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 미친 놈(11) >
사대장로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칠대제자들과 팔대제자들까지 모두 내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인 구대제자들은 눈동자를 별처럼 반짝이며 각오를 다지는 듯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일제히 옥소군과 세 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 네 명이 이번 일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었다·
나이며 항렬을 따질 것 없이 사람들은 모두 네 명을 바라보며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 줬다·
“소군 사저라면 틀림없이 잘 해내실 거야·”
“부럽다· 나도 의빈 분타로 뽑혀 가고 싶다·”
“정룡 사숙께서 쉰 명을 파견해야 한다셨으니까 아직 마흔일곱 명이나 남았어·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다고·”
“마흔여섯 명이겠지·”
“정룡 사숙의 말씀을 들어보면 오십 명에게만 언제까지나 맡겨두지 않고 돌아가며 경험을 쌓게 해주실 것 같아· 이번에 뽑히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할 것 없어·”
옥소군과 세 사람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면서도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빈으로 가서 범선을 구경하고 바깥세상을 경험할 생각에 신바람이 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까부터 내 옆 탁자에서 소맷자락으로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마흔 중반의 팔대제자가 한 명 있었다·
그녀는 바로 옥소군·은옥교·서동예·구숙정의 사부로 이름은 양모영이었다·
그 유명한 구대문파들을 비롯해 절대다수의 무림문파들은 온 강호를 뒤지면서까지 뛰어난 무재들만을 골라 제자로 들인다·
한데 도화곡은 좀 달랐다·
어쩌다 세상으로 나갔다가 오갈 데 없이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된 여자아이들을 만나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생각하고 데려다 먹이고 키우고 가르쳤다·
스승도 그렇게 도화곡으로 들어왔고 그 스승의 제자들도 그렇게 들어왔다·
그런 이유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만큼이나 끈끈했다·
대별산을 떠나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이곳 성도로 오는 동안 단 한 명의 제자도 도망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자신이 길러낸 제자들이 사문을 위해 큰 역할을 하고 또 인정까지 받게 되자 양모영은 그동안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듯했다·
어느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양모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서둘러 포권을 쥐는 것으로 무려 스무 살이나 많은 사저를 대하는 예를 갖추었다·
머릿속에서 그녀의 전음이 울린 것도 동시였다·
[고맙네·]
[오히려 제가 감사하지요·]
[그리고 잘 부탁하네·]
[다들 잘 해낼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때였다·
식당의 맨 뒤쪽 문이 벌컥 열리면서 구대제자 한 명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햇살에 반짝이는 피부며 이목구비가 예사롭지 않더라니 그녀는 도화곡에서 가장 빼어난 용모를 지녔다는 예홍이었다·
허리에 협봉검을 차고 머리에는 초립을 쓴 것이 아무래도 오늘은 그녀가 다른 구대제자 몇 명과 함께 정문 앞에서 번을 서는 모양이었다·
“예홍 무슨 일이냐?”
섭부용이 물었다·
예홍은 재빨리 섭부용에게 다가가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보고했다·
그러자 섭부용은 아무래도 자신의 선에서 처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직접 예홍을 데리고 우리가 앉아 있는 탁자 앞까지 왔다·
예홍은 나와 눈을 한번 슬쩍 마주치고는 이막하에게 다급히 보고했다·
“밖에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손님이라는 말에 그리고 예홍의 다급한 표정에 한순간 식당 전체가 서리라도 내린 것처럼 얼어붙었다·
백포산군 때문에 한동안 식겁을 하고 보니 외부인이라면 일단 다들 긴장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손님들?”
“화려한 사인교에 올라탄 육순 가량의 난쟁이 노인과 말을 탄 이십여 명의 칼잡이들이었습니다· 칼잡이들은 아무래도 호위무사들인 것 같습니다·”
“정룡 사숙과 남궁 가주님께서 머무시는 동안엔 외부인의 방문을 일절 받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안다만·”
“당연히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한데도 자신이 누군지 알면 말씀이 달라질 거라며 막무가내로 안에다 보고부터 하라지 뭐겠습니까?”
“대관절 누구이기에?”
“칼잡이들 중 하나가 사인교에 탄 노인을 가리키며 천금상단(千金商團)의 대행수인 황영길 대인이라고 했습니다· 길 안내를 하고 온 양강의 말에 따르면 사천성에서 차(茶)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단들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이라고요·”
“차 상단의 대행수?”
