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5. 푸른 봄을 그대에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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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붉었다.
한층 격렬해진 화염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바르도제의 껍질이 변화한 불꽃이 가르가렌스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본래 무정형이던 그의 육신은 서서히 원래 모습을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참으로 기나긴···인고의 시간이었다.】
가르가렌스가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견뎌온 나날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모든 사건의 발단은 로난의 아버지인 구원자에게 뿔을 잘린 것이었다.
힘을 모아 두는 기관이자 자존심의 상징인 뿔을 잃은 것은 가르가렌스에게 견딜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는 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말 그대로 미쳐 날뛰었고 결국 패악질을 보다 못한 나바르도제에게 힘 대부분을 빼앗기고 추방당했다.
‘어머니도 참 가혹하셨지. 버러지들의 도시를 대여섯 개 불사른게 무슨 대수라고고.’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가르가렌스는 나름 쾌적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힘을 거의 다 잃었어도 그는 굴지의 레드 드래곤이었으니.
일반적인 드래곤처럼 레어를 만들고 주변의 영주 노릇을 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느 시커먼 용 한 마리가 자신을 찾아오기 전까지는.
【오르세···여기서 나가면 가장 먼저 네놈을 찢어 죽여주마.】
가르가렌스가 이를 악물었다.
다시 생각해도 온몸의 비늘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갑자기 쳐들어온 오르세는 재활치료에 매진 중이던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조금만 더 늦게 몸을 정령화했다면 그대로 절명했을 터였다.
‘빌어먹을 몸 상태만 정상이었어도···!’
그 뒷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었다.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수정에 갇힌 가르가렌스는 십 년이 넘도록 고독과 싸워야 했다.
어느 정도 힘을 되찾고 자신의 존재력을 과시할 수 있게 된 다음에야 이번 부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나저나···어머니는 여전하군. 도저히 다 흡수할 수는 없겠어.】
회상을 마친 가르가렌스가 헛웃음을 쳤다.
벌써 전성기의 절반 가량 되는 힘을 되찾았음에도 불길이 마를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고작 껍질에서 나오는 마나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을 낳아 준 어미였지만 말도 안 나오는 괴물이었다.
가르가렌스가 말했다.
【어머니. 이제부터 내가 뭘 할 건지 아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탈피 중인 나바르도제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해묵은 껍질을 벗겨내는 중이었다.
가르가렌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먼저 나가서 보이는 놈들을 전부 태워죽일 거다. 잠깐이나마 머물렀던 고향에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건 싫거든. 어머니는 이 꼴이시고 형제들은 각국에 흩어져 있으니 나를 막을 존재는 아무도 없지.】
가르가렌스는 아드렌을 불바다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한때 붉은 죽음이라는 이명으로 불리던 그였다.
전성기의 힘만 되찾는다면 누구도 자신을 막을 수 없을 터였다.
【그 다음은 필멸자들의 세상이다. 장담컨데 수많은 동포가 나를 지지할 거야. 근래 혼란한 시기를 겪어서 다같이 미쳐버린 것 뿐이지 드래곤은 결코 다른 미물들과 공생할 수 있는 종족이 아니니까. 파괴야말로 우리의 본질이거든.】
【·······】
【물론 어머니를 이길 수는 없겠지. 평생 도망치게 될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어. 중요한 건 이 끔찍하리만치 따분한 평화가 파국을 맞이하는 거니까!】
가르가렌스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갈수록 힘이 차오르며 감정이 고조된 탓이었다.
빠르게 재생하던 그의 육신은 이제 뿔과 꼬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원복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전성기의 힘을 완전히 되찾을 터였다.
【누구도 나를 방해할 수 없다! 용은 군림하고 땅을 기어다니는 미물들은 우리의 날개 아래 머리를 조아리리라!】
시답잖은 고요는 끝났다.
미물들은 다시 용의 그림자 아래 벌벌 떨리라.
그가 화염 속에서 광소를 터트리던 와중이었다.
“꿈도 크군.”
【뭐?】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찔거린 가르가렌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탈피 중인 나바르도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분명히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는데.
【어떤 쥐새끼냐····】
잘못 들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가르가렌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거대한 날개가 폭발하듯 펼쳐졌다.
【모습을 드러내라! 이 미물아!】
콰아아아!
불의 대류가 궁전을 휩쓸었다.
바람을 타고 거칠어진 화마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회오리를 만들었다.
구원자와 오르세.
지금까지 자신보다 작은 존재들에게 엿을 먹어 온 가르가렌스는 이런 사소한 트러블도 넘기지 못하는 성격이 되었다.
