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8. 푸른 봄을 그대에게(10)
#A28
테러의 배후에 가르가렌스가 있었다는 사실은 엄중한 비밀로 부쳐졌다.
사건도 원만하게 잘 해결됐거니와 굳이 불안감을 조성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란세와 세치카도 폭발이 테러범들의 소행으로 알고 있었기에 진실을 아는 자는 나비로제와 불의 어머니 뿐이었다.
나비로제에게 사정을 전달받은 바렌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화염궁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날 뻔 했다고요?!”
“네. 란세와 세치카가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일단은 교수님만 알고 계시다가 수학여행이 끝나는 대로 두 사람을 표창하는 것이 맞다 봅니다.”
“아아아···로난 님도 없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바렌이 뒷목을 부여잡았다.
현기증이 나는 기시감은 특급 모험 동아리의 고문으로 있을 때 느낀 것과 흡사했다.
란세 일행이 돌아온 것은 다음날 새벽이었다.
나바르도제와 밤새 수다를 떨던 그들은 아침 점호를 하는 학생들 틈새에 몰래 숨어들었다.
“란세 어젯밤에는 어디에 짱박혀 있었냐? 자는 줄 알고 치약 바르러 가니까 없던데.”
“그런 걸 왜 발라 이 멍청아. 잠깐 아버지 친구분 좀 만나고 온다고 말했었잖아.
“아아 그랬지. 어쨌거나 우울한 아침이다. 화염 주머니···아니 나바르도제 님을 꼭 뵙고 싶었는데····”
윌럼프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도 세 사람의 외출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란세와 세치카가 워낙에 뒤처리를 야무지게 하기도 했고 화염궁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은 덕이었다.
“그래서 세치카. 어제 란세랑 키스했어?”
“키 키스는 무슨···걔 만나러 갔다온 거 아니라니까.”
“거짓말하지 마 요것아. 나로인가 하는 전학생이 쏙 꼬셔갈까 봐 선수 치려 했던 거잖아. 그래서 첫키스의 감상은? 혀도 넣었어?”
“아악! 아니라고!”
세치카의 머리카락이 불처럼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을 추궁하는 친구들을 물리치느라 제법 애를 써야 했다.
보고 있자면 저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광경이었다.
쩔쩔매던 두 사람을 감상하던 나비로제가 작게 혼잣말했다.
“닷새라.”
그녀가 소녀 나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진작에 20대의 외모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녀는 나바르도제에게 수학여행이 끝날 때까지만 이 모습으로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친구는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
이후의 여행 일정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나로. 이 목걸이 어때? 별로 세치카 취향은 아니려나? 너는 같은 여자애니까 조언을 좀 구하고 싶은데····”
“그 아이는 네가 뭘 줘도 좋아할 테니까 걱정 마라. 길가의 잡초를 뜯어다 줘도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뛸 거다.”
“그 그럴 리가. 장난치지 말고 조언해줘. 참고로 그냥 고마워서 주는 거지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오해하면 안 돼!”
“하아······이런 부분까지 아버지를 닮을 필요는 없는데.”
나비로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고구마를 다섯 개쯤 우겨넣은 것 같은 답답함은 로난과 아데샨에게서 이미 느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새로 사귄 두 친구에게 끌려다니며 아드렌에서의 관광을 만끽했다.
【아아 누군지 알겠다. 너희들은 로난과-】
【메이지 아셀의 후손들이지?】
“마 맞아요···그런데 어느 쪽이 용왕님이죠?”
【하하 그 아이들도-】
【같은 질문을 했었지.】
다함께 아드렌을 돌아다녔고.
“자 여기가 바로 대마법사 아셀 님이 아드렌의 추락을 막은 자리입니다. 바닥에 있는 마법진은 극악무도했던 네뷸라 클라지에의 것으로···”
“나로. 지루한데 우리 디저트나 먹으러 갈래? 봐둔 가게가 있거든.”
“그래도 네 아버지의 이야기인데 듣는 게 좋지 않겠나?”
“으웩. 내가 저걸 몇 번이나 들었다고 생각해? 동생들이 좋아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식탁에서 아드렌 서사시가 나온다고. 거인 성대모사를 하는 게 내 역할이라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가끔씩은 땡땡이도 쳤다.
특별할 것 없는.
정말로 평범한 십대들의 수학여행이었다.
너무 즐거워서 시간 가는 것도 몰랐다는 것만 제외하면.
어느새 찾아온 마지막 날.
학생들을 배웅하러 나온 나바르도제가 날개를 펼쳤다.
【잘 가라. 대지의 아이들아. 너희 모두가 언젠가 이 별을 밝힐 여명이 되기를.】
“우아아아···!”
학생들이 일제히 감탄을 터트렸다.
본모습으로 돌아간 나바르도제는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활짝 펼친 날개의 폭은 아드렌의 길이를 아득하게 초월하고 있었다.
“불의 어머니여!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이 별의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윌럼프와 센센은 눈물까지 흘리며 갑판에 머리를 박아 댔다.
