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 구대문파의 장문인들(2) >
삭풍이라도 불어 닥친 것처럼 좌중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특히 해남파의 제자들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잠깐 눈이 마주치자 엽초풍은 잔뜩 긴장한 와중에도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나도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내 할 일을 할 테니 나머지는 장문인께서 잘 감당하시라는 뜻이었다·
그 사이 남궁소소는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점창파의 기천일검부터 시작해 소림사의 공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 명도 헷갈리지 않고 보은패를 전부 전달해 주었다·
맹주 설산신검 장로 남궁유룡 총군사 사마옥 그리고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포문을 열었다·
“넉 달하고 보름 전 해남파의 엽초풍 장문인께서 의뢰를 하셨고 유성표 한백경 표사가 첫 운송을 시작하셨으며 천룡표국의 표사 이갑룡 · 이을룡 · 이병룡 · 이정룡이 함께 이어받은 표물을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께 전달해 드립니다·”
나는 일부러 형님들의 이름까지 하나씩 다 말했다·
지난 여정이 어찌 되었든 지금 이 순간에는 함께 있으니 모두 언급해야 하지 않겠나·
세 사람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나같이 정말 그 얘기를 할 거냐는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저 인간들도 잘 알고 있다·
지금 내가 하려는 말까지 완벽히 전달해야 비로소 표행이 끝난다는 걸·
“덧붙여 지금부터는 해남파 장문인의 전언(傳言)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보은패를 받으신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께서는 백칠십사 년 전의 맹약에 따라 본파의 철검무적 대협께서 새롭게 창안하셨던 창랑삼십육검의 마지막 아홉 초식을 이제그만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맹주부의 내실 전체에 격랑이 휘몰아쳤다·
각자가 처한 입장을 말해주듯 갖가지 표정들과 기운이 느껴졌다·
그 압박감에 숨조차 쉬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표사로서 그리고 무려 네 개 당이 동원된 천룡표국의 거대 표행단을 최종적으로 이끈 표두이자 단주로서 끝까지 소임을 다했다·
“이제 표물과 전언을 모두 전달했으니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께서는 본 표국의 표사가 내민 종이에 표물이 무사히 도착했음을 확인하는 수결을 부탁드립니다·”
표물 전달을 끝낸 남궁소소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다 말고 깜짝 놀라며 멈춰 섰다·
수결을 받아 오라는 것까지 시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뭐예요?]
[얼른 받아 오시오·]
[그런 얘긴 없었잖아요!]
[아니면 왜 수결지를 주었겠소·]
[그게 수결지였다고요?]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었다·
나는 턱으로 탁자 쪽을 쭉쭉 가리켰다·
고용된 처지에 달리 용빼는 재주가 있나·
남궁소소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일이 수결을 받으러 다녔다·
만약 나나 이병룡이 갔다면 식은땀도 땀이지만 장문인들이 뿜어내는 기세를 감당하지 못해 수결지를 내미는 손이 달달 떨렸을 것이다·
하지만 남궁소소는 든든한 할아버지가 무림맹주의 옆에 떡 하니 버티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덕분에 구대문파의 장문인들도 거절하는데 조금은 부담감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고·
‘기왕에 가지고 있는 자원이라면 최대한 활용을 해야지·’
그런가 하면 장문인들의 앞에는 마치 이런 상황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세필과 함께 벼루와 연적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이윽고 남궁소소가 완벽하게 수결이 된 아홉 장의 수결지를 가지고 돌아왔다·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모습에서 그녀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수고했소·”
“천·만·에·요·”
나는 수결지를 고이 접어 품속에 챙겨 넣었다·
이어 그때까지도 긴장을 풀지 못한 엽초풍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내가 할 일은 전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구대문파와 해남파 사이에서 알아서 해결할 문제들이었다·
내가 상관할 바도 아니고 함부로 상관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구대문파가 해남파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주길 간절히 바랐다·
