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 미곡운송 전쟁(5) >
“국주님을 뵙습니다·”
천룡표국의 무한 분타주이자 소문난 칼잡이인 방청양은 삼십여 명의 표사들을 이끌고 도시의 초입까지 우리를 마중 나왔다·
일개 분타의 입장에서는 십 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한 국주가 네 명의 아들들까지 포함된 선발대를 이끌고 왕림하는 것이 일대 사건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인지 방청양은 딸도 대동하고 왔다·
이름이 방금옥이었던가?
여자로서는 드물게 분타에서 장궤일을 맡아보는 그녀는 천룡표국의 표사와 쟁자수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미녀였다·
그녀를 보려고 무한행 표행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한 무한을 다녀오는 표사나 쟁자수들이 있으면 꼭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나이는 나보다 대여섯 살 많았으니 스물여덟 아홉쯤 되었을 것이다·
마음씨도 고와서 쟁자수들이 무거운 미곡을 나르다 잠시 쉬고 있으면 탁주를 사다 한 사발씩 나눠주곤 했다·
특히 나에게 잘 대해주었다·
아직도 그녀가 다른 쟁자수들 모르게 찔러주고 가던 주먹밥을 잊을 수가 없다·
아마도 무한으로 오는 쟁자수들 중 내가 가장 어린데다 다리까지 저니 안쓰러워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후 장궤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이후로는 영영 보지도 소식을 듣지도 못했다·
이십여 년 만에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땐 감히 말도 붙이기 어려울 만큼 높은 신분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녀가 마상에 앉아 있는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지 못했다·
“고생들이 많군·”
“오시는 길은 어떠셨습니까?”
“강행군을 했더니 다들 좀 지친 모양일세·”
“일단 분타로 가시어 여장부터 푸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황학루의 풍경은 여전한가?”
“예?”
“본 지가 꽤 되었군·”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지요·”
“잠시 들르지·”
장강 변에 야트막하게 솟은 산이 하나 있었다·
황학루는 그 산의 꼭대기에 위치한 누각으로 악양의 악양루 남창의 등왕각과 함께 천하 삼대명루로 꼽혔다·
자연히 황학루는 무한을 방문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첫 번째로 찾아가는 관광명소이자 시인묵객들의 필수 방문지였다·
분타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며 상단과 경쟁표국들에 대한 상세보고를 받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이종산이 황학루를 언급하자 모두 당혹스러워했다·
‘무슨 속셈이시지?’
백여 명에 이르는 무인들이 이종산을 따라 말을 타고 황학산 정상에 올랐다·
아까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라니 황학산 정상은 뜻밖에도 한산했다·
표사들은 아래에서 대기하고 수뇌부만 뿔처럼 우뚝 솟은 황학루를 올랐다·
이갑룡은 이병룡에게 술 서너 병과 전병을 보퉁이에 담아 뒤따르게 했다·
동생이랍시고 뭐라도 이유를 만들어 슬그머니 챙기는 것이다·
어쩌면 그 마저도 계산된 행동일지 모르지만·
이종산은 모르는 척 했다·
꼭대기에 이르자 무한 시내가 전부 내려다보였다·
특히 대륙을 남과 북으로 가르며 도도하게 흐르는 장강과 최대 지류인 한수(漢水)의 풍경이 장대하게 펼쳐졌다·
고풍스러운 누각과 어우러진 시원한 풍광에 사람들은 앞다투어 감탄성을 터뜨렸다·
총표두를 대신해 사실상 이종산을 보좌하고 온 이갑룡과 을룡은 감흥을 한마디씩 말했다·
“황학루는 오(英)의 황제가 산성을 쌓고 세운 망루가 시초라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와서 보니 과연 절묘한 위치로군요·”
“옛 제후들이 이곳을 거점 삼아 강남의 곡창지대를 확보하려 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무한을 손에 넣으면 장강 중류와 강북으로 이어지는 한수의 입구를 동시에 장악하겠군요·”
두 사람은 단순히 명소에 대한 여행객으로서의 감흥이 아닌 황학루의 역사와 무한이 지닌 지정학적 위치에 대한 자신들의 식견을 피력했다·
지금의 미곡운송로는 옛 시대의 군량미 운송로와 같았다·
해서 두 사람의 말은 나름 암시하는 바가 있었다·
이종산은 무심히 고개를 돌려 이병룡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느냐?”
“예?”