나바르도제의 탈피가 예상보다 빨리 끝나서 그들은 꿈에 그리던 알현을 할 수 있었다.
비록 기념 촬영은 못 했지만 그 압도적인 피지컬은 영원히 소년들의 망막 뒤편에 아로새겨져 있을 터였다.
“저 저게 본모습이시구나···엄청 크다아.”
“용왕님보다 큰 드래곤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긴 저 정도는 돼야 화염 주머니가···”
“화염 주머니?”
“아 아니야. 그런 게 있어.”
란세와 세치카 역시 서로의 소매를 꼭 잡은 채 전율하고 있었다.
인간 형태도 여러모로 충격적이었지만 역시 원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제 끝인가.”
무표정한 것은 나비로제 뿐이었다.
그녀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멀어져 가는 아드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안간 나바르도제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역행은 전성기가 아닌 그리워하는 시절로 돌아간다고 했었지.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야 슬슬 알 것 같았다.
란세와 세치카를 돌아본 그녀가 옅게 미소지었다.
“이해가 좀 되는군.”
본인도 모르게 그리워하고 있던 모양이다.
전쟁터가 아닌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청춘을.
원래대로라면 다시 돌아올 리가 없었던 푸른 봄을.
나비로제가 두 사람을 불렀다.
“어이.”
“응? 무슨 일이야?”
“덕분에 즐거웠다. 친구랑 논다는 건 참 즐거운 일이더군.”
“······갑자기?”
란세가 갸웃거렸다.
어차피 돌아가면 또 같이 놀건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쪼르르 달려온 세치카가 그녀에게 팔짱을 꼈다.
“나도 엄청 즐거웠어! 덕분에 잊지 할 경험도 했고. 히히 다음에도 꼭 같이 오자.”
“올 기회가 있다면.”
“당연히 있을 거야. 나로 너는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하니까. 란세랑 나도 뒤쳐지지 않도록 열심히 할게. 그럴 거지 란세?”
“다 당연하지. 다음에는 안 질거야.”
란세가 주억거렸다.
결연한 표정을 보아하니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많은 걸 느낀 듯했다.
그래 아이들이란 이렇게 성장해 나가는 거지.
두 사람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나비로제가 픽 웃었다.
“···그래. 언젠가 다시.”
하늘이 맑았다.
바람길을 탄 비공정은 학생들을 안전하게 필레온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날 이후 란세와 세치카가 나로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
한달 뒤.
“으후 드디어 끝났네. 뭘 이렇게 많이 쌓아놨어요?”
로난이 이마를 훔쳤다.
땀에 흠뻑 젖은 민소매 아래로 맹수처럼 잘 단련된 근육이 비치고 있었다.
그는 막 옛 스승을 도와 짐 정리를 마친 참이었다.
나비로제가 말했다.
“아무래도 양이 좀 되지. 고생했다.”
“고생은요. 오랜만에 땀 빼서 좋았어요. 그나저나 이게 도대체 몇 년치람.”
로난이 혀를 내둘렀다.
정리하는 내내 생각했지만 정말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엉망진창이던 나비로제의 집은 이제 박물관처럼 깔끔한 공간이 되었다.
제자들에게 받은 선물은 모두 특수 제작된 수납장에 전시되어 있었다.
“글쎄다. 내가 교단에 섰을 때부터 모은 거니까···20년은 족히 넘는군.”
“징글징글하긴 하네요. 그래서 별 물건이 다 있는 거구나···맞아 아까 보니까 무슨 속옷도 있던데 그건 어떤 변태가 선물해준 거에요?”
“···그러게나 말이다.”
나비로제가 고개를 내저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아데샨이 선물해줬다는 사실은 숨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다시 입어 보니 사이즈가 맞았지만 결국 입지 못하겠어서 넣어 놨다는 사실은 더더욱.
“둘 다 고생했어요. 여기 물.”
“아 고마워.”
그때 아데샨이 냉수를 가져왔다.
로난과 마찬가지로 민소매 차림인 그녀는 막 대청소를 마친 참이었다.
지위를 생각해 볼때 굉장히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청소하는 대장군이라니.
냉수를 단번에 비운 나비로제가 질문했다.
“맞아. 로난 이놈은 그렇다 쳐도 너는 정말 괜찮은 거냐. 나랏일을 해야 할텐데.”
“여름휴가라 상관 없어요. 오랜만에 교관님도 보고 싶었구요.”
“덥다. 떨어져라.”
아데샨은 인형이라도 다루듯이 나비로제를 끌어안았다.
키 차이가 많이 나서 품에 쏙 들일 수 있었다.
문득 그녀를 내려보던 아데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교관님. 뭔가 예뻐진 것 같아요.”
“난 원래 예쁘다.”
“그건 맞는데 피부의 탄력이 더 좋아졌다 해야 하나? 으음···분명히 변하기는 했는데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그리고 머리 엄청나게 잘 어울려요.”
