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 중원을 가로지르다(3) >
지금 이 순간 이름 모를 야산엔 백칠십여 명에 육박하는 표사들이 숙영 중이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작은 불씨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내가 모닥불은 물론 횃불 하나까지도 일절 밝히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어둠이 내린 숲엔 적막감만이 가득했다·
삼경이 가까워졌을 무렵 나는 이갑룡 을룡 병룡을 비롯해 엽초풍과 양홍경과 일견 그리고 이갑룡의 권유로 특별히 남궁소소까지 포함된 수뇌부 회의를 소집했다·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한 시진 동안 주변 지형과 척후를 살피고 돌아온 표사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좌우는 물론이거니와 절벽 뒤쪽의 강변까지 적들이 쫙 깔렸습니다· 들키지 않고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산 정상으로 갈수록 수목은 빽빽해지고 경사가 가팔라집니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다른 곳에서 싸우는 것보다는 훨씬 유리할 겁니다·”
“정상 바로 아래까지 이어지는 계곡이 하나 있는데 수량이 넉넉지는 않지만 말을 먹이거나 식수로 쓸 정도는 됩니다·”
보고를 한 사람들은 모두 강룡당과 복룡당과 묵룡당에서 차출한 일급 표사들로 천룡표국 내에서의 직급은 표두였다·
최소 이십 년 이상 표행을 하며 산전수전 다 겪어 본 표두급 표사들은 이 싸움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래서 보고의 형식을 빌려 내게 산 정상으로 후퇴한 다음 가파른 경사를 이용해 수성전으로 시간을 끌라는 권유를 열심히 하는 것이다·
표사들의 보고가 끝나자 그들의 상관인 당주들이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일단 일천 명의 마교도들을 뚫고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는데 이견을 가진 사람은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싸워서 이기는 것도 불가능하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우린 모두 이 산에 뼈를 묻을 수밖에 없어·”
“지형으로도 그렇고 숫자로도 그렇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 청성파와 아미파의 고수들이 나타날 때까지 시간을 끌며 버티는 것 외엔 현재로선 다른 길이 없다·”
이갑룡과 을룡이 차례로 내게 한 말이었다·
현 상황에선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을 만큼 타당한 주장처럼 보였다·
그때 양홍경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되면 우린 대응왕을 내주어야 할 것입니다· 청성파는 그 즉시 보은패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그를 죽이려 할 것이고 아미파는 반대로 지키려 할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두 문파가 서로 원치도 않는 피를 볼 수도 있습니다·”
이을룡이 즉시 반문했다·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지금부터 다 함께 머리를 맞대 보아야지요·”
“처한 상황이 선명하니 답도 선명한 겁니다·”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다른 문파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정도가 아닌 듯합니다만·”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을 제공한 해남파에서 하실 말씀은 아니지요· 혹시 구대문파에 요구할 보은패의 소명 하나가 사라질까 봐 그러시는 건 아닙니까?”
“뭐요?”
양홍경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 바람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뇌부 회의를 지켜보고 있던 복룡당의 표사들과 해남파 제자들 사이에 일순 긴장감이 흘렀다·
“진정하세요· 양 사형·”
엽초풍이 양홍경을 다독거렸다·
무림문파의 제자들에게 장문인이라는 자리는 절대적인 것이다·
열세 살 소년의 작은 음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엽초풍의 말에는 함부로 항거하기 힘든 힘이 실려 있었다·
양홍경이 흥분을 가라 앉히자 엽초풍이 우리 형제들 중 맏형인 이갑룡에게 정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청성파와 아미파의 고수들이 나타나서 우리에게 힘을 실어준다면 마교도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청성의 장문인께서 직접 청성칠검이 포함된 고수 서른 명을 이끌고 오시는 중입니다· 여기에 아미파의 복호삼승과 아미이십칠수까지 가세하면 적들도 정면 승부를 보기가 망설여 질 겁니다·”
“두 문파의 존장들께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인가요?”
“정도를 표방하는 구대문파의 존장들께서 마교도들의 준동을 가만히 지켜볼 리 없으니까요·”
“그런가요?”
