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43. 가정의 수호자(2)
#A43
“엄마. 이 돌은 뭐야?”
에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앞에는 성벽처럼 높고 맨질맨질한 바위 하나가 솟아 있었다.
회백색으로 번쩍이는 표면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아데샨이 목말을 타고 있는 딸을 올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에린은 아직 와본적이 없구나? 이건 위령비란다.”
“위령비?”
“응.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전사들을 기리는 비석이지. 저기 북부에 세워진 위령비에는 할머니랑 삼촌들의 이름도 적혀 있어.”
아데샨은 부드럽게 위령비를 쓸어내렸다.
여기 새겨진 모두는 최후의 전투에서 스러진 이들이었다.
로난의 영지인 발투아에 세워진 위령비는 한때 네뷸라 클라지에의 총본산과 연결되었던 호수를 굽어보고 있었다.
“우아 그럼 여기가 역사책에 나오는 거울 호수야?! 그 창백한 성과 이어져 있는?”
에린의 작은 발이 동동거렸다.
한 달에 한 번씩은 발투아의 별장에 오는데도 전혀 몰랐다.
네뷸라 클라지에와의 최종 결전이 벌어졌던 창백한 성.
그곳과 이어진 호수가 낙원숲 어딘가에 자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가문의 영지 안에 자리했을 줄이야.
딸의 반응을 본 아데샨이 미소지었다.
“후후 예전에는 이어져 있었지.”
“예전에? 지금은 아니야?”
“그래. 에린네 교장 선생님···그러니까 크라티르 님이 총본산과 이어진 통로를 뒤틀어 버렸거든. 이제는 멋대로 들어가면 감기에 걸릴 뿐이야.”
“엑 치사해!
그런 게 어딨어?”
에린의 볼이 부풀었다.
모험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십거리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가 아데샨의 정수리에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그럼 왜 온 거야? 혹시 여기가 아빠 일터?”
“그건 아니고. 아빠는 일을 하기 전에 항상 여기에 들르시거든.”
“왜?”
“글쎄···왜일까?”
현장학습이 시작되는 날 로난은 온 가족을 여기로 데리고 왔다.
아데샨은 대답하는 대신 로난에게 시선을 옮겼다.
과거에는 후배이자 전우.
이제는 남편이 된 사내는 멀지 않은 곳에서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위령비를 올려 보고 있었다.
“·······”
그 옆에서는 란세가 어색한 자세로 서 있었다.
에린과 마찬가지로 여기는 처음 와본 터라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침묵하던 로난이 입을 뗐다.
“발자크.”
“네?”
“나랑 친했던 모기 이름이야. 오필리아 이모 기억 나지?”
“아 네. 당연하죠.”
란세가 주억거렸다.
부모님의 동창생 중 한 명.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꼭 집에 놀러오는 뱀파이어 소녀.
설원처럼 창백한 피부와 새빨간 눈동자는 인간에게서 느낄 수 없는 마력을 머금고 있었다.
“그 오필리아를 짝사랑하던 놈이었어. 모기계의 슐리펜이었달까. 출신도 좋은 데다 얼굴도 그럭저럭 반반했거든. 나중에는 둘의 오해도 풀려서 좋은 한 쌍이 될 수도 있었을 거야.”
있었을 거라는 말은···?”
“그래. 이어지지 못했지. 마지막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에 죽었거든. 이 의리 넘치는 모기는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이 갈기갈기 찢어진 몸을 이끌고 와서 너희 엄마한테 총본산의 위치를 전해 줬어.”
로난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럴 때마다 담배를 끊은 게 아쉬었다.
그림자 대공의 동생.
죽어서 영웅이 된 흡혈귀의 이름은 위령비 가장 위쪽에 새겨져 있었다.
“그런····”
“물론 발자크 말고도 안타까운 사연은 차고 넘쳐. 처자식만 남긴 채 죽는 건 기본이고 부모자식이 같이 전사한 경우도 수두룩해. 여기 적힌 이름 하나하나가 교과서에 실려도 모자라지 않을 비극이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전쟁이 벌어지는 순간 목숨의 값어치는 휴지조각으로 전락한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죽어 나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좆같은 전쟁.’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목숨이 없었다.
로난이 할 수 있던 일은 최대한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뿐이었다.
짧은 회상을 마친 로난이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들. 전쟁은 참 개똥 같은 거야.”