“그런가. 네 안목이면 정확하겠지.”
나비로제가 실소했다.
그녀는 아드렌에서 자른 단발머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란세와 세치카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자른 것이었지만 막상 지내 보니 시원하고 괜찮았다.
아데샨이 손뼉을 쳤다.
“참. 혹시 조카분의 근황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조카?”
“네. 이름이 나로였나? 아드렌에서 친해진 친구라는데 도통 보이지가 않는다고 란세가 하소연해서요.”
“아아. 그 애 말인가···미안하지만 당분간은 안 올 것 같은데.”
나비로제가 고개를 내저었다.
마법이 풀린 이상 다시 소녀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그럼 어쩔 수 없죠. 많이 보고싶어 한다고만 전해 주세요.”
“그러지.”
란세와 세치카가 이미 몇 번이고 자신을 찾아왔지만 그때도 같은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그건 말 그대로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사건이었으니.
불현듯 거실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던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는 자신과 슐리펜의 사진 옆에 있는 가장 최근에 걸린 액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 이게 저번 수학여행에서 찍은 사진이죠? 란세 놈 방에도 붙어 있던거 같은데.”
“그래. 테러를 막은 직후에 찍은 거다.”
“나바르도제 님이랑 사진을 찍다니 운도 좋네 우리 아들. 역시 명불허전이라니까.”
로난이 휘파람을 불었다.
사진으로나마 불의 어머니의 용안을 뵙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사진 속에서는 나로를 포함한 꼬마 삼인방과 나바르도제가 가족사진을 연상케 하는 구도로 찍혀 있었다.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그녀의 중량감은 학생 무렵에 봤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농담이 아니라 한쪽이 내 머리보다 큰 것 같은데.
“란세 녀석이 좋아했겠네요. 그나저나 이 나로라는 애 정말로 누님 딸 아니에요? 닮아도 너무 닮았는데.”
“왜 멀쩡한 처녀를 애엄마로 만드는 거냐.”
“아니···그래도 이건 진짜로····”
로난이 혀를 내둘렀다.
사진 속의 소녀는 너무 닮은 나머지 나비로제의 어릴 적을 보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러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한참이나 사진을 감상하던 로난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그래도 누님이랑 다른 점은 하나 있네요.”
“뭐가 말이냐.”
“얘는 웃는 게 엄청 예뻐요.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구만.”
로난이 액자를 툭툭 두드렸다.
나로는 란세와 세치카의 사이에서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만들고 있었다.
자세는 조금 어정쩡했지만 표정만큼은 썩 근사했다.
“웃는 게 예쁘다고?”
“네. 누님도 이렇게 좀 웃으면 좋을 텐데.”
나비로제는 말없이 액자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과연 로난의 말대로였다.
내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화사한 웃음이었다.
무심결에 그녀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옆에 있던 아데샨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교관님 설마 방금 따라하신 거에요?”
“윽.”
나비로제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
아데샨은 귀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달아오른 얼굴을 쓸어내리던 나비로제가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끄럽다. 다 끝났으면 이제 가 봐라.”
“에이 쌀쌀맞게 그러지 말고 밥이라도 먹어요. 이렇게 셋이 모인것도 오랜만인데.”
“맞아요 교관님. 제가 살게요.”
“웃기지 마라 솜털들아. 내가 그 정도로 못 벌지는 않아.”
“오 그럼 누님이 사는 거에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비싼 거로 골라라. 이번에 벌이가 좀 있었으니까.”
나비로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용왕 아지다하카는 아드렌을 구한 보답으로 자신의 보물 창고에서 궤짝 다섯 개만큼의 금화를 가져가는 것을 허락했다.
나비로제는 거절하지 않았고 지금 필레온에서 그녀보다 부유한 인물은 몇 없었다.
“비싼 거라···딱히 땡기는 게 없는데 필레온 구내 식당은 어때요? 못 먹은지 엄청 오래됐는데.”
“죽고 싶은 게냐. 나는 매일 거기서 먹는다.”
“아 그랬지 참. 그러면···”
“자 자. 일단 나가서 고민할까요 우리?”
세 사람은 식사 메뉴로 옥신각신하며 밖으로 나섰다.
쏟아질 것처럼 푸르른 하늘이 제도 위로 펼쳐져 있었다.
전함처럼 거대한 뭉게구름 날씨가 그렇게 덥지 않아서 여름보다는 늦봄에 가까운 날씨.
돌이켜 보면 그 두 아이에게는 참 많은 걸 받았다.
하늘을 올려본 나비로제가 작게 중얼거렸다.
“청춘이군.”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데샨이 물었지만 나비로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도 모르게 지어지는 미소를 숨김 없이 지어 보였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꼭 여름에 피어나는 해바라기를 연상케 했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역시 닮았는데···진짜 딸 아니에요?”
“시끄럽다. 가자.”
나비로제가 앞장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절정에 달한 매미의 노래가 뒤늦게 푸른 봄을 맞이한 그녀를 축복하듯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