“네·”
“차 상인이 여길 왜?”
“풍운비룡 아니 정룡 사숙님께서 도화곡으로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뵈러 왔다고 합니다· 우리더러 범선이 언제쯤 올라오는지 아느냐고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일단 기다려 보시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칠대제와 팔대제자들은 모두가 눈매를 좁혔다·
어떤 상황인지 조심스럽게 짐작은 가지만 그 상황 자체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남궁유룡이 술잔을 들어다가 쭉 들이키고는 내려놓았다·
이어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웃으며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사천과 운남은 대륙에서 차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고장이외다· 또한 두 성(省)의 차 상인들은 오래전부터 강북과 강동으로의 진출을 염원했지요· 하지만 북쪽으로는 진령산맥 동쪽으로는 대별산맥 그리고 장강 물길로는 삼협이라는 천혜의 장벽이 버티고 있어서 쉽지 않았소이다·”
남궁소소가 할아버지의 빈 잔에 얼른 술을 채웠고 남궁유룡이 그걸 다시 한 모금 들이키느라 잠시 이야기가 중단되었다·
“물론 지금도 교룡방의 조운선을 통해 유통은 되고 있지만 운송비가 지나치게 많이 들고 또 그러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값이 터무니없이 비싸지는 바람에 아무리 질 좋은 차라고 해도 인근에서 생산된 차들과 경쟁이 되지 않지요·”
이막하가 그 말을 받았다·
“한데 대형 범선 두 척이 나타나 천혜의 장벽 세 개 중 한 곳을 뚫었으니 운송료가 획기적으로 줄어들겠군요·”
“장강 사천성 구간에 범선이 뜰 거라는 소문을 듣자마자 늙은 여우라고 소문난 천금상단의 대행수가 부리나케 달려온 걸 보면 의빈 분타주가 선적량을 채우기 위해 상단을 찾으러 다닐 일은 없을 것 같군요· 껄껄껄·”
그제야 상황을 선명하게 이해한 도화곡의 제자들은 모두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다 함께 밥을 먹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는데 언제부턴가 식사는 온데간데없고 도화곡의 대사를 논하며 결정하고 있었다·
이막하가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저는 지금 도화곡의 속가제자로 온 것입니다· 범선 두 척의 선적에 관한 건 전적으로 도화곡에 일임하겠다고도 이미 말씀 올렸고요·”
그러면서 나는 완전히 발을 빼버렸다·
내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올 줄 몰랐는지 모두 당황해했다·
내 의중을 간파한 이막하는 가볍게 웃더니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아 아직도 구석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옥소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군아·”
“예 곡주님 ”
“아무래도 이 일은 네가 결정해야 할 것 같구나· 이제부터 너는 천룡표국의 비룡당에서 세우고 도화곡에서 대리해 운영하는 사천성의 빈 분타의 분타주다· 더불어 의빈 분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결정권을 너에게 주겠다·”
“감사합니다· 곡주님·”
“각설하고 손님께서 기다리신다니 예홍에게 답부터 주어야 할 것 같구나·”
중요한 일들이 갑자기 연달아 일어나자 옥소군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어느때 보다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생각을 하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예홍에게 말했다·
“우선 정룡 사숙께서는 무공수련 때문에 당분간 외부인을 만나지 못하시며 범선의 선적에 관한 일은 도화곡에서 전적으로 위임을 받았다고 전해라· 그러나 오늘은 누구도 시간을 낼 수 없으니 그냥 돌아가시라고도 전하고·”
“예?”
“축객령을 내리되 정중해야 할 것이다·”
예홍은 과연 이대로 전해도 될지 몰라 평소의 습관대로 섭부용을 돌아보았다·
섭부용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소군 사저 아니 분타주님·”
예홍이 식당 밖으로 쏜살처럼 사라졌다·
누구도 예상 못 한 일처리에 다들 어리둥절해 했다·
남궁유룡도 나도 잔뜩 호기심 어린 얼굴로 옥소군을 바라보았다·
이막하가 물었다·
“차(茶)는 같은 부피의 미곡보다 훨씬 가벼워 범선에 싣는다면 선적량을 세 배까지 늘릴 수 있을 것이다· 한데도 가격은 미곡보다 비싸지· 다시 말해 범선으로 운반을 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물품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천금상단은 양강이 말했다시피 사천성을 통틀어 가장 큰 차 상단이고· 한데도 정녕 그냥 돌려보낼 생각이더냐?”
