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 골육상쟁 (4) >
이곳은 운남성이었고 운남 무림에서 점창파가 가진 명성과 위세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심지어 이곳 여강고성에서 점창산이 그리 멀지도 않았다·
놀라기는 강룡당의 표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검진을 펼치는 와중에도 모두 고개를 돌려 이갑룡을 바라보았다·
한 달여를 추적한 끝에 포획한 흉수가 하필 구대문파 중 한 곳인 점창파의 제자였으니 얼마나 당혹스럽겠나·
당연하게도 이갑룡 역시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한데 오랜 시간 그를 지켜본 내 눈에는 어딘지 모르게 행동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 시선을 옮겨 오른쪽 담벼락 위에 앉아 있는 쥐상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흰 두건으로 백발을 감춘 그는 이갑룡이 항주에서부터 고용한 객원표사로 세상에 모르는 무인과 무공이 없다는 만박신안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갑룡은 만박신안을 통해 유성표를 죽인 흉수가 점창파의 제자라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땐 것은 그래야 여기까지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흉수가 점창파의 제자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서 추적한 것과 잡고 보니 점창파의 제자였다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전자는 점창파로부터 심각한 시비의 빌미를 줄 수 있는 반면 후자는 오히려 점창파가 해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갑룡 여우가 다됐구나·’
그때쯤에는 복룡당의 표사 오십여 명이 뒤늦게 서쪽 지붕 위로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내가 이끄는 비룡당의 표사들과 해남파의 제자들도 동쪽 담장 위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쪽 사람들은 나처럼 모두 납서족의 전통복장으로 변복을 한 상태였다·
아마도 이곳으로 오기 전 눈치 빠른 남궁소소가 사람들에게 환기를 시켰고 호리독사가 눈 깜짝할사이에 옷을 훔쳐다 주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운남 사정에 밝은 청면살이 이갑룡에게 다가가 무언가 귓속말을 전했다·
마치 점창파의 단석조에 대해 이갑룡에게 설명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것 또한 미리 짜놓은 그림일 공산이 컸다·
이윽고 이갑룡이 다시 단석조를 보며 말했다·
“알고 보니 점창오검(點蒼五劍)의 맏형이셨군요· 강호에 협명이 자자한 협객을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그러면서 늦게나마 포권을 쥐어 보였다·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점창오검은 당대의 점창을 대표하는 다섯 명의 중장년 고수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중에서도 일검 단석조는 삼십 년 후쯤 ‘점창제일검’ 이라고까지 불리게 된다·
어쩐지 이름이 귀에 익더라니· 그런데 단석조가 유성표를 죽였다고?
“한데 점창의 제자께서 어찌하여 이렇게 음침하고 불경스러운 곳에 숨어 계신 겁니까?”
“그 말은 왜 유성표를 죽였느냐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점창의 제자에게 그런 말을 할 때는 혐의를 입증할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할 것이오· 아니면 뒷일을 감당할 배짱이 있든가· 귀하는 어느 쪽이오?”
“비 때문에 유성표가 사흘을 머물렀던 학경의 여곽에서부터 흉수를 추적해 왔습니다· 이제 와서 보니 유성표의 행낭에 남은 검흔이 아무래도 사일검법(射旧劍法)의 검흔인 듯싶군요·”
이갑룡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룡당의 표사 하나가 낡은 행낭을 받쳐 들고 와서는 단석조의 앞에다 놓아두고 돌아갔다·
행낭에는 핏자국과 함께 대여섯 개의 검흔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 유성표가 자신을 죽이러 온 흉수를 상대로 얼마나 격렬한 싸움을 벌였는지를 짐작케 했다·
어딘가에 남은 검흔만을 보고 그 검술의 유파를 알아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견문이 넓고 무리를 아는 고수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못할 것도 없었다·
만약 그 당사자가 불과 조금 전 누군가를 상대로 문제의 검법을 선보였다면 더더욱·
담장과 지붕 위의 흑도들 중에서도 견문넓고 눈 밝은 자들이 제법 여럿 있을 것이다·
이갑룡은 지금 운남성의 입 빠른 흑도 백여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단석조를 심문하고 있었다·
점창파의 제자를 덮어놓고 무력으로만 밀어붙일 수가 없으니 생포할 명분을 하나씩 쌓아 가는 것이다·
이것 역시 계획에 있었던 것 같다·
보면 볼수록 이갑룡이 이번 일에 사활을 걸었다는 게 느껴졌다·
“내가 왜 유성표를 죽였다고 생각하시오?”
