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 미곡운송 전쟁(7) >
두 명의 거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기세에 장내의 공기가 북해의 바닷속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차가워졌다·
다른 표국주들도 덩달아 투기를 끌어 올렸다·
상대는 녹림맹주를 꺾어 천하십검의 일석을 차지한 검호 여차하면 여문탁을 도와 연수합격이라도 펼칠 기세였다·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 있나·
장남인 이갑룡을 중심으로 이을룡과 나와 방금옥은 재빨리 눈빛을 주고받으며 검갑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이종산이 바싹 얼어있는 상단주들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귀한 손님들을 모셔두고 추태를 부린 것 같군요· 여 국주나 저나 젊은 시절 함께 경쟁하던 것이 생각나 호승심에 잠시 기 싸움을 한 것이니 너무 걱정들 마십시오·”
이 말 한마디로 팽팽하던 긴장의 끈이 탁 풀렸다·
단순히 끈만 풀린 것이 아니라 좀 전과는 다른 묘한 기류가 흘렀다·
이종산이 검을 뽑지 않으면 누구도 칼을 뽑을 수 없다·
칼을 뽑는 순간 그는 광오하게도 천룡표국주이자 천하십검의 일인에게 도전하는 자가 될 테니까·
반대로 이종산이 검을 뽑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검을 뽑아야 한다·
그래야 천하십검으로부터 자신과 동료들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이종산은 한번 가볍게 도발을 하는 것으로 장내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주도해버렸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여문탁과 아홉 명의 표국주들이 표정을 굳혔다·
“여 국주께선 제 술 한잔 받으시겠습니까?”
이종산이 여문탁에게 물었다·
이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앞에 놓인 새 술잔을 손등을 툭 쳤다·
술잔은 비스듬하게 서서는 아홉 명의 표국주들을 지나쳐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러다 경(冂)자 모양의 탁자 배치에서 각진 모서리 부분에 이르자 때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방향을 홱 틀었다·
그런 다음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는 여문탁의 오른손 앞에서 딱 멈추며 똑바로 세워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종산이 호리병 속의 술을 허공에 확 뿌리자 한 가닥 물줄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서는 술잔에 주르륵 담기며 찰랑거렸다·
무슨 조화인지 술은 단 한 방울도 바깥으로 튀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신기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입이 쩍 벌어졌다·
“허공섭물(虛空攝物)!”
상단주들 중 누군가의 목구멍을 비집고 흘러나온 신음이었다·
무림인들과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는 눈이 생긴 것이다·
나도 상단전의 염력을 이용해 선천오법술이라는 허공섭물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저렇게는 아니었다·
술잔을 원하는 장소까지 굴려서 세우는 건 가능하겠지만 물성이 완전히 다른 액체 상태의 술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다룰 자신은 솔직히 없었다·
‘이것이 천하십검의 경지!’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전부 여문탁에게로 집중되었다·
호북성 제일의 검사라는 무인으로서 결코 가볍지 않은 명성을 누리는 그가 어떻게 응수할지 궁금한 것이다·
여문탁은 이종산이 준 술을 단숨에 비우더니 그 자리에서 옆에 놓여 있던 또 다른 새 잔을 술로 채웠다·
그런 다음 그냥 가볍게 툭 던졌다·
잔은 술이 가득 담긴 채 허공에서 뒤집히며 뱅글뱅글 돌다가 이종산의 바로 앞으로 뚝 떨어졌다·
제법 묵직한 것이 떨어졌는데도 흡사 나비가 내려앉은 것처럼 작은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또한 허공에서 수십 번이나 뒤집혔지만 술은 조금도 줄거나 튀지 않았다·
마치 옆에서 누군가 따라준 것처럼 잠시 찰랑거리다 고요히 잦아들 뿐이었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와아!’ 하며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살짝 좀 애매하긴 했지만 기(氣)로 멀리 떨어진 사물을 통제하는 여문탁의 솜씨도 딱히 이종산의 아래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멀리 있는 사람들이 보기엔 그랬다·
“저기 한 방울 떨어졌어요!”
방금옥이 상단주들과 표국주들이 마주 보며 앉은 탁자 사이의 공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과연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술로 보이는 한 방울의 액체가 똑 떨어진 자국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여문탁이 던진 술잔의 궤적에 있었다·
사실 지금 객실 안에 있는 표국주과 총표두들은 모두가 술 한 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았다·
다만 여문탁의 체면을 생각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얼떨결에 이종산이 주도하는 분위기에 이끌리다 톡톡히 망신까지 당한 여문탁은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마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이종산과 격렬한 비무를 펼쳤다가 패한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이는 호북성 제일의 검사라는 말을 듣는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가 어디 가서 이런 수모를 당할 것인가·
그때 여사평이 자리에서 불쑥 일어나며 말했다·
“두 분 어르신들께서 진귀한 구경거리를 보여주셨으니 이에 화답하는 차원에서 이번엔 후기지수들끼리 여흥을 돋우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여사평 무슨 뜻이지?”
