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50. 저희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2)
#A50
“그 그 그림자 대공님이라고요?!”
시온이 기겁했다.
팔자에도 없는 욕을 먹은 그녀는 바짝 겁을 먹고 움츠려든 채였다.
이스란 폰 바르샤바.
세상이 부르기를 그림자 대공.
밤의 세계를 다스리는 흡혈귀의 제왕이자 최후의 전쟁에도 참여한 공로자.
오르세만큼 인지도가 높지는 않았으나 제국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법한 이름이었다.
시온을 응시하던 오필리아가 인사를 건넸다.
“머리카락 색이 눈에 익다 싶었는데···아가씨는 검성의 동생이구나. 반가워.”
“아아 이제는 전대 검성이지만요. 만나뵙게 되서 영광이에요 오필리아 님.”
“나를···알아?”
“그럼요. 고대 혈마법을 거의 다 복원하셨잖아요. 그리고 오라버니가 가끔 이야기해 주셨어요. 친구 중에 대단한 흡혈귀가 있다면서.”
“슐리펜도 나를 친구라 생각해 주는구나···고맙네.”
오필리아가 웃었다.
대공과 에르제베트 사이에는 여전히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한참을 벙쪄 있던 에르제베트가 겨우겨우 입을 똈다.
“죽여···달라고요?”
“그래.”
“갑자기 맥락도 없이···?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몹시 당황스러운 부탁이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는 반가움마저 잊혀질 정도로.
대공이 주억거렸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온전한 몸이 아니다. 벌써 스무 해가 넘는 시간이 지났건만 여전히···”
“잠깐. 대공님···여기는 너무 듣는 귀가 많아.”
오필리아가 대공의 말을 잘랐다.
과연 주변이 부산스러웠다.
“메이지 시온 괜찮나?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그릉?”
“잠깐. 저 덩치 큰 남자 북벽 기사단장 브라움 아니야?”
시온의 비명소리에 놀란 마법사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샐러맨더 낸시도 불꽃으로 이루어진 눈을 깜빡거리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개방된 장소에서 나눌 만한 대화는 아닌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에르제베트가 앞장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으음 일단 따라오세요. 조용하게 대화를 나눌 만한 공간이 있어요.”
****
그들은 여명 마탑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여섯 개의 층을 합쳐서 만들어진 지식의 전당은 어떤 마탑에도 꿇리지 않는 명물이었다.
에르제베트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 외진 구석으로 이동했다.
채광이 잘 되지 않아서 빛에 민감한 고서들을 보관하는 구역이었다.
책장에서 ‘뒷걸음질’이라는 제목의 책을 뽑아든 그녀가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들어오세요. 두리번거리지 말고 자연스럽게.”
“오오 왜 도서관으로 오나 했더니!”
에르제베트의 목소리는 책장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만질 수 있던 책장은 실체가 없는 껍데기로 변해 있었다.
그녀를 따라 들어가자 길고 어두운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브라움이 콧김을 뿜으며 감탄했다.
“여우가 엉덩이를 핥는 것 같군. 이렇게 신기할 수가!”
“···저급한 표현은 삼가주세요. 여기는 여명 마탑에서도 가장 신성한 장소라고요.”
“하하 그러지. 워낙에 거친 친구들과 구르다 보니 그만 물들었나 보군. 내 사과함세!”
“목소리도 조금만 낮추시구요. 정말이지.”
에르제베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브라움은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였다.
오필리아나 대공처럼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닌 주제에 참 한결 같은 사람이었다.
복도를 따라 걸은지 머지않아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이건···대단하네.”
“아름답군. 바르샤바 성의 서재에 못지 않아.”
오필리아가 나지막이 탄성했다.
여명 마탑의 도서관을 봤을 때보다 격한 반응이었다.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그림자 대공 또한 눈썹을 치켜뜬 채 흥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줄지어 늘어선 수백 개의 서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책들은 모두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또 하나의 도서관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으흐훙 대단하죠? 에리 언니가 관리하기 시작한 뒤로 훨씬 더 발전했다구요.”
“시온.”
“아차차 탑주. 언니가 아니라 탑주님이에요. 네!”
시온이 혀를 빼물었다.
그들은 잠시 목적도 잊은 채 멈춰서 비밀 도서관을 감상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인공 태양이 천장에서 어스름한 빛을 흘리는 중이었다.
어두운 녹색을 띠는 햇살은 자아를 가진 금서들의 안정과 수면을 유도하는 효과가 있었다.
“금서는 기본적으로 전부 잠들어 있어요. 필요할 때만 깨워서 열람하는 방식을 채택했죠. 관리 면에서도 종이의 보관 면에서도 이 편이 낫더라고요.”
