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8. 짐승들(10)
#A38
“저 저를 수인으로 되돌려 주신다고요?”
“그렇다네. 슬슬 때가 되었어. 아주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다만····”
바렌을 위아래로 훑어본 세크리트가 입맛을 다셨다.
구체에 가깝던 몸뚱어리는 어느 정도 사내다운 각이 잡혀 있었다.
역시 군살을 빼는 데는 팔자에 없는 고생이 제일이었다.
바렌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음? 뭐라고?”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왜 진작 풀어주지 않으신 겁니까! 도대체 몇 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된 줄 아십니까?! 이 모든 걸 고작 제 살 때문에 여태껏 돌려 놓으시지 않은 거라고요?”
참다 못한 바렌이 노호를 터뜨렸다.
아무리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었다.
세크리트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어째서···!”
“어쩔 수 없었어. 살이 뒤룩뒤룩 찐 자네로서는 북풍단 전체는 고사하고 저 표범 친구와의 승부도 장담할 수 없었을 테니까.”
정곡을 찔린 바렌이 움찔거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과거였다면 정면 돌파를 했을 상황에서 같지도 않은 미남계를 쓰고 잠입해야 했다.
저 블란타까지 처음에는 북풍단에게 사로잡혔던 걸 보면 인간이 아닌 본모습이었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어딜 도망치나!”
블란타는 여전히 수인들을 상대로 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전투법이 화려하면서도 군더더기가 없는 것이 타고난 싸움꾼이라 할 만했다.
심지어 오러는커녕 마나도 쓰지 않은 상태.
하는 짓거리가 잡스러워서 그렇지 전사로서의 기량 자체는 아내인 네메아보다 훨씬 뛰어났다.
“솔직히 헤이란에서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는 못 알아볼 뻔 했다네. 체중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예전보다 퇴보해 있었거든. 그 바렌 파나시르가 고작 늑대 몇 마리 잡는데 오러를 쓰다니 정말 기절할 뻔했지.”
“그 그건···!”
“일단 이거부터 풀지. 영 답답하군.”
“···알겠습니다.”
바렌은 그렇게 했다.
황금색 빛무리가 번득였다.
쾅!
바렌이 몸에 힘을 줌과 동시에 두 사람을 묶고 있던 사슬이 끊어졌다.
스트레칭하듯 어깨를 돌리던 세크리트가 말을 이었다.
“자네를 나무라는 건 아닐세. 그런 시대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참극도 지극히 일부일 뿐 전반적으로는 평화로운 세상이지. 평온 속에 여유로워 지는 것은 절대로 나쁜 게 아니야.”
세크리트의 시선은 절벽 아래 마을에 머물러 있었다.
북풍단의 기반이 되는 마을에서는 날카로운 종소리가 쉴새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마도 요새에 무슨 일이 생긴 걸 알아차린 것일 터.
이대로라면 무장한 마을 주민들과도 싸워야 할 판이었다.
“다만 아직도 볕이 들지 않는 땅은 존재하네. 악연과 증오가 오래도록 얼키고설켜서 더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땅이. 이런 곳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매듭을 단번에 잘라낼 영웅이 필요해. 로난과 메이지 아셀 자이파 님이나···”
세크리트가 주머니에서 분필을 꺼내들었다.
바렌을 인간으로 바꿀 때 사용했던 그 분필이었다.
북실북실한 꼬리가 흔들릴 때마다 각종 약재들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마법진을 완성한 세크리트가 손가락으로 바렌의 배를 찔렀다.
“바로 자네 같은 영웅이.”
“······저는 그런 위인이 못 됩니다.”
“웃기지 말게. 자네가 개발한 포션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했는지는 알고 있을 텐데? 어마어마하게 쌓아 올린 부조차도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사용했지 않은가.”
세크리트가 코웃음쳤다.
