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45· 가정의 수호자(4) >
#A45
로난이 발도하자 붉은 초승달이 전장에 떠올랐다·
곡선을 그리던 칼날이 멈췄다· 위아래로 토막난 시체들이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빼곡한 망자의 군대 한복판에 작은 개활지가 나타났다·
“냄새가 씨발·”
로난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이래서 언데드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콧구멍을 타고 올라온 시체 썩은내가 뇌를 찌르는 것 같았다·
“죽었으면 곱게 자빠져서 잠이나 마저 잘 것이지, 왜 일어나서 지랄이야?”
욕을 안 할래야 안 할수가 없었다· 머지않아 격한 반응이 돌아왔다· 잠시 주춤거리던 인근의 언데드 무리가 괴성을 지르며 로난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악!”
“키오옥!”
“하···그래· 댁들도 깨고 싶어서 깬 게 아니겠지·”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안식을 취하다 말고 강제로 기상한 언데드 역시 피해자라는 것을·
진정한 악당은 이 시체들을 깨운 작자였다·
‘어딘가에 시체를 부리는 놈이 있다·’
의심이 아닌 확신이었다·
가끔 마력을 동반한 자연재해나 유적 때문에 언데드가 자연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지나치게 많은 머릿수와 같은 방향으로만 나아간다는 점이 그를 방증하고 있었다·
언데드와의 간격은 어느덧 열 걸음 정도로 좁혀진 채였다·
검을 한 바퀴 돌려잡은 로난이 읊조렸다·
“푹 주무쇼·”
그는 빠른 안식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전후좌우 모든 방향으로 검격이 뿌려졌다·
퍼석! 로난을 에워싸고 있던 망자들이 피보라를 일으키며 폭발했다·
진즉에 썩어버린 피는 거무칙칙한 갈색을 띠었다·
‘보통은 맨 뒤에 있었지·’
이럴 때는 머리를 먼저 따야 했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군단은 아셀과 오르세가 어떻게든 해줄 터였다·
강령술사의 위치를 어림잡은 로난이 앞으로 뛰쳐 나갔다· 시체가 썰리며 피가 튀었다· 극광을 머금은 성검 앞에서 언데드의 썩은 몸뚱어리는 아무런 저항 없이 잘려 나갔다·
[오랜만에 목을 축이네· 즐거운걸·]
“저번 주에 썰어 죽인 오크가 흘린 건 우유였냐?”
[그건 너무 적었잖아· 오늘은 좀 많이 줘·]
린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성검에 깃든 정령인 그녀는 모든 종류의 피를 사랑했다· 존엄한 드래곤의 피든, 부패할 대로 부패한 망자들의피든 상관하지 않았다·
로난이 실소했다·
“하여튼 욕심 많은 할머니라니까· 배 터져도 모른다·”
[바라던 바야· 그리고 한 번만 더 할머니라 부르면 칼집에 안 들어간 채로 엉덩이 만진다?]
언데드의 규모로 보아 갈증이 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하늘까지 치솟았던 선혈이 비가 되어 쏟아지고 있었다·
끈적한 핏물이 온몸을 흠뻑 적시고 있었지만 로난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은 늘 이렇게 싸워왔고, 자식들이 보는 앞이라고 그건 달라지지 않는다·
“역시 에린은 제국군 본부로 보낼 걸 그랬나····”
다만 사랑하는 딸래미의 정서에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염려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에린만이라도 아내에게 맡기는 건데·
물론 이제 와서 후회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기에 로난은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그어지는 참격· 연달아 울려 퍼지는 파륙음·
그치지 않고 쏟아지는 붉은 비가 로난이 지나온 자리를 적셨다·
****
“아, 아빠 대단하다····”
“세상에···!”
초승달을 본 세 사람이 경악했다·
이 높이에서 봤을 때 저 규모면 도대체 얼마나 넓게 검기를 퍼뜨린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세치카가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로, 로난 삼촌이 저 정도였어?”
자식인 란세와 에린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도저히 인간의 무위로 볼 수 없었다·
삼 년 전 납치 사건 당시 보여준 검술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끊임없이 피의 초승달을 만들어 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로난의 모습은 꼭 대양을 가로지르는 범선 같았다·
“아까부터 같은 방향으로만 가시는데, 뭘 하려는 거지?”
“하, 한번에 우두머리를 잡을 생각인 것 같아·”
더욱 대단한 것은 속도가 전혀 줄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언데드는 끊임없이 로난에게 덤벼들었지만 모두 반경 10m에 접근하기도 전에 온몸이
토막나며 산화했다·
저게 진짜 집에서 배나 긁던 아저씨라고?
