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 구대문파의 장문인들(1) >
저 멀리 거대한 성을 방불케 하는 무림맹 총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길 양쪽은 인근에서 몰려온 양민들과 각종의 병장기를 패용한 무림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사이를 청성파 · 아미파 · 사천당문 · 도화곡 그리고 천룡표국에 이르기까지 무려 다섯 개 문파에서 온 육백여 명의 기마인들이 지나갔다·
양쪽에서 온갖 말들이 들려왔다·
처음엔 ‘저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누구다·’라며 신기해하고 감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점차 유성표의 죽음과 그가 잃어버린 표물을 둘러싸고 최근 사천성 일대에서 일어난 일들에 관한 이야기며 각종 증언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유성표가 죽은 지 석 달이 지났고 우리가 항주를 떠난 지는 얼추 두 달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금사강에서 시작된 소문이 이런저런 살을 붙여가며 중원무림을 한 번 크게 들었다가 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윽고 무림맹의 정문을 코앞에 두었다·
놀랍게도 무림맹 총군사인 만박노군 사마옥이 무려 백여 명에 달하는 맹도들을 이끌고 우리를 마중 나온 상태였다·
아마도 접객당의 관계자들을 비롯해 맹에 상주하는 청성파와 아미파와 사천당문의 제자들인 듯싶었다·
사문의 장문인이나 존장들 혹은 높은 신분의 사람이 먼 길을 왔으니 응당 나와서 맞이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가 하면 나와 제법 인연이 있는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도 여럿 보였다·
청성파의 두소부 점창파의 양조광 황보세가의 황보중악 상동악가의 악도광이 그들이었다·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엽초풍을 보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것이 어색한지 그는 다소 위축된 모습이었다·
“무림맹에 다 왔습니다·”
“마침내 도착했군요·”
“오늘 아침 청성의 장문인께서 받은 보고에 따르면 지난 밤 곤륜파의 장문인이신 운학진인을 끝으로 팔대문파의 장문인들께서 맹에 전부 모이셨다고 합니다·”
“제가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장문인이나 저나 호랑이 등에 올라탄 지 오래입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뜻한 바가 분명하시다면 사람들 앞에서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지 마십시오· 옳고 그름은 나중에 따져도 될 것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
천하 백도 무림의 수장이 기거하는 맹주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소박했다·
좁은 내실 안에는 이런저런 장식물은 물론이거니와 그 흔한 도자기나 병풍 하나 보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사치를 한 것이라고는 개봉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열두 개의 커다란 창과 내실을 남과 북으로 가로지르는 기다란 대리석 탁자 정도였다·
탁자의 가장 끝쪽 상석에는 천하십검의 일인이자 현 무림맹주인 설산신검 장초풍이 오연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사마옥과 남궁유룡이 각각 무림맹 총군사와 장로의 자격으로 보필하듯 앉았다·
사마옥은 무림맹에 상주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렇다고 치자·
한데 지금쯤 수천 리 떨어진 양주의 세가에 있어야 할 남궁유룡이 왜 여기서 불쑥 등장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타성에 가면 동향 사람 말투만 들려도 반갑다고 했다·
언제나 내게 잘 대해주었던 남궁유룡을 보니 왠지 든든한 마음이 일었다·
그리고 무림맹의 또 다른 장로들이기도 한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탁자를 가운데 두고 도열하듯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하나같이 막강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순서는 나이에 따라 소림사의 공진대사(空眞大士) 무당파의 청허진인(消虛眞人) 화산파의 옥수진인(玉手眞人) 곤륜파의 운학진인(雲鶴眞人) 청성파의 무극진인(武極眞人) 공동파의 복마신검(伏魔神劍) 노문량 종남파의 천기대협(天機大快) 능자휘 아미파의 혜광사태(惑光士太) 그리고 마지막으로 점창파의 기천일검(起天一劍) 우검학이 차례로 앉았다·
말이 좋아 나이 순이지 내가 볼 땐 다 같이 칠순을 넘긴 백발의 노인네들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기천일검을 시작으로 한두 살 정도씩 건너뛰다가 공진대사에 이르러 최종 열 살 정도 차이가 날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그들로부터 서너 장 정도 떨어진 입구 쪽에는 이번 표행의 총 책임자인 나를 비롯해 이갑룡 을룡 병룡이 나란히 서 있었다·
다시 옆에는 해남파의 장문인인 엽초풍과 그의 사형제들 전부가 도열했다·
그리고 특별히 남궁소소가 함께 배석했다·
그녀는 서호삼견과 마찬가지로 내게 고용된 객원표사의 신분이었다·
해서 본래는 수뇌부가 모이는 이런 자리에 감히 올 수가 없었다·
한데 표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하고 지켜본 사람의 객관적인 증언이 필요할 수 있다며 사마옥이 배석을 요구했다고 들었다·
그녀라면 아무리 천룡표국의 객원표사로 고용된 처지라고 해도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낼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남궁소소가 무림맹의 맹도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했다·
나는 우리의 모습이 마치 대국에 조공을 하러 온 소국의 사신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전혀 과장이 아닌 것이 전생은 말할 것도 없고 현생에서도 언제 저 기라성 같은 무림의 거물들을 한자리에서 이렇게 보겠나·
나도 나지만 이갑룡과 을룡과 병룡도 잔뜩 주눅이 들어서는 어깨가 평소의 반만 해 보였다·
그러나 엽초풍과 그의 사형제들만큼은 아니었다·
이번 행보에 문파의 명운이 달린 탓인지 그들은 숫제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내게 전서를 보낸 이가 자네였지?”
