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 표사들의 전통 (5) >
천룡표국의 수뇌부가 머물고 있는 무한 분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상단주들의 방문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열에 아홉은 비룡당주인 나를 찾았다·
범선 다섯 척이 비룡당의 소유이며 비룡당은 천룡표국 내에서도 독립적인 경영을 보장받는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계산이 빠른 상인들답게 지금 당장 계약을 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후 실질적인 힘을 지닌 사람과의 유대가 더욱 중요하다는 걸 아는 것이다·
상계는 인맥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실감 났다·
하지만 상단 선별의 권한을 이갑룡과 을룡 그리고 무한 분타주에게 일임한 나는 정작 분타에 있지도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도록 죽림을 깊이 눌러 쓴 채 장강변으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다섯 척의 범선에 싣고 온 물건들을 뒤늦게 하역하는 걸 종일 지켜보았다·
한데도 보고는 계속됐다·
“무한 미곡시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산서상인들이 북천표국을 비롯해 강북의 아홉 개 표국들과 진행 중이던 계약을 전부 파기해 버렸다는 소문이 빠르게 돌고 있습니다·”
“조금 전 북천표국과 강북의 표국들이 미곡운송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한 후 표사들을 전부 철수시키고 있습니다·”
“천룡표국이 계약할 상단을 서른 곳으로 한정한데 이어 파격적인 운송비용을 제시하며 뛰어들었던 경쟁자들까지 사라지자 남은 표국들은 그야말로 신바람이 났습니다·”
“금성루의 루주가 당주님을 한번 꼭 모시고 싶다고 했습니다· 소문에 들으니 예쁜 기녀들도 많다더라고요·”
“금성루의 루주가 가장 넓고 전망 좋은 전각의 꼭대기 층을 비워 두었으니 오늘 밤 오셔서 달구경이나 하고 가시라고 합니다·”
“금성루의 루주가 해 질 무렵에 마차를 보내드릴까냐고 물었습니다· 창문에 차양이 드리워져서 안에서 닫으면 누가 탔는지 점쟁이도 모른다고요·”
가불염 가불염 가불염 호리독사 호리독사 호리독사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동안 해온 보고였다·
가불염은 그렇다 쳐도 호리독사는 정식 표사도 아니거니와 지금까지 보고 같은 걸 해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끔 우연히 엿들은 걸 말해주기는 하지만 그건 보고라기보다 고자질에 가까웠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엉뚱한 짓을 하는 걸까?
그것도 누가 보면 금성루의 앞잡이가 아닌가 하고 의심할 법한 보고를·
해 질 무렵 나타난 무한 분타의 장궤 방금옥이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금성루는 대설산 만년설을 녹인 물과 동정호에서 나는 아홉 가지 영초로 담근 빙설구화주(水雪九華酒)가 유명합니다· 근동의 유명한 주객들은 금성루의 빙설구화주를 맛본 것이 큰 자랑이죠·”
“그 정도입니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워낙 귀해서 값이 문제가 아니라 특급의 귀빈이 올 때만 겨우 한 병씩 내놓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루주가 천룡표국의 표사들에게 비룡당주님을 모시고 오면 세 병을 내놓겠다고 약속한 모양입니다·”
“왜요?”
“고급 기루의 명성은 규모나 화려함이 아니라 어떤 유명 인사가 다녀갔느냐에 달렸지요· 기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명 인사의 시중을 한 번이라도 들면 그 기녀는 하루아침에 몸값이 달라지곤 하지요·”
나는 약간 우쭐해져서 물었다·
“내가 그렇게 유명합니까?”
“기루에서는 같은 귀빈이라면 무림 고수들을 더 선호합니다· 신비로운 행적과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들 때문이지요·”
“남의 고생한 이야기가 재밌긴 하지요·”
“당주님은 천룡표국의 사공자라는 엄청난 신분에다 최근 여러 가지 어려운 표행들을 성공시켜 표국업계를 떠들썩하게 만드신 것은 물론 젊고 잘생기기까지 하시어 화제성에서 단연 으뜸··· 이라고 루주가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한데 정말 모르셨습니까?”
“예?”
“아 아닙니다·”
맞다·
나는 원래 항주에서 유명한 한량이었지·
그 소문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방금옥의 눈에는 금성루의 뻔한 수작을 이해 못 하는 내가 잘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느낀 건데 방금옥은 직언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 살짝 있는 것 같았다·
전생에선 왜 몰랐을까?