“이유야 차고 넘치지요·”
갑자기 끼어든 사람은 이을룡이었다·
이갑룡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단석조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천룡표국의 복룡당주 이을룡입니다·”
이을룡은 누가 보아도 형식적인 태도로 포권지례를 올렸다·
“천룡표국의 이공자이시군· 한데 대관절 무슨 이유가 차고 넘친다는 거요?”
“유성표가 해남파로부터 표행을 의뢰받아 과거의 비사와 관련된 보은패를 구대문파에 전달하려 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한데 구대문파의 입장에서 그 비사는 영원히 묻혀 있어야 하는 것이었죠· 보은패의 대가로 유성표가 전달한 요구 역시 절대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고요·”
단석조와 이갑룡의 눈이 동시에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단석조는 이을룡이 내막을 모두 알고 있음에 이갑룡은 구대문파가 연관되어 있음에 크게 놀란 것이다·
담장 위에 있는 흑도들 사이에서는 술렁거림이 태풍처럼 들고 일어났다·
점창파에 이어 구대문파까지 언급되었으니 놀라 나자빠질밖에·
“그런 배경 속에서 유성표는 하필 점창파에 첫 번째 보은패를 전달한후 다음 목적지로 가려던 중 변을 당했습니다· 누구라도 이런 내막을 안다면 점창파가 과거의 비사를 감추기 위해 고수를 내려보내 살인멸구했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뻔히 의심받을 짓을 점창파에서 왜 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외다· 귀하들의 눈에는 점창산에는 죄다 멍청이들만 사는 것처럼 보이시오?”
“그건 천룡표국의 개입이라는 변수가 있고 난 후의 얘기지요· 만약 우리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유성표를 도모하는 거사가 성공했다면 점창파에서 벌인 짓이라는 걸 아무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 입 닥치지 못할까!”
어째 조금씩 선을 넘는 것 같더라니 급기야 점창파를 대놓고 범인 취급하는 이을룡의 말에 단석조는 불같이 화를 냈다·
검끝을 바깥으로 향한 채 눈알을 부라리는 것이 당장에라도 검진을 뚫고 날아들어 이을룡을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자 지붕 위에 있던 복룡당의 표사들이 마당으로 우수수 날아들었다·
이어 강룡당의 표사들이 펼친 검진의 뒤쪽에서 이중으로 차륜진을 펼치며 순식간에 단석조를 에워싸버렸다·
이렇게 되면 단석조 한 명을 상대로 강룡당과 복룡당이 동시에 포위한 셈이 된다·
이을룡은 시비를 거는 척 하면서 이갑룡이 차려 놓은 밥상에다 얼른 숟가락 하나를 얹은 것이다·
‘이런 얍삽한 인간!’
아니나 다를까 이갑룡의 얼굴이 또다시 와락 구겨졌다·
나만 열심히 경계하다가 엉뚱하게 이을룡에게 한 방 먹은 것이다·
단석조는 만사가 피로한지 한차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룡표국이 점창파를 껄끄러워하듯 점창파 역시 천룡표국을 어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결국 명분과 증거의 싸움이었다·
현재로선 명분과 증거를 모두 가진 천룡표국이 훨씬 유리한 상황이었고·
이윽고 흥분을 가라앉힌 단석조가 말했다·
“그날 유성표가 점창파를 찾아온 건 사실이오· 이공자의 말처럼 보은패를 주며 우리로선 수용하기 어려운 해남파의 요구를 전달한 것도 사실이고·”
단석조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더욱 강건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대명표 중 한 명인 유성표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건 나와 점창에 대한 모욕이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라도 반드시 천룡표국을 찾아가 국주께 정식으로 사과를 받아낼 테니 그리 아시오·”
“그 전에 먼저 행낭에 남은 검흔에 대해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유성표가 잃어버린 표물을 회수할 때까지 대협의 신병은 부득불 우리가 억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을룡이 또 끼어들세라 이갑룡이 얼른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단석조를 찾아내고 포위한 사람은 그였다·
“세상에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지만 그림자는 모두 비슷한 법이오· 사일검법이 독특하다고는 하나 비슷한 검흔을 남기는 검술유파가 존재하지 말라는 법은 없소· 이는 저 담장 위에 앉아 있는 노 선배께서도 인정하실 것이오· 다만 귀하들은 점창파에 유성표를 죽일 동기가 차고 넘친다는 이유만으로 사일검법의 검흔이라 단정 지었을 뿐· 그렇지 않소?”