무서운 해남오가의 사형들을 피해 이곳까지 온 엽초풍과 그의 사형제들에게는 지금의 이 자리가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건 무림맹주인 설산신검 장로 남궁유룡 총군사 사마옥도 마찬가지였다·
구대문파와는 같은 맹방이면서 사적으로도 매우 가까운 사이들일 테지만 지금 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마침내 올 것이 왔다고 여기는 것도 같고 또 어떻게 보면 마음속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격랑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나는 장문인들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이면서 무림의 태산북두로 불리는 소림사 방장 공진대사를 가만히 응시했다·
눈까풀이 흘러내려 두 눈을 덮는 바람에 그는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 좀처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 볼품없이 늙어 버렸어도 아직까지 주먹으로는 하늘 아래 적수가 없다는 천하제일의 권사였다·
그런가 하면 학을 타고 구름 속을 노닐 것처럼 생긴 무당파 장문인 청허진인과 화산파 장문인 옥수진인은 천하십검이라 불리는 일대 검호들이었다·
천하제일의 권사를 비롯해 천하십검 중 무려 세 명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전부 병기의 유무나 종류를 따지지 않고 서열을 정하는 천하십대고수의 일석들을 차지한 거물들이기도 했다·
내가 딱히 잘 못 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겁을 집어먹은 게 아니었다·
달리 무신(武神)이라고도 불리는 극초절정의 고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천하에 뻔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서호삼견도 간이 쪼그라들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흐르길 한참 역시나 예상대로 소림사 방장인 공진대사가 먼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영사는 잘 보내드렸소이까?”
영사(令師)는 남의 사부를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잘 보내드렸냐고 묻는 걸 보니 얼마 전에 죽은 해남파 십대 장문인인 남해일검 연대명을 일컫는 모양이었다·
고로 이 질문은 엽초풍을 향한 것이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으니 내용을 가늠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엽초풍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해남도 오지산 여모봉의 양지바른 곳에 정성껏 모셨습니다·”
“일생을 바친 해남파의 경내와 그렇게 좋아하던 남쪽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으니 혼자 누워 있어도 심심하지는 않으시겠군·”
“저희 사부님을 아시는지요?”
“빈승이 젊은 시절 사부님을 따라 잠시 해남도로 들어갔는데 역시 사부님과 함께 다니시던 영사를 만나 한나절 정도 동행한 적이 있소이다· 서로 장문인과 방장이 되고 난 이후에는 해남도에서 죄를 짓고 중원으로 도망치거나 중원에서 죄를 짓고 해남도로 도망간 흉신 악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두어 차례 서신을 나눈 적이 있었고· 늦었지만 삼가 조의를 표하외다·”
“사부님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강지약이라···· 빈승은 그 말을 오늘 풍운비룡에게서 처음 들었소이다만 혹 영사께서 생전에 장문인께 들려주셨던 말씀이외까?”
이게 무슨 소리?
좀 전에는 분명 백칠십사 년 전 장강에서의 일을 인정하고 보은패까지 해남파의 것이 맞다며 돌려주었다·
설마 이제 와서 부인을 하려는 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우리 쪽 진영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뜨악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엽초풍은 당황한 와중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으며 차분하게 대답을 이어 나갔다·
“저도 최근에서야 처음 들은 말입니다· 다만 사부님께서 작고하신 후 문파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기록한 사기(事記)를 확인해 보았더니 백칠십사 년 전 철검무적 사조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씌어 있었습니다·”
“그토록 봉변을 당하고도 장강의 치욕이 아니라 장강지약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이시다니· 고인의 풍류가 참으로 존경스럽군·”
“예?”
“젊은 장문인께서는 보은패를 도로 가져가도록 하시오· 아홉 초식은 본래 해남파의 것· 잠시 빌린 물건을 돌려주면서 어찌 이런 귀한 물건을 대가로 받겠소이까·”
“예에?”