설산신검 장초풍이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은하산장을 탈출해 강을 건너기 직전 나는 남궁소소에게 한 가지를 지시했었다·
가장 가까운 하오문 분타를 찾아 무림맹주 친전으로 최대한 빨리 전서구를 날려 보낼 것·
내용은 당금 무림에 전해진 보은패의 혼란을 잠재울 묘안이 있으니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을 전부 한자리에 모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좀처럼 산문(山門)을 벗어나는 일이 없거니와 일단 하산하면 천하가 그 행보를 주시하는 분들일세· 그런 분들을 이곳까지 걸음하게 만들었으니 자네는 그 값을 단단히 치러야 할 것이네·”
“맹주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들겠습니다·”
“이제 가져온 걸 내놓아 보시게·”
“모두 아시는 바와 같이 이번 일은 사대명표 중 한 명인 유성표 한백경 대협께서 해남파의 표물을 구대문파로 운송하던 중 의문의 고수에게 죽임을 당하고 표물을 빼앗기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백도무림을 지탱하는 아홉 기둥들답게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맹주부를 단숨에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심연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에 표물의 본래 주인인 해남파의 장문인을 모시고 여기에 모이신 구대문파 장문인들의 동의를 얻어 도둑맞은 표물을 다시 돌려받고자 합니다·”
“동의란 쉬운 말이 아닐세· 특히 일파를 이끄는 장문인들에겐 더더욱· 반드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근거가 있어야 하지· 각설하고 그 표물이 해남파의 것임은 어떻게 증명할 텐가?”
점창파의 장문인 기천일검이 물었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태산 같은 기세가 인상적인 그는 사일검법을 극성까지 익혔다고 전해진다·
“장문인들께서 백칠십사 년 전 장강에서 해남파의 철검무적 대협과 구대문파의 아홉 장로님들 사이에 있었던 장강지약의 비사를 인정하시면 간단히 끝날 일입니다·”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
아미파의 장문인 혜광사태가 물었다·
내가 복호삼승과 함께 대응왕을 호송하는 동안 그녀는 맹주의 소환령을 받고 곧장 무림맹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도 알겠군·”
종남파의 장문인 천기대협 능자휘가 말했다·
장문인들이 협공하듯 돌아가면서 빠르게 묻는 통에 살짝 정신이 없었다·
“천마성교의 군사에게 농락당해 구대문파가 서로 반목하고 칼을 겨누는 것보다는 백 배 나을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확 질러버렸다·
순간 나를 바라보는 장문인들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이 느껴졌다·
“그게 자네가 준비해온 우리의 걸음값인가?”
공동파의 장문인 복마신검 노문량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흰 송충이처럼 무성한 눈썹이 신령한 느낌을 주는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백여 명에 달하는 마두를 벤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그렇습니다·”
잠시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손에 땀이 흥건했다·
옆을 돌아보니 이갑룡 을룡 병룡도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유성표의 표행을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입을 꼭 다물고는 있지만 세 사람 모두 지금쯤 죽을 맛일 게다·
할 수만 있었다면 내 입을 틀어막아도 몇 번은 막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가 한 말은 듣기에 따라 구대문파가 곤란한 지경에 처한 틈을 타 내지른 협박이 될 수도 있었다·
“그 표물이 해남파가 다른 이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님은 어떻게 증명하겠나?”
청성파의 장문인 무극진인이 기습적으로 물었다·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여태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백칠십사 년 전의 비사를 부정할 것에 대해서만 준비했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삼고 나올 수도 있다는 건 전혀 예상치 못했다·
“아홉 문파의 명예가 달린 일일세· 표물을 해남파에 돌려줌으로써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강호인들 혹은 누군가의 문제 제기에 우리는 철저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하네·”
무극진인이 다시 나를 재촉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유성표를 죽이고 보은패를 빼앗아간 흉수를 잡아 오지 않는 한 그걸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그건 점창의 장문인께서 증언해주실 겁니다·”
갑자기 끼어든 사람은 이갑룡이었다·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쪽 사람들까지 모두 깜짝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무극진인이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런가?”
