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44. 가정의 수호자(3)
#A44
네뷸라 클라지에.
세상을 멸망시키려던 거악(巨惡)이 사라진 지도 벌써 십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한때 세계의 절반 이상이 파괴된 적도 있었지만 시간은 서서히 망가진 것을 되돌려 놓았다.
무너졌던 마을과 도시가 몸을 일으키고 시체로 뒤덮였던 벌판에는 다시금 거목이 싹을 틔웠다.
집마다 들려오던 장송곡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 커질 무렵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이 알던 세상이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허나 재생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라는 공공의 적에 맞서려고 뭉쳤던 세력 또한 서서히 흩어졌다.
당장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재물이나 땅 각종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싸움을 벌였다.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잡범들도 하나둘씩 야망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남부에서 창궐한 언데드 군단 또한 그 중 하나였다.
“꺄아아악! 도 도망쳐!”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마차에 태워라!”
검은 하늘 아래 절망이 팽배했다.
마을 사람들은 유일한 재산인 집과 가축까지 버려 가며 도망치는 중이었다.
망원경으로 피난길의 반대 방향을 정찰하던 촌장이 탄식했다.
“······신이시여.”
죽은 자로 이루어진 군대가 몰려오고 있었다.
마을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시체 썩은 냄새가 났다.
들판을 빼곡하게 뒤덮은 언데드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아서 개체라기보다는 하나의 색이 밀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무리다.’
언데드의 속도를 계산하던 촌장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몇 번이고 검산을 해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마을 사람들의 속도는 강이나 계곡도 개의치 않고 진군하는 언데드보다 훨씬 느렸다.
이대로라면 길어야 삼십 분 내로 따라잡힐 터.
아무리 운이 좋아도 몸이 날랜 소수만이 살아남을 운명이었다.
촌장이 스스로의 무능함을 저주하던 그때.
“초 촌장님! 하늘! 하늘에!”
“하늘?
갑자기 주민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냐고 되물어봤지만 소리를 지른 청년은 새하얗게 질린 채 하늘만 가리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놀랄 게 있나?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올린 촌장이 얼어붙었다.
“······드래곤?”
****
하늘이 드높았다.
오르세에 올라탄 로난 일행은 고작 수 시간 만에 남부 상공에 이르렀다.
등가시를 붙잡고 있던 란세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와아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네 장의 날개가 퍼덕일 때마다 구름과 별무리가 등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
괜히 신이 난 세치카가 우쭐거렸다.
“어때 우리 삼촌 대단하지?”
“응. 진짜로.”
그녀는 코흘리개 시절에 오르세를 타고 날아본 적이 있었다.
란세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조금 전부터 은근슬쩍 손을 겹치고 있음에도 눈치를 못 채는 중이었다.
눈치를 보던 세치카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후후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하늘이 이렇게 높을 줄이야····”
그럼에도 란세는 눈치채지 못했다.
평소라면 경기를 일으키며 떼어냈을 테였지만 하늘을 나는 쾌감은 쉬이 떨쳐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세치카의 입가에 음습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남자는 다 애라니까.’
오르세 삼촌을 타고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계획된 작전이었다.
늦은 밤까지 엄마를 괴롭히면서 꾸민 듯 안 꾸민 듯 몸단장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 엄마. 머리는 묶을까 아니면 과감하게 풀어헤칠까? 보통 남자들은 목덜미가 드러나는 걸 더 좋아하지 않나?
– 하암···둘 다 예쁘니까 슬슬 자자 세치카. 어차피 힘도 너가 더 센데 확 자빠뜨리면···아니 밀어붙이면 그만 아니니? 내가 너희 아빠 어떻게 꼬셨는지 얘기 안 해줬던가?
– 엄마. 솔직히 그건 범죄였잖아.
사실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마르야는 연애 상담에 영 재능이 없었으니까.
세치카는 무력을 통해 사랑을 이루기보다는 슐리펜 삼촌처럼 로맨틱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녀가 란세의 옆얼굴을 힐끔거리며 혼잣말했다.
“그새 어깨가 많이 넓어졌네에····”
란세는 남자였다.
