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48. 가정의 수호자(7)
#A48
“그래···복수를 위해서였네. 강령술을 다룬다고 무시하던 버러지들을···그륵 모조리 시체 밥으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지···놈들은 필레온 아카데미에 재학하던 당시부터 나를 비웃었다····”
“그렇구나. 기록을 보니까 아주 많은 언데드를 솜씨 좋게 다루던데 특별한 비결이 있었을까? 세간에 알려진 강령술과는 차이점이 몇 가지 보여서.”
“으흐흐···당연하지···이 몸의 마법이 어디 보통 마법인가? 50년이 넘는 세월을 허투루 보낸 게 아니야.”
“대단하다. 그럼 전부 말해줄래? 하나도 빠짐없이.”
아데샨이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앞에는 사지가 잘린 키어사지가 의자에 묶여 있었다.
침을 질질 흘리며 웃는 그의 눈동자는 아데샨과 같은 잿빛으로 물든 채였다.
“그러지······으르륵 별로 어려울 것도 없다네····”
키어사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줄줄 읊기 시작했다.
취조실 조명 아래 빛나는 얼굴이 제법 행복해 보였다.
군복을 입은 제국군 장교들이 유리창 너머에서 자백 내용을 받아적고 있었다.
“정말···몇 번을 봐도 오싹합니다. 대장군님의 능력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힘이지. 그림자의 마나를 타고난 사람이 저 분이라 다행이야.”
여군 중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자의 마나에서 기인한 정신 장악은 어떤 마법으로도 흉내낼 수 없었다.
악당의 손에 넘어갔다면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능력은 다행히도 아데샨이라는 선인에 의해서 올바르게 활용되고 있었다.
“···대장군님을 볼 때마다 제 가슴이 뛰는 것도 저 능력 때문이 아닌가 싶슴다.”
옆에 있던 소위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아데샨의 옆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새하얀 피부와 높다란 콧날.
재를 품고 있는 깊은 눈동자.
벌써 아이가 둘이나 있는 어머니였지만 비밀리에 진행되는 제국 여군 인기 투표에서 3위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화들짝 놀란 중위가 눈썹을 치켜떴다.
“얘가 큰일 날 소리를 하네. 너 대장군님 남편이 누군지 몰라?”
“왜 모르겠습니까. 제 우상 1호인데. 거인을 베어낸 영웅이신 로난 님이잖슴까.”
“아는 놈이 잘도 그런 생각을 한다. 너 같은 졸병은 귤 껍질로도 안 보일걸.”
“꿈 꾸는 것 정도는 봐주십쇼. 솔직히 중위님도 슐리펜 님이나 로난 님이 면회차 방문했을 때 넋 놓고 쳐다봤지 않슴까. 자기도 잘생긴 거 좋아하면서.”
“···시끄러워. 너 그거 상관 모독죄다?”
두 사람이 티격거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속기를 완벽히 해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키어사지와 마주앉아 있던 아데샨이 몸을 일으켰다.
“이크 나오신다.”
그들은 황급히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이윽고 아데샨이 취조실 밖으로 나왔다.
각 잡힌 자세를 잡은 중위가 경례를 보냈다.
“충성.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귀관들도 고생 많았어.”
“아닙니다. 취조는 다 끝나신 겁니까?”
“응. 더는 나올 게 없는 것 같네. 덕분에 좋은 정보를 많이 얻었어.”
아데샨이 눈웃음쳤다.
그녀는 정신 장악을 사용해서 키어사지의 머릿속에 있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뽑아내 버렸다.
마법적 지식이나 흉계는 물론 부모에게도 미처 말하지 못할 구구절절 추잡한 인생사까지.
이제 키어사지라는 인간은 한 권의 책이 되어서 서가를 장식할 터였다.
“아 그리고 미리 말했던 것처럼 오늘은 바로 퇴근할게.”
아데샨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알겠습니다. 저건 어떻게 할까요?”
중위가 키어사지를 향해 눈짓했다.
그는 아직도 정신 장악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실없는 웃음을 흘리는 중이었다.
유리창 너머를 슬쩍 돌아본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처분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잿빛 눈동자에서는 일말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끄덕거린 중위가 검을 뽑아들었다.
“알겠습니다.”
“고마워. 협조를 잘 해줘서 굳이 로돌란에 보낼 필요는 없을 것 같더라고.”
원래대로라면 오랫동안 고통을 주려 했지만 도중에 생각이 바뀌었다.
워낙에 양질의 정보를 제공해주기도 했고 덕분에 남편이 아이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가족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녀는 나름의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왜 사람들은 평화의 가치를 모르는 걸까.”
아데샨이 혼잣말했다.
네뷸라 클라지에가 사라졌음에도 군대는 존재한다.
넓은 별 어디선가는 전쟁이 벌어지고 위령비가 세워진다.
