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52. 저희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4)
#A52
【역겨운 미물 냄새…여기가 어디지…?】
으스스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대공의 가슴을 찢고 나온 눈동자는 뒤룩거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에르제베트를 비롯한 일행이 얼어붙었다.
어느새 기립한 대공의 몸은 완전히 그림자에 잠식당한 채였다.
“하아···하아아···!”
가빠진 숨소리만이 침묵 속에 울려 퍼졌다.
누구도 움직이거나 입을 열지 못했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저건 위험하다고.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황금빛 화염이 대공과 접촉하려는 순간이었다.
【빛…불쾌하다.】
구르던 눈동자가 정지했다.
동공이 고양이처럼 가늘게 좁혀지더니 붉은 안광이 터져 나왔다.
손아귀 형상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솟구치며 대공의 앞을 가로막았다.
콰아아아!
손바닥에 직격한 화염의 파도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 말도 안 돼!”
에르제베트가 경악했다.
상성을 무시하는 내구도였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손아귀는 태양의 힘을 머금은 불 속에서도 곧바로 소멸하지 않았다.
수백 갈래로 찢어진 불길은 자연스레 서가를 향해 쏟아졌다.
[갸아아아아! 살려줘!]
[타 탑주! 어떻게 좀 해 보시오!]
꼼짝없이 소사하게 생긴 금서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에르제베트는 황급히 양팔을 위로 쳐들었다.
수백 개의 불줄기가 일제히 위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콰광!
쾅!
천장과 충돌한 불줄기들이 폭발했다.
“타 탑주님! 괜찮아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시온이 외쳤다.
에르제베트는 거친 숨만 몰아쉴 뿐 대답하지 않았다.
봄비처럼 가느다란 불티가 도서관을 수놓고 있었다.
“후우···후우····”
그녀의 시선은 대공에게 고정된 채였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손아귀는 소멸했지만 대공은 여전히 건재했다.
오필리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큰일이네. 가장 우려하던 일이····”
경직된 얼굴에서 예전의 나긋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혈기가 발치로 모여들고 있었다.
심호흡한 에르제베트가 그녀에게 질문했다.
“오필리아 양. 대공님이···후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상처가 곪아 터진 거야. 하필이면 지금···이제 더는 방법이 없어.”
“방법이 없다니요? 설마···”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에르제베트가 말을 잇던 와중이었다.
대공의 몸이 거품처럼 끓어오르더니 그림자로 이루어진 손아귀 두 개가 그녀들을 향해 쏘아졌다.
【피를…내놔라.】
대공이 그르렁거렸다.
시야를 온통 가릴 정도로 거대한 손바닥에는 붉은 눈동자 수십 개가 박혀 있었다.
검붉은 홍채 위로 에르제베트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윽···!”
“내 이럴 줄 알았지! 트핫!”
거의 동시에 브라움이 도약했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두 여인의 앞을 가로막은 그가 방패를 휘둘렀다.
콰앙!
쩌렁쩌렁한 타격음과 함께 손아귀가 튕겨 나갔다.
바닥에 처박힌 손은 눈사람처럼 녹아내리며 시커먼 웅덩이를 만들었다.
“브라움 님!”
“으하하! 짜릿짜릿 하구만! 마저들 대화 나누시게나!”
브라움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대지를 연상케 하는 황색의 빛무리가 대방패와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꼭 바위로 이루어진 갑옷을 입은 걱 같았다.
방어력을 폭발적으로 향상시켜 주는 브라움의 오러였다.
【······!】
불현듯 대공의 몸이 다시금 들끓었다.
그림자가 고여 만들어진 웅덩이에서 세 개의 팔이 새롭게 솟아올랐다.
브라움은 잠깐의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다시 전투에 돌입했다.
눈빛으로 감사를 표한 오필리아가 말을 이었다.
“고마워 브라움. 설명을 계속하자면···저건 이미 대공님이 아니야.”
“뭐 뭐라고요?”
“진작에 꺼졌어야 할 목숨을 부지시킨 대가지. 대공님이 지난 20년간 낫기 위해 소모한 힘은 사라지지 않고 아벨이 낸 상처 속에 축적되어 왔어. 지금까지는 내 혈마법으로 어떻게든 억누르고 있었는데…방금 폭발의 충격으로 그게 한 번에 터진 것 같아.”
“무슨···! 자신의 힘을 되찾았을 뿐인데 왜 저런 모습이 된 거죠?”