“하긴···여명은 예전에 금서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지.”
오필리아가 끄덕였다.
적법한 조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전대 탑주가 금서에 홀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마탑 전체가 멸망할 뻔했던 과거가 있었으니.
문득 좌우를 훑던 그녀의 시선이 정지했다.
인공 태양 바로 아래에 세 개의 기둥이 솟아 있었다.
비어 있는 하나를 제외한 두 개의 기둥의 꼭대기에는 큼직한 책이 각각 한 권씩 놓여 있었다.
“저건···!”
오필리아의 눈이 커졌다.
두 권 모두 아는 책이었지만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표지가 새카만 책을 가리킨 그녀가 말을 이었다.
“······파괴의 바쥬라. 원본이야?”
“네. 십여년 쯤 전에 아셀 님이 반납하셨어요. 겨울의 마녀는 떠났지만 그 힘은 여전히 건재해요.”
본래 여명 마탑이 보관하던 책이었다.
아셀은 얼음 마법을 완벽하게 마스터한 뒤 바쥬라를 반납했다.
겨울의 마녀.
최고위 냉기 정령 이진느는 수백 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되어 정령계로 돌아갔다.
“그렇구나···잘 됐네.”
“사실 말이 떠난 거지 어지간하면 아셀 님의 곁에서 머문다고 들었어요.
솜씨 좋은 정령사가 계약해버리면 좋을 텐데.”
“그러게···레란트는 어디서 구한 거야?”
오필리아의 손가락이 옆으로 이동했다.
바쥬라와 정반대로 온통 새하얀 책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삼대 금서에 포함되는 지혜의 레란트였다.
“아 엘시아 님이 기증해 주셨어요. 자기는 이제 필요 없으시다면서. 정말 뜻밖의 행운이었죠.”
“카인의 금서를 하나 빼고 다 모으다니···정말 대단하네.”
오필리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구원자 카인이 손수 집필한 책 세 권은 그 위험도만큼이나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명저였다.
운이 좋았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에르제베트의 능력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엘시아라는 이름을 곱씹던 그녀가 혼잣말했다.
“그립네···알리브리헤 할아버지도 잘 지내겠지····”
오필리아가 잠시 추억에 잠겼다.
두 사람을 못 본지도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두 대간부와 친해진 것은 전쟁으로 파괴된 세상을 복구하던 무렵이었다.
듣자하니 알리브리헤는 여전히 용의 도시에 머무르고 있다던데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대공의 문제를 정상적으로 해결해야 가능하겠지만.
불현듯 멀지 않은 곳에서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라? 탑주님?”
동시에 바닥에서 웬 소녀의 상반신이 불쑥 솟아났다.
오렌지색 단발머리가 상큼한 느낌을 주었다.
화들짝 놀란 브라움이 뒷걸음질쳤다.
“흐억! 깜짝이야!”
“순찰 중이었군요. 아이레.”
에르제베트가 미소지었다.
바닥에서 빠져나온 소녀가 다섯 사람을 마주보고 섰다.
공중에 둥실둥실 떠 있는 몸이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하고 있었다.
머나먼 과거 사란테에게 봉인당한 정령.
여명 마탑의 사서 아이레였다.
“그분들은?”
“제 손님이에요. 지금 다른 이용자는 없죠?”
“네. 그렇기는 한데···엄청난 거물들이 찾아오셨네요.”
아이레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 역시 어디가서 꿇리지 않는 고위 정령이었지만 오늘의 방문자들은 격이 달랐다.
고대 혈마법의 복원자와 그림자 대공이라니.
북벽 기사단장은 초라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아무도 없다니 다행이네요. 궤짝을 좀 쓰려구요.
“아아 진지한 이야기구나. 저는 그럼 가 볼게요. 순찰도 마침 끝났고.”
“고마워요. 늘 고생 많아요.”
사람들에게 인사한 아이레가 천장 속으로 사라졌다.
승강기를 타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는 그녀는 여전히 여명 마탑의 유일한 사서였다.
에르제베트는 도서관 한복판에 세워진 별실로 일행을 안내했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외부의 잡음과 기척이 사그라졌다.
“소리가···!”
“흐흥 최소 열 종류 이상의 차단 마법으로 보호받는 장소에요. 다른 차원이라 봐도 무방하달까요?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에는 이만한 곳도 드물죠.”
에르제베트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궤짝이라 불리우는 이 별실은 원래 금서들이 폭주할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진 비상 대피소였다.
사실 탑주의 방으로 가도 됐었지만 여기를 꼭 구경시켜주고 싶었다.
비밀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만들어낸 공간이었으니까.
“확실히 괜찮군.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대공도 만족한 듯 주억거렸다.