코트를 어깨 위에 걸친 그녀가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키어사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깐만···여기는···? 커억!”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렸지만 유언을 남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칼 휘두르는 소리와 함께 침묵이 찾아왔다.
아데샨은 본부 건물을 나가는 내내 옷에 피가 묻었는지를 확인했다.
솔직히 란세가 자신이 아닌 로난을 따라간다 했을 때 조금은 안심했었다.
****
필레온 아카데미.
갈레리온 관에 위치한 무예과 강의실.
“우와····”
“란세네 아버지 최고다····”
학생들의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교실 앞에 떠오른 영상에 집중된 채였다.
영상 속에서는 로난과 아셀 오르세가 언데드 군단과 싸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사라져라! 벌레 같은 놈들!】
영상의 절정부는 오르세가 브레스를 뿜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아셀의 염력으로 무너져 내리는 지반 마룡의 불 속에서 타오르는 언데드 군세의 모습은 소년소녀들의 가슴 속에도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설마 그 마룡 오르세와도 친한 사이였다니···!”
“옆에 떠 있는건 대마법사 아셀 님이잖아. 고향 친구라 들었는데 지금도 같이 다니시는구나.”
학생들은 로난의 능력과 더불어 그의 인맥에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본인이 세상을 구한 영웅이라 그런지 벗들조차 역사책에 나올 법한 위인들이었다.
함께 영상을 시청하던 란세가 헛구역질했다.
“우웁.”
“왜 그러니 란세?”
“아닙니다. 잠깐 속이 안 좋아서.”
란세가 입가를 닦았다.
하마터면 정말로 올릴 뻔했다.
사실 그가 발표에 사용하고 있는 것은 교묘하게 짜여진 편집본이었다.
세치카가 자신의 시점에서 촬영한 영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본은 절대. 절대로 못 보여줘.’
란세가 굵은 침을 삼켰다.
그는 이번 일을 계기로 로난을 정말 존경하게 되었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원본이 30초라도 상영되는 순간 여기 모인 학생들은 모조리 구토를 하거나 울부짖으면서 뛰쳐나갈 터였다.
“아빠···존경해요 진짜.”
란세가 중얼거렸다.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피를 뒤집어 쓰면서 싸울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느새 영상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마무리를 짓는 것은 역시나 로난이었다.
드높은 상공.
오르세의 등 위에 있던 로난이 지상으로 강하했다.
촤아아아아악!!
전장 한복판에 그려지는 붉은 초승달의 자태에 학생들은 완전히 미쳐 버렸다.
“캬아아아악! 멋져!”
“내가 마지막으로 뵜을 때는 속옷 차림으로 화분에 물 주고 계셨는데···정말 같은 사람이야?”
“씨발 저거지! 저 정도는 되어야 영웅이지!”
“방금 욕한 놈 앞으로 나와라. 그래 너 말이다 센센.”
사방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로난의 직업 현장을 찍어 달라 부탁했던 윌럼프는 아예 책상 위에 올라 헤드스핀을 돌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대륙을 통일했다 선언해도 이런 반응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란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마무리 멘트를 읊었다.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번 과제를 수행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사흘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마땅한 직업이 없는 줄 알았죠. 물론 불만은 없었습니다. 마상 결투에서 우승을 해도 평생 놀고 먹는 상금을 받는 마당에 세상을 구했으면 좀 놀아도 되잖아요?”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란세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직업은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그림자를 몰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당신께서는 혹시라도 제가 위험해질까봐 직업을 숨기고 계셨던 거였습니다. 영웅 로난은 여전히 영웅이었습니다. 다만 예전과는 다르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을 뿐이죠····”
란세가 말꼬리를 끌었다.
비위가 상해서 구역질을 하기는 했지만 그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었다.
이 세상은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피를 손에 묻혀야 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피를 묻히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평화는 존속될 수 있었다.
그게 이번 과제를 수행하며 란세가 얻은 깨달음이었다.
잠시 다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저는 그런 아버지가 누구보다 자랑스럽습니다. 이상으로 발표를 마칩니다.”
“와아아아아아!!!”
다시 한 번 갈채가 쏟아졌다.
터져 나온 환호성이 갈레리온 관을 쩌렁쩌렁 울렸다.
과제를 낸 교수 역시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박수를 치고 있었다.
“진심이에요.”
가만히 서 있던 란세가 혼자만 들리는 크기로 읊조렸다.
****
“다녀왔습니다.”
란세가 귀가한 것은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기숙사 제도를 차용하는 필레온이었지만 금요일 저녁과 주말까지는 집에 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석양이 거실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무도 없나?”
란세가 갸웃거렸다.
원래대로라면 에린이 발랄한 애교를 부리며 마중을 나와야 할 타이밍이었다.
이상하다.
모두 집에 있을 시간인데?
넥타이를 풀어헤친 란세가 안방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어서 와. 아들.”
“······어?”
란세가 얼어붙었다.
온몸의 털이 단번에 곤두섰다.