그들이 벙찐 채 전대미문의 학살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갑자기 손가락을 뻗은 란세가 지상을 가리켰다·
“···잠깐· 아래 좀 봐·”
“뭐?”
세치카와 에린의 시선이 옮겨졌다·
란세의 검지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작은 마을 하나가 있었다·
근처에서는 짐수레를 끄는 피난민들이 필사적으로 언데드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이대로면 금방 따라잡힐 것 같은데·”
다만 피난민들의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언데드 군단은 넓게 포진하며 몰려오고 있었고, 로난에게 분쇄당하지
않은 병력은 여전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불행히도 마을과 피난민들은 그 경로에 포함된 채였다· 란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우리가 도와야 해·”
“하, 하지만 아빠가 여기서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데···엄마가 우리를 죽일 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란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한 번 반사적으로 엉덩이가 움츠러들었다·
길쭉한 팔로 행해지는 아데샨의 스윙은 말채찍을 연상케 했다·
엄마에게 볼기를 맞은 적은 코흘리개 시절에 딱 한 번 뿐이었지만, 그날의 트라우마는 아직도 란세의 엉덩이
뼈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었다·
이윽고 눈을 뜬 란세가 쥐어짜내듯 말했다·
“····우리가 안 가면 저 사람들은 진짜 죽잖아· 너는 세치카랑 여기 있어·”
“오, 오빠?”
“아벨! 이리 와!”
【뭐?】
란세가 입가에 손을 모아 외쳤다·
익숙한 이름을 들은 오르세가 움찔거렸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생각하던 찰나, 근처의 구름 속에서 온몸이 하얀 새 한마리가 튀어 나왔다·
“휘리릿!”
“좋아· 잘 따라왔구나·”
란세가 웃었다· 삼 년 전에 자신의 품에서 태어난 꿈새 아벨이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와 이름이 같은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였다·
“어? 시타는 아직도 북부에서 안 돌아온 거야?”
“휘루룻·”
“하긴 쉽게 끝날 일은 아니겠지· 세크리트 교수님이 직접 부르실 정도였으니·”
란세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린과 마찬가지로 피를 사랑하는 시타에게 있어서 이 전장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왔으면 좋아 죽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벙쪄 있던 오르세가 다시금 질문했다·
【이봐· 그 새는 뭐냐·】
“아, 소개할게요· 제 친구 아벨이에요·”
【친구라고?】
“네· 꿈새라는 환상종인데 엄청 유능해요· 오르세 님 정도는 아니지만 꽤 빠르고요·”
란세가 웃었다· 평소에 시타와 어울려 놀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비둘기만하던 아벨의 덩치는 고작 삼 년 만에사람을 태울 정도로 커져 있었다·
그래· 사람을 태울 정도로·
“그럼 다녀올게· 너희 둘은 여기서 기다려·”
“자, 잠깐, 란세!”
“오빠?!”
미래를 본 두 여자가 뭐라 외치려던 차였다·
오르세의 등에서 뛰어내린 란세가 아벨의 다리를 붙잡았다· 아벨은 기다렸다는 듯이 날개를 퍼덕이며 균형을잡았다·
“좋았어!”
“휘릿!”
미리 합을 맞춘 것처럼 완벽한 동작이었다·
란세가 아벨에게 다음으로 할 일을 속삭였다·
뚫어져라 그들을 응시하던 세치카가 혼잣말했다·
“······역시 나는 엉덩이가 큰 남자도 좋아·”
“세치카 언니?”
에린이 움찔거렸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세치카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에린은 꼭 여기서 기다려· 알겠지?”
“자, 잠깐만! 안 돼!”
에린이 옷깃을 쥐었지만 허사였다· 도움닫기를 한 그녀가 오르세의 등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강하를 준비하던 아벨의 반대쪽 다리를 멋지게 붙잡았다·
“휘요오옷?!”
무게를 이기지 못한 아벨이 휘청거렸다·
가엾은 꿈새의 입에서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란세의 눈동자가 왕방울만하게 커졌다·
“세, 세치카? 기다리라니까 여기는 왜 왔어?!”
“시끄러워! 너는 어떻게 된 애가 매번 혼자서만 해결하려 그러니? 한 번쯤은 친구를 믿어줄 수 없어?”
“하지만 위험하잖아! 저 숫자가 안 보여?”
“너 혼자 위험해지는 건 괜찮고?”
세치카가 으르렁거렸다·
하여튼 남자들의 객기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손만 자유로웠어도 한 방 먹여줬을텐데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벨은 휘청거리면서도 어찌어찌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때, 혼자 남아 있던 에린이 몸을 던졌다·
“에린만 두고 가지 마!”