“절경을 보았으니 너도 무언가 감흥이 있을 게 아니더냐·”
분타에서 마중 나온 표사들 중 함께 황학루로 올라온 세 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쟁자수가 선발대로 따라온 것은 온갖 허드렛일을 해야 하니 그렇다 쳐도 이종산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질문까지 하니 의아한 것이다·
그들은 이병룡을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병룡은 담백했다·
모르는 것은 당당하게 모른다고 하고 그에 대해서도 어쩐 일인지 부끄러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어떻게든 이종산의 눈에 들려고 하던 예전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이을룡이 피식하고 조소를 흘렸다·
그는 원래부터 이병룡을 한심하게 여겼었다·
방청양과 방금옥 부녀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한데 그들과 함께 온 분타 소속 표사 세 명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여전히 상황파악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눈치로 칼밥을 먹었다고?’
방금옥이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가 표사들을 노려보고 있는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려 표사들을 향해 입술을 미세하게 달싹거렸다·
짐작하건대 전음으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표사들이 뒤늦게 내 눈빛을 알아차리고는 움찔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이종산이 내게도 물었다·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
사람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았다·
특히 방씨 부녀와 분타의 표사들이 잔뜩 호기심 어린 얼굴을 했다·
향시와 회시의 장원급제부터 시작해 온갖 어려운 표행들을 척척 해냈다는 내 소문을 듣고 과연 사실인지 궁금한 것이다·
“동쪽 장강 기슭의 개활지 수만 평이 잡초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백여 명의 사람들이 가장자리에 쌓여 있는 일정한 굵기와 길이의 통나무를 서둘러 바닥에 까는 중이고요·”
사람들의 눈빛이 대번에 변했다·
특히 방청양과 단옥경을 비롯한 분타 소속 표사들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커졌다·
“그게 어떻다는 것이냐?”
“십중팔구 저 통나무들은 미곡섬을 쌓을 때 통풍을 위해 바닥에 까는 받침목입니다· 제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내일부터 호남성 전역에서 올라 온 미곡섬들이 도착할 겁니다·”
“그래서?”
“무한의 미곡시(米穀市)는 보름째가 절정이라고 했으니 보름 후면 저 개활지는 강남 전역에서 모여든 미곡섬이 산더미처럼 쌓일 겁니다· 개활지 앞 강변은 그 미곡섬을 실으러 온 운반선들로 장사진을 이룰 것이고요·”
미곡의 최종 목적지가 강북이든 강동이든 일단 출발은 장강이었다·
설사 강북으로 간다고 해도 수백 대의 표마차에 미곡을 가득 싣고 첩첩산중을 넘지 않으려면 여강까지는 장강 수로를 이용해야 했다·
이후 각자가 원하는 곳에서 배를 멈추고 대기 중인 표마차들에 미곡을 옮겨 실은 다음 본격적인 육로로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말을 했을 때 이 씨 삼 형제는 물론이거니와 선발대의 표사들과 분타의 표사들까지 전부 하얗게 질려버렸다·
똑같이 질렸어도 그 의미는 제각각이었다·
이 씨 삼 형제와 선발대의 표사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았냐는 것이고 분타의 표사들은 항주에서 온 당신이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뜻이었다·
나는 결론 내리듯 말했다·
“여름 내내 볕이 좋더라니 올해는 미곡시가 닷새 정도 빨리 열릴 것 같습니다· 시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촉박하군요·”
“무한을 와 본 적이 있더냐?”
“처음입니다·”
“다른 도시에서라도 미곡시를 본 적은?”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무한은 전생에서 삼십 년 동안 거의 해마다 빼놓지 않고 왔었고 미곡시도 올 때마다 지겹도록 봤다·
“한데 어찌 그리 잘 아느냐?”
“비룡당의 신입 표사들 중 무한에서 십 년 정도 표사 노릇을 한 자가 있습니다·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그를 불러다가 이맘때 무한의 사정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들어 두었습니다·”
이종산은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청양과 방금옥을 비롯한 분타의 표사들은 ‘무슨 저런 괴물이 다 있지?’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반대로 이갑룡과 이을룡은 굳은 낯빛을 숨기느라 애를 먹었다·
이병룡은 괜히 아는 척을 했다가 두 형이 결과적으로 망신을 당한 것이 고소한 듯 씨익하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 또한 이종산이 황학루로 가자고 한 이유를 뒤늦게 깨닫고 그의 경험과 통찰력에 매우 놀라고 있었다·
“네 말대로 우린 닷새 정도 늦었다· 반면 경쟁 표국들은 이미 오래전에 도착해 미곡상단들과의 접촉을 시작했을 것이다· 너라면 어떻게 대책을 세우겠느냐?”
“우선은 경쟁 표국들의 취약한 곳을 찾고 다음엔 우리가 지닌 무기를 찾아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겠습니다·”
“그건 병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더냐?”
