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 장강십팔탄(4) >
강남구상의 의중을 알아차린 나는 이종산을 돌아보며 지금부터 내가 총지휘를 해도 좋을지 눈빛과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 내 것은 선발대의 표사들 밖에 없다· 나머지는 전부 네 것이니 당분간은 나도 구상 선배님들과 함께 네 배의 선객이 되어 술이나 마시고 싶구나·”
내 마음대로 해보라는 소리다·
이는 곧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이갑룡과 을룡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굳어졌다·
나는 감사의 의미로 이종산에게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서둘러 황해노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가능하겠습니까?”
“해뜰무렵 범선이 청수탄을 거슬러 오르는 걸 보고 싶으시다면 두 시진쯤 후에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지난 열흘 동안 장강을 거슬러 오르며 풍운조화를 살폈사온데 특별한 조짐이 있지 않은한 낮에는 바람이 상류 쪽을 향해 불고 밤에는 하류 쪽을 향해 붑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씀입니다만·”
“후후· 밤낮을 주기로 풍향이 바뀌는 것은 바닷가에서 항시 있는 일인데 아무래도 장강이 바다처럼 크고 넓다 보니 비슷한 현상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은?”
“순풍에다 유속이 빠른 강심까지 타면 올라올 때에 비해 삼 할 이상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구태여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요·”
“잘 됐군요· 긴 여행에 지친 선원들이 고기와 술을 먹으며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두 시진 후 다섯 척 모두 출항할 준비를 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나는 이어 방청양을 돌아보며 말했다·
“분타주께서는 지금 즉시 분타의 쟁자수들을 전부 풀어 밝은 선등(船燈) 오백 개와 신호용 폭죽 일천 발을 사들여 범선에 싣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방금옥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방 장궤께서는 오백 명이 먹고 마실 술과 요깃거리를 준비해 주세요· 구휼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정말 간단하게만· 쟁자수들에게 듣자 하니 주먹밥을 잘 뭉치신다고 하던데·”
“예?”
“힘에 부치면 비룡당의 쟁자수들을 데려다 쓰십시오· 가불염 표두에게 협조하라고 지시를 내려 두겠습니다·”
천룡표국의 유명한 미녀장궤 방금옥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젊은 쟁자수들이 서로 돕겠다고 줄을 설 것이다·
그때였다·
“내가 도와줄게요·”
“저도요·”
“저도요·”
“저도요·”
불쑥 끼어든 사람들은 남궁소소를 비롯해 비룡당의 여표인 염지약 여소옥 운휘향 이었다·
당황해 하는 방금옥의 모습을 보고 나름 도와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방청양과 방금옥이 사람들을 데리고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를 발견하고는 훌쩍 뛰어 올라갔다·
구름처럼 모여든 군중의 시선이 동시에 전부 나를 향했다·
그새 소문을 듣고 왔는지 이제 일만 명은 족히 될 것 같았다·
그때쯤엔 해가 서산을 넘어가기 직전이어서 내 그림자가 군중의 머리 위로 길게 늘어졌다·
넘실대는 장강과 다섯 척의 범선을 등지고 선 나는 먼저 세 방향의 군중을 향해 천천히 포권지례부터 했다·
그런 다음 멀리서도 들을 수 있도록 내공을 담아 말했다·
“저는 천룡표국의 표사 이정룡이라고 합니다·”
단지 이름을 말했을 뿐인데 곳곳에서 나직한 웅성거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로 향시와 회시 장원급제 무림맹 풍운비룡 남궁세가 도화곡 남만 천마성교 칠마총 벼락부자 등의 단어들이 들어간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했던 표행들을 중심으로 강호에 이름과 별호가 어느새 제법 알려진 모양이었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어쩌다 보니 얼마 전 다섯 척의 범선을 건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한의 미곡시에 맞춰 급히 오느라 아직 제대로 된 진수식을 갖지 못했지요·”
여기까지 말을 했을 때 군중은 이미 흥분으로 시끌시끌했다·
강남구상이 배를 태워 달라고 요청한데 이어 내가 황해노경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바위에 오르자 짐작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이에 천룡표국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이곳 무한에서 손님들을 모시고 조촐하게나마 진수식을 치를까 합니다· 인원은 범선 한 척당 백 명씩 딱 오백 명만 모시겠습니다·”
“와아아아!”
