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 미친 놈(8) >
이백여 합에 걸친 공방이 나의 패배로 끝나자 사람들은 당황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내공을 전혀 쓰질 못하니 나는 그냥 평범한 표사들 축에도 끼기가 힘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초식을 본격적으로 익힌 지 일 년이 채 안 되었는데 내가 무슨 수로 어려서부터 무공을 수련한 남궁소소를 이기겠나·
그나마 백포산군이 내 손발을 조종한 덕분에 이백여 합이라도 겨룰 수 있었다·
아마도 백포산군 역시 내 손발의 움직임이 이 정도로 어설플 줄은 몰랐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천천히 백포산군에게로 향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그가 이 싸움의 승부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었다·
백포산군은 호목을 부릅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선배님께서 펼친 수법으로 공격했다면 그녀를 떨칠 수 있었겠지만 저 또한 이마의 절반이 잘려나갔을 겁니다· 그건 양패구상이지 이긴 게 아닙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속임수였기는 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어디까지나 그녀가 저의 벗이기 때문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전 벌써 죽은 목숨····”
“이놈!”
무얼 어떻게 할 틈도 없었다·
백포산군의 신형이 눈앞에서 갑자기 번쩍하고 사라졌다·
불길한 예감에 미리부터 이능력을 발동하고 있던 나는 내공까지 끌어 올리며 사력을 다해 보법을 펼쳤다·
하지만 천하십대고수의 가공할 신법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내상을 입은 데다 거리가 너무 가까운게 특히 치명적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가 한 손을 뻗어 내 멱을 틀어잡고 있었다·
이막하를 비롯해 깜짝 놀란 도화곡의 제자들이 백포산군을 향해 신형을 쏘았다·
백여 개의 협봉검이 그를 벌집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찰나 남궁유룡이 사자후를 내질렀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도화곡 제자들이 걸음을 뚝 그쳤다·
나는 나대로 버둥거리는 척하며 양손으로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내 소맷자락과 그의 눈과의 거리는 불과 한 자 반 여차하면 소맷자락에 꽂아둔 비격쌍뇌창으로 눈을 뚫어 버릴 참이었다·
백포산군은 자신이 내 명줄을 틀어쥐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도 그의 목숨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바늘이 눈을 뚫고 들어가 뇌에 박히고도 살아 남을 인간은 없을 테니까·
“기호포이(驗虎捕耳) 방금 네가 펼친 수법의 이름이다·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 왼손으로는 꼬리를 잡고 오른손으로 귀를 잡는다는 뜻이지·”
“지난 이레 동안 너를 상대로 삼백오십여 초식을 펼쳤지만 기호포이를 출수한 적은 딱 한 번밖에 없다· 대체 네 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그러니까 이 노인네 말은 자신이 딱 한 번밖에 안 보여준 수법을 내가 어떻게 알고 그대로 펼쳤느냐는 거였다·
백포산군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이거였다·
“커걱··· 컥!”
말을 하고 싶어도 멱을 틀어쥐고 있어 할 수가 없었다·
백포산군은 불똥을 품은 눈으로 나를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팽개치듯 홱 놔 주었다·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나는 휘청거리며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백포산군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남궁유룡에게 말했다·
“내가 졌소이다·”
“또 볼 수 있겠소이까?”
백포산군은 고개를 들어 하늘과 도화곡의 장원과 마방산 자락에 가득한 홍엽을 하나씩 눈에 담으며 말했다·
“나는 아마도 봄을 맞지 못할 것 같소이다· 그래서인지 걸음을 하는 곳마다 보이는 풍경들이 예사롭지 않구려·”
백포산군은 다시 남궁유룡에게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래도 귀하를 다시 볼 수 있어서 좋았소·”
“붙잡지 않겠소· 대신 마지막 가는 길에 남은 사람의 궁금증이나 시원하게 풀어주고 가시오· 우리에게 그만한 정리는 있었던 것 같소만·”
“마병(魔病)이오· 젊어서 정순한 내공수련을 게을리하고 욕심을 다스리지 못해 사이한 무공들을 가까이했던 대가를 조금 빨리 치르는 것일 뿐이오·”
마병은 마공을 익힌 무인들이 역천의 기운을 다스리지 못한 나머지 늙어서 걸린다는 주화입마의 일종이었다·
충격 그 자체였다·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인 백포산군이 젊어서 사이한 무공에 손을 댔다는 것도 충격이고 그로 말미암아 팔순에 이르러 천수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무맥을 이을 제자는 보아 두셨소이까?”