“저희 형제들은 유성표 대협의 행낭에서 사일검법의 검흔을 발견하고 오랜 시간 흉수를 추적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운남의 여강고성에서 흉수를 덮치기 직전에 점창오검과 맞닥뜨렸습니다· 점창오검 역시 유성표 대협을 죽이고 표물을 훔쳐 간 흉수를 추적하던 중이었지요· 흉수는 점창파의 파문제자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선언에 장내의 공기가 크게 요동쳤다·
이갑룡은 이에 굴하지 않고 침착하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현재 강호에 알려진 그의 별호는 구혼귀수(拘魂鬼手) 과거 점창파의 어린 제자들 사이에서는 ‘바보 사형’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렸지요·”
나는 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유성표가 삼뇌의 사주를 받은 파문제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해남파의 표물을 탈취당했다는 건 점창오검을 내려보내 조사케 한 기천일검이 제일 잘 알 것이다·
이갑룡이 여강고성에서 그렇게 열심히 흉수를 추적하고 돌아다니더니만 이처럼 절묘한 순간에 써먹을 줄이야·
무극진인과 시선을 마주치자 기천일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심히 괴로운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의 손으로 사지근맥까지 잘라 파문시킨 제자 때문에 이렇게 큰 사달이 일어났으니 마음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울 것이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번갈아 가며 쏟아지던 장문인들의 질문도 뚝 그쳤다·
대신 모두가 우리 네 형제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흡사 눈에서 나오는 불로 온몸을 지져대는 것 같았다·
분명 살기는 아닌데 뭐라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표왕이 아들들을 잘 길러냈군요·”
“호부 밑에 견자 없다고 하더니 과연·”
“일전에 표왕에게 듣자 하니 무림문파에서 성년이 된 제자들에게 천일주유행을 시키듯 천룡표국에서는 코흘리개 아이 때부터 강제로 표행에 딸려 보내 세상을 온몸으로 익히게 한다더군요·”
곤륜파의 장문인인 운학진인 화산파의 장문인인 옥수진인 그리고 남궁유룡이 차례로 한 말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부드러워지자 나는 살짝 당혹스러웠다·
심지어 남궁유룡은 마치 벗의 자식들이 칭찬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말미에 슬그머니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한데 더욱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표물은 해남파에서 도둑맞은 것이 확실한 것 같군·”
여태 한 번도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만 보던 소림사 방장 공진대사가 한 말이었다·
이어 그는 품속에서 한 뼘가량의 목패를 꺼내 탁자 위에다 ‘척’ 하고 올려놓았다·
오랜 세월 손때가 묻어 새까맣게 변한 목패에는 낯선 세 글자의 이름과 함께 생년월일 등이 새겨져 있었다·
백칠십사 년 전 소림사의 어느 장로가 장강에서 해남파의 철검무적에게 건네준 자신의 호패 즉 보은패였다·
공진대사의 뒤를 이어 무당파의 청허진인 화산파의 옥수진인이 차례로 까만 호패들을 꺼내 놓았다·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세 문파의 장문인들이 보은패를 꺼내 놓자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이윽고 아홉 개의 보은패가 전부 탁자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마옥이 옆을 돌아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마도 맹주부의 호위장으로 짐작되는 장년인이 탁자를 돌며 베게만한 목함에 보은패들을 하나씩 정성스럽게 담았다·
그리고 곧장 내게 가져다주었다·
유성표가 잃어버린 표물을 마침내 전부 회수하는 순간이었다·
이걸 회수하기 위해 지난 두 달 동안 겪었던 고생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이갑룡 을룡 병룡도 감개가 무량한 얼굴들이었다·
이 인간들도 사실은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다·
비록 어느 순간부터 선수를 내게 빼앗기고 나를 보좌하는 역할로 전락해 버렸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형제들 간의 경쟁을 떠나 천룡표국의 명예와 표사로서의 명예를 모두 지켰다는 사실이 기뻤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감격해도 엽초풍과 그의 사형제들만큼은 아니었다·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문파의 보물이 다시 돌아오자 그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저 보은패에 엽초풍과 자신들의 목숨이 달려있음을 아는 양홍경은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몰래 훔치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절차가 한 가지 남아 있었다·
나는 옆에 있던 남궁소소에게 보은패가 든 목함과 함께 아홉 장의 종이를 건네주었다·
“이것들을 다시 장문인들께 전달해 주시오·”
“제가요?”
“아직 표행이 끝나지 않았소·”
“명을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