아드렌에 수학여행을 갔을 때부터 실감이 났다.
본격적으로 2차 성징이 시작될 나이라 그런지 확실히 몸이 예전보다 단단해진 게 느껴졌다.
아직까지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조금 더 과감하게 나가도 될 것 같았다.
그녀가 왼팔로 란세의 허리를 감으려던 차였다.
“오빠. 에린 추워.”
“응?”
갑자기 나타난 에린이 란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원래는 로난이 비행 중에 위험하다는 이유로 꼭 안고 있었는데 세치카의 수작질을 보다 못해 전력으로 탈출한 것이었다.
그제서야 세치카와의 거리가 좁혀진 것을 눈치챈 란세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뭐 뭐야. 너는 언제 이렇게 가까이 왔어?!”
“아하하···어쩌다 보니.”
세치카는 면목 없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운도 없지 하필이면 지금 끼어들 줄이야.
애써 아쉬움을 떨쳐낸 그녀가 에린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 에린 많이 추웠어? 언니가 따뜻하게 안아줄까?”
“싫어.”
“으응?”
“세치카 언니는 가슴에 머리가 눌려서 답답해. 오빠가 좋아.”
그 말과 함께 에린은 오빠의 품으로 쏙 파고들었다.
까칠한 고양이처럼 좁혀져 있던 눈매는 란세가 머리를 쓰다듬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 풀어졌다.
“히히 오빠아.”
“이제 이럴 나이도 지났으면서 참. 위험하니까 여기 얌전히 앉아 있어.”
“응! 얌전히 있을게.”
“···쳇.”
그 모습이 괜스레 얄미워 세치카가 눈썹을 찡그렸다.
뭔가 고의성이 느껴지는데 기분 탓이겠지?
그녀가 구시렁거리던 와중이었다.
“쯧 도착했군.”
“네?”
로난이 혀를 찼다.
그의 시선은 지상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래를 바라본 세치카가 헛숨을 들이켰다.
저 멀리 구름 아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언데드가 강산을 뒤덮고 있었다.
“세상에···!”
“저 저게 다 뭐야?”
란세와 에린 또한 경악했다.
동물이건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집어삼키는 시체들은 꼭 밀림에 사는 군대개미를 연상케 했다.
물론 저것들이 훨씬 더 추찹스러운 존재였지만.
망자들의 행진을 지켜보던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똥물에 튀겨 죽일 놈들은 기껏 세상을 구해 놨더니 다시 조져 놓고 자빠졌네. 머리통을 죄다 뽑아서 젓갈을 담그던가 해야지.”
“로 로난 삼촌?”
세치카가 당황했다.
처음에는 로난이 아닌 다른 사람이 말한 줄 알았다.
촌구석 용병들이나 할 법한 걸쭉하고 천박한 욕이었다.
“어···욕 엄청나게 잘하시네요?”
“후···미안하다 얘들아. 그런데 저걸 보고 욕을 안 하면 내가 신전에서 일했지. 이런 꼴을 볼 때마다 담배를 끊은 게 후회된다니까.”
“워 원래 담배도 피우셨었어요?”
로난의 과거를 모르는 세치카로서는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가 급발진할 것을 예상한 란세는 이미 여동생의 양쪽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오빠. 방금 아빠가 뭐라 한 거야? 응?”
“너는 몰라도 돼.”
“우으 그런 게 어딨어? 에린도 알려줘!”
에린은 제대로 못 들었다면서 바동거렸지만 란세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아직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만을 알고 있는 그녀가 들었다가는 적잖게 충격을 받을 터였다.
“오르세. 아셀은 어디 갔냐? 저딴 꼴을 두고 볼 놈이 아닌데.”
【나도 모르겠다. 분명 이쯤에서 기다리겠다고 했거늘.】
“그런데 왜 없어? 이 땅딸보 자식 설마 잡아먹힌 건 아니겠지?”
“뭐 뭐라구요?!”
세치카가 경악했다.
당사자의 딸 앞에서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로난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크 미안하다. 땅딸보라 부르기에는 다른 장점이 많은 놈인데. 머리도 좋고 얼굴도 곱상하고 자식을 다섯이나 가질 정도면 의외로 남자로서의 능력도···”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저 정말로 우리 아빠가 잡아 먹혔을 수도 있나요?”