일만 군중이 내지르는 함성에 흡사 천둥이 치는 것처럼 천지가 뒤흔들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격렬한 반응에 황해노경을 비롯해 주위에 있던 천룡표국의 사람들이 깜짝 놀란 표정들을 했다·
‘이거 오백 명으로 끝냈다간 맞아 죽겠는데·’
함성이 잦아들 무렵 멀리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더니 혹시라도 내가 듣지 못할까봐 꽥꽥 소리를 지르며 물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 어떻게 오백 명을 고르신다는 겁니까아?”
“의도치 않게 개활지를 점령해 버리는 바람에 미곡을 싣고 온 농장 사람들과 상인들 그리고 강남북의 표국 사람들에게 큰 손해를 끼쳤으니 그분들께 먼저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일만 군중의 희비가 엇갈렸다·
우선 절대다수의 군중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호남에서 이곳까지 미곡을 싣고 온 농장의 일꾼들과 상인들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범선이 순수한 돛과 노의 힘만으로 그 무시무시하다는 청수탄을 거슬러 오르는 광경을 구경할 수 있다·
그것도 강변에서가 아니라 직접 그 범선을 타고· 세상의 누가 이런 진귀한 경험을 놓치고 싶겠나·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마다 평생 자랑할 수 있는 얘깃거리가 될 텐데·
반면 강남북의 표국 사람들은 당황하고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범선에 타자니 천룡표국의 잔치에 들러리로 전락할 것 같고 타지 않자니 천룡표국과 상단주들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이종산은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내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옆에서는 강남구상의 늙은 상단주들이 신바람이 나서는 호위무사들에게 두꺼운 옷을 준비하라느니 피풍의를 빨리 챙기라느니 등의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
어둠에 둘러싸인 관제묘는 음습하고 섬뜩했다·
그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구석진 곳의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한 잔 하겠나?”
귀에 익은 음성과 함께 어둠 속에서 호리병을 든 손 하나가 쑥 올라왔다·
“천산 설봉에서 채취한 영초로 담근 설초천엽주(雪草千葉酒)라네· 한 잔만 마셔도 세상의 시름을 절반은 잊을 수 있지·”
“사양하겠습니다·”
어둠 속의 사내는 한 모금을 더 홀짝이는가 싶더니 호리병을 옆에 놓아두고 쓰윽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에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눈동자 가득 정광이 번뜩이는 미공자였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못 올 이유가 없으니까요·”
“내가 필요했던 건 아니고?”
“무슨 뜻입니까?”
“요즘 강북의 표사들이 객점에서 만나면 주로 무슨 얘기를 나는 줄 아나? 바로 천룡표국의 겁 없는 표사 풍운비룡에 관한 이야기지· 이번엔 무슨 표행을 했다더라· 이번엔 얼마를 벌었다더라· 이번엔 누구와 인맥을 쌓았다더라·”
“사람을 불러다 놓고 무슨 뜬금없는 말씀을 자꾸 하십니까?”
“아직도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군·”
“뭐라고요?”
“향시와 회사에 연달아 장원급제한 기재가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고 일개 표사가 되었네·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그건 녀석이 평범한 유생이 아니라 천룡표국의 사공자이기 때문이지요· 비록 서자이기는 해도 말입니다·”
“천룡표국 사공자 자리가 한림원의 학사 자리보다 낫다는 건가? 그것도 진왕의 총애까지 받는 처지이고 보면 출세길이 보장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벼슬이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쳐· 한데 이번엔 이 친구의 인생 목표가 글쎄 고작 명표가 되는 것이라는군· 표왕의 뒤를 이어 천룡표국의 국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표행들을 하나 씩 차근차근 성공시키고 있지·”
“제가 그걸 모를까 봐 확인시켜 주려고 불렀습니까?”
“풍운비룡의 행보가 강호의 표사들에게 그저 밥벌이로만 생각했던 자신들의 직업에 대해 긍지를 갖도록 해주고 있네· 바람이 불고 있다는 뜻이지·”
“풍운비룡은 과거의 자신들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명성을 누리고 인맥을 만들었으며 항주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네· 또한 주변엔 조영영 당군백 매소옥 남궁소소 같은 미녀들이 들끓지· 어디 그뿐인가 남궁세가의 사람들이라면 가주인 뇌검부터 시작해 말단 무사들에 이르기까지 풍운비룡을 한 식구처럼 여기고 좋아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네·”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뭡니까!”
“발끈하는 걸 보니 이제야 상황파악이 조금씩 되는 모양이군·”
어둠 속에서 사내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정광이 번뜩이던 눈동자에는 이제 음침한 모략의 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풍운비룡이 범선을 앞세워 상단들과의 대량 계약까지 성공시키면 표사들은 이제 정말로 그를 명표라고 부르기 시작할지도 모르네· 자네도 나처럼 그걸 원하지 않을 것 같네만·”
“함께 손을 잡고 망치기라도 하자는 말입니까?”