“게다가 무림맹의 장로이자 남궁세가주이신 뇌검 남궁유룡대협의 손녀가 지금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청성파와 아미파의 존장들 모두 남궁유룡 대협의 얼굴을 보아서라도 못 본 척 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엽초풍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도 새삼 남궁소소의 신분이 어떠한지를 상기하게 만드는 설명이었다·
양홍경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남궁소소와 이병룡은 가만히 듣고만 있을 뿐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갑룡과 병룡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되면 양홍경의 말처럼 애꿎은 두 문파가 서로 피를 보면서까지 싸우게 될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어느 쪽이 이기든 보은패의 효력 중 하나가 사라지게 될 것이고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을 전부 한 자리에 모아놓고 한 방에 해결하겠다던 내 계획도 차질을 빚게 된다·
그때 일견이 말했다·
“우리가 대응왕을 먼저 죽여버리면 어떻겠나?”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양홍경과 남궁소소는 살짝 반색하는 기미까지 보였다·
지난번에 이견이 대응왕을 죽여버리자고 했을 때만 해도 흘려들었는데 지금이야말로 그걸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표사이지 협객이 아닙니다· 상대가 아무리 죽어 마땅한 마두일지라도 협의라는 명목하에 포로로 잡힌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취할 순 없습니다· 하물며 저의 이익을 위해선 더더욱·”
이건 명표가 되겠다는 사람이 해선 안 되는 짓이었다·
그리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대응왕의 목숨을 거두어 들일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또 하나 대응왕을 무림맹까지 살려 데려가야 잘 못 전달된 보은패의 폐해를 신랄하게 보여주면서 구대문파 장문인들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하면 대체 어쩌자는 거냐?”
이병룡이 답답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강룡당과 복룡당의 표사들은 적이 올라올 만한 길목 곳곳에 노방(路姑)을 설치하도록 하세요· 묵룡당의 표사들은 말을 전부 끌어다 산 정상에 올려 놓도록 하시고요·”
노방은 표행을 하는 도중 숲에서 숙영할 때 쟁자수들이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설치하는 여러 가지 작은 덫을 말한다·
노방이 잔뜩 설치된 곳에 멋모르고 들어갔다가는 말이 발을 걸려 넘어지거나 갑자기 푹 꺼지는 땅 때문에 발목이 부러지거나 휘어진 나뭇가지에 매달아 둔 화살이 배를 뚫어 버리는 등의 불상사가 일어난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어떤 계획을 세우더라도 결국엔 산 정상으로 밀려 올라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적들을 최대한 지치게 만들면서 산 정상까지 끌어들인 다음····”
나는 말을 하다말고 심각한 얼굴이 되어 주변을 살폈다·
이어 바닥에 떨어진 가랑잎들을 주워 허공에 날렸다·
바싹 마른 가랑잎들이 앞으로 비스듬하게 날아가며 떨어졌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남궁소소가 내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소· 회의를 시작할 때만 해도 산에서 들판을 향해 불었는데 지금은 들판에서 산 정상 쪽을 향해 불고 있소·”
“그게 왜요?”
나는 대답 대신 일천 마교도들이 진을 치고 있는 들판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아니나 다를까 수많은 모닥불 속에서 백여 개의 횃불이 갈라져 나오더니 갑자기 산 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바람에 말발굽 소리가 실려 오는 걸 보니 말을 타고 오는 모양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병룡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활을 준비하라!”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째서?”
“어차피 유효사거리까지 오지 않을 겁니다·”
나는 당주들을 보좌하기 위해 근처에서 대기 중인 각 당의 표두들에게 곧바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 즉시 숲 구석구석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표사들을 전부 소환토록 하세요· 숙영지에 남은 표사들은 행낭과 병장기를 챙기라고 명하시고요·”
그러나 강룡당과 복룡당과 묵룡당의 표두들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자신들의 상관을 보았다·
어떻게 할지를 묻는 것이다·
이병룡이 먼저 자신을 보좌하는 묵룡당의 표두에게 호통쳤다·
“시키는 대로 하세요!”
이갑룡과 을룡이 차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표두들이 재빨리 다른 표사들을 불러 좀 더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리며 명령을 전달했다·
그 사이 횃불들은 백여 장 앞까지 다가왔다·
이어 갑자기 멈춰 서더니 그때부터는 옆으로 달리며 서너 장 정도의 간격을 벌리고 섰다·
“대체 뭘 하려는 거죠?”
“잠은 다 잔 것 같군·”
남궁소소의 궁금증에 대한 내 대답이었다·
이윽고 삼백여 장 정도의 길이로 늘어선 백여 개의 횃불들에게서 작은 불이 하나씩 생겨났다·
“횃불들이 새끼를 깠다!”
“화살에 불을 붙인 겁니다!”
“화공!”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이견과 삼견과 일견이 차례로 한 말이었다·
그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백 대의 불화살이 산 쪽을 향해 호선을 그리며 날아들기 시작했다·
산기슭에 툭툭 꽂힌 불화살들은 순식간에 불씨를 숲으로 옮겨 붙이기 시작했다·
“저런 미친놈들이!”
