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42. 가정의 수호자(1)
#A42
“으잉? 부모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 오라고?”
정원에서 잔디를 깎던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옆에는 아들 란세가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네. 정확히는 같이 체험하고 감상문을 제출하라 했어요.”
“칼 휘두르는 법이나 가르쳐 줄 것이지 별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는구만. 우리 때는 그런 거 없었는데 말이야.”
로난은 툴툴거리며 아데샨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쓴 채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도자기처럼 매끈하고 흰 피부 전혀 망가지지 않은 몸매를 보고 있자면 애를 둘씩이나 낳은 유부녀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내 아내지만 참 훌륭하단 말이지.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친 아데샨이 쿡쿡 웃었다.
“당신도 참. 신입생 과제 중 하나로 있었잖아. 기억 안 나?”
“아 그랬나? 내가 부모가 없어서 안 알려 줬나 보네. 와하하핫!”
“꽤 괜찮은 과제였어. 나도 아버지를 도와서 옷감을 잘랐었는데 옛날 생각도 나고 좋더라.”
“장인어른도 한번 봬야 하는데 말이지···어쨌거나 이해했어. 근데 란세 너는 엄마 직장에 따라가면 될 것을 왜 나한테 왔냐? 제국군 장성이면 어디 가서 꿇릴 직업은 아니잖아.”
로난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아데샨의 직업이 자신보다 오십 배 정도는 세련되고 멋진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본인의 업무는 출근이 불규칙한 데다 손을 더럽히는 현장직이었으니.
물론 급여가 짭짤하기는 했지만.
“하지만 친구들도 아버지가 하는 일을 궁금해하는걸요.”
“친구들은 무슨. 네가 궁금한 거겠지. 우리 아들은 역시 나를 집에서 가랑이나 긁는 개백수라 생각하고 있었구나···이거 서러운걸.”
“개 개백수라니. 그런 생각 안 했어요!”
정곡을 찔린 란세가 다급하게 손사래 쳤다.
다르만의 납치 사건 이후 삼 년.
올해로 열네 살이 된 란세는 아버지에게 관심이 많았다.
무능하다는 오해는 풀린 지 한참 지났지만 막상 로난이 밖에 나가서 일을 할 때 뭘 하는지는 여전히 모르는 채였다.
“쓰읍···귀찮은데. 그냥 가정의 수호자라 적어서 내면 안 될까?”
“아 진짜 장난이 아니라니까요!”
“얘가 무시하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친구들이 궁금해한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특히 센센과 윌럼프가 세상을 구한 영웅은 평소에 뭘 하고 지내냐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물어보는데 낙엽 쓸고 마당에서 잔디나 깎는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로난이 귀찮은 티를 팍팍 내던 와중 아데샨과 함께 물을 주던 소녀가 로난에게 다가왔다.
“아빠. 안 돼?”
로난과 아데샨의 딸이자 란세의 여동생.
저번 달에 필레온에 입학한 에린이었다.
구원자를 닮은 새하얀 머리카락이 여름 볕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로난의 바짓단을 붙잡으며 갸웃거렸다.
“에린도 아빠가 무슨 일 하는지 궁금한데에····”
“어이쿠 우리 공주님 왔어요?”
로난의 입꼬리가 귀밑까지 올라갔다.
란세를 대할 때와는 대조되는 태도였다.
그는 에린을 안아든 채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렸다가 내리는 것을 반복하더니 말랑거리는 얼굴에 자기 뺨을 연신 부벼 댔다.
“우으으. 수염 따가워어!”
“그래그래. 에린도 궁금하다면 어쩔 수 없지. 오빠랑 같이 견학 한번 갈까?”
에린이 빠르게 주억거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딸을 내려놓은 로난이 란세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좋아 아들. 그럼 일감이 생기는 대로 알려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하루에서 이틀 정도는 걸릴 테니까 나비로제 누님한테 미리 말씀드리고.”
“······지금은 방학인데요.”
“아 그러냐? 어쩐지 너랑 에린 둘 다 집에 있길래 나는 또 등교 거부인가 했지. 피는 못 속인다 생각했는데 다행히 니들은 엄마를 닮았구나.”
껄껄 웃는 로난을 본 란세가 벙쪄 버렸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는 무신경함?
아니면 위대한 필레온 아카데미의 교감을 누님이라 부르는 부분?
로난의 가시지옥(남매가 직접 명명했다)에서 풀려난 에린이 란세에게 쪼르르 달려와 안겼다.
“히히 오빠! 나 잘했지?”
“그래. 최고야.”
애교 많은 날다람쥐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사춘기의 초입에 들어선 란세와는 달리 에린은 아직 천진난만한 아이 티를 간직하고 있었다.
적어도 로난과 아데샨이 보기에는.
