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 골육상쟁 (9) >
“그대는 누구인가?”
청성파의 장문인 무극진인이 내게 물었다·
차분한 음성이었지만 감히 항거할 수 없을 것 같은 위엄이 실려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쓰고 있던 죽림을 벗어 던졌다·
뜻밖에도 스물 중반의 준수한 용모를 지닌 사내가 등장하자 사람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청성파의 진영 속에서 제운학이 나를 먼저 알아보고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입을 빌릴 것 없이 나는 무극진인과 복호삼승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지례부터 올렸다·
“소생은 항주의 천룡표국에서 온 표사 이정룡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뛰어들어 소란을 일으킨 일에 대해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풍운비룡!”
소개가 끝나자마자 바로 일천 무림인들 속 누군가에게서 튀어나온 외침이었다·
함성과도 같은 웅성거림이 퍼졌다· 내가 과거에 벌였던 각종 표행들에 대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끝도 없이 전해졌다·
그중에서도 장강에 범선을 일곱 척이나 띄웠고 두 척은 민강을 타고 성도까지 올랐다는 이야기가 단연코 화제였다·
“천룡표국의 표사가 여긴 어쩐 일이신가?”
무극진인이 좀 전과 달리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자 일천 무림인들의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한 달 보름 전 천룡표국의 국주께서는 사천성 금사강에서 횡액을 당한 유성표의 표행을 잇겠노라고 천명하신 바 있습니다· 이에 특명을 받고 그가 잃어버린 표물을 되찾으러 다니는 중에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 표물은 이미 우리 수중에 들어온 것 같네만·”
“알고 있습니다·”
“하면 된 것 아닌가?”
“잘 아시다시피 보은패의 숭고한 명령이 엉뚱한 자들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바뀌었으니 문제지요·”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네·”
“그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모든 게 끝난 줄도 알겠군·”
나는 가만히 복호삼승을 돌아보았다·
그녀들 역시 이 점에 대해서는 무극진인과 생각이 같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보은패의 원래 주인인 해남파에서 자신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려고 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백칠십 년 전 사조께서 해남파에 준 보은패가 엉뚱한 사람들의 손을 통해 사문으로 돌아왔다·
입장을 바꿔 내가 만약 아미파나 청성파의 장문인이라면 그 사연을 알아보려 하지 않겠나·
금사강에서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유성표가 알고 보니 해남파의 표물을 운송 중이었다는 사실은 이제 비밀도 아니었다·
남은 건 해남파가 자신들에게 보은패를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려고 했는가였다·
그리고 한 달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걸 알아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나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아미파와 청성파가 보은패의 소명을 완수하지 못했으니 천룡표국의 전위표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청성파가 대응왕을 죽이려는 것도 막고 아미파가 대응왕이 금분세수를 끝낼 수 있도록 호법을 서는 것도 막겠습니다·”
“함께 온 열두 명의 표사들로 말인가?”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일천 무림인들 속에는 나처럼 죽림을 쓴 비룡당의 표사들과 점창오검이 신분을 숨긴 채 숨어 있었다·
그들의 숫자가 딱 열두 명이었다·
군중 속에 있던 내가 구경꾼들과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무극진인은 혼전 중에도 그걸 알아차리고 정확한 위치와 주변인들의 복장까지 살폈던 것이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련함과 통찰력이었다·
남궁소소를 비롯해 비룡당의 표사들과 점창오검이 뒤늦게 무림인들을 헤치고 나와 죽림을 벗어 던졌다·
“남궁소소!”
“점창오검!”
남궁소소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청성파의 제자들 중 한 명이었고 점창오검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아미파의 제자들 중 한 명이었다·
“장로님들과 장문진인을 뵙습니다·”
“장로님들과 장문진인을 뵙습니다·”
남궁소소와 단석조가 복호삼승과 무극진인을 향해 자신들을 소개하는 짧은 인사말과 함께 포권지례를 올렸다·
비룡당의 표사들과 엽초풍 그리고 점창오검의 다른 네 명은 말없이 포권지례를 따라 하는 것으로 백도무림의 존장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
일천 무림인들이 또다시 술렁거렸다·
남궁소소의 용모에 대한 찬사와 점창오검이 왜 우리와 함께 다니는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한편 천하의 무극진인도 파악하지 못한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키가 작은 탓에 해남파의 장문인인 엽초풍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튀어나오기 이전에 아홉 명의 일행이 더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남궁소소의 가슴까지 오는 엽초풍을 본 무극진인과 복호삼승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나는 그들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말했다·
“표사가 수십 명이 된다고 한들 소생에게 무슨 재주가 있어 두 문파를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오늘 중으로 대응왕이 금분세수를 하기는 그른 것 같으니 이제 그가 청성파의 손에 죽는 것만 막으면 되겠군요·”
“저런 뻔뻔한지고!”