“벽을 만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무공은 천하에 없는 법· 해남파의 고인 덕분에 구대문파는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오늘에 이를 수 있었소이다· 이에 후인이신 엽초풍 장문인께 구대문파를 대표해 깊이 감사드리외다· 덧붙여 보은패의 뒷면에 창랑삼십육검의 실전된 아홉 초식을 새겨 돌려 드리오니 부디 영사의 유지를 받들어 해남파를 반석 위에 세우길 바라오·”
공진대사를 시작으로 구대문파의 장문인들 전부가 앞에 놓인 보은패를 ‘탁!’ 소리가 나도록 뒤집어 놓았다·
이어 아까 수결을 해준 붓으로 벼루의 먹물을 찍고는 뒷면에다 즉석에서 무언가를 정성껏 쓰고 그리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초식명을 적고 투로와 보법을 점과 선으로 그려 넣는 것 같았다·
그런 다음에는 자신들이 깨우친 무리(武理)까지 상세하게 적어 넣었고·
상상도 못 한 상황에 큰 충격을 받은 나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이갑룡 을룡 병룡은 물론이거니와 남궁소소까지 숨이 멎은 채 그대로 석상이 되어 있었다·
엽초풍과 양홍경 그리고 해남파의 사형제들은 아예 넋이 나가 버린 상태였다·
특히 엽초풍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것이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그가 격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말했다·
“지난날 본파의 사조께서 구대문파의 장로님들께 드린 아홉 초식은 각 문파의 절기들을 깨트릴 수 있는 파훼법이라고 들었습니다· 이걸 주시면 구대문파가 크게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알고서도 달라고 하신 게 아니외까?”
“사부님께서 그리 명하셨습니다· 유지를 받들기 위해 찾아는 왔지만 이렇게 선뜻 내주실 줄은 정녕 몰랐습니다·”
“엽 장문 구일신(奇旧新) 일일신(旧旧新) 우일신(文旧新)이라는 말을 아시오이까?”
“날로 새롭게 하려면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마다 새롭게 하라는 뜻이 아닌지요·”
“대저 무공이란 같은 이름으로 불려도 각자가 깨달은 바에 따라 한 사람을 넘어가면 식(式)이 달라지고 한 대를 넘어가면 형(形)이 달라지는 법이외다· 돌려 드린 아홉 초식은 백칠십사 년 전의 무공비급에 기록된 최초의 것으로 창랑삼십육검을 크게 발전시킬 수는 있으나 더이상 구대문파의 절기들을 꺾을 수는 없소이다· 하니 안심하시구려·”
큰 불상사 없이 아홉 초식이라도 돌려 받으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아홉 초식은 물론이거니와 보은패까지 고스란히 가지고 돌아가게 생겼다·
엽초풍은 졸지에 구대문파의 비호를 동시에 받는 인물이 된 것이다·
해남오가는 말할 것도 없고 천하의 누구도 그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리라·
한편 나는 까마득한 옛날 자신들의 사조가 저질렀던 잘못을 인정하고 이제라도 바로 잡으려는 노장문인들의 용기와 기백에 큰 감명을 받았다·
더불어 내가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뼛속 깊이 깨달았다·
중원무림을 통틀어 가장 거대하고 유서 깊은 아홉 문파의 장문인들을 어처구니없게도 나의 눈높이로만 재단하고 가늠했다·
저들은 감히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고승과 도사와 무림의 명숙들이었다·
아무래도 유성표와 이종산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어느 정도 짐작했던 것 같았다·
자신들은 그저 표행만 완수하면 그뿐 당면한 난제들은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알아서 지혜를 모을 것이라는 걸·
전생에서 오십 년 동안 산 경험과 그때 꽃 피우지 못한 학문을 이용해 지금까지 승승장구 해왔다·
한데 그 모든 것들이 오늘처럼 무기력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산 너머에 산이 있고 배움 너머에 또 다른 배움이 있었다·
진정한 천외천(天外天)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이윽고 장문인들이 하나둘씩 붓을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누가 우연히라도 볼 수 없도록 보은패를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뒤집어 놓았다·
맹주부의 호위장이 목함을 가지고 와서 보은패 들을 하나씩 회수했다·
잠시 후 그가 엽초풍에게로 가져가 공손하게 목함을 내밀었다·
양홍경과 그의 사형제들은 격정을 억누르느라 입술을 말아서 먹었다·
한데 어쩐 일인지 엽초풍은 선뜻 목함을 받지 않았다·
다들 의아해하고 있던 차에 공진대사가 물었다·
“어찌 그러시는 거외까?”
“뒤쪽에 쓰고 그려주신 아홉 초식은 기꺼이 돌려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보은패는 역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홉 개의 보은패가 어떤 힘을 지녔는지 아시외까?”