“······네.”
“그냥 그렇다는 거니까 너무 침울해 하지는 말고. 누가 보면 여기 적힌 사람 너가 다 죽인 줄 알겠다.”
“그 그런···!”
“농담이야 인마. 그럼 일단 1분간 묵념.”
그 말과 함께 로난은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진지한 모습이었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한 란세가 시선을 떨구었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죽어간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린이 천천히 끄덕였다.
“역시 아빠는 좋은 사람이야.”
“후후 에린도 그렇게 생각하니?”
“응. 본인은 그렇게 보이는 걸 싫어하는 것 같지만.”
모녀가 웃었다.
이윽고 묵념을 마친 로난이 다시 발자크의 이름을 쳐다보았다.
부디 모기들의 천국에서 최고급 피를 마시고 있기를.
“그나저나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응? 누가요?”
“내가 안 말했던가? 우리끼리만 가는 게 아니라···”
로난이 말을 잇던 차였다.
화아악!
갑자기 불어닥친 강풍과 함께 일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섬칫한 기운을 감지한 란세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지만 어느새 그림자는 사라진 채였다.
그리고.
“오랜만이군. 이 호수도.”
“뭣.”
란세의 뒤편에서 낯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황급히 돌아본 자리에는 웬 길쭉한 사내가 서 있었다.
“누 누구야?”
엄마보다 키가 큰 사내의 어깨 위에는 계절에 맞지 않게 길고 시커먼 코트가 걸쳐져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도 검은 색이라 꼭 그림자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사내의 시선이 란세에게 닿았다.
“흐읍···!”
그 순간 란세의 몸이 굳었다.
진홍색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의 동공은 파충류처럼 세로 방향으로 찢어져 있었다.
부연설명 없이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자가 터무니없는 강자라는 것을.
란세가 벌벌 떨리는 손을 칼자루에 가져다 대려는 찰나.
“닮았군. 네 자식인가.”
사내가 툭 내뱉었다.
영문 모를 말에 란세의 손이 멈췄다.
성큼성큼 걸어온 로난이 사내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그래. 제법 쓸만해 보이지?”
“그 시절의 너보다는 싹수가 있어 보이는군.”
“말하는 꼬라지는 여전하시구만. 그나저나 안 덥냐? 이 땡볕에 롱코트라니.”
“안 덥다. 이거 놔라.”
“조금만 더. 확실히 파충류 계열이라 그런지 시원하네.”
사내가 목을 휘감은 팔을 떨쳐내려 했지만 로난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사내의 입에서 짐승 같은 으르렁거림이 새어나올 즈음에야 어깨동무를 풀어 주었다.
어느새 다가온 에린이 란세의 등에 찰싹 들러붙은 채 속삭였다.
“오빠. 누구야?”
“···나도 모르겠어.”
란세가 도리질했다.
로난이 웃고 있는 걸로 봐서 적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허나 사내의 어깨 위로 피어나는 불길한 기운을 보고 있자면 도저히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사내와 마주친 아데샨이 미소지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오르세 님.”
“오 오르세?!”
란세와 에린이 경악했다.
태어나 자라면서 몇 번이고 들어온 이름이었다.
‘설마 그 전설 속의 마룡?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블랙 드래곤 오르세.
네뷸라 클라지에와의 결전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한때는 대륙을 불사르던 흉악무도한 마룡.
나바르도제 다음으로 유명한 드래곤이 왜 이런 곳까지 행차한단 말인가?
오르세는 애써 현실을 부정하는 두 사람을 뒤로 하고 인사를 받았다.
“음. 야전 사령관인가.”
“후후 그리운 호칭이네요. 그것도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가 됐어요.”
“내게는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지. 못 보던 새 경지가 더 늘었군.”
“오르세 님도 더 강해지셨는걸요. 얘들아 아빠 친구분께 인사해야지?”
“치 친구?”
아데샨이 남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르세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기는 했지만 로난의 친구라는 것을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머뭇거리던 란세와 에린이 예를 갖춰 인사했다.
“처음 뵈어요 오르세 님. 에린 데 발투아라고 해요.”
“···란세입니다.”
오르세는 적당히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반응이 영 시니컬한 것이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번에 남편을 도와 주신다고 들었어요. 여기까지 데리러 와주신 것도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흥. 간만에 피 냄새 섞이지 않은 바람을 쐬러 왔을 뿐이다. 살인 기계의 자식은?”
