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 중원을 가로지르다(2) >
두두두두두!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우월한 기동성을 이용해 대숲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우리는 보름달이 뜬 쪽을 향해 질주했다·
다 잡은 먹잇감을 놓친 적들은 한발 늦게 대숲을 빠져나간 다음 대기시켜 둔 말들을 집어 타고 또다시 맹렬하게 추적해 오는 중이었다·
들판을 가로질러 끝도 없이 늘어진 적들의 횃불을 보니 흡사 거대한 화룡이 쫓아 오는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적 선두와의 거리는 백여 장에 불과했다·
죽림을 탈출하기 직전 천라지망의 한쪽을 구성하는 적들과 격전이 벌어졌는데 그때 시간이 지체된 탓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선두에서 이병룡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며 물었다·
이병룡은 마상에서 뒤를 한번 힐끗 돌아본 후 ‘이랴!’ 하고 박차를 가하곤 말했다·
“뭐가 알고 싶은 거냐?”
“전부 다요· 형님이 갑자기 왜 거기서 나오는 것이며 저들은 누구이고 그동안 어디서 무얼 하고 다니셨는지까지요·”
“그 얘길 다 지금 해달라고? 이렇게 달리면서?”
“말이 달리지 우리가 달리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때쯤엔 얕은 하천을 가로지르느라 말들의 달리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그 바람에 적 선두와의 거리가 칠십여 장까지 좁혀졌다·
이대로라면 하천을 건널 때쯤 오십여 장 정도로 좁혀질 것이다·
화살로 말과 표사들의 등을 쏘아 쓰러뜨리기에 딱 좋은 거리였다·
순간 적 선두에서 달려오던 말 십여 필이 무슨 이유에선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뒤에서 바짝 따라오던 말들이 쓰러진 앞말에 다리를 걸려 다시 넘어지면서 한바탕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모두가 영문을 몰라하는데 어느새 우리 행렬의 가장 뒤쪽으로 가 있던 일견이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철질려를 좀 더 챙기는 건데!”
은하산장을 탈출하던 중 동굴 속에서 대응왕이 철질려를 잔뜩 챙겼었다·
내가 대응왕을 두들겨 팬 이후 일견이 그걸 버리지 않고 다시 챙겨 두었다가 조금 전 뒤로 가서 솔솔 뿌린 모양이었다·
좁혀졌던 적들과의 거리가 벌어지자 이병룡은 다소 안심이 된 것 같았다·
하천을 완전히 건너자 다시 속도를 내며 그가 내게 말했다·
“점창산을 내려온 직후 나는 유성표의 지도에 난 길을 따라 곧장 아미파로 향했다· 유성표의 다음 목적지가 아미파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지·”
“그래서요?”
“한데 가는 동안 들리는 주점이며 객점마다 대응왕이 아미파의 비호 아래 금분세수를 한다는 소문이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퍼지고 있더군· 너무나 공교롭게도 말이지·”
“그래서요?”
“그때부터 표기를 감추고 표사들을 네 개 조로 나눈 다음 변복까지 한 채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자들을 은밀히 추적했다· 그랬더니 어떤 놈들이 나타난 줄 알아?”
“어떤 놈들이었는데요?”
“바로 양쪽 귀가 없는 놈들이었다· 두건을 써서 그걸 감추고 있었지·”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생각나는 놈들이 없어?”
“제가 아는 놈들입니까?”
“네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제가요?”
“남만의 마총에서 보물을 뗏목에 실어 탈출한 후 장사십곡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를 기억하겠지? 거기서 삼뇌가 수천 흑도들을 선동해 우리를 죽이려 하자 네가 오히려 역으로 흑도들에게 저 마교놈들의 귀를 잘라오면 보물을 전부 나눠 주겠다고 했잖아·”
“천마성교!”