뒤쪽에 있던 이을룡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두 사람은 동년배였던 탓에 친구까지는 아니어도 말을 놓을 정도의 친분은 있었다·
“천하십검을 배출한 천룡표국의 검법을 견식할 기회가 어디 쉽게 오겠나? 마침 이렇게 만났으니 핑계 삼아 한 수 배워 볼까 하네·”
여사평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각각 호북성과 절강성을 대표하는 표국의 후예라는 것 외에도 호북제일검의 아들과 천하십검의 아들이 겨루면 과연 누가 이길지 궁금한 것이다·
철담도룡이라는 별호에서도 알 수 있듯 여사평은 어려서부터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는 말을 들을 만큼 담력이 셌었다·
거기다 표행 중에는 살인도 예사로 해서 도룡(雇龍)이라는 두 글자까지 붙었다·
도룡은 상서로운 신수인 용까지 죽인다는 뜻으로 무자비한 살검을 일컫는 말이었다·
서른도 안 된 녀석이 벌써부터 피 맛을 알아가지고·
“얼마든지 상대해주지·”
이을룡이 앞으로 나섰다·
본격적으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쯤 여사평은 절정의 경지를 바라보는 고수일 것이다·
몇 년 후에는 더 높은 경지의 고수가 되고· 그러다 쉰 살 무렵에는 제 아비의 뒤를 이어 호북 제일의 검사가 된다·
이을룡의 실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나 여사평을 상대하기에는 한참 모자랄 것이 분명했다·
“자네 말고·”
“뭐?”
“다른 사람과 겨루어 보고 싶다는 뜻이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여사평은 대답은 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 명확했다·
이을룡이 화를 참지 못하고 무언가 말을 하려는 순간 이갑룡이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이군· 여사평·”
“인사가 늦었습니다· 갑룡 선배님·”
“자넨 누구에게나 선배라고 하는군·”
“그야 선배님이시니까요·”
“정원으로 나갈까?”
“죄송합니다만 선배님도 아니십니다·”
“제가 싸우고 싶은 상대는 저 친구입니다·”
그러면서 여사평이 손을 들어 정확히 나를 가리켰다·
이 자리를 비롯해 다른 객실에서 지켜보고 있던 수백 개의 시선이 여사평의 손가락을 따라 나를 향했다·
“저요?”
“소문은 듣고 있었네· 설인탁 선배로부터 풍운비룡이라는 별호까지 얻었다던데· 아 을룡의 동생이니 말을 편하게 해도 되겠지?”
“표사들은 소속을 떠나 모두 같은 길을 오가며 함께 밥을 먹는 동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깍듯이 선배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역시 듣던대로 호탕하군·”
“부끄럽습니다·”
“선배의 도전을 받아 주겠나?”
겸손한 척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가득한 오만이 느껴진다·
지켜보는 사람들도 모두 여사평이 말한 도전을 혼내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표정이었다·
부자지간인 이종산과 이갑룡을 똑같이 선배라고 부르질 않나·
일부러 이을룡과 이갑룡을 하나씩 엿먹여서 나중에라도 형제들끼리 서로 싸우도록 이간계를 펼치질 않나·
잔혹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흉계도 깊은 놈이었다·
이런 놈들의 공통된 특징은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본다는 거다·
“칼이어도 괜찮겠습니까?”
“무슨 뜻이지?”
“방금 천룡표국의 천무십검을 보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데 제가 지금 검이 없어서요· 천무십검은 천무십검이되 본류와는 조금 다를 겁니다·”
그러면서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시마즈 가문의 가보 마사무네를 톡톡 두들겨 보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저는 솔직히 칼이 더 편하긴 합니다만·”
스르릉!
지이잉!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정원에서 검과 칼이 차례로 뽑혔다·
여사평의 검(劍)은 용머리가 새겨진 황금빛 손잡이에 어딘지 모르게 푸르스름한 검신을 지니고 있었다·
내 칼에도 쇠를 수십 번 접고 두들겨서 만든 물결문양과 깊은 광채를 속으로 머금은 듯한 예광이 있었다·
하지만 물결문양은 사실 도가 문파의 제자들이 흔히 지니고 다니는 송문고검(松紋古劍)의 그것과 비슷해서 명확히 구별하기 어려웠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검이 아니라 칼 그것도 왜도라는 정도?
그 외 은은한 예광은 빛이 비치는 각도나 보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는 것이고·
반면 여사평의 용두장검은 멀리서 보기에도 청광이 번쩍번쩍 했다·
또한 황금 용머리가 새겨진 손잡이까지 있어 누가 보아도 보검임을 짐작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검을 볼 줄 아는 표사들 사이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환호가 싫지 않은지 여사평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멋진 검이로군요·”
“처음 표사일을 할 때 아버지께서 주셨지·”
“손잡이는 순금입니까?”
“그렇다네·”
“몇 돈이나 들어갔습니까?”
“쓸데 없는 데 관심이 많군·”
“저는 천지수라검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요·”
“천인수라검(天刀修羅劍)이다!”