일갈을 터뜨리며 앞으로 나온 사람은 삼협문의 초로인 이었다·
그는 앞서 아미이십칠교가 펼치는 검진을 뚫으려다 혜원사태의 일장을 맞고 나가떨어진 바 있었다·
초로인의 말이 이어졌다·
“표행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마두를 비호하는 것도 서슴지 않겠다는 건가? 표왕의 명성이 강호에 진동하여 오랫동안 흠모하는 마음을 품었건만 오늘 그 아들이라는 자가 하는 짓거리를 보니 개탄스럽기 짝이 없군· 부끄러운 줄 아시게!”
“선배님의 충고는 가슴에 무겁게 새기겠습니다·”
“무인의 가르침은 혀로 하는 게 아니지!”
채앵!
초로인이 별안간 장검을 뽑아 들었다·
이어 함께 온 아홉 명의 고수들과 함께 청성파의 진영으로 가서 합류했다·
청성파를 도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응왕을 죽여버리겠다는 뜻이다·
무극진인이 제자들을 이끌고 나타난 이상 대응왕의 죽음은 모두 청성파의 협행으로 강호에 알려질 것이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삼협문 고수들의 행동에는 어떤 계산도 없었다·
오직 천인공노할 마두를 죽여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숭고한 협의지심만 가득할 뿐·
그들의 행동은 다른 무림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챙! 채챙! 채채챙!
곳곳에서 도검을 뽑는 소리가 들리더니 삼삼오오 앞으로 나와 청성파의 진영 쪽으로 가서 섰다·
잠깐 사이에 그 숫자가 무려 이백여 명을 헤아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청성파와 삼협문에 이어 이백여 명의 무림인들까지 가세하자 은하산장의 여자들도 용기를 내어 하나둘씩 청성파의 진영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 배은망덕한 년들이!”
“닥치시오! 우리가 비록 귀하를 비호하지만 귀하가 과거에 저질렀던 짓들까지 이해하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오·”
대응왕이 욕지거리를 하자 복호삼승의 첫째인 해공사태가 더는 참지 못하고 일갈을 터뜨렸다·
그러나 대응왕은 조금도 반성의 기미가 없었다·
“내가 무얼 어쨌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금분세수를 앞두고 과거를 뉘우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소· 다만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주시오· 그래야 귀하를 비호하는 우리의 낯이 조금이라도 덜 부끄러울 테니까·”
“사태들께서야 말로 목숨 걸고 이 몸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무려 사조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보은패가 아닙니까?”
복호삼승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그녀들이라고 저 흉악한 마두가 금분세수하는 걸 돕고 싶겠나·
아미파의 제자들은 고작 삼십여 명 나를 포함한 비룡당의 표사 여덟 명을 전부 합쳐도 사십 명이 채 안 된다·
그에 반해 청성파의 진영은 삼백 명을 훌쩍 넘었다·
이건 정상적인 싸움이 될 수가 없었다·
무극진인이 점창오검을 이끌고 온 단석조에게 물었다·
“자네들은 어쩔 텐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후배들은 최선을 다해 이마파와 청성파의 싸움을 막겠습니다·”
“저 표사를 돕겠다는 뜻이군·”
“현재로선 그를 돕는 것이 두 문파의 싸움을 막는 길인 것 같습니다·”
“싸움을 막는 길은 최대한 빨리 대응왕의 숨통을 끊는 것뿐이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협의로운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손속에 사정을 두어 주시게·”
단석조는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곤란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무극진인은 마지막으로 남궁소소를 한 차례 바라보았다·
이어 뒤쪽의 청성 제자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작하거라!”
“우와와아!”