하긴 그땐 그녀와 길게 말을 나눌 신분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음흉한 성격보다 백배 낫다·
최소한 앞에서는 입안의 혀처럼 굴고 뒤돌아 몰래 비수를 갈 지는 않을 테니까·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방금옥이 말했다·
“감사드립니다·”
“갑자기 뭘요?”
“범선 한 척의 선적권을 저희 분타에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무한 분타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그동안 마치 상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까다롭게만 굴던 상단주들도 저희 부녀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고요·”
“잘됐군요·”
“이렇게 큰 선물을 주신 이유를 여쭈어도 될는지요·”
“선물에 이유가 있으면 쓰나요·”
“그럼 염치 불고하고 부담 없이 받도록 하겠····”
“두 분을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천박하다고 여길 만큼 노골적으로 말했다·
천성이 솔직하고 담백한 사람들은 혀로 장난치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일단 말을 던져 놓고는 가타부타 설명 없이 방금옥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의 크고 맑은 눈동자를 지져가며·
범선 다섯 척이 항주와 이곳을 왕복하며 돈을 쓸어 담으려면 무한에 거점을 두고 있는 분타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만약 무한 분타가 이갑룡이나 이을룡의 손에 떨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범선을 통한 장강 조운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
그들은 무언가 계약이 성사되려 할 때마다 사사건건 방해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방금옥 정도의 식견과 재주를 지닌 사람이라면 충분히 꿰뚫어 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녀에게 내 수족이 되어 그걸 막아줄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
방금옥은 한참이나 내 눈을 피하지 않고 응시하더니 말했다·
“국주님께서 일개 표사에 불과했던 제 아비를 파격적으로 발탁하시어 무한 분타를 맡기셨지요· 그리고 항상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후 제 아비는 국주님을 주군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의 넷째 아드님을 주군으로 모시게 될 것 같습니다· 만약 그분께서 저처럼 하찮은 사람의 손도 필요로 하신다면 말입니다·”
이 여자 전생에선 내게 주먹밥을 쥐여 주었지만 현생에서는 범선 다섯 척에다 돈을 차곡차곡 담아 줄 것이다·
나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 앉아 하릴없이 장강에 짱돌을 던지며 시간을 죽이고 있던 호리독사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왜 그렇게 기운이 없는 거요?”
“딱히 기운이 날 일도 없고해서요·”
“범선 다섯 척이 장강을 거슬러 오르는 역사를 만들고 우리와 계약을 하기 위해 상단들이 줄을 서는데도 기운이 안 난다고요?”
“그닥 관심이 없어서-·”
“그렇게 주인의식이 없어서야·
“저는 객원표사인데요·”
“···!”
그렇게 빙설구화주가 탐나면 훔쳐서라도 마셨을 인간이다·
한데도 저러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이미 털어 봤는데 금성루에는 없는 것이다·
“금성루의 루주에게 가서 오늘 밤 제일 넓고 전망 좋은 방으로 하나 비워 놓으라고 하세요· 새로 사권 친구와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 볼라니까·”
“저 정말이십니까?”
“가불염 표두와 남궁소소와 황해노경 선배님 그리고 갑판장 범주에게도 시간을 비워 두라고 전하세요· 귀하도 마찬가지고요·”
“명을 따르겠습니다!”
“금성루의 루주에게는 기녀들을 한 명도 들이지 말라고 미리 못 박아 두시고요· 대신 솜씨 좋은 악기가 있다면 선금을 주어 미리 약속을 잡아 놓으세요·”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기녀들은 불러봤자 귀찮게 굴면서 아까운 술만 축냅니다· 그럼 저는 이만 당주님의 말씀을 전하러!”
쌩!
호리독사는 공령신투의 평생 역작인 영사신법을 펼치며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방금옥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재밌는 분이시군요·”
“알고 보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때 방금옥의 너머 저만치에서 이십여 기의 인마가 보였다·
이종산이 곽석산은 물론이거니와 오당의 당주 등을 거느리고 이리로 오는 중이었다·
이종산의 바로 옆에는 내 특명을 받고 그를 모시러 갔던 남궁소소도 보였다·
잠시 후 말들이 멈춰서자 이종산을 시작으로 모두가 내렸다·
이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나와 마주하고 섰다·
“범선이 두 척 더 있다고?”
“그렇습니다·”
“어디에 있느냐?”
