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6. 짐승들(8)
#A36
“후우···아슬아슬했군. 제 시간에 맞췄어.”
자이파와 마주친 세크리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한참 걸려서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알맞게 도착해 주었다.
벙쪄 있던 바렌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세 세크리트 교수님? 이건 도대체···?”
“붙잡혀 오는 도중에 구조 신호를 보냈다네. 자네도 눈치채지 못한 걸 보니 대마법사의 주문이 썩 괜찮게 만들어진 모양이군.”
세크리트가 태연하게 끄덕거렸다.
그는 북풍단에게 납치당하는 와중 구조 요청 마법을 쏘아 올렸다.
온갖 위험한 곳을 전전하며 저주를 수집하는 세크리트를 위해서 아셀이 직접 만들어준 마법이었다.
“가장 근처에 있는 치안 유지군이 오기로 합의되어 있지. 그런 의미에서 여기 친구들은 참 운이 없군. 설마 자이파가 직접 올 줄이야.”
“그 제가 듣기로는 방금 술친구라고····”
“아아. 말 그대로일세. 아무래도 연배도 비슷하고 빈번하게 마주치다 보니 정이 들더군. 가끔 만나서 한 잔씩 하고 있다네.”
“전대 검성과 말입니까···굉장하군요.”
바렌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세크리트가 오랜 시간 북부를 돌아다니며 각지에 친분을 쌓아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자이파까지 술동무로 삼았을 줄이야.
그가 알기로 자이파에게 친구라 부를 만한 인물은 로난과 나비로제 말고는 없었다.
“맞아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그렇게 두들겨 맞았는데 괜찮을 리가 있나. 최소 석 달은 앓아누워야 있어야 할 것 같네.”
“그런···! 어서 여기서 탈출을···”
“됐네. 자네는 이미 충분히 힘써 줬어. 나머지는 저 호랑이에게 맡기자고.”
세크리트가 턱짓으로 자이파를 가리켰다.
검은 웨어타이거는 여전히 썰려나간 첨탑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와 바렌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세크리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둘 다 생각이 많겠지. 그렇지 않나?”
****
“씨바···진짜 좆됐네.”
블란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름다운 표범의 털가죽은 바늘처럼 곤두서 있었다.
첨탑 위에 서 있는 웨어타이거는 틀림없는 자이파 터르겅이었다.
그의 오러에 절단되었던 공간이 스멀거리며 복구되는 중이었다.
레테가 입을 열었다.
“······침착해라 블란타. 이럴 때를 대비해서 세워둔 작전이 있잖나.”
“알지···내도 안다. 아는데도 쉽지 않네.”
블란타는 자이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언월도가 서슬 퍼런 빛을 뿌리고 있었다.
“저 늙은이는 우째 기세가 더 흉흉해졌노?”
도저히 백 살 가까이 먹은 노장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같은 웨어타이거와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덩치가 컸다.
레테가 식은땀을 닦아냈다.
“일단 나는 가보겠다. 두 놈을 부탁하지.”
“알았다. 내한테 맞기라.”
“성공을 빌어라. 실패하면 우린 다 죽을 테니까.”
그 말을 남긴 레테가 요새 쪽으로 걸어갔다.
비장한 발걸음을 보아하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자이파 님 위험···컥!”
“쓸데없는 짓 마라. 니들 도망치려는 낌새 보이는 순간 뒤진데이.”
바렌이 경고하려 했지만 블란타에게 무산되고 말았다.
그는 화풀이하듯 살기를 발산하며 두 사람과 연결된 사슬을 움켜쥐었다.
목이 졸린 바렌과 세크리트가 켁켁거렸다.
여전히 자이파를 응시하던 블란타가 입술을 질겅였다.
“···맞제. 실패하면 우린 다 죽는다.”
자이파는 묵묵히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붉은 눈동자는 소싯적과 다를 것 없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썩 일어나지 못해?! 여기가 어디라고 쓰러지는 거냐!”
“죄 죄송합니다···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저 멀리 염전에서는 아직도 학대가 행해지고 있었다.
원체 거리가 있는지라 아직 자이파의 등장을 알아차리지 못한 탓이었다.
붉은 코트를 입은 인간이 가시 달린 채찍으로 소금을 나르는 수인들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건 네놈이 형편없는 탓이지. 염장 고기가 되기 싫으면 당장 일어나!”
