.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났다.
그런 치매 노인 한 명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야 했다니.
란세가 다시 공을 던지려던 차였다.
“두 사람 그쯤 하고 와서 점심 먹어요~”
느티나무 쪽에서 아데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돗자리에 앉아 사과를 깎고 있었다.
길게 뻗은 다리 옆에는 직접 만든 도시락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에린이 주억거렸다.
“맞아. 에린 배고픈데 오래 참았어. 시타도 그렇지?”
“뺘!”
시타가 끄덕거렸다.
한때 무수한 피와 생명을 거두었던 꿈새는 프라이팬 위의 버터처럼 푹 퍼져 있었다.
에린은 폭신폭신한 시타의 깃털 위에서 뒹굴거리며 엄마가 깎아준 사과를 먹는 중이었다.
네 갑니다. 가요.
로난이 글러브를 벗어 흔들었다.
어느새 밥 먹을 시간이 되어 있었다.
공을 챙긴 란세가 그의 뒤를 따랐다.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 걷던 로난이 아들을 힐긋거렸다.
“참 엉덩이는 좀 괜찮냐? 남부 다녀와서 엄마한테 맞은 자리.”
“언제적 이야기를…! 그날 바로 시타가 치료해 줘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울면서 싹싹 빌던 꼴이 선하구만 허세는. 에린도 너보다는 의연했다 인마.”
“윽···!”
란세의 얼굴이 붉어졌다.
요란벅적한 체험학습 이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와 에린은 감히 목숨을 걸고 시체 군대 한복판에 강하한 죄로 태형을 선고받았었다.
집행자는 아데샨 데 발투아.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일격은 란세의 엉덩이뼈 깊숙한 곳에 다시는 잊혀지지 않을 트라우마를 한 번 더 새겨 놓았다.
낄길거리던 로난이 란세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렸다.
“뭐 그때는 말 못했는데 꽤 멋졌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들 구하려고 뛰어드는 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거든. 물론 나는 엄마 편이지만 살았으니 된 거 아니겠냐. 정말로 잘 해줬어. 아들.
그렇게까지…별 일도 아니었는걸요.
얌마. 내가 칭찬해 주면 그냥 ‘넵!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면서 받아. 폼 잡을 여자친구도 없는 놈이 요상한 물이 들어서는···아니지 세치카가 있구나. 둘이 뽀뽀는 했냐?
세 세 세치카 이름이 갑자기 왜 나와요?! 걔랑은 그냥 친구 사이라니까요!”
란세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어차피 사귀게 될 거면서 꼴값이 따로 없었다.
답답하기도 하지.
나는 안 이랬었는데.
그나저나 참 괜찮은 날이었다.
적당히 선선한 날씨와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나무.
웃으면서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까지.
티격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로난이 씩 웃었다.
“아들. 나는 검성 결정전에 나가느니 너랑 캐치볼 한 판을 더 할 거다.”
“네?”
“그게 백만 배는 더 가치있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거든. 진짜로.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란세가 눈살을 찌푸렸다.
숭고한 검성의 자리가 어째서 캐치볼보다 못한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로난은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은 엄연히 존재하니까.
불현듯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세상에는 자신을 증명해야만 하는 부류가 존재하는 법이지.”
“뭐····”
낮고 무거운 음성이 낯익었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사라졌던 검끝은 말을 건 자의 목젖 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온몸이 새카만 털로 뒤넢인 웨어타이거 한 명이 두 사람을 내려보고 있었다.
자이파가 웃었다.
“간만이군. 애송이.”
“털에 윤기가 좔좔 흐르시네. 회춘했다는 풍문이 진짜였나 봐.”
로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자이파를 위아래로 훑어본 로난은 그가 환골 탈태를 했다는 말이 사실임을 알아챘다.
먹물로 샤워를 한 것처럼 새카만 체모에는 힘이 넘쳐흘렀다.
온몸을 찢고 나올 것 같은 근육은 자신이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옹골차게 압축되어 있었다.
“작은 것들은 네 자식들인가···많이 컸군 그래.”