“지금 하역 중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아침부터 쟁자수와 선원들 전부가 동원되어 하역 중인 물건들을 가리켰다·
갖가지 모양과 크기로 가공된 목재들은 어느새 강변에 두 개의 무더기를 이루며 산더미처럼 쌓이는 중이었다·
“저게 범선이라고?”
“정확하게는 범선으로 조립하기 직전 상태까지 모두 가공을 마친 목재들입니다· 다섯 척의 선실에 나누어 싣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이다 보니 차지하는 면적이 생각보다 컸습니다·”
“어찌하여 처음부터 완성해서 끌고 오지 않고?”
“이 두 척의 배들은 항주와 무한을 오가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민강과 장강이 합류하는 사천성 의빈에서 호북성 자귀까지만 운항할 겁니다·”
사천성 의빈은 장강 물길을 따라간다고 가정했을 때 이곳에서 약 삼천 리나 더 상류 쪽에 위치한 도시였다·
표사들의 걸음으로 대략 이십 일이 걸리는 길· 반면에 자귀는 닷새면 도착한다·
말을 타고 속도를 조금 낸다 싶으면 사흘 안에 주파하는 것도 가능하고·
자귀까지도 거리는 꽤 되지만 대부분 평지인데다 관도가 거의 직선에 가깝도록 시원하게 뚫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폭탄같은 선언에 지켜보고 있던 오당 당주들과 이십여 명의 일급 표사들은 모두 입이 떡 벌어져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여기 도착할 때부터 저들은 이미 얼굴이 반쯤 누렇게 떠 있었다·
갑자기 남궁소소가 나타나 생각지도 않았던 범선 두 척이 더 있다고 했으니 얼마나 놀랐겠나·
아마도 누가 철퇴로 뒤통수를 두 번 정도 가격하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한데 완전히 건조된 범선이 아니라 그 직전까지 가공한 목재들이라고 하자 ‘이건 또 무슨 희한한 소리야’라는 표정들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 범선들을 조립한 후 사천성의 의빈에서 호북성의 자귀를 오가는 구간에 띄울 거라는 내 말에 거의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이종산이 격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장강의 그 어떤 배도 호북성을 넘어 사천성까지 거슬러 오를 수는 없다· 바로 두 성의 경계에 그 유명한 장강삼협(長江三峽)이 있기 때문이지·
“과거라면 그랬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상류의 구당협과 무협을 쌍각선으로 충분히 거슬러 오를 수 있습니다· 교룡방도 그 구간에선 오래전부터 조운선을 운용하는 중이고요·”
“그게 다가 아니지 않느냐·”
“맞습니다· 문제는 가장 하류 쪽에 있는 서릉협입니다· 서릉협은 백오십 리 구간 안에 무려 일곱 개의 크고 작은 탄(難)이 밀집해 있어 물고기도 오르다 지쳐 죽는다는 말이 있지요· 자귀는 무한에서 보자면 바로 그 서릉협이 끝나는 지점입니다·”
장강삼협 중 상류 쪽 두 곳은 양안의 깎아지른 산비탈로 말미암아 강폭은 좁아지지만 대신 수심이 충분히 깊어 물살을 아주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서릉협의 물살은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그곳은 그냥 장강에 펼쳐져 있는 절대사지였다· 들어가서도 안 되고 들어갈 수도 없다·
애초 사람이 접근할 일이 없으니 장강십팔탄을 말할 때도 이곳 서릉협 구간의 여울들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육로를 통해 저 목재들을 서릉협 너머 자귀까지 옮겨간 다음 그곳에서 건조와 조립을 할 생각이더냐? 이후 장강에 띄워 의빈과 자귀를 오가며 운항할 것이고?”
“서릉협의 입구인 남진관까지는 교룡방의 방주께서 조운선 서른 척에 나누어 실어다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후 자귀까지 백오십리 구간은 인근 형주에 있는 성원표국의 표마차 백 대에 나눠 싣고 두어 차례 왕복하며 옮길 것이고요·”
“자귀에 도착해서는?”
“뱃도랑을 파고 범선으로 조립 건조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해룡선방의 배목수 열 명과 노련한 십장 스무 명이 처음부터 함께 범선을 타고 왔습니다· 그 십장들이 현지에서 일꾼 백여 명을 한 달 정도 추가로 고용할 계획이고요·”
“한 달?”
“해룡선방의 방주님 말씀이 잘 건조된 목재를 모두 가공한 상태라면 대륙 어디에서든 한 달 만에 쌍각선과 똑같은 범선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