“그렇습니다·”
“어찌하여?”
“천금상단의 대행수께서는 도화곡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지난 열흘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지금 어떤 귀빈들께서 와 계시는지도요·”
“아마도 그렇겠지·”
“이런 시국에 약속도 없이 호위무사를 스무 명씩이나 대동하고 불쑥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정룡 사숙을 뵙자고 하니 이는 예를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하여 네가 예를 가르치겠다?”
“소질이 어찌 감히· 그리고 제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천금상단의 대행수는 오늘의 방문을 무례라고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남궁 가주님도 계신데 감히 저런 태도로 나오지는 못했겠지요·”
“하면?”
“상계의 거물답게 그는 정룡 사숙께서 범선의 선적 일을 우리에게 맡길 거라는 걸 이미 꿰뚫었을 겁니다· 그리고 오늘의 방문을 천금상단이 가난한 도화곡에 주는 선물이라는 거만한 생각으로 찾아왔을 것이고요·”
“하여 오늘은 돌려보내고 나중에 정식으로 약속을 정한 다음 다시 만나야 비로소 같은 눈높이에서 거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가 다시 오지 않으면·”
“그것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 어깨에 정룡 사숙의 이름과 도화곡의 명운이 걸려있다고 생각하니 당장 눈앞의 이득에 눈이 멀어 함부로 첫걸음을 떼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결정에 이은 상상도 못 한 이유였다·
사람들은 모두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만 보면 마치 노련한 상계의 인물 같았다·
그때 남궁유룡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찌하여 저 아이를 딱 꼬집어 분타주로 지목 하나 했더니만 풍운비룡이 사람을 제대로 보았군 그래· 하하하·”
내 생각도 남궁유룡과 똑같았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옥소군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특히 사숙과 도화곡의 이름을 가볍게 생각지 않는 태도가 기특했다·
저런 각오와 결기와 책임감이라면 믿고 의빈 분타를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남궁유룡을 시작으로 이막하와 사대장로는 물론 칠대제자와 팔대제자들까지 전부 잘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굳어 있던 옥소군의 얼굴이 그제야 비로소 조금 펴졌다·
그때였다·
‘텅!’ 소리와 함께 좀 전에 뛰쳐나갔던 예홍이 다시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누구에게 보고를 해야 할지 몰라 식당 한가운데 멈춰서서 잠시 이막하와 옥소군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에라 모르겠다’하는 얼굴을 하고선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그대로 전했더니 천금상단의 대행수께서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한참을 가만히 있더라고요· 그러다 이내 혈색이 돌아와서 이렇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은 용담객점에 머물고 있을 테니 시간이 될 때 연락을 주면 그때 다시 찾아뵙겠다고요·”
“와아아!”
이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구대제자들은 환호성까지 지르며 좋아라했다·
도화곡이 사천성 상계를 주름잡는 천금상단을 상대로 한 수 물러나게 한 것도 좋았지만 그것보다는 의빈 분타주로서 옥소군이 내디딘 성공적인 첫걸음을 다들 응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
눈을 떴을 때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는 남궁소소가 홀로 앉아 내 곁을 지키는 중이었다·
제 딴에는 검까지 한 자루 옆에 놓아두고 밤새 호법을 선 모양인데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침 떨어진다!”
깜짝 놀란 남궁소소가 그 와중에도 얼른 돌아앉으며 소매로 입술을 훔쳤다·
“츄릅!”
하지만 소매에 아무것도 묻어나오질 않자 뒤늦게 속았다는 걸 깨닫고는 다시 돌아앉으며 빽 소리를 질렀다·
“뭐예요!”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거요?”
“구천구관이 끝난 지 오늘로 꼭 사흘째예요·”
“사흘 동안 까무러쳐 있었다고?”
“맞아요·”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니·”
“얼굴이 반쪽이 됐어요· 불쌍해라·”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그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요·”
“표행비는 할아버지께 단단히 받아낼 테니 그리 아시오· 아는 사이라고 해서 깎아주고 그런 거 절대 없소·”
“그중 일 푼은 내 몫이라는 거 잊지 마시고요·”
이상하게 언제부턴가 남궁소소와 말싸움을 하면 조금씩 힘에 부치면서 내가 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누구에게 저런 뻔뻔하고 현란한 말솜씨를 배우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 된 것이오?”