오빠의 목덜미에 매달려 있던 에린이 작게 속삭였다.
“나도 알아. 그럼 최고의 성과에 걸맞는 값어치를 지불해야겠지?”
“···원하는 게 뭐야?”
“제국 금화 세 닢. 아니면 뺨에 뽀뽀 세 번.”
란세의 눈이 질끈 감겼다.
학생이 금화라는 거금을 들고 다닐 리 없었으니 사실상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에린. 너도 이제 열 살이잖아. 한 번으로는 안 될까?”
“내가 견학 날에 복통을 호소해도 좋다면야. 참고로 엄마랑 아빠 둘 다 나를 안 돌보고는 못 배길 만큼 지독한 복통일걸.”
란세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애가 날이 갈수록 영악해지는 것 같았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란세는 결국 그녀의 볼에 세 번 입을 맞추어 주었다.
딱따구리처럼 빠르게 행해진 동작인지라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린이 눈웃음쳤다.
“히히 정성이 부족하기는 한데 특별히 넘어가 줄게.”
“고맙기도 해라···도대체 언제까지 업어달라 할 생각이야?”
“당연히 평생이지.”
에린은 그리 대답하며 란세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엄마처럼 학생회장을 노리는 그녀는 필레온에서 완벽한 아가씨 컨셉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어리광은 오빠가 집에 있는 방학 기간 동안 잔뜩 부려 놔야 했다.
“아참 세치카 언니도 와?”
“아직 말은 안 해봤는데. 부를까?”
“아니.”
즉답이었다.
아셀과 마르야의 장녀 세치카.
어제 마주친 그녀의 모습을 떠올린 에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소년 티를 못 벗은 란세와 달리 세치카는 슬슬 아가씨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날씨에 맞게 가벼운 옷을 입고 있었고 자신과 심부름을 하던 란세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내가 실수했어. 수학여행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더듬이가 된 채 곁눈질을 반복하는 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한심했다.
에린이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했다.
“에린은 우리 둘만 가면 좋겠어.”
****
똑똑!
카라벨 저택의 정원에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렌과 자이파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들어올 만큼 거대한 대문은 석양을 받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머지않아 문 너머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누구세요?”
“대머리 학살자.”
“앗 로난 삼촌?!”
대문은 곧바로 열렸다.
머리카락이 새빨간 소녀 한 명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로난을 응대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나야 뭐 늘 똑같지.”
카라벨 가 오남매의 장녀인 세치카였다.
로난이 그녀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고작 한 달 못본 것 같은데 또 커버렸네. 란세랑 연애 사업은 잘 돼가냐?”
“무 무슨 소리세요? 제가 걔랑 왜···!”
“아니었어? 둘이 있을 때 분위기 좋길래 이미 볼 장 다 본줄 알았지. 잘 어울리기도 하고.”
“자 잘 어울린다니···흐흠.”
세치카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멋대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로난 삼촌도 오늘따라 한결 더 와일드하고 멋지네요. 그래서 어쩐 일이세요?”
“너희 아빠 만나러 왔다. 뭔가 조용한데 설마 집에 너 말고 없는 건 아니지?”
“아아 엄마는 동생들이랑 할아버지 댁에 갔어요. 아빠는 연구실에 계시고요. 불러 드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야. 엇차.”
“끼약!”
로난은 대답과 동시에 제자리에서 도약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세치카가 어깨를 움츠렸다.
단번에 3층 발코니에 착지한 로난의 발에서는 조금의 소리도 나지 않았다.
“우와.”
세치카가 감탄했다.
현역에서 벗어난 사람의 몸놀림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브이를 한 번 만들어 보인 로난은 가장 구석진 방으로 이동했다.
이미 수도 없이 들락거린 아셀의 연구실.
문틈 새로 마나가 자욱하게 흘러나오는 것이 지금도 뭔가 실험하는 중인 것 같았다.
로난이 문을 슬쩍 열었다.
“어이 아셀.”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저는 가능하다고 봐요. 당장 이 별을 제외하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명이 존재하니까요. 그래서···”
아셀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기에 로난은 일부러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아셀의 책상 위에는 어디서 많이 본 소년의 반신이 반투명한 상태로 떠올라 있었다.
원조 대마법사 로르혼.
아셀의 설명을 들은 그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흐음. 확실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그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만 더 연구하고 공유하도록 하지. 마탑주 자리에는 아직도 관심이 없는 건가?”
“아시잖아요. 사람 대하는데 서툰 거. 다루는 데는 더 소질이 없어서요.”
“사실 멋대로 추대하고 싶다만 그랬다가는 아르말렌 백작께서 나를 가만두지 않겠지. 그럼 다음에 보세나.”
“쉬세요.”
원래 막바지였는지 대화는 머지않아 끝났다.