“죄송합니다 부디 자비를···!”
시선을 옮긴 곳에서는 광산을 오가는 수인들이 보였다.
온몸에 분진이 엉겨붙은 수인들은 이미 원래의 털 색을 잃어버린 뒤였다.
핏물 섞인 기침을 연신 토해 봐도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무시와 재촉이었다.
“왜 이렇게들 힘을 못 써? 아까 말린 대구도 먹었잖아.”
“콜록 콜록! 고작 한 사람당 반 덩이씩 줘 놓고선····”
“불평불만 하지 마! 날 봐라 매일같이 두들겨 맞는데도 희망을 잃지 않잖아. 책임질 것도 없는 너희가 그렇게 엄살을 부리면 어쩌겠어?”
심지어 그들을 관리하는 것은 같은 수인이었다.
조금 전까지 블란타의 방에서 시가를 태우던 웨어베어는 뻔뻔스레 작업반장 행세를 하는 중이었다.
당하지도 않은 구타 이야기를 연신 떠들어 가면서.
“이건····”
그러한 풍경은 자이파로 하여금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했다.
불타는 고향 제국의 확장 정책과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 동포들.
짐승처럼 몰이사냥을 당한 끝에 살해당한 아내와 아들.
영원히 잊지 못할 악몽을 되뇌이던 와중이었다.
“다들 진형을 가다듬어! 절대로 실수하지 마라!”
“검성은 지나간 과거일 뿐 이제는 노괴일 뿐이다. 제압과 동시에 죽여라!”
첨탑 아래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옥상으로 올라온 북풍단이 자이파를 에워싸고 있었다.
상당히 바글거리는 것이 요새 바깥에 포진한 인원도 합친다면 수백 명은 되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일반적인 병장기와는 다르게 생긴 장비들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모두 수인을 상대하기 위해 자체 개발한 물건 같았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투지 넘치는 광경을 본 바렌이 혼잣말했다.
“다 다들 미쳐버린 건가요···?”
집단 최면에 걸린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자이파 터르겅이 어떤 인물인지 모르거나.
그렇지 않고서야 저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장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쳐도 모자랄 지경이거늘.
“북부는 인간의 것이다!”
“늙은 야옹아 뒷방에나 앉아있을 것이지 여기는 왜 기어들어온 거냐!”
자이파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급한 욕지거리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요새 옥상으로 올라온 인원이 세 자릿수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준비를 마친 북풍단이 마침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지금이다! 발사!”
“발사!”
복창이 뒤따랐다.
쇠뇌를 비롯한 각종 투사체가 일제히 자이파를 향해 쏘아졌다.
개중에서는 일전에 바렌과 세크리트를 납치할 때 사용되었던 물건도 있었다.
지근거리에 근접한 쇠뇌의 머리가 쪼개지며 그물이 튀어 나왔다.
마침내 자이파가 입을 열었다.
“좋아. 결정했다.”
동시에 언월도의 형체가 흐릿해졌다.
어디라 할 것 없이 사방으로 창날이 휘둘러졌지만 그 궤적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투사체로 이루어진 구(球)가 자이파를 삼키려던 차였다.
퍼어어엉!!
몰아치는 칼바람과 함께 모든 투사체가 공중에서 폭발했다.
그물은 잘게 썰리고 화살과 창은 두 동강이 났다.
이름 모를 기계장치들 역시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다.
“무 무 무슨!”
북풍단이 얼어붙었다.
투사체들의 잔해가 비처럼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자이파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괴물···!”
“말도 안 돼.”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중대장 역할을 하는 사내였다.
그가 얼어붙은 부하들을 향해 뭔가 지시하려던 차였다.
첨탑 위에서 뛰어내린 자이파가 사내의 머리 위로 착지했다.
콰직!
사람이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피보라가 튀었다.
창대를 바로잡은 자이파가 회전하며 언월도를 휘둘렀다.
잘 벼려진 창날이 원을 그리자 단원들의 목이나 얼굴 위로 붉은 선이 그어졌다.
“뭣.”
참격이 행해졌지만 이번에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뒤늦게 중대장의 압사를 눈치채고 반응하려던 찰나였다.
촤아아악!
붉은 선이 일제히 벌어지며 백 개의 머리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섬뜩한 파육음.