“손을 잡을 생각은 있고?”
“왜 형님들이 아니라 접니까?”
“풍운비룡 때문에 가장 많은 피해를 봤다고 들었네· 외가는 천룡표국에 의지해 겨우 연명 중이고 항주 삼대 미녀 중 하나라는 수향문의 영애에게는 파혼을 당하고· 아 그러고 보니 그녀가 사실은 풍운비룡을 좋아했다는 소문도 도는 것 같던데·”
퍼엉!
파팡!
느닷없는 그의 격장에 어둠 속의 사내 역시 쌍장으로 응수했다·
기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막강한 내공을 감당하지 못한 그는 삼 장이나 튕겨 날아간 끝에 벽과 부딪혀 떨어졌다·
낡은 관제묘의 벽에 구멍이 뻥 뚫리면서 황토를 구워 만든 벽돌이 우수수 떨어졌다·
“쿨럭!”
“많이 다쳤나?”
“다가오지 마!”
“그러게 왜 도발을 해·”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아무렴 내가 천룡표국에 해를 가하면서까지 네 놈과 손을 잡을 줄 알았더냐?”
“천출에게 국주 자리를 넘겨줄 셈인가?”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오르는 것도 녀석을 거꾸러뜨리는 것도 내 손으로 한다·”
“물론이지· 난 단지 좀 거들어 줄 뿐이야·”
“대신 평생 나의 약점을 잡고 살겠지·”
“아주 생각이 없진 않았나 보군·”
“남의 표국일에 신경 쓸 겨를 있으면 검술이나 수련해· 그런 보검을 들고도 그 녀석에게 고작 십초지적도 안되는 주제에· 카악 퉤!”
그는 가래침을 얼른 뱉고는 도망치듯 관제묘를 빠져 나가 버렸다·
어둠 속의 사내는 그가 빠져 나간 문 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뇌까렸다·
“저 새끼는 클수록 얼굴이 두꺼비를 닮아가네·”
어둠 속의 사내도 관제묘를 떠났다·
이윽고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바깥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구렁이 담 넘듯 창문을 쓰윽 넘어 들어왔다·
이어 아직 손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술호리병을 얼른 찾아 위로 꺾었다·
하지만 술은 잠시 쥐오줌발처럼 쪼르르 나오다가 두어 방울 똑똑 떨어뜨린 후 완전히 멈춰 버렸다·
아직 혓바닥도 다 못 적셨다·
“에잇 좋다가 말았네!”
여사평이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르니 잘 감시하라는 풍운비룡의 말을 듣고 졸졸 따라다닌 지 무려 한 시진
생각지도 못했던 명주를 맛보나 했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그런 행운은 그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이병룡을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두꺼비라····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
슈슈슉 펑! 펑! 펑!
신호용 폭죽 일천 발이 장장 반 시진에 걸쳐 장강의 밤하늘을 수 놓았다·
선등이 꽃송이처럼 내걸린 범선의 갑판에는 진수식에 초대된 선객들이 술과 주먹밥을 나눠 먹으며 폭죽놀이를 구경했다·
폭죽이 허공에서 번쩍번쩍 할 때마다 넘실대는 장강의 물과 돛을 한껏 부풀린 선단의 위용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종산은 강남구상을 비롯한 상단주들 및 표국주들과 함께 대장선의 갑판에서 조촐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남궁소소와 염지약 여소옥 운휘향 그리고 무한 분타의 장궤 방금옥은 하늘돛을 날리기 위한 선수의 비상대 끝에 등을 보인 채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허공에서 폭죽이 터질 때마다 손뼉을 치며 ‘와아!’ 하는 소리를 냈다·
모두가 생경한 야간운행을 즐길 때 나는 허락 받은 선원들만 오를 수 있는 선미 쪽 상갑판에서 황해노경을 만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군가 천룡표국이 상단주들과 계약하는 걸 방해하기 위해 내부의 조력자를 구하려고 했었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습니다·”
“놈들이 어떤 방법을 쓸 것인지 제 의견을 묻는 것이고요·”
“지혜를 빌린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요·”
“혹시 그자가 북천표국 사람입니까?”
“그걸 어떻게?”
“그 표국의 장자가 강북의 표국주들과 상단주들이 보는 앞에서 당주님께 크게 망신을 당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거친 호북인들의 기질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하지요·”
“일단 그런 것 같습니다·”
“북천표국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가장 극적인 모습으로 우리가 무너지는 걸 원할 겁니다· 기왕이면 수백 명의 선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요·”
“내일 아침· 청수탄!”