“그래· 그놈들이야·”
유성표를 죽이고 표물을 빼앗아간 고수의 배후에 천마성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천마성교의 잔당들은 지난번 무림맹 표행건과 마총건의 연이은 실패로 엄청난 인적 물적 타격을 입었다·
그 때문에 당분간은 내부결속을 다지고 세를 키우느라 다른 곳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한데 내가 저들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이럴 땐 전생에서 마교의 행보를 좀 더 자세히 알지 못 했던 게 아쉬웠다·
사실 알았어도 이제는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전생과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달라져 버렸을 테니까·
당연하게도 그건 나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이상하게 천마성교 놈들과 자꾸 엮이는군요·”
“그건 네가 할 소리가 아니지· 거사를 도모하려고만 하면 네가 귀신같이 알고 나타나 방해를 한다며 마교놈들이야 말로 진절머리를 낸다고 하더라·”
“놈들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군요·”
“솔직히 내가 볼때도 그래· 아무튼 그때부터 은하산장에서 벌어지는 일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놈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그러다 네가 대응왕을 납치해 사천성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과 마교놈들이 죽림에 덫을 놓는 것까지 알게 됐지·”
“그러셨군요· 어쨌든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는 저놈들이나 따돌리고 나서 해·”
“안 그래도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지금처럼 한 방향으로만 달리면 머지않아 따라 잡힐 겁니다· 방향을 꺾어 적을 교란해야 합니다·”
“그랬다간 다 죽어·”
“예?”
“아까 네가 숙영을 하려고 했던 죽림은 入(입)자 모양으로 갈라진 강줄기에 둘러싸여 있다· 우린 그 사이로 들어왔고· 왼쪽과 오른쪽 모두 막혔다는 얘기지· 알다시피 뒤쪽은 적들이 쫓아오는 중이고·”
“하면 앞쪽도 막다른 길이라는 말씀이잖습니까?”
“강이 갈라지는 곳에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다· 경사가 가파르고 숲이 우거졌으니 그리로 들어가서 배수진을 펼치면 당분간 버틸 수 있을 거야·”
“수성전을 벌이자고요?”
“그런 셈이지·”
이병룡이 이끌고 온 병력은 천룡표국에서부터 데려온 사십여 명이 전부였다·
죽림에서 오십여 명으로 보았던 건 말과 횃불로 말미암은 착시였다·
여기에 내가 이끌고 온 일행이 열아홉이니 모두 합쳐야 육십 명이 채 안되었다·
이 병력을 가지고 일천 명의 기마인들과 맞서 싸울 수는 없다·
해서 생각해 낸 계획이 가장 가까운 산으로 들어가 수성전을 펼치며 버틴다는 거였나 보다·
적의 숫자가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사실은 이 역시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한데 현재로선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이긴 했다·
한편 똑같이 말을 타고 전력 질주를 하는데도 적 선두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말이 일천 필에 달하다 보니 그중 유난히 빠른 놈들이 앞으로 치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슈슈슉!
슈슈슉!
슈슈슉!
갑자기 날카로운 파공성들이 귓가를 스쳤다·
선두의 적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말을 타고 달리는 와중에도 하나씩 들고 있는 횃불이 저들에게 우리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횃불을 꺼야 합니다!”
“그랬다간 말이 돌부리에 걸려 고꾸라질 거예요!”
양홍경의 외침에 말을 잘 아는 남궁소소가 받았다·
그 순간 ‘핑!’ 소리와 함께 뒤쪽 표사가 든 횃불이 불꽃을 터뜨리며 꺼졌다·
화살은 ‘슉슉’ 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급기야 맨 뒤쪽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던 묵룡당의 표사 두 명이 연달아 비명을 질렀다·
“헉!”
“헉!”
“홍 표사와 백 표사가 맞았습니다·”
“상태는!”
“낙마할 정도는 아닙니다!”
“거의 다 왔다· 다들 조금만 참아라!”
이병룡과 묵룡당 표사 사이에 다급하게 오간 대화였다·
“모두 묵룡당주님을 따라 일렬로 달립니다!”
나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친 후 가장자리로 물러나며 말의 속도를 확 늦추었다·
선두에서 달리던 비룡당의 표사들과 해남파의 제자들이 차례로 빠르게 나를 추월해 갔다·
그러다 이견이 나타날 때 다시 속도를 맞추어 달리며 외쳤다·
“황금대야 좀 빌려주십시오·”
“갑자기 황금대야는 왜?”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돌려주는 거지?”
