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 중원을 가로지르다(8) >
팔백 마교도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아미파와 사천당문의 사람들이 다가와서 채웠다·
눈이 마주친 복호삼승은 노기가 가득 담긴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반면 당군룡은 웃으며 한 손을 들어 주었다·
이해관계가 얽힌 다른 문파들과 달리 사천당문은 순수하게 우리를 돕기 위해 달려온 모양이었다·
한바탕 함성이 터져 나올 법도 하건만 천룡표국의 표사들과 도화곡의 제자들은 흥분을 극도로 자제했다·
이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검진을 풀지 않은 채 청성파와 아미파의 제자들 그리고 은하산장의 시비들을 마주보며 섰다·
우여곡절 끝에 천마성교의 잔당들을 쫓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대응왕을 놓고 벌여야 할 또 다른 싸움이 남아 있었다·
무극진인이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 우리의 계산을 시작해 볼까?”
“그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무극진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나는 무극진인과 복호삼승 그리고 당군룡에게 정중한 예를 갖추어 차례로 포권지례부터 올렸다·
“여러 선배님들께서 힘을 보태주신 덕택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 조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천룡표국의 이름을 걸고 맹세컨대 반드시 신세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짚고 넘어갈 일이라는 게 그것인가?”
“그렇습니다·”
“계산이 분명하군·”
“장사치가 셈이 흐려서야 쓰겠습니까·”
“우리 사이의 계산도 그렇게 분명하길 바라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도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네·”
“말씀하시지요·”
“사천성의 백도무림을 대표하는 우리가 사천성에 나타나 패악을 일삼는 마교의 잔당을 몰아내는 것은 당연한 일· 하니 천룡표국이 조금 전의 일로 우리에게 갚아야 할 빚은 없네·”
“장문진인과 선배님들의 높은 뜻은 잘 알겠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천룡표국이 신세를 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이는 언젠가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추호도 빚진 마음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
“표사라면 무림인으로서의 원한은 잊어도 표행 중에 받은 도움과 호의는 잊지 않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표왕다운 가르침이군·”
“그리고 본격적인 계산을 하기 전에 잠시만 시간을 주실 수 있겠는지요· 약속드리건대 청성파와 아미파 어느 쪽에도 손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 각을 주겠네·”
나는 무극진인과 청성파의 제자들을 모두 지나쳐 걸어갔다·
그리고 뒤쪽에 있는 한 여자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은하산장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이 청성파에 보은패를 보냈노라고 주장하던 바로 그 여자였다·
나는 그녀에게도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했다·
“저는 천룡표국의 비룡당주 이정룡이라고 합니다·”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어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자 여자는 크게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답례도 해오지 않은 채 얼음장처럼 싸늘한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은하산장의 여자들 전부가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마침내 죽일 수 있게 된 불구대천의 원수를 내가 중간에서 가로채 달아났기 때문이다·
그녀들 역시 그것 때문에 청성파의 장문인과 함께 몇 날 며칠 밤잠을 설쳐가며 여기까지 추적해 온 것이고·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여협의 협명은 어찌 되시는지요?”
“귀하가 누군지는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제 이름은 봉설란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협이 아닙니다· 한때는 한 아이의 어미이자 한 남자의 아내였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저 은하산장의 천한 시비일 뿐이죠·”
“그거야말로 과거 한때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은하산장은 만년설에 쓸려 영원히 사라져 버렸고 여러분은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까요· 또한 일신에 고강한 무공을 익힌 데다 지금은 악인을 처단하려고 나섰으니 여협이라는 호칭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살짝 낯간지러운 말이긴 했으나 이는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나는 봉설란을 비롯한 은하산장의 여자들이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길 진심으로 바랐다·
싸늘하던 봉설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온기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다소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물었다·
“무극진인께선 산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 아무래도 귀하인 것 같다고 하시던데 그 말씀이 사실인가요?”
“제가 아니라 해남파의 제자들입니다· 정확하게는 해남파의 장문인께서 묘안을 내셨고 장문인의 사형제들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거사를 치르셨지요· 여협들의 처소에 손때 묻은 방물들이며 중요한 물건들도 많았을 터인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방물도 방물이지만 대응왕이 준 패물들이 방마다 가득했었죠·”
“그랬군요·”
“하지만 패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도 전혀 아깝지 않았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고요·”
뒤 쪽에 있던 백여 명의 여자들이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봉설란의 말이 이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은하산장을 쓸어 버린 건 정말 잘하셨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통쾌했던 적은 처음이었어요·”
고통스러운 기억들만 가득한 장소가 눈사태에 휩쓸려 통째로 사라져 버리자 속이 시원했던 모양이다·
주변의 공기가 다소 무거워졌다·
그녀의 고백 같은 한마디에서 백여 명의 젊고 아름다운 은하산장의 여자들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절절하게 느껴진 탓이다·
대충 분위기가 무르익은 듯 하자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 정도 아시겠지만 여협께서 누군가로부터 받아 청성파에 준 보은패는 본래 해남파의 것입니다· 이를 부정하진 않으시겠지요?”