“다른 무공은 그렇다 치더라도 구천홍염장은 구천구관(九泉九關)을 모두 통과해야만 익힐 수 있소· 한데 지옥 같은 구천구관을 견딜 독기와 치열함과 무재까지 모두 지닌 후기지수를 나는 평생 일곱 명밖에 보지 못했소· 여섯은 이미 명문대파의 제자들이었고 한 명은 뇌정갑이었소·”
구천은 인간이 죽은 뒤에 넋이 돌아간다고 하는 땅속 깊은 세계를 말한다·
그곳에 있는 아홉 개의 관문이니 얼마나 무시무시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백포산군의 말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평생 고작 일곱 명의 무재를 보았는데 그중에 하나였던 뇌정갑이 죽어버렸으니 저 가공할 무맥도 이제 끝이었다·
“이제 가도 되겠소?”
백포산군이 또 무슨 돌발행동을 할지 몰라 도화곡의 제자들은 그때까지도 멸살구곡대진을 풀지 않고 있었다·
남궁유룡이 이막하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막하가 다시 제자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검진이 흩어지며 길이 열렸다·
백포산군은 모든 미련을 접은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고작 세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저 자는 어때요?”
남궁소소가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황당하다는 표정들이었다·
오직 남궁유룡만 자신만큼 오래 살면 세상에 놀랄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듯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궁소소가 다시 물었다·
“선배님께서 보시기에 저 자는 구천구관을 통과할 것 같으신가요?”
“아마도·”
“그럼 데려가시는 게 어때요?”
더는 참지 못하고 내가 끼어들었다·
“소저 그건 안될 말이오 나는 이미 사부님을 두 분이나 모신 데다 그중 한 분은 백포산군 선배님의 제자와 생사결을 치른 끝에 죽이기까지 했소· 한데 어찌 내가 선배님의 제자가 되겠소· 백포산군 선배님 또한 어떻게 제자를 죽인 원수의 제자를 다시 제자로 거둘 수가 있겠소·”
솔직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갑자기 어디서 개족보를 그리고 있냐!’라는 일갈이었다·
내 말 어디 하나 틀린 곳이 없기에 사람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포산군이 말했다·
“나와 뇌정갑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네· 녀석은 발군의 무재를 지니기는 했어도 알다시피 바라보는 곳이 늘 어두웠지· 타고 나길 그렇게 타고났어·”
“···?”
“그렇다고 해도 나의 제자임을 부정할 순 없네· 지옥의 구천구관을 뚫고 지독한 수련까지 묵묵히 견뎌준· 한데 내 어찌 그를 죽인 자의 제자를 다시 제자로 받아들일 수 있겠나· 그건 안될 말일세·”
“산군의 말씀이 옳다· 그만 주워 담거라·”
급기야 남궁유룡까지 나서서 남궁소소를 부드럽게 나무랐다·
그러나 남궁소소는 조금도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꼭 다문 입술에서 반드시 나를 구천구관에 처넣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다들 무언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백포산군 선배님께서 그를 제자로 삼으시라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하면?”
“표행을 의뢰하시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표행?”
“그에게 구천홍염장을 전수해 준 다음 훗날 무맥을 이을만한 무재를 만나게 되면 자신이 익힌 초식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고스란히 전수해 달라고 하는 것이지요·”
“···!”
“···!”
“···!”
백포산군 남궁유룡 이막하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한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막하가 가만히 물었다·
“그게 가능할까?”
“십 장이 채 안 되는 거리를 무려 이레나 걸려서 표물을 배달하는 최고의 표사예요· 그에게 맡기면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보증하겠어요·”
어영부영하다간 큰일 치르게 생겼다·
나는 다시 한번 황급히 끼어들었다·
“무공을 몸으로 익혀서 가지고 있다가 다음 대에 전해준다니· 세상에 그런 의뢰는 들어 본 적이 없소·”
“그동안 귀하가 했던 표행들은 뭐 일반적이었는 줄 아세요? 하나도 이상할 것 없어요· 먼 곳으로 운송하던 표물을 먼 훗날로 운송하는 것뿐이니까· 표마차는 귀하의 몸으로 대신하고요·”
“그게 제자와 다를 게 무엇이오?”
“표물을 운송하는 것과 다를 건 뭐예요?”
“표물은 내가 잠시 맡아두기만 할 뿐 절대 사용할 수 없소· 만약 표물을 내 물건처럼 사용한다면 그건 사기이고 표주를 기만하는 것이오·”
“구천홍염장도 귀하가 완전히 익힌 다음에는 절대 사용하지 않으면 되죠·”
“완전히?”
“설마 구천홍염장과 같은 무공을 실전은 배제한 채 혼자 목인장(木人植-나무인형)만 죽으라고 치면서 익히겠다는 건 아니겠죠?”
“내가 완전히 익혀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이오?”