이견이 밧줄에 꿰어 거북이 등딱지처럼 짊어지고 가던 황금대야를 마지못해 풀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황금대야를 빼앗듯이 낚아챈 나는 고삐를 잡아 당기며 말을 뚝 멈추었다·
그러자 묵룡당의 표사들이 쏜살처럼 내 곁을 스쳐 갔다·
이윽고 마지막 한 명까지 추월했을 때 재빨리 행렬의 꼬리에 붙으며 다시 질주하기 시작했다·
천룡표국의 일급 표사 정도 되면 오십 장 밖에서 날아오는 화살 정도는 소리만 듣고도 충분히 피하거나 검으로 쳐낼 수 있었다·
문제는 지축을 울릴 정도로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였다·
주변을 꽉 채워버리는 소음 속에서 화살의 파공성만 정확히 골라내고 대처하는 건 일갑자 이상의 고수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슈슈슉!
슈슈슉!
슈슈슉!
‘지금이다!’
나는 이견이 튼튼한 놈으로다가 갈아 끼워 놓은 밧줄을 잡고 황금대야를 힘차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땅! 따당! 따다당!
적들이 쏜 화살은 황금대야를 요령처럼 울려대며 모조리 튕겨 나갔다·
밧줄을 팔 하나의 길이만큼 넉넉하게 늘여 잡았더니 질주하는 행렬의 뒤쪽 허공에 방원 일 장정도의 커다란 방패막이 뚝딱하고 생겨났다·
내 의도를 알아차린 비룡당과 묵룡당의 표사들은 방패막의 공간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일렬로 달렸다·
그렇게 백여 발의 화살을 튕겨내며 달렸을 무렵이었다·
대동소이한 파공성들 사이로 갑자기 범상치 않은 파공성이 하나 들려왔다·
쒜애애액!
‘철전!’
따앙!
놀랍게도 화살은 황금대야의 바닥을 그대로 관통한 후 내 왼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황금대야만 믿고 휘두르면서 쳐내지 않았다면 그대로 등을 꿰뚫렸을 것이다·
‘나를 노렸어!’
달리는 마상에서 오십여 장 밖에서 달리는 또 다른 사람의 등으로 철전을 정확히 쏘아 보냈다·
그것도 황금대야의 바닥을 관통해 버리는 강도로·
누군지 몰라도 적진영에 굉장한 활의 고수가 있는 듯했다·
그때 앞쪽에서 이병룡이 일갈을 내질렀다·
“모두 말을 탄 채 산을 오른다!”
이병룡을 시작으로 선두에서 달리던 비룡당 표사들이 눈앞에 나타난 산비탈의 숲속으로 우수수 뛰어들었다·
묵룡당의 표사들과 내가 차례로 뒤를 이었다·
그 모습이 흡사 시커먼 숲에게 모조리 잡아 먹히는 것 같았다·
나무가 우거진 데다 가파르게 경사까지 지다 보니 달리는 속도가 뚝 떨어졌다·
그 틈을 타 적들은 순식간에 삼십여 장 밖까지 다가왔다·
숲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는 일렬로 달리는 게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경사를 따라 말과 사람들이 늘어서면서 뒤가 훤히 노출 될테니까·
잠시 후 산 아래에 도착한 적들이 숲속을 향해 일제히 화살비를 쏟아부으면 그야말로 큰 낭패였다·
한데 또 끝이 아니었다·
달빛이 파고들지 못하는 사방의 숲속에서 살기를 뿌려대는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그것도 백여 명은 족히 될 것 같은·
‘매복!’
순간 좌우의 숲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가 아니라 이십여 장 밖까지 추격해온 마교도들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두두두둑!
활 쏘는 소리를 가까이에서 들으면 파공성이 아니라 이렇게 시위 털리는 소리가 난다·
횃불을 밝히며 선두에서 맹렬하게 달려오던 적 수십 명이 화살비를 그대로 뒤집어썼다·
“으악!”