명령은 청성의 제자들에게 내렸는데 함성은 뒤늦게 가세한 이백여 명의 무림인들과 백여 명의 여인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복호삼승을 필두로 장창을 든 아미이십칠교가 진법을 펼치며 스스로 장벽이 되었다·
나와 비룡당의 표사들 그리고 점창오검은 서둘러 아미파의 진영으로 날아갔다·
싸움은 시작부터 격렬했다·
그리고 일방적이었다·
청성파의 제자들만으로도 벅찬데 삼백여 명의 무림인들에게까지 둘러싸이니 흡사 벽이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무극진인은 나서지도 않았다·
아미이십칠교는 사생결단의 각오로 무림인들을 막아섰다·
그녀들이 정체 모를 합격진을 전개하자 무슨 조화인지 일기당천의 위력이 뿜어져 나왔다·
복호삼승은 천둥 같은 장법으로 적 선봉의 기세를 연달아 무너뜨렸다·
비룡당의 표사들과 점창오검도 좌우의 날개에서 최선을 다했다·
대응왕도 놀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쓰러진 청동화로에서 자신의 독문병기인 혈응조를 이미 찾은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 식지를 않아서 착용은 못 하고 쇠사슬에 연결해 유성추처럼 썼다·
불그스레한 빛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그의 혈응조가 허공을 날 때마다 누군가의 도검이 텅텅 터져 나갔다·
단순히 도검만 부수어 버린 게 아니어서 대응왕은 잠깐 사이에 일곱 명의 무림인들을 때려눕히는 신위를 선보였다·
그리고는 아예 머리통을 부수어 죽여버리려고 했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든 사람들이니 그의 입장에서는 살심이 일어날 만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와 단석조와 남궁소소가 번갈아 가며 앞을 막아서며 방해했다·
급기야 남궁소소는 우리가 끝까지 도와주길 바란다면 손속에 사정을 두라고 소리 지르며 협박했다·
협박이 먹혔는지 대응왕은 그때부터는 살인을 시도하지 않았다·
싸움은 점점 이어져 반 각이 훌쩍 지나갔다·
아무리 고수들이라고 해도 압도적인 숫자의 격차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저쪽 진영에 고수가 없는 것도 아니고·
제운학이 이끄는 청성칠검이 기어이 아미이십칠교의 합격진을 뚫었다·
길이 열리자 무림인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들어왔다·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우리 쪽의 진영도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때부터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각자가 알아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복호삼승은 신형을 물려 대응왕을 삼방에서 호위했다·
보은패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 최후의 보루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그녀들을 상대한 것은 청성칠검이었다·
평범한 무림인들은 평생을 가도 볼 수 없는 두 문파의 절기가 세 고승과 일곱 도사의 손끝에서 현란하게 펼쳐졌다·
“언제까지 싸울 텐가!”
“이러다 정말 다 죽어!”
혼전 중에 일견과 이견이 외쳤다·
나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양홍경이 아홉 사형제를 이끌고 떠난 지 반 식경이 훌쩍 넘었것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싸움도 격렬해지면서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그나마 서로가 살초만큼은 최대한 피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상대를 진짜 적으로만 여겼다면 지금쯤 수십 명이 죽어 나갔을 것이다·
그때였다·
꾸웅!
태어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가 산 정상 쪽으로부터 울렸다·
웅장하지만 가볍지 않고 짧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심장을 철렁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사람들은 산 정상 쪽으로 힐끗 시선을 주었지만 싸움을 멈추지는 않았다·
오히려 우리 쪽의 패색이 짙어지자 무림인들이 더욱 거칠게 몰아붙였다·
또 그때였다·
꾸구구궁!
이번엔 소리로만 끝나지 않았다·
수백 명이 난상으로 얽혀 싸우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발밑에서 심상치 않은 진동이 느껴졌다·
놀란 사람들이 후다닥 물러나면서 거짓말처럼 싸움이 그쳤다·
모두가 만년설로 뒤덮인 산 정상을 심각하게 올려다보았다·
저녁노을에 반사되어 숯불처럼 붉게 빛나는 설봉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나는 때마침 옆에 있던 호리독사에게 조용히 읊조렸다·
“엽 장문인을 업으시오·”
“알겠습니다·”
꿍!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촛대처럼 깎아지른 산봉우리로부터 거대한 덩어리의 눈이 뚝 떨어졌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 뒤를 이었다·
콰콰콰콰콰콰!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산정상 부근의 눈 덩어리 전체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눈은 골짜기를 타고 은하산장을 향해 무섭게 달려왔다·
“눈사태다!”