“그 이상은 소자도 모르겠습니다·”
알아도 말할 수가 없다·
분타에 혹시라도 첩자가 섞여 있어서 내 계획이 새어 나간다면 경쟁 표국들로 하여금 대비할 시간을 주게 되니까·
때가 되면 천둥번개 치듯 경쟁자들이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무섭게 몰아쳐야 한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날지라도 미곡 운송 일을 처음 해 보는 네가 어찌 모든 걸 알겠느냐· 그 정도로도 충분히 훌륭했느니라·” 이종산은 다시 장강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강 건너 날렵하게 생긴 배들이 보이느냐?”
모두가 이종산의 눈길을 따라 강 건너로 시선을 던졌다·
강폭이 워낙 넓은 데다 살짝 물안개까지 끼어 전부 내공을 끌어 올려야 했다·
과연 그곳엔 수십 척의 삼판선(三板船)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삼판선이란 갑판 없이 배의 가장자리를 따라 대를 세우고 커다랗게 차양을 씌운 화물선을 말한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배를 본격적으로 운항하면 가운데 돛도 두 개나 올라가고 양쪽에 십여 개의 노가 지네 발처럼 튀어나온다·
내가 말한 바로 그 미곡운반선들의 일부가 이미 강 건너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수십 척에 불과하지만 하루가 지날 때마다 아마 배로 늘어날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장강은 사시사철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만약 누군가 장강이 끝나는 동쪽 끝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가려면 어쩔 수 없이 물길을 거슬러 올라야 하지· 다행히 장강은 워낙 넓고 평평해서 유속이 그닥 빠르지 않다·”
경쟁 표국들의 공격에 대한 대비책을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장강을 언급하는 걸까?
장강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 건가?
“한데 아무리 날렵한 배라고 해도 거슬러 오를 수 없는 열여덟 곳의 물길이 있는데 이를 장강십팔탄(長江十八難)이라고 부른다·”
이거다·
장강이 천연의 거대한 수로이면서도 동시에 구간 구간 나뉘어 갇힌 수로일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어떤 특정한 집단이 장강의 조운(港運)을 독점할 수밖에 없는 이유·
만약 사천성에서 항주까지 한 번에 가고자 한다면 배를 타고 장강 물길 따라 천천히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다시 배를 타고 사천까지 물길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보통의 배로는 열여덟 개의 급류를 모두 거슬러 오른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자들이 있다· 바로 장강 물길을 손금보듯 한다는 교룡방(長江被龍常)의 방도들이지·”
대륙의 모든 강에는 조운의 권리를 독점한 방파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강 장강의 조운을 장악한 곳이 바로 교룡방이었다·
매해 이맘때가 되면 교룡방은 급류마다 제비처럼 빠른 비조선과 힘세고 건장한 노꾼들을 배치해 둔다·
그리고 미곡을 싣고 하류로 내려갔던 교룡방 소속의 운반선들이 돌아오면 백여 명의 노꾼들이 비조선 이십여 척에 나눠 타고 마중을 나간다·
이어 운반선에 밧줄을 건 다음 한 시진 정도 죽을 둥 살 둥 노를 저어 거대한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백여 명이 한 번에 끌어 올릴 수 있는 운반선은 한 척이 고작이었다·
해서 각각의 급류마다 적게는 삼백에서 많게는 오백여 명씩 대기하고 있다가 운반선이 나타나면 교대로 달라붙는다·
남직예의 하구에서 이곳 무한까지는 모두 일곱 개의 급류가 있으니 대략 삼천여 명의 노꾼들과 육백여 척의 비조선이 한철 장사를 위해 동원되는 셈이다·
교룡방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곡운송은 이처럼 생산자들인 호남의 무수한 농장들 그것을 대량으로 매입하는 미곡상단들 호송을 책임지는 표국들 그리고 장강 구간의 운송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교룡방까지 모두가 사활을 걸고 뛰어드는 복잡한 사업이었다·
이종산의 말이 이어졌다·
“저 삼판선들은 내가 산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천룡표국은 앞으로 석 달간 교룡방 조운선 오십 척의 독점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한 상단들도 거래처를 옮기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이갑룡을 필두로 사람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모두가 태산같이 걱정을 하다가 이제야 한 시름 놓았다는 투였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교룡방의 조운선 한 척당 표마차 스무 대 분량의 미곡을 실을 수 있다·
오십 척이면 무려 일천 대에 해당하는 선적량이었다·
쉽게 말해 일천 대의 표마차가 석 달간 무한과 강동을 계속해서 쉬지 않고 오가는 것이다·
마차와 달리 배는 밤에도 돛을 올리고 운항하니 실제로는 표마차보다 훨씬 빠르다·
하지만 모든 게 예측대로 되지는 않는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빼앗겼단 말이지·’
이건 이종산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이종산의 능력을 너무나 잘 아는 경쟁표국들이 작은 실수조차 없도록 오랜 시간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해온 탓이다·
불현듯 내가 싸워야 할 적들이 두려워졌다·
천하의 이종산조차도 이기지 못한 표행의 달인들을 과연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그때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십여 명의 무인들이 말을 타고 나는 듯 달려 황학산을 올라오는 게 보였다·
거침없는 기세도 기세지만 바위를 뛰어넘고 나뭇가지를 피하는 등의 기마술이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울창한 숲을 빠져나와 황학루가 있는 정상에까지 다다랐다·
그러자 숲에 가려져 있던 각양각색의 용모를 한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러운 무인들의 등장에 황학루 아래에 있던 선발대와 분타에서 마중 나온 표사들이 앞을 막아섰다·
산을 올라온 기마인들은 서두르지 않고 아직도 흥분 상태인 말들의 목을 능숙하게 쓰다듬으며 숨을 골랐다·
단 한 명도 비범해 보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유달리 출중한 기도를 뿜어내는 젊은 사내가 있었다·
육척장신에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잘생긴 얼굴 고된 수련으로 다져진 근육질의 몸 백여 명의 표사들이 앞을 막아서는데도 불구하고 주눅이 들기는커녕 사람들을 압도하는 눈빛까지·
누가 보아도 훗날 크게 되고야 말 것 같은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다·
이런 느낌은 남궁세옥과 신창양가의 양조창을 보았을 때 이후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저 녀석이 여길 왜!”