그는 솔직히 거인을 베어낸 로난만큼이나 바렌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대부호였던 바렌은 누구보다 재산을 가치 있게 사용했고 최후의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 중에서 바렌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용의 목을 베고 공주를 구해야지만 영웅이 아닐세. 하지만 불공평하게도 자네에게는 그럴 힘도 있어. 바렌 자네는 내가 본 그 어떤 웨어라이온보다 강인한 육체를 타고났네.”
“세크리트….”
“겸손은 그만. 기껏 살도 빠졌는데 멋 좀 부리고 오게나.”
세크리트가 손뼉을 쳤다.
마법진의 문양에 따라 빛이 일어났다.
저주를 말소시키는 기운이 바렌의 다리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건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네?”
“자네가 진정 막아야 할 상대는 블란타 따위가 아닐지도 몰라.”
목소리가 진지했다.
바렌이 무슨 뜻이냐며 되물어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주문을 읊는 내내 세크리트의 시선은 자이파가 분투 중일 요새에 고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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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이 거세지고 있었다.
“뭐고 벌써 끝이가?”
블란타가 코웃음쳤다.
막 싸움을 끝낸 그의 몸은 붉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수십 명의 수인들은 싸늘한 시체가 된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러게 적당히 개겼어야지. 주제를 모르니까 죽는기라.”
“컥···커거억····”
블란타의 발밑에는 그와 같은 웨어팬서 한 명이 깔려 있었다.
오늘의 유일한 생존자.
쳐다보는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다는 이유로 맹인이 된 사내였다.
“어떻게···그럴 수 있는 거냐···어떻게 동포를 그토록 무참하게····”
웨어팬서가 흐느꼈다.
떨려오는 목소리에서는 감출 수 없는 증오가 배어났다.
그와 함께 납치당한 고향 친구들은 모두 블란타에게 살해당했다.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산 채로 팔다리를 잡아 뜯던 블란타의 모습이 아직도 선했다.
“음? 투기장에 가족이나 친구라도 있었나? 미안한데 하도 많이 죽여서 누군지 모르겠다.”
“이런···쿨럭 짐승 같은 놈···!”
“짐승이라 아주 틀린 말도 아니제.”
블란타가 웃었다.
욕구에 충실한 삶을 추구하는 그에게는 칭찬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사내를 짓밟은 다리에 체중을 더했다.
“반대로 묻건데 그럼 니는 여기 갇혀 있으면서 니가 사람이라 생각했나?”
“컥···!”
“그러니까 니네 좆밥들이 죽고 눈깔까지 뽑히는기라. 즐기는 법을 모르면 노력이라도 했어야지. 짐승이 되기 위해서.”
내장이 눌린 사내가 각혈했다.
당장에라도 일어나서 놈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중상을 입고 시력조차 상실한 그로서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블란타가 임무도 잊은 채 낄낄거리던 와중이었다.
“블란타. 거기까지입니다.”
갑자기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꼬?”
블란타가 고개를 돌렸다.
눈보라 몰아치는 벌판 위에 웬 덩어리가 솟아 있었다.
하도 기골이 장대해서 처음에는 무슨 바위인 줄 알았다.
블란타는 눈을 두어 번 비비고 나서야 저게 자신과 같은 수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니는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나.”
“허억!”
블란타가 웨어팬서에게서 발을 치웠다.
위협을 감지한 그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눈발이 한순간 잦아들자 덩어리의 형체가 온전히 드러났다.
웨어라이온.
그 웨어타이거와 함께 가장 흉폭하다 알려진 수인 종족.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는 거구의 사자가 조용히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자도 잡혀왔었나? 기억이 안 나네.”
“블란타.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기회?”
“네. 살육을 멈추고 투항하세요. 북풍단은 오늘부로 해체될 겁니다. 당신들의 수장은 절대로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바렌이 차분하게 말했다.
풍성한 갈기가 눈보라 속에서 춤추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발언이었지만 블란타는 웃지 않았다.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저 덩치는 어마어마한 강자였다.
몸에는 군살이 조금 붙어 있기는 했지만 그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근육은 마치 거장의 조각 같았다.
블란타가 얼굴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았다.