단석조는 이갑룡에게 칼끝 같은 시선을 꽂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모순이오· 만약 내가 범인이라면 사일검법의 검흔이 남아 있는 행낭을 하오문을 통해 천룡표국에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오· 이건 누군가가 점창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략임을 진정 모르시겠소이까?”
단석조는 만박신안의 존재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어떤 재주를 지녔는 지도 포함해서·
이갑룡은 슬쩍 만박신안을 바라보았다·
만박신안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단석조의 말이 일부 맞음을 확인해 주었다·
이을룡이 얼른 끼어들며 물었다·
“하면 대체 왜 이곳에 숨어 있었던 겁니까?”
“장문인의 명을 받아 진짜 흉수를 비밀리에 추적하던 중이었소· 점창산에서부터 학경을 거쳐 여강에 이르기까지 무려 한 달 동안· 그리고 마침내 흉수로 짐작되는 자가 여강고성에 나타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매복 중이었지·”
“그게 정말입니까?”
“하지만 이제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오· 오늘 밤 당신네 형제들이 여강고성을 발칵 뒤집어 놓아버렸기 때문이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갑룡과 이을룡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단석조는 여세를 몰아 더욱 강건한 어조로 몰아 붙였다·
“내 해명은 여기까지오· 경고하건대 지금부터는 나도 검초에 사정을 두지 않을 것이오· 오늘 싸움으로 누군가 죽거나 불구가 된다면 진짜 흉수를 찾고 난 후에 저절로 시비가 가려지겠지· 누구든 자신 있다면 앞을 막아서도 좋소·”
단석조는 명분과 증거의 싸움을 단숨에 배짱 싸움으로 바꾸어 놓아버렸다·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돌연 처마 아래에서 담벼락 밑에서 전각 안에서 그리고 허공에서 네 명의 또 다른 죽립인들이 장내로 휙휙 날아들었다·
그리고는 단석조를 가운데 놓고 강룡당과 복룡당의 표사들이 이중으로 펼치고 있는 차륜진의 바깥쪽 네 방위에 포진했다·
그러자 어처구니없게도 단석조와 네 명의 죽립인이 강룡당과 복룡당의 표사 일백 명을 안팎에서 포위한 것 같은 형국이 되어 버렸다·
숫자로만 보면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소리인데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단석조를 비롯해 새롭게 나타난 저들 죽립인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기도 때문일 것이다·
“점창오검!”
지붕 위의 흑도들 중 누군가가 신음하듯 외쳤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일단 누군가 사일검법을 흉내 내 점창파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단석조를 포함한 점창오검이 우리보다 월등히 앞선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저들이야말로 진짜 흉수에 대한 확실한 첩보를 가지고 여강고성에서 매복 중이었으니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양조광 선배께서는 잘 지내시는지요?”
이갑룡과 을룡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는 사이 내가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양조광은 전날 백발노성을 무림맹으로 호송할 때 동행했던 점창의 후기지수였다·
서호삼견 중 이견이랑 가는 내내 호칭 문제로 투닥거리다가 무림맹에 도착해서는 돌아서 가려던 세 명을 붙잡고 깎듯이 선배님이라고 인사하던·
“귀하는 또 누구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천룡표국에서 비룡당을 이끌고 있는 이정룡이라고 합니다·”
“풍운비룡?”
풍운비룡이라는 말에 점창오검의 다른 네 명도 죽림을 슬쩍 들어 올리고 나를 구경했다·
하나같이 정광이 번뜩이는 눈동자에 용 같고 범 같은 기도를 풍기는 고수들이었다·
“부끄럽습니다만 그렇게 불리기도 합니다·”
“만나서 반갑군·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단석조라고 하네· 아 말을 편하게 해도 되려나?”