하늘을 향해 치솟는 백 줄기의 피보라.
희뿌연 구름과 대비되는 적색이 유별나게 붉었다.
생존자는 범위 바깥에 서 있던 일곱 명 뿐.
간신히 목숨을 건진 단원들이 무기를 내던지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 아아아아악!!”
“씨발 도망쳐!”
허나 자이파는 이미 결심을 내린 뒤였다.
언월도가 재차 휘둘러지자 일곱 명의 몸이 동시에 반 토막이 났다.
허무하게 널브러지는 시체들.
재차 쏟아지는 선혈의 폭우.
시선을 요새 아래로 내린 자이파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너희는 몰살이다. 한 명도 빠짐없이.”
****
“음? 너희가 왜····”
“허어억 두목!”
레테와 마주친 단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멈춰섰다.
그들은 막 요새를 떠나 도망치는 중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레테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전장으로 복귀해라.”
“무 무리입니다. 저건 이길 수 없어요 어떤 무기를 써도 먹히지 않습니다!”
앞장서던 중년인이 뒤를 가리켰다.
자이파가 날뛰고 있는 요새는 지옥으로 변해 가는 중이었다.
검은 참격이 외벽을 부수며 튀어나올 때마다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목숨을 던져서라도 시간을 끌어라. 내가 해결해줄 테니까.”
“이 상황에서 해결이라니···벌써 절반 정도가 죽었습니다! 그냥 후퇴를 허락해 주십···”
중년인이 울먹이며 말을 잇던 차였다.
오른손을 들어올린 레테가 방아쇠를 당기는 동작을 취했다.
푹!
손목 아래에서 발사된 독침이 그의 목에 박혔다.
“컥.”
비틀거리던 중년인이 쓰러졌다.
다른 도망자들의 면면이 창백하게 질렸다.
독침에 맞은 자리가 검게 변색되고 있었다.
더 볼 것도 없이 즉사였다.
“두 두목····”
“짐승놈들도 한 방에 보내는 극독이다. 인간은 스치기만 해도 끝이지. 내 손목 아래에는 이 독침이 정확히 스무 발 장전되어 있다.”
레테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킬 때마다 단원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레테가 눈을 부릅뜨며 일갈했다.
“돌아가라. 두 번 말하지 않겠다.”
“크으윽···!”
“미적거리지 말고 뛰어. 멈추거나 걷는 순간 쏴버릴 테니까.”
협상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원들은 눈물을 머금은 채 등을 돌렸다.
해방된 수인들이 문이나 창문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우워어!! 풀려났다!”
“자이파 만세! 인간 놈들을 말살해라!”
자유의 몸이 된 그들은 북풍단을 보는 족족 달려들고 있었다.
대부분은 제압당했지만 체격으로 밀어붙여 승리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끝내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한 웨어울프 한 마리가 쇠뇌를 쏴붙이던 여성 단원을 물어뜯었다.
“꺄아아아악!”
“크하하 피조차도 달콤하구나!”
피와 내장이 비산했다.
거리가 좁혀진 이상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인간이 수인을 이길 방법은 없었다.
그녀는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늑대의 손에 분해되었다.
피에 미쳐 날뛰던 웨어울프는 여인을 비롯한 단원 세 명을 찢어발긴 뒤에야 벌집이 되어 숨을 거두었다.
“자이파····”
참상을 지켜보던 레테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다시 분주히 걸음을 옮기던 그는 요새와 상당히 멀리 떨어진 감시탑에 도착했다.
그저 높기만 한 이제는 버려져서 누구도 접근하지 않는 건물.
그 옥상에는 방수포로 덮힌 무언가 설치되어 있었다.
“송곳니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이파.”
방수포를 들추자 공성전에나 쓰일 법한 거대한 발리스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에는 전혀 쓸 일이 없는 애물단지는 오직 이 순간을 기다리며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발리스타를 구성하는 부품에는 온갖 마법 주문과 글귀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장갑을 벗은 레테가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글귀를 쓰다듬었다.
[부디 훌륭한 공학자가 되기를]
투박하지만 정교한 글씨체.
문장을 새긴 사람은 더는 이 세상에 없었다.
레테는 심호흡을 한 뒤 조종간에 앉았다.
요새를 겨냥한 그가 씹어 삼키듯 읊조렸다.
“피는 피로 씻어야 하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