“애들이야 원래 쑥쑥 크니까. 아들 아빠 친구한테 인사해라. 자이파 알지? 전전전대 검성.”
“지 진짜로 자이파 님이에요? 최근에 젊어지셨다는 소문도 역시···!”
바짝 얼어 있던 란세가 겨우겨우 입을 뗐다.
쿵쿵 뛰는 심장이 가슴을 찢고 나올 것 같았다.
평생 선망하던 인물 중 한 명이 눈앞에 있었으니.
만난 적은 있었지만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이파가 끄덕거렸다.
“그래. 애송이 사자 덕에 의도치 않은 깨달음을 얻었지. 그나저나····”
별안간 자이파의 시선이 로난의 뒤편을 향했다.
에린이 시타의 등에 바짝 엎드린 채 고양이처럼 자이파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몸을 일으킨 아데샨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잿빛 눈동자가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좀 풀어주지 않겠나. 오금이 저릿거리는데.”
“앗. 너무 기척 없이 오셔서 저도 모르게 그만···오랜만이에요 자이파 님.”
아데샨이 미소지었다.
눈동자의 빛이 사그라졌다.
자이파를 내부에서부터 짓누르던 정신 장악이 잦아들었다.
몸이 가벼워진 것을 확인한 자이파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하여튼 적응이 안 되는 능력이군. 유능한 지휘관을 둬서 제국군은 좋겠어.”
“저걸 당하고 기절 안 한 댁도 만만치 않아. 북부에 있어야 할 양반이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쇼?”
로난이 칼자루를 톡톡 두드렸다.
원체 돌발 행동을 좋아하는 작자라서 방심할 수 없었다.
애초에 첫만남부터 인사를 하겠답시고 언월도를 휘두르지 않았던가.
자이파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 별 건 아니고…대화나 하러 왔다. 검성 결정전과 관련해서. 나는 이번에 출전하기로 했거든.”
“댁도 검성 타령이야? 됐수다. 나는 안 나가.”
“나랑 대화하다 보면 나가고 싶어질 거다.”
“대화라. 그거 입으로 하는 거 맞아?”
로난의 질문을 들은 자이파가 클클거렸다.
젊어져서 그런지 웃음소리가 경쾌했다.
그는 이제 언월도가 아닌 두 자루의 단창을 등에 메고 있었다.
마주보던 사람이 거의 동시에 웃음을 멈췄다.
“당연히 아니다.”
“그럴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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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찍 소리와 함께 사두 마차 한 대가 멈춰섰다.
투박한 오솔길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마차였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검푸른 머리카락의 소녀 한 명이 뛰쳐나왔다.
“와아아! 도착이다 도착!”
마차에서 내린 아리아가 방방 뛰었다.
평소라면 행동을 조신하게 하라는 주의가 들어왔을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잔소리를 담당하는 교사나 집사장은 모두 그랑시아 저택에 남아 있었으니까.
뒤따라서 하차한 이릴이 생글생글 웃었다.
“히히 우리 아리아 그렇게 신났어요?”
“응! 엄마 아빠랑 다 같이 와서 너무 좋아! 그런데 여기가 어디야?”
소박한 시골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늘어선 잡목들 마을을 굽이치는 좁다란 강과 말뚝에 묶인 채 떠있는 뗏목.
마을 개구쟁이들은 삼삼오오 몰려 나와 숭어 낚시를 하고 있었다.
아리아가 눈을 반짝거렸다.
“멋지다아····”
“에헤헤 그치?”
지극히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그랑시아 영지와 제도에서 보내는 아리아에게는 꽤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릴이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여기는 님버튼. 엄마의 고향이야.”
“고향? 태어나서 자란 곳?”
“응. 나랑 로난은 거의 평생을 여기서 살았거든.”
이릴이 주억거렸다.
이제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님버튼에서 보낸 나날은 아직도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선명했다.
그때 짐을 챙긴 슐리펜이 마지막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여기는···”
쉿.
님버튼을 둘러보던 그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검지를 그의 입술 앞에 가져다댄 이릴이 히죽 미소지었다.
“오늘은 그냥 저를 따라오세요.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