이을룡이 신음하듯 말했다·
기마인을 내려다보는 이갑룡의 눈빛도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쯤엔 나도 저 사내의 정체를 간파했다·
그의 뒤쪽에 있는 자의 등에 꽂혀 있는 북천표국의 표기 때문이었다·
북천표국은 천룡표국 보다 이 할이나 낮은 금액을 제시해 상단 세 곳을 빼앗아간 것으로 의심되는 바로 그 표국이었다·
용머리가 새겨진 황금빛 손잡이의 대도를 등에 멘 사내는 북천표국의 장남인 철담도룡(鐵膽雇龍) 여사평이었다·
‘저 자가 왜?’
속으로일망정 나도 똑같은 소리가 나왔다·
여사평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황학루 꼭대기에서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이종산을 향해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북천표국에서 온 여사평이라고 합니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하신 표왕 선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말이 묘하다· 보통은 국주님이라고 하는데 선배님이라니·
이는 같은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자신도 언젠가 당신의 위치에 오를 것이라는 당찬 포부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딱히 비례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새파란 젊은 무인들이 팔순의 무인에게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림에선 흔한 일이었다·
한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나뿐만 아니라 이갑룡 을룡 병룡은 물론이거니와 분타주와 그의 딸 방금옥까지도 어금니를 깨물고 있었다·
“알고 보니 여 국주의 자제분이시군· 혹 그대도 황학루에서 보는 풍광이 궁금해서 왔다면 이리 올라오시게·”
“말씀은 감사하오나 소인은 본표국의 국주님으로부터 선배님을 찾아뵙고 저녁 식사에 모시라는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찌 알고?”
“선배님께서 무한에 나타나셨다는 소식을 들으시더니 제게 황학루로 가면 뵐 수 있을 거라 셨습니다·”
황학루에 올라 상황을 살피려 한 이종산도 놀랍지만 그런 이종산의 행보를 정확히 예측한 북천표국주는 더욱 놀라웠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크게 당황해 했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그때 방청양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북천표국을 비롯한 강북의 표국들이 금성루(金星樓)라는 대형 기루 하나를 통째로 전세 내어 밤마다 상단 대행수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여러 상단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도록 수를 낸 모양이었다·
한편 아까부터 방금옥이 유독 화가 많이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종산이 무심코 그녀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찌 그러시는가?”
국주가 자신에게까지 관심을 보이고 질문을 하자 방금옥은 한순간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들의 행태가 너무 괘씸해서 그렇습니다·”
“무엇이 그리 괘씸한가?”
“저들은 국주님께서 초대에 응하지 않으실 줄 알고 배포가 작다는 말을 퍼뜨리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와 수작을 벌이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내가 응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가?”
“긴 여정 끝에 이제 막 도착을 하신 데다 적대적인 사람들만 우글대는 곳에 구태여 걸음 하시어 수모를 받아내실 이유가 없으니까요·”
“강북의 표국들은 경쟁자들이지 적이 아닐세· 하물며 상단의 대행수들은 더 말할것도 없겠지· 자넨 아버지와 달리 생각이 너무 많군·”
“하지만 장궤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지·”
이종산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분타주는 선발대와 함께 분타로 돌아가 상단들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하시게· 당주들은 나와 함께 금성루로 간다·”
이종산은 이어 방금옥에게도 말했다·
“자네도 함께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