“아악!”
“크악!”
커다란 말이 고꾸라지는 소리와 화살 맞은 자들의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달려오던 속도를 갑자기 줄이지 못한 적들은 계속해서 밀려 오고 걸려 넘어지고 화살비를 맞았다·
잠깐 사이에 백여 명의 적들이 말과 함께 쓰러져 나뒹굴었다·
“모두 이백 장 밖으로 후퇴한다!”
누군가의 일성을 시작으로 전열을 재정비한 적들이 뒤돌아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놈들이 백여 장 밖으로 달아날 때까지도 의문의 숲속 궁수들은 화살을 쉬지 않고 퍼부어 댔다·
그 바람에 추가로 오십여 명의 마교도들이 도망치는 와중에도 등에 화살을 맞고 바닥을 굴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리는 모두 비탈 오르는 걸 멈추고 지켜보았다·
잠시 후 어둠에 잠긴 좌우의 숲으로부터 활과 도검으로 무장한 백여 명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그 중 수장으로 보이는 두 명의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확 들어왔다·
“강룡당주?”
“복룡당주?”
일견과 이견이 차례로 한 말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두 명의 수장은 이갑룡과 이을룡이었다·
두 사람이 이끌고 온 무인들은 당연하게도 강룡당과 복룡당의 표사들이었고·
생각지도 않았던 아군의 등장에 비룡당의 표사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묵룡당의 표사들은 그들의 팔과 손을 맞잡으며 반가워했다·
강룡당과 복룡당의 표사들도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무사히 탈출한 묵룡당의 표사들을 축하하고 격려해 주었다·
항주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이였어도 머나먼 타지에서는 결국 같은 표국의 동료들이었던 것이다·
한데 비룡당의 표사들과 달리 묵룡당의 표사들은 저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그렇게 놀라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다친 곳은 없으신가?”
이갑룡이 다가오더니 남궁소소에게 물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그는 항주에 남아 있는 남궁세옥과 오랜 친구 사이였다·
그가 적들에게 쫓기고 도망쳐 온 친구 여동생의 안부를 특별히 챙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다행이군·”
“모두 선배님들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남궁소소는 이갑룡과 을룡에게 깎듯이 포권지례를 올렸다·
그제야 이갑룡이 양홍경과 함께 있는 엽초풍을 힐끗 바라본 후 내게 나무라듯 말했다·
“그러게 처음부터 표사들을 충분히 데려왔어야지·”
“형님들을 여기서 다시 뵐 줄은 몰랐습니다·”
“거창하게 출표식까지 하며 항주를 떠나왔는데 누가 되었든 표행은 성공시키고 돌아가야 할 게 아니더냐· 설마 너만 진심으로 천룡표국을 위하고 우린 천룡표국이 어떻게 되건 아무 상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제가 이리로 올 줄은 어떻게 아시고요?”