“흐르지 못하고 상처 안에서 썩어버렸으니까. 더군다나 지금 대공님의 정신력으로는 갑작스럽게 늘어난 힘을 통제할 수 없어. 오염된 힘에 완전히 잠식당했으니 이제 폭주만이 남았을 뿐이야.”
고통에 몸부림치며 옛 힘을 되찾기 위해 날뛰는 괴물.
그것이 지금의 그림자 대공이었다.
악의로 이글거리는 그림자 피를 갈구하는 눈동자에서 이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이제···고칠 방법은 없는 건가요? 다른 몸으로 갈아타는 것도?”
“······응.”
오필리아가 끄덕거렸다.
선홍색 눈동자는 슬픔으로 젖어 있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허무한 반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에르제베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파고든 자리에서 피가 흘렀다.
밤의 세계를 호령하던 자의 최후라기에는 너무나도 비참했다.
‘어떻게 이런 비극이····’
하지만 상심에 빠져 있을 여유는 없었다.
사실 지금 동정받아야 할 것은 그림자 대공이 아닌 자신들일지도 모른다.
범람하는 살기에 몸이 아플 지경이었다.
브라움은 어느새 다섯 개로 늘어난 손아귀를 동시에 막아내고 있었다.
“와하핫! 미안하지만 오래는 못 버틸 것 같네. 어떻게 안 되겠나!”
그 장렬한 모습이 폭풍우 치는 밤바다에 솟아난 등대 같았다.
대방패 위에는 기존에 없던 상흔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채였다.
브라움은 대공의 공격을 방어하는 내내 웃음을 터트렸다.
다만 그것은 즐거워서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었다.
에르제베트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알았어요. 제가 할게요.”
“응. 같이 하자.”
결단은 내려졌다.
두 여인은 그림자 대공에게 시선을 맞춘 채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노랫말 같은 영창은 전투의 소란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인근의 마나가 크게 소용돌이치며 모여들고 있었다.
“저 저도 도울게요!”
바짝 얼어 있던 시온도 용기를 내서 다가왔다.
이중창은 삼중창이 되어 울려 퍼졌다.
누구도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들은 이미 암묵적인 합의를 마친 채였다.
경의를 담아서 일격에.
가능하면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마침내 주문을 완성한 에르제베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토네이도 플레임 부스터. 프로미넌스 스트림.
“토네이도! 파이어 스트림!”
시온이 그 뒤를 따랐다.
가장 먼저 발현된 것은 에르제베트와 시온의 바람 마법이었다.
콰콰콰콰콰!
두 개의 회오리가 그림자 대공의 양 옆에서 치솟았다.
【음?】
대공이 당혹성을 흘렸다.
바람은 나무도 통째로 뽑아버릴 것처럼 거칠었다.
회오리에 휩쓸린 몸이 공중에 뜨려 했지만 대공은 바닥에 양쪽 손을 박으며 버텨냈다.
엄청난 완력.
하지만 에르제베트의 계획을 눈치챘더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판단이었다.
에르제베트가 외쳤다.
“시온!”
“네! 탑주님!”
시온이 회답했다.
한때 둘이서 합을 맞춰 온 기술이었다.
짝!
그들이 동시에 손뼉을 쳤다.
좌우에서 따로따로 놀던 회오리가 대공을 중심점으로 삼아 하나로 합쳐졌다.
두 배로 강해진 회오리바람이 그를 덮쳤다.
【허튼 짓을.】
허억! 한 숨 돌렸군!
대공이 으르렁거렸다.
흐물흐물하게 변한 그의 몸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브라움에게 퍼부어지던 맹공이 잦아들었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손아귀는 창칼로 모습을 바꾸어 두 여인을 공격했다.
【거슬린다…!】
허나 다음 마법은 이미 시전되어 있었다.
대공의 발밑에 거대한 마법진이 형성되었다.
기하학적인 문양의 집합 속에는 에르제베트가 개발한 최강의 마법이 각인되어 있었다.
대공을 응시하던 그녀가 입술을 짓씹었다.
미안해요. 대공님.
콰아아아아아아!!!
폭발하듯 솟구쳐 오른 화마가 그림자 대공을 집어삼켰다.
찬란한 황금빛에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태양의 힘과 더불어 위력을 증폭시키는 에르제베트의 오러를 머금은 불이었다.
【크하아아아악?!】
처절한 괴성이 어둠을 찢었다.