“해남도를 떠나 이곳까지 오는 동안 충분히 보았습니다·”
“한데도 받지 않겠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어째서요?”
“부끄럽습니다만 저에겐 아직 이 보은패들을 지킬 힘이 없습니다· 혹시 실수라도 하여 구대문파와 선배 장문인들을 또다시 곤란하게 만들까 두렵습니다·”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데 세게 얻어맞는 것 같았다·
보은패로 말미암아 누구도 해남파와 엽초풍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만 생각했지 반대로 누군가 엽초풍에게서 아예 그것을 빼앗아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엽초풍의 말이 맞다·
구대문파를 어떤 방식으로든 한 번 움직일 수 있는 보은패가 해남파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장강지약의 비사와 함께 온 강호에 알려졌거나 앞으로 알려질 것이다·
절정고수인 유성표도 죽이고 보은패를 빼앗았는데 아직 어리고 세력도 없는 엽초풍에게서 그걸 빼앗기는 더욱 쉽다·
가장 위험한 건 해남오가의 사형들이었다·
도적처럼 쌩으로 빼앗으려 들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펼칠 온갖 귀계와 함정과 음모로부터 보은패를 지킬 힘이 엽초풍에겐 없었다·
가령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엽초풍의 사형들 중 한 명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고 치자·
그리고 그를 구해줄 수 있는 힘이 오직 해남오가에만 있다고 치자·
그때 해남오가에서 엽초풍에게는 친형제나 다름 없는 사형을 살려주는 대가로 보은패를 요구하면 들어주지 않을 수가 있겠나·
엽초풍은 현재 자신의 위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생각하기에 따라 무리할 수도 있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신의를 지켜 준 구대문파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남해일검께서 해남오가의 힘 있는 제자들을 다 놔두고 구태여 이렇게 젊은 제자에게 장문인 자리를 물려주신 이유가 있었군·”
“젊은 장문인께서 저리 총명하니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해남파의 미래가 결코 어둡다 하지 못할 것입니다·”
긴 침묵 끝에 무당파의 청허진인과 화산파의 옥수진인이 차례로 한 말이었다·
아까 공진대사도 그렇고 손자뻘인 엽초풍에게 ‘어린 장문인’이라는 말 대신 ‘젊은 제자’ 혹은 ‘젊은 장문인’으로 바꾸어 말하는 노거목들의 사려 깊음에 나는 절로 숙연해 졌다·
모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대문파의 장문인들도 해남파의 돌아가는 사정 정도는 훤히 꿰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엽초풍이 처한 현실과 자신들을 걱정하는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는 안타까워 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백칠십사 년 전 사조들끼리 각각 초식과 보은패를 주고받으며 했던 맹약의 조건을 함부로 바꿀 수도 없다·
그건 사조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거니와 무림의 일반적인 통념과도 맞지 않았다·
“이를 어쩐다·”
“다시 돌려 받을 수도 없고·”
“이미 했던 말을 주워 담으면 우린 두고두고 강호인들의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무슨 방법이 없겠소이까?”
무당파의 청허진인 화산파의 옥수진인 곤륜파의 운학진인에 이어 청성파의 무극진인이 마지막으로 사마옥을 보며 한 말이었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사마옥을 돌아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무림맹 총군사이자 천하가 알아주는 지낭인 그라면 무언가 기똥찬 해법을 찾아내지 않겠나·
사마옥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두 숨소리를 죽이고 그를 지켜보았다·
한참 만에야 눈을 뜬 사마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몇 가지 대안들이 있기는 하지만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다들 하나씩 걸리는 문제들이 있군요· 이 일은 해남파의 장문인께서 맹에 머무르시는 동안 천천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그때까지는 장문인들께서 각자의 보은패를 보관하고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진대사의 말을 끝으로 상황이 대충 정리되는 듯했다·
양홍경과 그의 사형제들은 이러다 보은패를 돌려받지 못하게 될까 봐 잔뜩 초조해 했다·
반면 모든 게 자신의 어린 나이와 보잘것없는 무공 때문이라고 생각한 엽초풍은 좌절감에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말했다·
“제게 생각이 있기는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