“우릴 산채로 태워 죽일 작정입니다!”
이견과 삼견의 외침을 시작으로 숙영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겨울 산은 지난 가을 동안 떨어져 쌓인 나뭇잎들이 바싹 말라 있다·
바람을 타고 불이 붙으면 온산으로 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게다가 놈들은 하필 화살을 쏘아 맞힐 수 없는 거리에서 지금도 계속해서 산기슭을 향해 불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한 명도 빠져 나갈 수 없도록 촘촘하게 불의 장막을 만들려는 것이다·
노방을 설치하고 투석을 던지며 저항한다는 계획이 물거품으로 변해 버렸다·
어떤 위험한 노방을 만들어 놓더라도 불이 전부 태워 없애 버릴 테니까·
전면전은커녕 한번 제대로 붙어 보지도 못하고 죄다 몰살당하게 생겼다·
모두가 우왕좌왕하면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다급해진 이병룡이 나를 보며 재촉했다·
“뭐라도 명령을 내려 줘야지!”
“기다리세요!”
나는 잠깐 시간을 더 끈 후에야 산기슭을 태우며 올라오는 불에서 시선을 뗐다·
이어 환생한 이후 첫 표행을 함께했던 복룡당의 표두 장량기를 불렀다·
“장 표두!”
“말씀하시지요·”
“지금 즉시 복룡당의 표사들을 전부 이끌고 산 정상 쪽으로 달려 올라가 계곡이 시작되는 지점을 경계로 빙 둘러 앞불을 놓으십시오· 불이 스스로 정상을 다 태울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중간중간에 불화살을 계속해서 쏘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한 시진 안에 정상이 다 타버려서 사람이 다닐 만큼 열기가 사라져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장량기는 노련한 사람이었다·
내 말뜻을 즉시 알아차린 그는 복룡당의 표사들과 함께 쏜살같이 사라졌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 계속해서 지시를 내렸다·
“산기슭에서부터 시작된 불이 온산을 태우며 정상에 도착하려면 두 시진은 족히 걸릴 겁니다· 그사이 우리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복룡당의 표사들이 모두 태워 버리고 재만 남은 정상으로 들어가 화마를 피할 것입니다·”
“그런 묘수가!”
삼견이 목구멍을 쥐어짜며 읊조린 말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묘안에 수뇌부를 비롯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표사들까지 크게 흥분했다·
“다들 후퇴할 준비를 하십시오!”
내가 호통을 치자 사람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행낭과 병장기를 챙기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이갑룡과 을룡과 병룡도 더는 묻거나 따지지 않고 각자의 위치로 가서 후퇴할 준비를 했다·
남궁소소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결국 형님들 말씀처럼 산 정상으로 올라가 수성전을 펼치며 시간을 끄는 수밖에 없게 되었군요· 엄폐물로 쓸 나무가 죄다 타서 사라져 버릴 테니 그마저도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지형에 빈틈이 없다면 인간 심리의 빈틈을 파고드는 수가 있으니까· 어쩌면 그편이 더 수월할지도 모르고·”
“예?”
“소저는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좀 있소·”
“뭔데요?”
“이리 가까이·”
내 설명을 모두 들은 남궁소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잔뜩 고무된 그녀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나는 저만치에서 행낭을 챙기고 있는 이견에게 다가가 물었다·
“혈응조는 어쨌습니까?”
“혈응조라니?”
“대응왕의 성명병기 말입니다·”
“그걸 뜬금없이 왜 내게서 찾는 건가?”
“챙기신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예·”
“어디서?”
“동굴에서요·”
“언제?”
“제가 대응왕을 때려 눕혔을때요·”
“어떻게 알았지?”
“빼앗아도 모자랄 판에 그런 신병이기를 버리고 오셨을 리 없잖습니까· 빨리 내놓으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이견은 잠시 갈등하더니 마침내 결심한 듯 행낭을 벗어 내려놓았다·
이어 다섯 손가락이 매 발톱처럼 날카로운 강철장갑 즉 혈응조 한 쌍을 꺼내주며 말했다·
“이번에도 황금대야처럼 구멍을 내서 돌려주는 건 아니겠지?”
“내려 한다고 구멍이 날 물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혈응조를 건네받은 나는 솟구치기 시작한 불길 너머의 들판을 응시했다·
모닥불이 가득한 적 진영 어딘가에서 그 역시 이쪽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삼뇌 아직도 안 죽은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