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9. 짐승들(1)
#A29
“자기. 더는 안되겠어.”
“음? 무슨 일입니까?”
소파에 누워 책을 읽던 바렌이 갸웃거렸다.
그는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집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책을 슬쩍 내리자 허리춤에 두 손을 올린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네메아.
제국 기사단을 역임했고 한때는 자이파의 직속 부관이었던 엘리트 웨어라이온은 이제 주부가 되어 살림을 챙기고 있었다.
“학부모 회의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끄으응차····”
바렌이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몸집이 워낙 비대해진 바람에 그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습관적으로 손을 뻗은 그가 협탁에 놓인 쿠키를 집어들었다.
바렌이 직접 만든 초콜릿과 꿀이 듬뿍 들어간 쿠키는 하나의 크기가 거의 인간이 쓰는 쟁반만 했다.
쿠키를 막 입에 가져가려던 찰나였다.
“멈춰. 오늘 몇 개째야?”
“네?”
“그 과자. 몇 개째 먹는 거냐고.”
“어디보자···세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요. 한 다섯 개 정도 먹었나?”
“틀렸어. 정확히 서른일곱개째야. 아직 정오도 안 됐는데 말이지.”
목소리가 무서웠다.
성큼성큼 다가온 네메아가 바렌의 손에서 쿠키를 낚아챘다.
“무 무슨 짓입니까?! 돌려 주세요!”
“안 돼. 자기는 당분간 군것질 금지야.”
“어째서 그런 잔혹한 말을···!”
“처음에는 귀여웠지만 이건 좀 심해. 최근에는 당신이 내 동족인지 의문이 들 지경이라구. 이 뱃살 좀 봐. 이게 웨어피그지 어떻게 웨어라이온이야?”
“커헝!”
네메아가 바렌의 뱃살을 잡아당겼다.
아주 두툼한 것이 비육우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감촉이었다.
한때 제국 최고의 멋쟁이로서 명성을 떨치던 사람의 몸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바렌이 턱살을 푸들푸들 떨며 호소했다.
“아 아파요! 그리고 부인. 이건 뱃살이 아니라···”
“덕이라는 농담은 집어치워. 나는 요즘 진지하게 각방 쓸까 고민중이라구. 자기가 침대 면적을 얼마나 차지하는지 알아? 혹한기 훈련도 아닌데 차디찬 변방에서 웅크리고 자는 내 기분을 아냐고.”
“그 그런 고충이 있었다니. 저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아···솔직히 말하면 그건 참을 수 있어. 나는 자기를 사랑하니까. 그런데 요즘은 도저히 자기 건강이 걱정되서 일이 손에 안 잡혀. 애들도 한창 클 때인데 고혈압이나 당뇨로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가정을 이루었으면 더는 목숨이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지. 제국에서 손꼽히는 대부호라도 건강을 잃으면 다 끝이라고.”
확실히 부관 출신이라 그런지 언변이 뛰어났다.
심지어는 죄다 맞는 말이라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바렌은 한 마디 대꾸도 못한 채 꼬리를 말고 그녀의 연설을 경청했다.
“아 알았어요 부인. 내가 잘못했습니다. 살을 빼 보지요.”
“웃기지 마. 당신이 그렇게 공표한게 올해만 벌써 14번째인거 알아?”
“이번에는 정말로 빼겠습니다! 저 바렌 파나시르 이래뵈도 소싯적에는 대륙을 누비던 모험가였다구요. 부인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갈 테니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바렌의 손이 쿠키를 향해 슬금슬금 나아갔다.
이쯤 되면 중독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철썩!
채찍처럼 날아온 네메아의 꼬리가 그의 손등을 때렸다.
“커흥!”
“이 상황에서도 정신 못 차리지?! 역시 안 되겠어. 특단의 조치를 내릴 수밖에.”
“트 특단의 조치?”
예감이 별로 좋지 않았다.
바렌이 침을 삼키며 긴장하던 차였다.
갑자기 서재의 문이 열리더니 수염 긴 노인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그가 바렌에게 인사했다.
“반갑네. 바렌 군.”
“교 교장 선생님?!”
바렌의 눈이 커졌다.
공간 마법의 구사자이자 황립 필레온 아카데미의 교장인 크라바 크라티르였다.