“이를 말씀입니까·”
그러면서 나는 단석조는 물론이거니와 새롭게 나타난 나머지 네 명의 죽립인에게도 정중히 포권지례를 올렸다·
상대가 적이 아니라고 판단한 바에야 마땅히 무림의 선배를 대하는 예를 취해야지 않겠나·
“백발노성을 호송하는 동안 자네가 보인 실력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네· 조광의 목숨도 두 번이나 구해주었다지?”
“그 무슨 받잡기 어려운 말씀을요· 표행 중 비적들의 공격을 받는 건 다반사로 벌어지는 일· 함께 위기를 넘기며 나아갔을 뿐입니다·”
“조광에게 듣기로는 조금만 활약을 해도 온갖 생색을 다 내면서 돈을 뜯어간다더니만 실제로 보니 전혀 다른 걸· 아니면 초면이라 아직 본색을 드러내지 않은 건가?”
듣고 있던 점창오검의 다른 네 명이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막내 동생 뻘인 사제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주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점창오검은 이갑룡과 이을룡을 대할 때와는 달리 내게 아주 호의적이었다·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실 작정입니까?”
“아직 정하지 못했네·”
“하면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자네와?”
“야단 맞을 각오하고 고언을 올리자면 점창파가 의심을 받는 것은 현재로선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앞으로 점점 그리될 것이고요· 선배님들께서도 그 점을 아시고 산문을 나선 것이 아니신지요?”
“그래서?”
“선배님들께선 점창에게 씌일 누명을 벗겨야 하고 저는 표물을 회수해 유성표 대협께서 끝내지 못한 표행을 이어가야 합니다· 적어도 흉수를 잡을 때까지는 동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우리가 가진 정보를 이용해 형제들 간의 후계경쟁에서 이득을 취하시겠다? 내가 비록 자네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고는 하나 천룡표국 내부의 일에는 끼어들고 싶지 않네·”
이 양반 눈치가 아주 절정고수다·
“동행을 하시는 동안 유성표 대협께서 점창파에 전달한 표물에 대해 해남파의 제자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눠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해남도에 있는 사람들과 무슨 수로?”
나는 오른쪽 담장 위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엽초풍이 알았다는 듯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양홍경을 비롯한 아홉 명의 사형제들과 함께 마당으로 표표히 뛰어내려 내 곁으로 다가와 섰다·
갑자기 열세 살가량의 소년이 출중한 기도의 고수들과 함께 등장하자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한데 단석조를 비롯한 점창오검은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듯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아마 유성표에게서 유례가 없는 해남파의 소년 장문인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들은 모양이었다·
“엽초풍입니다·”
엽초풍이 먼저 단석조에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아무리 장문인이라고 해도 상대가 무림의 까마득한 선배이다 보니 예를 갖추는 것이다·
단석조는 단석조대로 검을 거꾸로 잡고 이마까지 올리는 무림인의 인사법인 포검식을 취함으로써 일파의 장문인을 대하는 예를 정중히 갖추었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점창 제자 단석조입니다·”
점창오검의 다른 네 명도 엽초풍을 향해 조용히 포권지례를 하는 것으로 예를 갖추었다·
양홍경과 여덟 명의 사형제들도 점창오검을 향해 마주 포권지례를 했다·
백칠십 년 전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해남파의 제자들과 점창파의 제자들이 마침내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표사며 흑도들이며 할 것 없이 모두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해남파의 장문인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기절초풍할 일인데 불과 열서너살 가량의 소년이었으니 얼마나 놀랐겠나·
한편 단석조의 얼굴에 나타난 감정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결국 나와 동행하게 될 거라는 걸·
그걸 감지한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
이갑룡과 을룡의 얼굴이 시꺼멓게 죽어들어갔다·
내 머릿속에서는 남궁소소의 전음도 들려왔다·
[큰 형님이 차린 밥상에 둘째 형님이 숟가락을 올려놓는가 싶더니 막내가 홀라당 훔쳐 먹게 생겼네요·]
[내가 그랬소?]
[본인의 성명절기이면서 뭘 모른 척 해요·]
[무슨 성명절기씩이나·]
[아무튼 약삭빠르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