【이봐· 멋대로 구는 것도 정도껏···】
오르세가 경고했지만 에린은 이미 뛰어내린 뒤였다·
그녀는 솜씨 좋게 제비를 돌며 아벨의 등 위에 안착했다·
란세나 세치카보다 훨씬 더 유연한 몸놀림은 잽싼 족제비를 연상케 했다·
“휘룩!”
“어?”
허나 문제는 아벨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점이었다· 깃털 덮인 몸이 훅 꺼졌다·
감당 못 할 무게를 짊어진 꿈새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캬아악! 라, 란세!”
처절한 비명이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날갯짓을 멈춘 오르세가 시선을 내렸을 때, 세 명과 한 마리는 벌써 저 구름 아래로 사라진 뒤였다·
【아·]
****
결과부터 말하자면 착륙은 성공했다·
“히이익! 세치카, 마법, 마법을 써!”
“마, 맞아· 나 마법사였지···!”
세치카가 극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떠올린 덕이었다·
지면에 처박히고 얼룩이 되기까지 10초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입 안에 들어간 머리카락을 뱉어낸 그녀가 주문을 영창했다·
“스, 슬로우 존!”
여느 때보다 다급한 영창이었다·
주문이 허공에 흩어지며 예상 착지점 위로 반구형의 역장이 펼쳐졌다· 역장에 들어서자 눈에 띄게 추락하는속도가 줄어들었다·
“인비저블 핸드!”
하지만 아직 전신 골절을 면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세치카가 다시 한 번 주문을 영창했다·
허공에 나타난 보이지 않는 손이 그들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아빠에게 배운 첫 번째 마법·
감속을 거듭하던 손은 지상에 다다른 뒤에야 세 사람을 놓아 주었다·
“주, 죽는 줄 알았네···!”
“아하하, 미안해· 나도 깜빡하고 있었지 뭐야·”
“으우···어지러워·”
간을 몸에서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은 기분이었다·
아벨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헤롱거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일어난 란세가 두 사람을 부축했다·
“일어나· 그런데 에린 너는 왜 온거야?”
“에헤헤, 그러니까····”
란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세치카는 그렇다 쳐도 에린이 왜 따라왔는지가 의문이었다·
그가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여동생을 추궁하려던 차였다·
“너, 너희는 누구냐?”
목소리 걸걸한 노인이 그들을 불렀다·
란세가 공중에서 봤던 마을의 촌장이었다·
망원경을 떨어뜨린 그가 벌벌 떨었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분명 하늘에서···”
“맞아요· 그런데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할아버지· 시간을 벌 테니까 어서 도망치세요·”
“뭬야?”
노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비장한 표정으로 주억거린 란세가 언데드를 향해 돌아섰다·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검이 시체들을 겨누었다·
“네· 제가 저놈들을 막을게요·”
“제가 아니라 우리겠지· 란세·”
세치카가 끼어들었다·
촌장은 완전히 벙쪄 버렸다·
눈을 꿈뻑거리던 그가 버럭 호통을 쳤다·
“내 원 어이가 없어서···어디서 불거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썩 따라와라! 너희 같은 꼬마들이 뭘 할 수 있다는 게냐?!”
아무래도 떨어지는 충격 때문에 머리를 다친 모양이었다·
두들겨 패서라도 데려가기로 마음먹은 촌장이 망원경을 치켜드는 차였다·
반쯤 썩은 늑대 다섯 마리가 언데드 군대의 선봉에서 뛰쳐 나왔다·
“커허헝!”
“끄아아아악!”
직선으로 쇄도하는 속도가 화살을 연상케 했다·
죽음을 직감한 촌장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 애들이라도 살려야 한다!
아이들을 끌어안기 위해 손을 뻗은 그가 당혹성을 뱉었다·
“뭐?”
세 사람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콰아아앙-!!
불현듯 늑대가 닥쳐오던 방향에서 폭발음이 작렬했다·
고개를 들어올린 촌장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무, 무슨···!”
다섯 늑대는 벌써 불귀의 객이 된 채였다·
세 마리는 거대한 주먹에 찍힌 것처럼 짜부라져 있었고, 두 마리는 머리가 사라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털가죽에서 검을 뽑아낸 에린이 입을 열었다·
“꽤 빠른 애들도 있네· 조심해 오빠·”
“너는 집 가서 보자·”
“너무 그러면 에린 슬퍼·”
에린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란세는 가차없이 고개를 돌렸다·
태연한 남매의 대화를 보며 촌장은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 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