영혼의 동반자인 꿈새 마르페즈가 그의 품에 안긴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 피이···피이이유····
“맙소사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 계셨던 겁니까?”
바렌이 벌떡 일어났다.
압사의 위기를 겪던 소파가 숨을 돌리듯 삐걱거렸다.
크라티르가 말했다.
“30분쯤일까···네메아 양이 워낙에 간곡히 부탁해서 오게 되었지. 여기서 대화를 엿듣고 있다가 조건이 충족되면 나오기로 했다네.”
“조건이라니요?”
“자네가 살을 빼겠다 선언한 직후에 군것질을 하려 드는 게 조건이었지. 나는 아니기를 바랬지만 네메아 양의 예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떨어지더군. 자네도 참 한결 같은 남자야.”
크라티르가 껄껄거렸다.
바렌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그가 뭐라 변명하려던 찰나 크라티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눈앞의 공간이 뒤틀리며 거대한 차원문이 나타났다.
“자 그럼 이제 들어가 보게나. 최고의 탐험가였던 만큼 짐은 별달리 필요 없겠지.”
“···예?”
“이게 바로 특단의 조치일세. 확실히 내가 봐도 자네는 조금 과하게 듬직해진 감이 있어. 건강과 필레온 아카데미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살을 빼는걸 권장하겠네.
“아 아니. 방금 뺀다고 말했잖습니까. 굳이 이러실 필요까지는···!”
“애들한테는 이미 다 말해놨어. 육아랑 영지 관리는 나랑 직원들이 다 할테니까 자기는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네메아가 끄덕였다.
동시에 벙쪄 있는 남편을 차원문 쪽으로 밀었다.
방심하고 있던지라 바렌은 그대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커허어엉! 부 부인! 교장님!”
“미안해 자기.”
“이런 선택을 한 나를 용서해 주시게나. 바렌.”
“저를 어디로 보내는 겁니까! 안 돼!!”
바렌이 애처롭게 외쳤지만 허사였다.
차원문은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킨 뒤 닫혀 버렸다.
크라티르가 수염을 매만지며 웃었다.
“허허 개학식 날에는 조금 더 날렵해진 모습으로 만나면 좋겠군. 이거 기대되는구먼.”
“감사합니다 교장님···그이 스스로는 도저히 못뺄 것 같아서 부탁드린 건데 괜찮겠죠?”
네메아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다 못해 강경책을 쓰기는 했다만 그래도 사랑하는 남편이었다.
크게 다치기라도 한다면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크라티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고말고 네메아 양. 설령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살아 돌아올 친구일세.”
“설마 그 정도라고요? 그러고 보니 방금 탐험가가 어쩌고 하기는 했는데····”
“아 제대로 못 들었나 보군. 바렌은 황제 폐하의 초청을 직접 받아서 필레온에 들어왔네. 교수로 부임하기 전까지는 명망 높은 학자이자 탐험가였지. 그 친구가 개척한 오지나 항로만 해도 천 개는 족히 넘을 걸세.”
아직도 바렌을 처음 만났을 때가 선명했다.
온화한 인품이야 지금과 다른 것이 없었지만.
당시 그의 육체는 수인들의 신이 강림한 것이라 해도 믿어질 만큼 훌륭했다.
전신은 조각 같은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고 꼬리는 강철로 만들어진 채찍 같았다.
거칠게 나부끼는 흑갈색 갈기는 자이파 못지않게 야성적이었다.
‘솔직히 좀 무서웠지. 사람은 지금이 훨씬 더 좋아보이기는 한다만.’
푸딩처럼 변한 지금의 바렌도 나름 매력적이었지만 역시 문제는 건강이었다.
아무리 강인한 종족이라 할지언정 비만은 만병의 근원이었으니.
네메아는 크라티르보다 두 배 정도 키가 컸기 때문에 어깨를 두드려줄 수는 없었다.
마르페즈를 소파에 내려 놓은 크라티르가 그녀를 위로했다.
“그러니 걱정 말게 네메아 양. 부군은 훌륭하게 시련을 이겨내고 돌아올 테니까.”
****
“커흐아으억!”
차원문에서 빠져나온 바렌이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둥글둥글한 거구는 두 바퀴 가량을 구른 다음에 멈춰섰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아 안돼! 가지 마세요!”
차원문이 사라지고 있었다.