“그게 의뢰니까요· 구천홍염장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십이성까지 익힐 것· 그리고 죽기 전에 후인을 찾아 고스란히 전수해 주고 죽을 것·”
“설사 그렇다고 해도 무공을 수련함에 완전함이란 없소·”
”이 표물에는 있어요· 표물을 무공으로 전수받는 방식이니 의뢰를 한 표주만큼의 경지를 펼칠 수 있게 되면 비로소 표물로서 완전해지는 거죠·“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네·’
솔직히 백포산군의 제자가 되지 않고 또 구천구관에도 들어가는 것만 아니라면 나야말로 이 기상천외한 의뢰를 꼭 맡아서 해보고 싶었다·
이런 표행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안 될 말이었다·
여름에 온갖 절진으로 가득했던 남만의 마교 동굴에서 수차례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이후 동굴과 기관진식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했다·
“소저의 얘기는 잘 들었고요· 내 대답은 의뢰거절이오·”
나는 남궁소소가 열심히 세운 논리를 간단하게 묵살해 버렸다·
한데도 남궁소소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귀하가 거절하면 구천홍염장의 무맥은 백포산군 선배님의 대에서 끊기고 말 거예요· 일의 잘잘못을 떠나 그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조금씩 있어요· 한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을 한 명만 고르라면 단연코 귀하예요·”
“내가 왜?”
“대별산에 있던 도화곡을 이곳 성도로 옮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천룡표국의 풍운비룡이니까요·”
“만약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의 무맥이 귀하 때문에 사장되었다는 소문이 강호에 돌기 시작하면 명표는 물 건너가는 오리꼴 나는 거예요·”
원래대로라면 그럴 일은 없다·
하지만 방금 나와 가장 친한 남궁소소가 그렇게 그림을 그려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공산이 컸다·
아니나 다를까 지켜보고 있던 도화곡의 제자들 전부가 과연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남궁소소의 말에 설득당해 버린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는지요?”
의기양양해진 남궁소소가 열심히 밥상을 차려다가 바치듯 백포산군을 돌아보며 물었다·
백포산군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남궁소소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표사에 그 벗이로군·”
백포산군은 이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 번째 의뢰를 하겠네·”
“선배님 잠깐만 진정을 하시고요· 이게 말이죠····”
“부탁이네·”
“···!”
백포산군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횃불이 하나 보였다·
그건 생명이 점점 꺼져가는 한 노인의 마지막 불꽃이자 어떻게든 무맥을 이으려는 무림 거물의 염원이었다·
“저는 매우 비쌉니다·”
“강호의 내로라 하는 고수들이 금원보가 가득 든 궤짝을 지고 찾아와도 혼구녕을 내어 쫓아 보냈건만 이제는 오히려 내가 거액의 돈 까지 주고 무맥을 이어달라 부탁해야 한다니· 후후·”
“제겐 어디까지나 표행이니까요·”
“미안하네만 심산에 은거한 내게 무슨 돈이 있겠나·”
“애석하군요· 아무래도 다른 표사를 찾아보시는 게····”
“내가 대지·”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은 남궁유룡이었다·
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남궁유룡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유룡은 백포산군을 보면서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내가 대신 내어드리겠소·”
“얼마를 달라고 할 줄 알고요·”
“얼마가 되든 내가 내어드리겠소·”
“고맙소이다·”
“천만의 말씀을·”
그때 이막하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괜찮으시다면 도화곡의 조용한 곳에 구천구관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보름이면 충분할 겁니다· 물론 관문은 산군께서 직접 여신다는 전제하에서요·”
백포산군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구천구관이 무엇인 줄 알고?”
“도화곡에 전해 내려오는 무림백서에 구천홍염장과 구천구관에 관한 간략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구천구관은 강호인들의 생각처럼 복잡한 기관진식이 아니라 초단공을 익히는 첫 아홉 날 동안 거쳐야 할 고통스러운 관문을 일컫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도화곡에 머물며 구천구관을 여시면 다시 애뇌산으로 돌아가는 수고를 덜고 아까운 시간도 절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막하의 호의에 백포산군은 뭐라고 말해야 할 지를 몰라 남궁유룡을 돌아 보았다·
남궁유룡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백포산군이 그제야 결심을 한 듯 이막하에게 말했다·
“고맙소이다·”
“별 말씀을요·”
도화곡의 제자들은 잘되었다는 듯 서로를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모든 걸 떠나 백포산군의 무맥과 은원을 끝내고 사실상 화해를 하게 되자 더할 나위 없이 기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나는 더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음을 깨달았다·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어댔다·
백포산군이 내게 말했다·
“의뢰를 하기 전에 한가지 조건이 있네·”
“또요?”
“표단은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내가 직접 작성하겠네·”
옆에 있던 남궁소소가 얼른 백포산군에게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참고로 저는 일 년째 천룡표국 비룡당의 표사로 일해왔습니다· 특히 풍운비룡의 수법을 아주 잘 알고요·”
백포산군이 다시 내게 말했다·
“전문가를 찾은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