천무십검이 천룡표국의 직계혈족에게만 전수되는 비전검법이라면 천인수라검은 북천표국의 비전검법이었다·
하늘에서 번뜩이는 칼날이라는 이름처럼 눈 깜짝하는 순간 허공에 나타나 내리꽂는 걸로 악명이 높았다·
“제가 착각했습니다·”
“어디서 뻔한 수작질을!”
“진정하세요· 비무를 앞두고 흥분은 금물입니다·”
“강호출두 후 몇 차례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더니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젊은 시절 너 정도의 성취를 이룬 표사들은 강호에 구름 처럼 많다는 걸 알아야지!”
“이 정도면 말은 충분히 섞어 본 것 같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도검을 섞어 보도록 하시지요· 선배를 자처하셨으니 선공은 후배에게 당연히 양보해 주시겠지요?”
여사평은 검을 왼쪽 어깨에 척 올린 상태에서 한 걸음을 뒤로 뺐다·
이어 한 손을 쭉 뻗어 강아지 부르듯 손가락으로 나를 까딱까딱 부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와라· 애송이!”
“좌수검이시군요!”
눈 깜짝할 사이에 신형을 쏜 나는 그의 정수리를 향해 일도를 내리쳤다·
깡!
이어 오른쪽 옆구리를 치고 뒤돌아 왼쪽 옆구리를 치고 다시 정수리를 내리쳤다가 연거푸 세 걸음이나 물러나는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가슴을 힘차게 찔렀다·
깡! 까깡! 깡! 깡!
죽간본의 이능력과 귀영무의 보법에 이은 천무십검의 삼초식이었다·
귀청을 찢는 쇳소리와 함께 여사평과 나 사이에서 새파란 불똥이 작렬했다가 사라졌다·
여사평도 평범한 표사는 아니어서 내가 휘두른 천무십검의 초식들을 모조리 쳐냈다·
이토록 빠른 공격을 예상치 못했는지 여사평의 얼굴이 노래졌다·
하지만 그를 더욱더 당혹스럽게 만든 것이 있었다·
그건 격검의 순간마다 손목을 통해 저릿저릿 전해지는 암경과 불똥이 튈 때마다 한 조각씩 떨어져 나가는 검편 그리고 반격의 틈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보법과 검초였다·
지금 내 몸속엔 백오십 년에 가까운 내공이 깃들어 있었다·
경공과 초식의 빠르기는 곧 내공과 직결되는 법·
나는 한 달 전과 또 달라져 있었다·
여사평이 제아무리 미래의 호북 제일검이라 할지라도 어디서 엄청난 기연을 얻어오지 않는 한 지금은 내 상대가 아니었다·
쩌겅!
정확히 십 초식을 펼쳤을 때 여사평의 황금 용두장검이 마사무네에 담아낸 암경을 견디지 못하고 반 토막으로 터져 나가 버렸다·
여사평은 여사평대로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내 칼을 받아내며 뒷걸음질 치다가 연못에 그만 풍덩 빠졌다·
정원을 가운데 두고 사방에서 지켜보고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칼을 역수로 쥐고 도신을 왼손에 올려놓은 다음 쓰윽 당기며 날을 살폈다·
검파를 황금으로까지 장식한 걸 보면 보통 보검이 아닐 텐데도 불구하고 마사무네는 생채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귀물이라더니 과연!’
그때쯤 여사평이 반 토막 난 용두장검을 들고 물 밖으로 기어 나왔다·
상투가 풀어진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고 속이 훤히 비치는 옷에서는 흙탕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어 토막 난 자신의 검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나는 칼을 도갑에 멋들어지게 갈무리하고는 여사평을 향해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
금성루 전체에 한바탕 태풍이 몰아친 것 같았다·
모두가 경악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작은 숨소리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다만 수뇌부들이 모여 있는 객실에서 방금옥이 혼잣말을 조용히 그러나 쥐죽은 듯 고요한 탓에 누구에게나 들릴 만큼은 큰 소리로 말했다·
“십초지적!”
초식을 세고 있었나 보다·
아마 초조한 마음에 내가 몇 초식까지 버티는지를 보려고 한 모양이었다·
금성루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선공을 시작하자마자 십 초식 만에 단 한 번의 공방도 없이 일방적으로 퍼붓기만 하다가 박살을 내버렸으니 얼마나 당혹스럽겠나·
하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당혹감은 여사평의 아버지이자 북천표국의 국주이면서 호북제일검으로 유명한 조령검객 여문탁의 분노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하필 여사평이 내게 도전을 하면서 천룡표국의 비전검법인 천무십검을 견식하고 싶다 말한 것이 더 화근이 되었다·
강호인들은 철담도룡 여사평이 풍운비룡 이정룡에게 패했다고도 하겠지만 북천표국의 천인수라검이 천룡표국의 천무십검에게 패했다고도 할 것이다·
덧붙여 칠대 만에 천룡표국에서 표왕을 배출하고 나아가 천하십검을 배출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도 말할 것이다·
이종산은 무언가 벅차오르는 듯 가슴을 한껏 부풀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갑룡과 을룡은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때 다급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한 기의 인마가 금성루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마상의 인물은 마치 그것이 자신의 임무라도 되는 양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큰 소리로 외쳤다·
“첫 번째 미곡선이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