“뭐야 그게 문제였냐? 난 또 뭐라고.”
로난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란세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잘 모르듯 이 소녀도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진지하게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걱정 마라 세치카. 저거 열 배를 데려다 놔도 그 녀석이 잡아먹힐 일은 없으니까.”
“우 우리 아빠가 그렇게 세요? 아무리 그래도 열 배는····”
“그래. 당장 이 용용이가 그 자식을 뭐라 부르는지 생각해 봐.”
마룡이 공인한 전대미문의 살인 기계.
불현듯 로난은 세월이 참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시원찮은 요술쟁이도 아니고 그 아셀이 이런 취급을 받다니.
하긴 주변에서 아무리 대마법사라 칭송해도 집에서는 공처가에 불과하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진짜 역겨워서 못 참겠군.”
불현듯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시체 썩는 냄새가 올라와서 코가 아플 지경이었다.
원래는 언데드를 부리는 놈을 찾은 뒤 강하하려 했는데 계획을 변경해야 할 것 같았다.
“아들. 아빠가 했던 말 기억나냐.”
“예?”
“그 왜 위령비 앞에서 말한 거 있잖아. 내가 전쟁은 뭐 같은 거라고 했지?”
“어···개똥 같은 거요.”
“그렇지. 확실히 엄마를 닮아서 머리가 좋네. 지금부터 아빠는 개똥을 치울 거야.”
참으로 적절한 비유였다.
로난은 허리춤에 매달린 칼자루를 쓰다듬고 있었다.
과거의 이름은 라만차.
이제는 린이라는 정령이 깃든 성검은 당장 내보내 달라는 것처럼 진동하는 중이었다.
“너희는 견학이니까 여기서 얌전히 지켜보기만 해. 만약 따라오거나 바보 같은 짓거리를 했다가는 그대로 엄마에게 보고할 거니까. 너희들도 나중에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릴 텐데 마누라 될 사람한테 당신 엉덩이는 왜 이렇게 불어 터졌냐는 조롱을 받고 싶지는 않겠지?”
“힉···!”
란세와 에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데샨은 정말 좋은 어머니였지만 아주 가끔 화를 낼 때는 그 누구보다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움츠린 란세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치카가 킥킥거렸다.
“나는 엉덩이가 좀 커도 상관없는데···어쨌든 저는 가도 되죠 삼촌?”
“될 리가 있냐. 너도 마르야한테 다 일러바칠 거야.”
“히잉····”
결국 세 명 모두 침울해졌다.
축 늘어진 꼴이 영 보기 안쓰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 털도 제대로 안 난 애송이들이 상대하기에는 벅찬 상대였으니까.
낄낄거리던 로난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럼 부탁한다. 오르세.”
“자 잠깐만요. 어떻게 가시려고···끄아아악! 위험해욧!”
란세가 뭐라 말하기도 전이었다.
날개가 퍼덕이는 타이밍을 재던 로난이 그대로 지상을 향해 몸을 던졌다.
에린과 세치카가 뒤따라 비명을 터뜨렸다.
“아 아빠아!”
“로난 삼촌!”
외침은 허무하게 흩어졌다.
로난의 모습은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애송이들의 삼중창을 듣던 오르세가 으르렁거렸다.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
“하지만 이 높이에서 떨어졌다가는···!”
【너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저 괴물도 자식들에게는 어지간히 무르게 구나 보구나.】
“괴물요?”
오르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는 로난과 함께했던 모험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극광이 쏟아지던 오로라 스칼.
미쳐버린 용왕을 막기 위한 아드렌에서의 사투.
로난을 등에 태운 채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빛의 창을 피하던 여느 때보다 피가 들끓었던 나날.
로난이 두아루의 목을 베어내는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전율이 일고는 했다.
【그립군. 그때가.】
오르세가 클클거렸다.
그 순간 지상에 착지한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촤아아아악-!
소리 없이 뽑혀 나온 칼날이 호를 그리자 망자의 군대 한복판에 붉은 초승달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