대응왕이 개자식이지 봉설란은 양심이 있는 평범한 여자였다·
내가 정곡을 찌르자 잠시 풀렸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졌다·
“염려 마십시오· 여기서 그 보은패를 회수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간단한 문제도 아니거니와 무리해서 그럴 이유도 없으니까요·”
“하면요?”
“저는 지금 해남파의 장문인을 모시고 무림맹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곳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마침 대응왕이 제법 쓸모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만 대응왕을 죽여 달라며 청성파에 요구한 보은패의 소명을 멈추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의 신경이 바짝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봉설란의 한마디에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봉설란은 즉답을 못 하고 한참이나 시간을 끌다가 물었다·
“대응왕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내가 뒤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견이 청성파와 아미파의 고수들을 피해 뒤쪽 구석에 숨겨 두었던 대응왕을 질질 끌고 나왔다·
대응왕은 동굴에서 나한테 곤죽이 되도록 얻어터진 데다 오는 내내 이견과 삼견에게 또 두들겨 맞아서 본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온몸이 망가져 있었다·
“아아·”
참혹한 대응왕의 몰골에 은하산장의 여자들에게서 나직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청성파와 아미파 그리고 당문의 고수들도 눈살을 찌푸렸다·
한편 혜공사태를 본 대응왕은 죽은 제 사부라도 돌아온 것처럼 반색했다·
그리고 사력을 다해 몸부림치며 대화를 시도했다·
“음! 으음! 음! 음!”
보나 마나 빨리 자신을 구해 금분세수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일 것이다·
그게 나와 청성파의 마수로부터 벗어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그러나 쇠사슬로 사지를 묶인 데다 입에는 재갈까지 물려있어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이견이 내공을 담아낸 손으로 자기보다 족히 스무 살이나 많은 대응왕의 싸대기를 냅다 후려쳤다·
“닥쳐!”
빠각!
거대한 체구의 대응왕은 고목이 쓰러지듯 그대로 엎어지더니 까무러쳤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이런 방면으로는 눈치가 백 단인 이견이 혹여라도 쓸데없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기절시킨 것이었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견이 내게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도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봉설란이 살짝 격양된 음성으로 물었다·
“그를 대체 어떻게 한 거죠?”
“턱뼈를 박살 내고 한쪽 눈을 못 쓰게 하고 양팔을 꺾어 부러뜨렸습니다· 오는 내내 팔을 치료해 주지 않았으니 아마도 저 상태로 영원히 굳어버릴 것입니다·”
“그 말씀은··· ”
“다시는 무공을 쓸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가 자랑하던 혈령탈백조(血靈奪魂爪)의 조공은 더더욱 그렇고요·”
철천지원수가 무공을 잃었다·
이제 마음만 먹는다면 그를 죽이는 건 언제라도 가능했다·
여자들의 입장에선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어야 한다·
“만약 그가 금분세수를 해버리면 어떡하나요?”
“대응왕이 저의 수중에 있는 한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것만 약속드리면 여협께서도 보은패의 소명을 멈추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나는 옆으로 돌아서며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복호삼승의 첫째인 혜공사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포권을 쥐며 정중히 말했다·
“은하산장에서의 일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다만 청성의 장문진인과 아미의 장로님들께서 보은패의 소명을 다하셔야 하는 것처럼 후배에게도 유성표의 표행을 이어가야 하는 소명이 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자네에게 책임을 물으려면 나의 어리석음부터 먼저 탓해야겠지· 각설하고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
“그를 무림맹으로 데려간 다음 아미파가 지금 짊어지고 있는 보은패의 치욕스러운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만 아미파에서도 잠시 소명을 멈추어 주십시오·”
“그럴 순 없네· 그가 요구한 보은패의 소명은 금분세수를 무사히 끝낼 때까지 호위해달라는 짧고 명쾌한 것이었지· 아미파는 보은패의 맹약에 따라 지금 당장도 그를 지키고 보호할 의무가 있네· 해서 그를 돌려받아야겠네·”
스릉!
나는 발도와 함께 대응왕이 엎어져 있는 우리 쪽 진영으로 갔다·
이어 그의 목에 칼끝을 겨누고 서서는 혜공사태를 노려보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자를 아미파에 넘기면 모든 상황이 다시 꼬이게 됩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제가 여기서 목을 쳐 살인자가 되고 말겠습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슈슈슈슈슉!
혜공사태의 일갈과 함께 아미이십일표가 일제히 앞으로 나서며 창을 겨누었다·
그에 맞서 섭부용이 이끄는 도화곡의 구대제자들이 아미파의 제자들을 막아섰다·
내가 다시 말했다·
“어차피 길게 얘기해 봐야 겉돌기만 할 터· 실례를 무릅쓰고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저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만들어 지금 당장 보은패의 소명 완수에 실패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일단 그를 살려 나중을 도모함으로써 소명을 완수하시겠습니까?”