“사흘 전 병룡이 우리에게 사람을 보냈다· 마교놈들이 비룡당이 운송 중인 천룡표국의 표물을 탈취하고 표사들을 죽이려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거냐고·”
옆을 돌아보니 이병룡은 숲에 도착하자마자 열일을 제쳐둔 채 상처 입은 두 표사들을 살피고 있었다·
제 손으로 직접 화살을 뽑고 횃불에 달군 단도로 상처를 지지는 과정이 빠르게 이어졌다·
다행히 표사들은 어깨와 팔을 맞아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나는 다시 이갑룡에게 말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두 분 다 말머리를 돌려 항주로 가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전해 듣기로는 그렇게 소문이 났다더라고요·”
“마교놈들이 우리가 고용한 흑도들 속에 간자를 심어 두었다· 그리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았지· 해서 항주로 돌아가는 척 하며 역정보를 흘리고 고용한 흑도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그러셨군요· 어쨌든 달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한 시름 놓았습니다·”
“고마워하지 마라· 다시 말하지만 널 위해서가 아니라 천룡표국의 존엄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달려온 것이니까·”
만약 이갑룡과 이을룡이 그대로 귀환을 했었다면 강호인들의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이다·
천룡표국의 장남과 차남이 위기에 빠진 두 동생을 버려두고 자기들만 돌아왔다고·
그전에 이미 이종산에게 고작 그런 그릇으로 어떻게 천룡표국을 운영할 생각이었냐며 크게 혼쭐이 날 것이다·
천룡표국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갑룡의 말과 그들이 처한 현실 중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 지는 나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지금은 싸우고 경쟁할 때가 아니라 손을 잡을 때였다·
“그거면 족합니다·”
나는 이갑룡에 이어 멀뚱히 옆을 지키고 있는 이을룡에게도 공손히 포권지례를 올렸다·
여강고성에서 내게 몇 대 맞고 크게 욕까지 본 그는 여전히 응어리가 풀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상관없다·
나 역시 남궁소소와 내 사람들을 죽이려 한 그를 조금도 용서해 줄 생각이 없으니까·
우리의 동맹은 어디까지나 이 표행이 끝날 때까지만이다·
이윽고 치료를 끝낸 이병룡이 다가오더니 내게 다짜고짜 말했다·
“이제부터 네가 지휘를 해라·”
“제가요?”
“이건 어디까지나 네 표행이다·”
“하지만 형님들께서 절 이리로 이끄셨잖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어찌어찌해서 널 빼돌리는 데까지는 성공을 했다만 나가는 건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제 네가 우리를 살려서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
“제가 무슨 수로요?”
“남만에서는 놈들에게 잘도 엿을 먹이더니 왜 갑자기 약한 척이야? 됐고· 강룡당 복룡당 묵룡당의 표사들을 전부 합치면 백오십 명이다· 여기에 네가 이끌고 온 인원들까지 더하면 백칠십 명쯤 되겠군· 반면에 적들은 일천 명이 조금 넘는다· 자 이제 어떡할 테냐?”
이병룡은 단호했다·
예전에는 보지 못 했던 모습이었다·
아니다 오히려 내게 호통까지 치는 이 모습이야말로 처음 환생을 했을 때 보았던 그의 본래 모습이었다·
다만 그때는 나를 개무시했고 지금은 말투는 여전히 거칠지만 실제로는 나를 인정하고 두려워 한다는 것이 다를 뿐·
이갑룡과 을룡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이병룡의 말대로 내 지시를 따르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강룡당과 복룡당과 묵룡당의 표사들도 전부 선 자리에서 나만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남궁소소가 내게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행 중에 무림의 선배들을 이끄는 것과 천룡표국의 다른 당을 그것도 형님들을 이끄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한다·
우선 나부터가 나와 내 사람들의 목숨을 이갑룡이나 이을룡에게 맡길 수가 없었다·
마침내 결심을 굳힌 내가 이갑룡에게 물었다·
“활과 화살은 얼마나 있습니까?”
“활은 백 자루 정도이고 화살은 인당 열 발 정도씩밖에 남지 않았다· 만약 적들이 오늘 밤 다시 공격해 온다면 반각을 버티지 못하고 다 소진될 것이다·”
“말은 몇 필이나 있습니까?”
“인당 한 필씩이다·”
다시 이병룡에게 물었다·
“청성파의 장문인과 아미파의 장로님들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우리를 추적 중일 겁니다· 지금쯤 어디까지 오셨을지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제저녁에 마지막으로 보고를 받았으니 아마 내일 아침쯤이면 타강을 넘을 거다· 와 봤으니 알겠지만 타강에서 이곳까지는 한나절 정도 걸리고·”
“하면 적들은 내일 아침 해가 떠서 숲속이 보이기 시작할 때 다시 공격해 올 겁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서둘러 끝장을 보려 할 테니 우리도 그 전에 대책을 세워야 하고요·”
“그러니까 어떻게?”
“그 전에 한배를 탄 사람들끼리 인사부터 나누시죠· 여기 세 분은 저의 형님들이십니다· 그리고 이쪽은 해남파의 십일대 장문인과 사형제 분들이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