“아아 그 아이는 따로 온다고 했어요. 공간 스크롤을 사용한다 했으니 금방···”
“오르세 아저씨!”
아데샨이 말하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시야 바깥에서 튀어나온 그림자 하나가 오르세의 목덜미에 들러붙었다.
굉장히 낯이 익은 튤립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의 소녀.
소녀를 힐긋거린 오르세가 혀를 찼다.
“떨어져라. 그리고 누구더러 아저씨라는 거냐.”
“아하하 아저씨는 맨날 까칠하더라. 나 안 보고 싶었어?”
“안 보고 싶었다.”
“솔직하지 못하기는. 하긴 그게 아저씨의 매력이지.”
세치카가 큭큭거렸다.
오르세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이라 체념한 사람처럼.
란세 뒤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던 에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세치카 언니?”
“앗 에린도 있네? 안녕!”
세치카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평소의 일상복이 아닌 란세 남매와 같은 탐험용 경장을 갖추고 있었다.
에린이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가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응? 란세한테 못 들었니? 부모님 직업 체험 과제를 같이 하기로 했잖아.”
세치카가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로난과 아셀은 같이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합의했고 그 장소가 남부라는 것이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란세가 당혹성을 흘렸다.
“금시초문인데.”
로난이 자식들에게 말하는 것을 깜빡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세치카가 오르세의 어깨 위에서 뛰어내렸다.
“엥? 진짜로?”
“그래.”
“아무렴 어때. 다 같이 가면 좋지 뭘. 나도 방학에는 거의 엄마 상단만 따라다니느라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몰랐거든.”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란세에게 팔짱을 끼웠다.
크고 맑은 눈동자는 마르야를 닮은 비취색이었다.
세치카가 되물었다.
“아니면 나랑 가는 게 싫어?”
“윽.”
과감한 행동에 란세의 얼굴이 붉어졌다.
가까워진 세치카의 몸에서는 들꽃을 연상케 하는 향기가 났다.
“···그건 아닌데.”
“히히 그럼 됐어.”
세치카가 팔을 더 끌어당겼다.
로난과 아데샨이 그런 두 사람을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던 와중이었다.
허리춤 아래에서 에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왜 말 안했어?”
“엉? 뭐를?”
“세치카 언니도 같이 간다는 거.”
시선을 내리자 잔뜩 심통이 난 에린이 눈에 들어왔다.
동글동글하고 예쁜 눈은 자기 어릴 때처럼 날카롭게 째진 채였다.
색다른 귀여움을 뽐내는 딸의 모습에 로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게 아빠가 말해준다는 걸 깜빡했네. 우리 딸 만세 만세 해줄까?”
“싫어.”
“으음? 시 싫다고?”
“몰라. 아빠 미워. 가까이 오지 마.”
에린이 돌아섰다.
갑자기 차가워진 태도는 냉랭한 북풍을 연상케 했다.
그녀는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는 란세와 세치카 사이에 끼어들며 둘의 거리를 벌려놨다.
로난이 벙찐 채 중얼거렸다.
“···여보. 내가 뭘 잘못했나?”
“아하하 아직은 오빠가 좋을 나이니까요.”
아데샨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한때 두 명의 오라비와 지냈던 그녀는 에린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로난은 통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머리만 긁적거렸다.
불현듯 오르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다 모인 것 같군.】
아까와는 달리 숲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목소리였다.
한순간 모두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사방으로 번져 나가는 흉흉한 마나에 대기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란세가 반사적으로 여동생을 품에 끌어당겼다.
“무 무슨···!”
뒤를 돌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오르세가 보였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목은 너무 길어서 그 끝을 보기가 힘들었다.
밤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을 오려낸 듯한 비늘은 강렬한 여름볕 아래에서도 어둠에 잠겨 있었다.
“우와. 아저씨가 변신하는 건 다섯 살 이후로 처음 보네.”
세치카가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이어서 오르세의 몸에 붙어 있던 네 장의 날개가 쫙 펼쳐졌다.
시타와 닮은.
하지만 규모를 비교할 수 없는 흑익(黑翼)은 하늘을 가리는 장막 같았다.
이윽고 오르세가 위령비만큼이나 거대한 머리를 숙이며 으르렁거렸다.
【타라. 지금 이 순간에도 불태워야 할 쓰레기들이 늘어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