뒤로 묶은 머리를 풀어 헤친 아셀이 한숨을 내쉬었다.
퀭해진 얼굴 밤하늘에 고정된 눈빛.
이 재수 없는 천재에게서는 정말로 찾아보기 힘든 난제를 맞닥뜨렸을 때만 짓는 표정이었다.
기척을 감추고 슬금슬금 접근하던 로난이 아셀의 귓가에 손가락을 튕겼다.
“얌마.”
“히에에엑!!!”
아셀은 기괴망칙한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고양이 같은 반응이었다.
가까스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그가 눈물을 닦았다.
“로 로난?! 여기는 언제···!”
“방금 왔다. 쥐콩만한 심장은 여전하시구만.”
로난이 낄낄거렸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대마법사의 일면이었다.
손가락을 까딱여 산을 만들고 궁전을 띄우는 괴물이라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그냥 얼빠진 고향 친구에 불과했다.
그가 아셀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어? 로르혼 영감쟁이 같던데.”
“응. 그게 최근에 연구하고 있던 게 있어서····”
아셀이 말꼬리를 끌었다.
시선까지 피하는 걸 보니 뭔지는 몰라도 비밀로 하고 싶은 듯했다.
흠 궁금했는데 어쩔 수 없나.
아쉬움을 떨쳐낸 로난이 화제를 돌렸다.
“말하기 싫으면 됐다. 그나저나 너네 집은 빵에 방부제라도 섞어 먹냐? 어째 필레온에 다닐 때랑 변한 게 없어?”
“아하하 그 정도는 아닌데····”
“아니기는. 얼굴이 우리 딸보다 뽀얗구만.”
“우아아. 하 하지 마아···!”
로난은 아셀의 뺨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푹 들어갔다 나오는 탄력이 에린이나 란세 못지 않았다.
나는 순혈 인간이 아니니까 그렇다 쳐도 이 자식은 뭐지?
아셀이 풀어헤쳐진 머리를 다시 뒤로 묶었다.
“그 그게···원래 마법사는 일정 경지에 오르면 노화를 조절할 수 있게 되잖아. 그거지 뭐.”
“맞아. 로르혼 영감도 그랬었지. 하긴 너도 그 무렵이 제일 팔팔하기는 했어.”
“으응. 신체적 전성기였으니까. 그 그리고 이 시기에 맞추지 않으면····”
“안 하면?”
“그···몸이 못 버텨서····”
아셀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실소했다.
어쩐지 슬퍼 보이는 웃음이었다.
디디칸 일생의 역작인 카메라가 뽑아낸 결과물.
대형 액자에 걸린 사진 안에서는 한층 무르익은 마르야가 다섯 남매를 끌어안은 채 활짝 웃고 있었다.
말뜻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런 제기랄 다섯으로도 모자란 건가.”
“아하하 어쩌면 올해 안에 육남매가 될지도···너희도 이래?”
“우린 그 정도는 아니지 씨발···내가 말했지? 너는 가슴에 깔려 지낼 거라고.”
로난은 측은한 눈빛으로 아셀을 바라보았다.
장난 삼아 툭툭 던졌던 말이 현실이 되니 뭔가 미안했다.
어쩐지 밥도 잘 먹고 다니는 놈이 야윈 것 같더라니.
가족사진을 보던 아셀이 다시금 미소지었다.
“그래도 행복하긴 해. 아직 못 들은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온 거야?”
“아. 잡설이 길었네. 너 오르세랑 남부에서 하려던 거 있지? 거기에 나 좀 끼워 주라.”
“남부? 워 원래 담당하던 곳은?”
“어제 마무리짓고 왔어. 오래된 강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정령이 질기기는 하더라. 그래도 토막을 쳐 놨으니 당분간은 괜찮겠지.”
태연한 대답을 들은 아셀이 벙쪄 버렸다.
언제나 빠른 일처리를 보여주는 로난이었지만 이번에는 좀 많이 빨랐다.
수백 년 묵은 강의 정령을 케이크 먹듯이 해치워 버리다니.
머리를 긁적거리던 로난이 말을 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토끼 같은 자식들이 아빠 직업을 궁금해 하더라고. 뭐가 잘나서 밥벌이를 하는지 알아오라고 필레온에서 과제를 내 줬다나.”
“아아 그래서···! 그러고 보니 세치카도 같은 과제를 받은 거 같던데?”
“그러냐? 하긴 란세랑 동갑이었지. 그렇다면····”
로난이 생각에 잠겼다.
요즘들어 란세나 에린을 보고 있자면 자신의 소년 시절이 떠오르고는 했다.
님버튼에서 모험을 시작했을 때와 비슷한 나잇대라 그런 걸까?
추억을 음미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야. 아셀.”
“으응?”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같이 가장의 위엄을 한번 되찾아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