여기서라면 무슨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로브를 벗은 그가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긴 말은 필요 없다. 직접 봐라.”
“에엑?!”
뭐라 말릴 새도 없었다.
셔츠의 단추가 다 풀리자 새하얀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화들짝 놀란 시온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꺅! 가 갑자기 뭐 하는 짓이에요?”
“세상에 이건···!”
에르제베트가 당혹성을 흘렸다.
남자의 몸을 보는 것은 로난을 치료할 때 이후 처음이었지만 비단 그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대공의 상반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흉측한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그 전쟁때 당한 거군요.”
“그래. 스무 해동안 곪고 있지. 그날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온전한 휴식을 취해본 적이 없다.”
대공이 끄덕거렸다.
칼날이 긋고 지나간 창상이 온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수십 토막이 난 살덩이들을 아교로 이어 붙이면 이런 모습이 될 것 같았다.
상처는 하나같이 낫지 않고 검게 썩어든 채였는데 자세히 보고 있자면 꼭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것도 있었다.
이런 끔찍한 상처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에르제베트가 말했다.
“하지만 교주···그러니까 아벨은 이미 죽었잖아요?”
“이미 입은 상처와는 무관한 모양이더군. 남아 있는 선혈의 정수로 어찌어찌 버티고는 있다만 슬슬 한계가 찾아오고 있다. 내가 왜 빌어먹을 애새끼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나?”
대공이 이를 악물었다.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은 자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원래의 외모를 되찾기 위해서는 힘을 모아야 하는데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유지하는 행위에 대부분의 기력이 소모되고 있었다.
“더는 버틸 수 없다. 이 몸은 글렀어.”
“왜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구시는 거에요? 맞아. 예전에 구원자 님도 아벨에게 상처를 입었지만 완치되셨었잖아요. 먼저 로난 님을 찾아가 보시면····”
“이미 다녀왔다. 치료를 위해서는 아벨의 피가 필요하지만 네 말마따나 죽고 없지. 시체라도 남아 있으면 뭐라도 해보련만 로난 녀석의 말을 들어보니 빛으로 분해되어 소멸했다 하더군. 남은 선택지는 네가 나를 불살라 주는 것뿐이다.”
“그런···!”
에르제베트가 입을 틀어막았다.
도저히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림자 대공의 죽음은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처럼 숙명적이었다.
‘전쟁도 끝났는데 이런 비극이 벌어지다니. 세상을 구한 영웅 중 한 명인데.’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대공과의 인연은 별로 없었지만 세상을 구하기 위해 헌신한 자가 이런 결말을 맞는 것이 너무 비극적이었다.
그래도 이게 최선이라면 내가 하는 수밖에.
간신히 눈물을 삼킨 그녀가 요청을 승낙하려던 차였다.
파아아아···!
별안간 대공의 손바닥 위로 붉은 빛구슬 하나가 떠올랐다.
“아쉽지만 이 몸은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네?”
“다시 시작한다고 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새싹을 피울 만큼의 정수는 모았거든···표정이 왜 그러지? 밤의 일족에 대해 잘 모르나?”
대공이 눈썹을 으쓱였다.
미간을 구기고 있던 에르제베트가 도끼눈을 치켜떴다.
“······진짜로 돌아가시는 건 줄 알았잖아요.”
“내 동생이 목숨을 맡기고 전사했는데 이렇게 갈 수는 없지.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다.”
“그런 부탁이면 다른 곳에 가지 왜 여기로 오신 거에요? 불은 드래곤도 뿜을 수 있잖아요.”
“용의 불은 아프거든. 그건 정말로 맞을 게 못 된다.”
“아 진짜! 뭐에요 그게?!”
참다 못한 에르제베트가 빽 소리를 질렀다.
어깨 위로 피어난 검보랏빛 마나가 불길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시온은 오필리아를 끌어안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대공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아찔함은 데여 본 자만 알지. 특히나 화룡 일족의 불은 역겨울 정도로 고통스럽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야.”
“중요하긴 뭐가 중요해요! 어쩐지 다른 두 분의 표정이 가볍다 싶더라니 고작 그런 이유로 저를 찾아오신 거라면···!”
“고통의 차이를 제외하더라도 중대 사안이다. 네 말대로 용의 화염도 나를 죽일 수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 일대는 멸망할 테니까.”
“······뭐라고요?”
“말 그대로다.”
대공의 표정은 여전히 농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검지로 자신의 심장을 짚은 대공이 말을 이었다.
“나는 다른 방법으로 죽어서는 안 된다. 오직 여명의 마법사만이 이 몸에 온전한 안식을 줄 수 있어. 나는 너를 찾아온 것이다. 에르제베트 데 아칼루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