머지않아 회오리가 가라앉았다.
【······흥.】
가르가렌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생명체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잡것이 숨어들었는지는 몰라도 방금 타 죽은 것이 분명했다.
괜한 낭비를 했군.
이제는 거의 전신을 되찾은 그가 날아오르려던 차였다.
스각!
두 쌍의 뿔 위로 녹색 선이 그어졌다.
【뭣···!】
가르가렌스가 황급히 시선을 올렸다.
웬 인간 소녀 한 명이 자신의 머리 위에 서 있었다.
작지만 억센 손에는 녹색 마나가 일렁이는 롱소드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무슨 배짱인가 했더니 이런 거물이 뒷배로 있었군. 화룡 일족이라.”
나비로제가 말했다.
인식 저해 마법이 그녀의 몸 주변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가르가렌스가 뭐라 외치려던 차였다.
녹색 선이 벌어지더니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한 뿔이 불꽃이 되어 흩어졌다.
동시에 지금까지 모인 마나가 역류하며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앙!!
머리를 공성추로 내리찍는 듯한 충격이 가르가렌스를 덮쳤다.
【크아아아악!!】
거구가 크게 휘청였다.
나비로제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검을 역수로 고쳐 잡은 그녀가 곧장 가르가렌스의 왼쪽 눈을 찔렀다.
로난의 피가 발린 칼날은 아직 드래곤보다는 정령에 가까운 가르가렌스의 안구를 아무 저항 없이 파고들었다.
푸확!
암적색 불꽃이 피를 대신하듯 솟구쳤다.
【이놈!】
고통에 몸부림치던 가르가렌스가 팔을 휘둘렀다.
거대한 앞발이 제 머리를 내리쳤지만 나비로제는 간발의 차로 회피에 성공했다.
그녀는 지면에 착지함과 동시에 검을 넓게 휘둘렀다.
촤아악!
들개처럼 다가오던 불길이 단번에 사그라졌다.
【불을···?!】
가르가렌스가 흠칫거렸다.
알을 깨고 나온 뒤 처음으로 보는 장면이었다.
일개 필멸자가 화룡 일족의 불을 끄다니.
비록 어머니의 껍질에서 기인한 잔불이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이 정도인가. 빨리 끝내야겠군.’
나비로제가 입술을 짓씹었다.
로난의 피가 완전히 말라붙기 전에 승부를 내야 했다.
그녀가 폭염 속에서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다가오는 불을 베어낼 수 있게 되어서였다.
드래곤의 약점은 뿔과 심장.
그리고 몸 어딘가에 있는 역린.
뿔은 베어뒀으니 둘 중 하나라도 파괴하면 놈은 소멸할 가능성이 컸다.
심장을 겨냥한 나비로제가 쇄도하려던 찰나.
【건방 떨지 마라 이 생쥐야!!】
일순 가르가렌스의 아가리가 벌어졌다.
부풀어 오른 폐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나비로제가 몸을 뒤로 물렸다.
“큭···!”
만사를 발동했지만 체급 탓인지 통하지 않았다.
쩍 벌어진 아가리 안쪽에서 불이 쏟아져 나왔다.
피하거나 받아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고도로 농축되어 광선에 가까워진 화염은 정확히 나비로제가 있던 자리에 적중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작렬하는 불기둥과 함께 굉음이 울려 퍼졌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를 벌레 따위가!!】
나비로제가 폭발에 삼켜졌지만 가르가렌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전후좌우로 움직여 가며 화염을 방사했다.
불이 지나간 자리마다 거센 폭발이 일어났다.
마침내 폐부의 불꽃을 다 쏟아낸 그가 사납게 포효했다.
【크아아아아!!!】
화염궁이 흔들렸다.
폭발이 가라앉은 자리에서 폐허가 된 실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녹아내린 샹들리에와 복도.
모조리 깨진 유리창.
기어코 방어막을 뚫고 피해를 입힌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생존자는 보이지 않았다.
가르가렌스가 입안에 남아 있던 불을 갈무리했다.
【···쓸데없이 힘을 썼군.】
흥분하는 바람에 필요 이상으로 힘을 쓰고 말았다.
불꽃으로 변한 신체의 말단이 그 낭비를 방증하고 있었다.
물론 치명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아직도 나바르도제의 화염은 잔뜩 남아 있었으니까.
시간이 다소 빠듯해지기는 했다만.
【도대체····】
가르가렌스가 으르렁거렸다.