사실 무림맹으로 가서 보은패의 소명을 무력화시키는데 대응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아니었다·
다만 여기서 그를 죽여 버리면 청성파에 전해진 보은패의 소명 하나가 달성되어 버린다·
반면에 대응왕을 지키는데 실패한 아미파의 명예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질 것이다·
보은패의 소명도 완수하지 못한데다 천하의 아미파가 악명 높은 마두를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대응왕을 죽여 버리면 청성파만 좋고 해남파와 아미파에게는 매우 불리했다·
특히 아미파에게는 최악의 전개였다·
해서 나는 지금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혜공사태에게 보은패의 소명 완수를 잠시 미룰 수 있는 명분을 주려는 것이었다·
혜공사태는 즉답을 피한 채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동안 수도한 노승의 눈동자에서 깊은 갈등이 느껴졌다·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혜공사태의 입이 열렸다·
“역설적인 질문이군·”
“우리 모두가 그런 상황에 처해있지요· 그러니 서로가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또 그러려면 한발씩 물러나야 하고요·”
“그렇게 하겠네·”
“감사합니다·”
[인사는 내가 해야겠지· 고맙네·]
갑자기 머릿속으로 들어온 혜공사태의 전음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내 약속에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필요하네· 청성파가 보은패의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내가 없는 곳에서 그를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
나는 마지막으로 무극진인을 돌아보았다·
그에게는 긴 설명이나 설득이 필요 없었다·
청성파의 모든 것을 책임진 장문인인만큼 지금 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데다 자신들의 입장이 있을 테니까·
“이제 청성파에서 결단을 해주실 차례입니다·”
“청성파와 아미파 모두에게 손해가 되지 않을 거라더니·”
“분명 그리될 것입니다·”
“대응왕의 목숨을 얘기하는 것이 아닐세·”
“저도 대응왕을 두고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순간 나를 노려보는 무극진인의 눈동자가 심연처럼 깊어졌다·
딱히 기운을 끌어 올리거나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허공에 못 박힌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공력의 높고 낮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위압감이 있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남은 식량이 있나?”
“바닥난 상태입니다·”
“하면 당장의 끼니는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었나?”
“이곳 지리를 잘 아는 객원표사 말이 반 시진 거리에 작은 산채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 들러 허기를 채우고 가는 동안 먹을 식량도 구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계획 속에 백육십 개의 입을 더 추가해 넣게· 청성파와 아미파 그리고 옛 은하산장의 무인들도 함께 무림맹까지 가야 할 테니 말일세·”
“감사합니다!”
나는 무극진인은 물론이거니와 봉설란과 혜공사태에게도 똑같이 포권지례를 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마침내 대응왕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한데 시종일관 목석같기만 하던 무극진인과 그 못지않던 혜공사태의 입가에서 미소 비슷한 것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뭐지?’
혜공사태는 그럴 수 있다 쳐도 무극진인은 대체 왜?
지금쯤이면 유성표가 점창파에 보은패를 가져다주며 무얼 요구했는지 그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청성파로서는 보은패의 소명을 싸게 해결해 버릴 절호의 기회를 놓쳤는데도 저렇게 대범할 수 있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백 명 더 추가하거라·”
갑자기 말을 보태며 나선 사람은 이막하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도화곡의 제자들도 전부 함께 갈 것이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해하지 말거라· 장문진인과 복호삼승의 세분 사태께서 허언을 하실 분들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천마성교의 잔당들이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르는 길을 너 혼자 보내 줄 수는 없느니라·”
“장문 사저····”
“백 명 더 추가하게·”
이번엔 당군룡이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다음 말을 이었다·
“천마성교에는 아직도 많은 술법사들이 있지· 그들을 상대하려면 당문의 독공과 암기술이 필요할 것이네·”
***
독산채에 도착했을 때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탁자 위에는 먹다 남은 음식들을 비롯해 화톳불조차 아직 꺼지지 않은 상태였다·
“다들 어딜 간 거지?”
“도망간 것 같은데요?”
“왜?”
“주변을 한 번 둘러 보십시오· 청성파에 아미파에 사천당문에 그리고 성도를 먹은 도화곡에 그냥 제자들도 아니고 장문인과 장로들 아니면 대공자가 최고수들을 이끌고 나타났는데 이런 작은 산채의 두령이 무슨 간뎅이로 버티겠습니까? 이유가 뭐든 차라리 줄행랑을 치고 말지·”
“산적 두령이 내성적이군·”
이견과 삼견이 나눈 대화였다·
산적은 없어도 식량은 겨울을 나기 위해서인지 충분히 비축되어 있었다·
우리는 독산채를 탈탈 털어먹고도 모자라 가는 동안 먹을 식량이며 필요한 가재도구들까지 넉넉히 챙겼다·
아무리 녹림산채라고는 하나 주인 없는 집에 쳐들어와 허락도 없이 먹었는데 그냥 갈 수야 있나·
나는 은전 백 냥을 두령의 자리로 짐작되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 정도면 우리가 먹고 챙긴 값의 두 배는 될 것이다·
독산채의 입장에선 가만히 앉아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크게 한 탕 한 셈이었다·
나의 소속과 이름을 밝히며 훗날 지나는 길이 있으면 다시 들러 제대로 인사를 드리겠다는 편지도 남긴 후 산채를 떠났다·
그리고 보름 후 마침내 무림맹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