대공의 몸은 불꽃의 급류 속에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어서 시온의 파이어 스트림이 같은 자리에서 터져 나왔다.
에르제베트의 프로미넌스 스트림에는 훨씬 못 미쳤지만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두 개의 겁화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솟구쳤다.
…….내가 당신을 기억할게. 요제프.
마지막은 오필리아였다.
대공의 이름을 뇌까린 그녀가 허공에 수인을 맺었다.
요동치는 대공의 몸 밖으로 피가 왈칵거리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몸에서 빠져나온 피는 다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불에 타서 사라졌다.
영구적인 소멸의 촉진.
점점 작아지던 몸뚱어리가 미라처럼 변해가던 무렵이었다.
【키에에에엑!!】
뭐?
대공의 몸이 발악하듯 부풀었다.
기어코 불길을 찢고 나온 그림자 한 가닥이 서가에 적중했다.
정확히는 진열되어 있는 금서 중 하나에.
피격당한 금서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억! 놔라!]
그 청은 받아지지 않았다.
촉수같은 그림자는 그대로 아가리를 벌려 금서를 삼켰다.
불 속에서 타오르던 대공의 몸이 아주 약간 커졌다.
소멸하기 직전 상태이던 몸이.
잠깐 설마!
에르제베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무슨 조치를 취하기도 전이었다.
그림자 촉수 수십 가닥이 화염 속에서 튀어나왔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시온이 경악했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촉수 중 사람을 노리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금서들의 비명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이 이 놈이 지금 뭐 하는 짓이냐!]
[탑주! 탑주!!]
금서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림자에 삼켜졌다.
한 권을 흡수할 때마다 대공의 몸은 점점 원형을 되찾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법의 지속 시간이 끝났다.
회오리가 멈췄다.
빠르게 잦아드는 불길 속에서 거대한 무정형의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오오오!!】
어둠이 포효했다.
괴이한 음성은 전의를 상실시키는 위력이 있었다.
기존의 수십 배로 증폭된 덩치는 한 눈에 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더는 대공의 형체가 남아 있지 않았다.
아…아아아…!
어둠은 거대한 연체동물처럼 도서관 곳곳에 촉수를 뻗쳤다.
촉수가 뻗어 나갈 때마다 금서들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사라져 가고 있었다.
절망이 형상화되면 저런 모습일까.
침묵하던 에르제베트가 입을 뗐다.
“······시온. 도망쳐요.”
“네 네에?”
“어서요.
마탑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대피시키고 아이레를 불러요. 성격상 제법 멀리 갔을 텐데 그래도 꼭 찾아와 주세요. 잘 할수 있죠?
에르제베트의 시선은 어둠에 머물러 있었다.
새로운 마법의 주문이 빠르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에 반응하듯 화염이 도서관 곳곳에서 솟구치며 대공을 공격하고 있었지만 금서를 집어 삼키는 어둠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 그럴 수는 없어요. 어떻게 저만···! 같이 싸우게 해 주세요!”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오필리아 양이나 브라움 님이라면 모를까 당신 실력으로는 턱도 없어요.
하지만…헉.
뭐라 말하려던 시온이 헛숨을 들이켰다.
어느새 몸을 돌린 에르제베트가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얼굴을 바짝 들이댄 에르제베트가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왜 속상하게 자꾸 고집을 부리는 거니! 언니 말 안 들을래?!”
“타 탑주님…?
“어서 가! 너까지 뺏겨 버리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없어진다고! 약자를 보호하는 게 귀족의 의무인 것처럼 동생을 지키는 건 원래 언니의 역할이야!
에르제베트는 그 말과 함께 시온을 밀쳤다.
아예 반말을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스스로를 언니라 칭하는 것도.
휘청거리던 시온이 균형을 잡았다.
소매로 눈가를 닦은 그녀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나는…알았어…….갈게요.
그래야 착한 아이죠. 뒤돌아보지 마세요.
에르제베트가 미소지었다.
언제 소리를 질렀냐는 것처럼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등을 돌려 달아나던 시온이 외쳤다.
죽지 마! 언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온은 나머지 세 사람의 보호를 받으며 무사히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다시 찾아온 대치 상황.
오필리아가 물었다.
저 아이도 아칼루시아였어?
그럴 리가요. 아칼루시아에 저런 덜렁이는 없답니다. 그랑시아의 경박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거에요.
하지만 아주 사이가 좋아 보이던걸.
흥 그야 당연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