“당주께서 제게 조언을 구하시는 것처럼 그들도 물길에 익숙한 자들에게 조언을 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장강엔 갑작스러운 범선의 등장을 매우 못마땅해 하는 방파가 한 곳 있지요·”
“교룡방!”
“역시 총명하시군요·”
“그들이 북천표국의 손을 잡을까요?”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는 격일 겁니다·”
지금쯤 교룡방은 살짝 얼이 빠져 있을 것이다·
일단 천룡표국이 의뢰받은 표물들을 직접 운송하겠다고 나선 상황에서 뭐라고 시비를 걸고 나설 명분이 없었다·
장강이 자기들이 파놓은 도랑도 아니고 내 배로 내 물건을 내가 옮기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하지만 범선의 선적량이 워낙 어마무시하다보니 어떻게든 타격을 받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게다가 행여라도 우리가 돈을 받고 다른 표국들의 미곡까지 운송하는 등 본격적으로 조운에 뛰어들까봐 조마조마할 것이다·
물론 나는 지금 당장은 거기까지 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서로의 입장 정리를 위해 교룡방주와 만날 계획까지 갖고 있었다·
한데 이런 식으로 먼저 주먹다짐부터 하고 볼 줄은 몰랐다·
여사평이라는 돌발변수 때문이다·
비무를 할 때 보았던 녀석의 눈빛이 찜찜해 호리독사를 붙여 놓았더니만 이런 정보를 물어 올 줄이야·
“어떤 식으로 방해를 해올지도 아시겠습니까?”
“대충 알만합니다·”
“제 질문이 그렇게 간단한 거였습니까?”
“북천표국이나 교룡방 모두 자신들의 모습을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심각한 제약이 있습니다· 그랬다간 망신을 당하는 정도를 넘어 천룡표국과 전쟁을 해야할 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면 쓸 수 있는 패가 몇 개 안 됩니다·”
“창이 있으면 방패도 있겠죠?”
“폭죽놀이만으로는 뭔가 심심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차라리 잘 됐습니다· 재밌는 구경을 시켜드리지요· 한데 어디까지 허용해 주시겠습니까?”
“무얼 말입니까?”
“교전수칙 말입니다·”
“교전··· 이라고요?”
“상대는 수백 년 동안 장강을 지배해온 물귀신들입니다· 만만하게 보았다가는 도리어 크게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 이게 솔직한 모습이지·
하지만 자신만만한 황해노경의 모습 또한 거짓이 아닐 것이다·
이젠 내가 당주로서 오늘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서도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일도삼고(一刀三考) 일도할단(一刀割斷)·”
“그게 뭡니까?”
“한 번 칼을 뽑으려면 세 번을 먼저 생각하고 일단 칼을 뽑으면 확실하게 끝장을 보라는 뜻입니다· 천룡표국의 표사들이 표행을 하는 동안 지켜야 할 ‘표사십규’ 중 한 가지지요·”
북천표국의 표사들은 무림인이지만 교룡방의 방도들은 엄격히 말해 무인이 아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천룡표국이 교룡방의 방도들까지 무자비하게 쳐 죽여 버린다면 이는 이종산이 이번 무한행에서 오랜 거래처들을 잃어 가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가치를 크게 훼손하는 일이었다·
나는 전쟁을 말하는 황해노경에게 이것이 어디까지나 표행 중의 일임을 분명히 했다·
전쟁을 해도 표사의 방식으로 하라는 뜻이었다·
“옛날 버릇을 못 버리고 잠깐 방심할 뻔한 늙은이를 일깨워 주시는군요·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습니다· 천룡표국의 명성과 표사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표사와 선원들이 위험에 처한다면 상대가 누구든 살인까지 허용하겠습니다· 뒷일은 모두 제가 책임을 집니다·”
“선실 고물에 귀밝은 선원을 하나 박아두어야겠군요· 첫 신호가 거기서 올 겁니다· 만약 그가 공을 세우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포상으로 은전 한 냥이라도 내려 주십시오· 하면 충성심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공이라고요?”
“작은 일이지만 범선 전체를 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은전 한 냥이면 싸게 먹히는 것이지요· 후후·”
그때였다·
저만치 하갑판에서 삼족두꺼비처럼 생긴 쟁자수 하나가 대바구니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며 선객들에게 주먹밥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 귀밝은 선원 제가 뽑아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