천천히 돌아본 자리에는 아데샨이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었다.
아직 군복 차림인 걸 보니 퇴근한 지 얼마 안된 것 같았다.
“어 엄마? 오늘은 일찍 들어오셨네요···?”
“그렇게 됐단다. 오늘은 기쁜 날이니까 가족 다같이 외식이라도 해야지.”
“···기쁜 날?”
“응. 나비로제 교관님께 소식 전해들었어. 발표를 아주 멋지게 해냈다면서? 우리 남편과 아들이 서로를 더 잘 알게 된 것 같아서 엄마는 너무 행복해.”
아데샨이 손바닥을 맞추며 미소지었다.
평소처럼 다정한 웃음이었지만 오늘은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란세가 가쁜 호흡을 내쉬던 찰나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오빠아아····”
“에 에린?!”
란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긴장한 나머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거대한 침대 한구석에 잠옷 차림의 여동생이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의식을 잃을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 도망쳐어····”
“너···!”
란세의 눈이 커졌다.
에린의 엉덩이 위에는 얼음을 감싼 보자기가 얹어져 있었다.
촉촉한 눈망울 아래로는 하염없이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 엉덩이에 감각이 없어····”
에린이 훌쩍거렸다.
짐작가는 사유는 하나뿐이었다.
불현듯 란세의 엉덩이뼈가 경고를 보내듯 욱신거렸다.
“히 히이익!”
“엄마도 이러고 싶지 않았단다. 하지만 딱 하나뿐인 규칙을 어겨서 어쩔 수 없었어. 그게 뭐였지 란세?”
“저 절대로···위험한 일은 하지 않는다. 생명과 직결된 행동이면 더더욱.”
“그래.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랬을까?”
“어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저는 아무것도···!”
겁에 질린 란세가 횡설수설하던 와중이었다.
아데샨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마법 주문이 각인된 어디선가 많이 본 구체.
빛이 반짝거리나 싶더니 허공에 영상이 떠올랐다.
– 우리가 안 가면 저 사람들은 진짜 죽잖아. 너는 세치카랑 여기 있어.
– 역시 나는 엉덩이가 큰 남자도 좋아.
– 에린도 데려가!
그것은 위에서 찍은 란세 일행의 모습이었다.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오르세의 등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이었다.
이걸 어떻게?
어디서?
란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허어어억···!”
“엄마가 얼마나 놀랬는지 아니? 하마터면 전군 사열을 하던 와중에 주저앉아서 울 뻔했어.”
“어 엄마. 그게 그러니까요····”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아들. 규칙은 이거 하나뿐이잖니.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만약. 만약에 너희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면···후우. 아니야 역시 이건 생각 안 할래.”
아데샨이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다.당시를 떠올리면 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군대에서 업무를 하던 와중 해당 마도구를 전달받았다.
만약 아셀이 보고를 조금만 더 늦게 해줬더라면 그녀는 크라티르에게 정신 장악을 걸어서라도 남부에 쫓아갔을 터였다.
불현듯 범인을 추리해낸 란세가 탄식하듯 외쳤다.
“서 설마 시타가···!”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아들.”
상황을 미루어 보건대 범인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꿈새밖에 없었다.
자신이 로난에게 걸었던 것과 같은 마법을 엄마가 시타에게 걸어 놨던 것이다.
‘어쩐지 갑자기 튀어나왔다 했더니 그런 거였나.’
원망스러운 마음이 고개를 쳐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딴 게 아니었다.
손을 쥐었다 편 아데샨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럼···규칙을 어긴 대가를 치뤄야겠지. 얼른 끝내고 다같이 밥 먹으러 가자.”
“자 잠깐만요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안단다. 그러니까 벌을 받는 거지. 아마 세치카도 지금쯤 마르야 이모한테 혼나고 있을 거야.”
“하한번만!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용돈 삭감도 외출 금지도 괜찮으니까! 제발!!
란세는 무릎을 꿇은 채 자비를 구걸했다.
에린이 쳐다보고 있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눈물콧물을 쏟으며 싹싹 비는 모습은 영웅의 아들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미안해 아들. 하지만 규칙은 지켜져야 해요. 명시된 대로 한 번에 끝날 테니까 안심하렴.”
“히익! 안 돼에에!”
그럼에도 기적은 일어나지 았다.
지금의 아데샨은 상냥한 어머니가 아닌 냉혹한 법의 수호자이자 집행자였다.
조금 전까지 흉악범을 심문하던.
아데샨이 그를 번쩍 안아듬과 동시에 안방의 문이 닫혔다.
“갸아아아아악-!!!”
취조실에서도 듣지 못한 처절한 비명이 저택에 울려 퍼졌다.
정원에서 호스로 물을 뿌리던 로난이 낄낄거렸다.
그는 나비로제가 찍어준 란세의 발표 영상을 시타와 함께 감상하고 있었다.
“그래. 나도 네가 자랑스럽다. 아들.”
“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