무거운 몸을 뒤뚱거리며 달려갔지만 공간의 균열은 바렌의 손이 닿기 직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아아아····”
바렌이 주저앉았다.
편하게 집에 돌아갈 방법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뒤늦게 치밀어 오르는 멀미감에 그가 구역질했다.
“우욱···!”
공간 이동의 부작용이었다.
오랜만에 겪는지라 역겨움이 유별났다.
바렌은 대낮에 먹은 쿠키를 모조리 게워낸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여기는····”
포만감이 사라지자 이성이 돌아왔다.
바렌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온통 검은 돌이 가득한 땅에는 풀 한포기 없었다.
파란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중충한 하늘 아래로 부스러기 같은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곳곳에 쌓인 눈무더기 이따끔 보이는 야생동물의 뼈.
신록이 무성한 제도와는 정반대의 풍경이었다.
휘이이잉!
불현듯 북녘에서 불어온 강풍이 바렌을 휘감았다.
“으윽?!”
바렌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한기였다.
두터운 털가죽을 타고난 웨어라이온이 추위를 느끼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겨울에 북부를 돌아다녀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가혹해도 그건 아닐 겁니다.’
불길함을 애써 삼킨 바렌이 걸음을 옮겼다.
몸이 하도 무거워지는 바람에 조금만 움직여도 무릎이 아팠다.
머지않아 드높은 바위에 올라선 그가 다시 한 번 주변 지형을 살폈다.
“오오···맙소사.”
시야가 넓어지자 아까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렌의 시선은 저 멀리 해안선에 고정되어 있었다.
검푸른 바다 위로 얼음이 떠다니고 있었다.
핫초코에 넣어 먹는 마시멜로를 연상케 하는 유빙(流氷)은 볼 수 있는 장소가 굉장히 한정된 요소였다.
바렌이 탄식했다.
“······헤이란.”
한때 로난과 아데샨이 찾아왔던 극지.
작은 마을조차 없는 대륙의 최북단.
여기보다 추운 곳은 마경이라 불리우는 망령의 바다밖에 없었다.
“이건···이건 정말 너무하잖습니까.”
바렌이 울먹거렸다.
아무리 살이 쪘다지만 이건 너무 비인도적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헤이란에 떨궈 버리다니.
제국까지는 잠을 안 자고 전속력으로 달려도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물론 살이 빠지기는 할 터였다.
살아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시금 불어온 찬바람에 바렌의 이빨이 딱딱 부딪혔다.
“으으···일단 추위부터 어떻게 해야겠군요.”
이대로 가다가는 다이어트고 뭐고 얼어 죽을 판이었다.
외투도 뭣도 없이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와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죽이나 은신처를 구해야 해.
정신을 다잡은 그가 다시 이동하려던 차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젠장···허억! 저리 꺼져라 이놈들아!”
“크아아악! 크악!”
바렌이 고개를 돌렸다.
웬 여우 수인 한 명이 늑대 무리에게 뒤쫓기고 있었다.
털이 유별나게 풍성한 것을 보아하니 북부에서도 유별나게 추운 곳에서만 살아가는 털실늑대였다.
“이런 위험하군요···!”
바렌은 곧바로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힘을 증폭시키는 황금빛 오러가 그의 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평소에는 계단 오르는 것조차 버거운 그였지만 오러와 함께라면 하루에 10분 정도는 초인이 될 수 있었다.
거리를 좁히는 데는 두 번의 도약이면 충분했다.
바렌은 착지와 동시에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충격파와 함께 지면이 뒤집혔다.
“깨갱!”
“캥!”
부채꼴로 솟구친 지반이 늑대들을 덮쳤다.
흙과 바위의 급류는 거대한 강보가 터지는 순간을 연상케 했다.
간신히 휩쓸리지 않은 서너 마리만이 깨갱거리며 도망쳤다.
오러를 해제한 바렌이 웨어폭스를 돌아보았다.
“거기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은 없나요?”
“······덕분에. 엄청난 괴력이군.”
웨어폭스가 감탄했다.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 힘이었다.
문득 바렌에게 감사를 표하려던 그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잠깐 당신은····”
“으음?”
바렌도 마찬가지였다.
웨어폭스의 인상착의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그것도 굉장히.
서로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바렌 교수?”
“저주학과의 세크리트 교수님 아니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