짧은 조우였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필멸자였다.
불을 베는 걸로 모자라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설마 뿔을 다시 한 번 잘릴 줄은 몰랐다.
【마음이 변했다. 아드렌을 완전히 파괴해 주지.】
그 정도 해주지 않고서는 기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윽고 흡수가 끝났다.
뿔을 제외한 부위를 전부 재생시킨 가르가렌스가 아가리를 벌렸다.
콰아아아아!
직선으로 발사된 광선이 내벽에 적중했다.
빠르게 녹아내리던 벽면이 마침내 붕괴했다.
‘드디어.’
가르가렌스의 날개가 다시 펼쳐졌다.
거대한 날개는 이제 완전히 제 모습을 되찾은 채였다.
붉게 달아오른 피막은 화염으로 만들어진 장벽을 연상케 했다.
새로 뚫린 구멍 너머로는 아드렌의 밤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보름달이 아름다웠다.
외부에서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는지 학생들이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너희가 잊고 있던 공포라는 감정을 다시 한 번 알려주겠다.】
가르가렌스가 웃었다.
이제 저 웃음소리는 절규와 통곡으로 바뀔 터였다.
날갯짓과 동시에 그의 몸이 떠올랐다.
폭풍을 일으키며 비상한 가르가렌스가 고개를 쳐드는 순간이었다.
“꼼짝 마라···후우 이 도마뱀아.”
【어떻게···!】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가르가렌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흔적도 없이 소멸했어야 할 소녀가 화염궁 한복판에 서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나비로제가 말을 이었다.
“지금 밖에서는 내 제자들이···청춘을 즐기고 있다····”
【···놀랍군. 왜 살아 있는 거지?】
가르가렌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한 몰골이었다.
검은 볼품없이 부러졌다.
허리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은 짧은 단발이 되어 버렸다.
반쯤 불타버린 교복 아래로 드러난 피부에는 끔찍한 화상이 각인되어 있었다.
불길을 막는 도중에 로난의 피가 말라붙는 바람에 벌어진 결과였다.
“누구보다 빛나는 하루하루를 영위하는 아이들에게···더러운 입김을 풍기지 마라.”
그럼에도 나비로제는 개의치 않았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을지언정 눈동자는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반으로 부러진 검으로 가르가렌스를 겨누었다.
【하 웃기는군. 힘을 되찾자마자 이런 진귀한 풍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가르가렌스가 실소했다.
그는 난생 두 번째로 필멸자에게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은 뿔까지 재생한 그가 어이를 상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질렸다. 네 용기를 높게 사서 특별히 목숨을 부지시켜 주지. 어디 한번 그 꼴로 잘 살아 봐라.】
“멈춰라····”
【대신 네 제자들에게 죗값을 받아내야겠다. 불을 내뿜으면서 분명히 말해 주지. 너희들이 죽는 이유는 주제 모르는 스승 때문이라고. 그때의 표정이 기대되는구나.】
“여기서···나와 싸워라.”
나비로제가 말했지만 가르가렌스는 무시했다.
이미 다 죽어가는 놈에게 낭비할 여유는 없었다.
다시 날개를 펼친 그가 조소했다.
구멍을 통해 스며드는 달빛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붉은 머리가 구멍을 돌아보는 찰나였다.
【······?】
가르가렌스의 몸이 얼어붙었다.
방금까지 있던 보름달이 사라져 버렸다.
벽에 뚫어놓은 구멍도 화염에 휘감긴 채 탈피하는 어머니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말 그대로 암흑에 뒤덮인 채였다.
혼란에 빠져 있던 가르가렌스는 문득 자신에게 닥친 또 다른 변화를 눈치챘다.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세상 속에서 바람 새는 듯한 소리가 나지막이 번졌다.
샤아아아아···
바로 등 뒤였다.
불현듯 전신의 비늘이 곤두섰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뱀이 자신의 몸을 친친 휘감고 있었다.
몸통이 자신의 목보다 두꺼운 독사는 전신에 화상을 입은 채였다.
그와 눈을 맞춘 뱀이 입을 열었다.
“내가···멈추라고 했지 않느냐.”
【······!】
나비로제의 목소리였다.
동시에 가르가렌스의 몸 위로 세 번의 참격이 그어졌다.
뿔과 날개 가슴을 뒤덮은 비늘 위로.
세상이 다시 밝아졌을 때는 이미 모든것이 끝난 뒤였다.
촤아아아악!
단번에 모든 급소를 파괴당한 가르가렌스가 지상으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