“등치를 보니 어디서 방귀 좀 뀌고 살았나베. 싫다면 어쩔낀데?”
“여기서 당신을 처리할 수밖에요.”
“하 처리라.”
블란타가 헛웃음쳤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완전히 바렌을 돌아본 그가 자세를 낮췄다.
“건방진 새끼···그렇게 잘났으면 한번 해 봐라. 니 정도면 고기 씹는 맛 좀 나겠네.”
저런 말을 듣고 물러나면 남자도 아니었다.
블란타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북풍단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오러가 그의 혈관을 타고 퍼져 나갔다.
“부탁인데 제발 허무하게 가뿌지 마라.”
전투에 돌입한 그의 동공이 가늘게 좁혀졌다.
전신의 근육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피가 눌어붙은 주먹 위로 검붉은 화염이 터져 나왔다.
진짜 불이 아닌 오러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니는 내가 산 채로 가죽을 벗겨서 카페트를 만들어 줄 테니까!”
블란타가 포효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요새 너머까지 울려 퍼졌다.
화염이 한층 더 거세졌다.
팔을 타고 올라온 불길은 이윽고 블란타의 몸 전체를 휘감기에 이르렀다.
찰나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역시····’
바렌이 나지막이 감탄했다.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속도였다.
붉은 꼬리를 끌며 날아오는 웨어 팬서의 모습은 지옥에서 발사된 탄환 같았다.
‘살을 빼기 전에 싸웠다면 정말로 졌을 수도 있겠군요.’
세크리트의 판단은 옳았다.
괜히 자이파의 무장 친위대가 아니었다.
북부에서 가장 강한 전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닌 듯했다.
‘새끼. 결국 허세였구마.’
쇄도하던 블란타가 입꼬리를 올렸다.
바렌은 어떤 움직임도 없이 제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표정에도 일체 변화가 없는 것이 공포로 얼어 버린 것이 분명했다.
흥미를 잃은 블란타가 발톱을 세웠다.
원래는 주먹으로 후려칠 생각이었지만 단번에 심장을 뽑아 버리는 편이 깔끔하고 좋을 것 같았다.
“죽어라!”
블란타가 외쳤다.
날카로운 발톱이 바렌의 가슴팍을 파고들기 직전이었다.
허벅지 옆에 머물러 있던 바렌의 손이 한순간 희미해졌다.
블란타의 눈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
블란타의 눈이 커졌다.
시야를 거의 다 가린 그림자는 거대한 주먹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충돌할 터였다.
위기를 감지한 몸이 반사적으로 멈추려 들었지만 바렌의 주먹은 이미 그의 안면 한복판을 파고들고 있었다.
느려졌던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순간.
콰아아아앙!!!
블란타가 바닥에 처박혔다.
건물을 철거할 때나 들릴 법한 굉음이 지천을 흔들었다.
주먹의 궤도를 따라 밀려난 그의 머리는 노면을 뚫고 박혀 버렸다.
숨을 고른 바렌이 담담하게 말했다.
“유감이군요.”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머리만 파묻힌 블란타의 몸은 감전된 것처럼 경련하고 있었다.
그를 휘감았던 불길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하아아….
바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도유망한 강자 그것도 동포를 이렇게 보내 버린 것이 참담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압도적으로 향상된 신체 능력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군요. 인간화가 이토록 효과가 좋았을 줄이야.’
웨어라이온의 본능이 날뛰고 있었다.
피가 끓어오르는 감각은 수십 년 전에나 느껴본 것이었다.
축 늘어진 웨어팬서의 주검 위로 새하얀 눈이 쌓이고 있었다.
바렌이 다음 행선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와중이었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오싹한 기운이 그를 엄습했다.
“······이건?!”
갈기가 뻣뻣하게 곤두섰다.
일순 경직된 근육이 위험한 적수의 등장을 경고하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바렌이 얼어붙었다.
전례가 없이 흉흉한 기운은 자이파가 교전 중인 요새로부터 퍼져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