누군가의 일성을 시작으로 구경하고 있던 무림인들이 양쪽의 산릉을 향해 달렸다·
아무리 협의지심이 깊어도 내 목숨을 잃어 가면서까지 마두를 죽이려는 사람은 없었다·
청성파를 돕겠다며 싸움에 가세한 무림인들도 전부 산릉을 향해 달렸다·
은하산장의 시비들과 내게 부끄러운 줄 알라며 호통치던 삼협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쭉정이들이 전부 빠져나가자 장내에는 아미파와 청성파의 제자들 그리고 내가 이끌고 온 일행들만 남게 되었다·
“마무리를 지어라!”
무극진인이 일성을 내지르며 싸움에 뛰어들었다·
전부 눈사태에 휩쓸려 가버리기 전에 끝장을 보려는 것이다·
아미이십칠교가 달려나가 다시 합격진을 펼치며 막아섰다·
청성파의 제자들도 아미이십칠교를 향해 돌진했다·
나는 대응왕을 에워싸고 있던 복호삼승에게 황급히 달려갔다·
“여긴 저희에게 맡기고 대응왕과 함께 복호산으로 피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청성의 장문인께서도 아미파까지 찾아와 대응왕을 내놓으라고 하지는 못하실 겁니다·”
“내 어찌 새파란 후배들에게 불덩이를 던져주고 뒷모습을 보이며 달아나겠나· 여긴 우리가 맡을 테니 자네가 대응왕을 호위해 빠져나가게·”
“하지만 사태·”
“우리도 곧 따라가겠네·”
“그럼 무운을 빕니다·”
나는 두 번도 묻지 않고 돌아섰다·
대응왕이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오라는 말을 남긴 채 어디론가 신형을 쏘았다·
수백 명의 무림인들이 치워지니 퇴로가 열린 것이다·
그때쯤엔 무극진인이 아미이십칠교가 펼치는 합격진을 뚫고 들어왔다·
복호삼승의 세 고승이 무극진인을 향해 달려갔다·
뻥! 뻥! 뻥!
장과 장이 격돌하면서 귀청을 찢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눈 덩어리는 어느새 몇 배로 불어나 골짜기의 절반까지 쏟아져 내려온 상태였다·
대응왕을 따라 달려간 곳은 은하산장 뒤쪽의 깎아지른 절벽 앞이었다·
“여길 올라가자고요?”
“어느 세월에·”
“하면요·”
“비키시게·”
대응왕이 석벽의 한 지점을 향해 일장을 떨쳤다·
그러자 굉음을 내며 석문이 열리더니 시커먼 동굴이 입을 쩍 벌렸다·
“이건 뭡니까?”
“산 아래로 향하는 동굴일세·”
그때였다·
소리가 점점 커지더라니 엄청난 돌풍과 함께 거대한 눈의 벽이 마침내 은하산장에까지 들이닥쳤다·
전각들이 맥없이 쓸려 내려가고 아름드리 교목들이 우지끈 부러지고 사라졌다·
우리가 있는 곳까지도 눈 폭풍이 휘몰아쳤다·
평생 동안 일군 산장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는 보는 대응왕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갑자기 눈사태라니· 분명 말코놈들이 무언가 수작을 부렸을 터· 금분세수를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의 치욕은 반드시 갚아주리라!”
“이러다 다 죽습니다·”
“따라오게·”
겨우 미련을 버린 대응왕이 동굴 속으로 뛰어들었다·
비룡당의 표사들과 점창오검이 차례로 뒤를 이었다·
호리독사에게 업혀 온 엽초풍은 사형들이 걱정되는지 마지막까지 남아 설봉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둘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말했다·
“다들 무사히 빠져 나갔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시지요?”
“눈사태가 일어나는 순간 개미만한 그림자들이 서쪽 능선으로 빠르게 달려 올라가는 걸 보았습니다· 세어보니 정확히 아홉 개였습니다·”
“그걸 전부 보고 있었다고요?”
“그렇습니다·”
눈 폭풍이 점점 거세졌다·
엽초풍은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후 동굴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뛰어들자 석문이 닫혔다·
뒤이어 ‘쿵!’ 하며 눈 덩어리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