나는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물었다·
남궁소소도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약속한 이레가 되어 칠검향과 함께 석굴을 찾아갔을 땐 향내가 자욱한 가운데 당주님만 혼자 누워 있고 백포산군께선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어요·”
아마도 약해진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그랬을 것이다·
구천구관에 든 날부터 시작해 하루가 지날 때마다 백포산군의 몸은 급격하게 늙고 쇠약해져 갔다·
마치 그에게 허락된 삶이 몇 년씩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처럼·
그러다 마지막 이레째가 되자 주름이 줄줄 흘러내리는 쭈글탱이 노인이 된데다 앞니까지 몽땅 빠져 버렸다·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본 백포산군의 모습이었다·
이후 그는 나의 등에다 자신의 장심을 붙였다·
이어 전이대법(轉移大法)을 통해 구천구관을 열고 남은 공력을 모두 내게 주었다·
지옥 같은 구천구관을 감당하느라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막강한 공력을 감당하지 못한 나는 결국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백포산군이 석굴을 떠나기 전 내게 보냈던 전음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뒷일을 부탁하네·]
그리고 나 역시 의식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모르지만 석굴을 나서는 백포산군에게 전음을 보냈다·
[반드시 후인을 찾아 전하겠습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구천구관 자체가 비기의 일부인지라 외부인에게 함부로 말해 줄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오·”
“미안해요· 몰랐어요·”
“미안할 것까지야·”
“생환 기념으로 내가 재밌는 거 보여 줄까요?”
남궁소소가 품속에서 작은 대나무 통을 꺼내 보였다·
저건 내가 백포산군에게 준 것으로 안쪽에 돌돌 말린 표단이 들어 있었다·
“그걸 왜 소저가 갖고 있는 거요?”
“백포산군 선배께서 말씀하시길 자신과 할아버지의 시대는 곧 끝이 날 거라고 가장 오래 살 내가 이 표단을 가지고 있다가 당주님이 약속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똑똑히 지켜봐 달라셨어요·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표단에 적혀 있는 조항대로 당주님을 부관참시해 달라고도 하시고요·”
“소저를 어떻게 믿고?”
“딱 보면 믿음직스럽지 않나요?”
“달리 믿고 맡길 사람이 없었군·”
“당주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했던 건 분명해요·”
천만의 말씀이다·
나를 믿었기에 의뢰를 맡겼고 남궁소소를 믿었기에 표단을 맡겼다·
백포산군은 우리 두 사람에게 그가 평생 동안 익혔던 무맥의 명운을 맡기고 사라진 것이다·
나도 남궁소소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내 몸속엔 백포산군이 주고 간 공력이 새로운 호수를 만나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용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운기행공을 하면서 용의 집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생으로 공력을 닦는 게 아니니 길어야 열흘이면 족할 것이다·
운기행공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나는 무려 삼백 년에 가까운 공력을 일신에 지니게 된다·
그게 내가 익힌 무공들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남궁소소가 문을 열어주자 예쁘게 차려입은 예홍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왔다·
“정룡 사숙 몸은 좀 어떠세요?”
“배가 고파 죽을 것 같다·”
“식사는 나중에 하시고요· 걸을만 하시면 저희와 함께 범선 구경하러 가요· 다들 밖에서 정룡 사숙과 소소 선배님을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범선이 도착했다고?”
“곡주님과 장로님들은 벌써 가셨어요·”
그러면서 예홍은 침상에 걸터앉아 있는 내 손을 잡아 창가로 끌고 갔다·
창밖 공터에는 백여 명에 달하는 구대제자들이 대나무 광주리를 하나씩 들고 북적대는 중이었다·
“손에 든 건 다 뭐야?”
“옥소군 사저께서 범선을 한번 태워 준다고 하셔서요· 범선에서 먹으려고 만두랑 월병이랑 술이랑 잔뜩 준비했어요·”
“여기서 의빈까지 아무리 바람이 좋아도 이틀은 걸리는데 저렇게 다 우르르 몰려가서 보겠다고? 도화곡은 누가 지키고? 곡주님께서는 허락을 해주신대?”
“장원은 백 명씩 교대로 남아서 지키기로 했고요· 범선은 오늘 아침 성도에 도착했는데요· 여기서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한식경 안에 갈 수 있고요·”
“뭐?”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옆을 돌아보았더니 남궁소소가 씨익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까무러쳐 있는 동안 그녀가 조양방과 타협해서 범선들을 성도까지 불러 들인 모양이었다·
남궁소소가 말했다·
“허기는 범선에서 달래야 할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