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 바다 건너 동쪽으로(8) >
혼란을 틈타 성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 우리는 곧장 바닷가를 향해 달렸다·
처음엔 분명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렸다·
한데 어느 순간 보니 사람들이 어미 쫓는 새끼 오리들처럼 전부 내 뒤에서 한 줄로 따라오는 중이었다·
석불원 호리독사 모모카 순이었다·
“무얼 하시는 겁니까?”
“앞이 보이지 않아 다들 몸을 사리는데 자네 혼자 전력으로 내빼고 있으니 믿고 뒤를 따르는 중일세· 대체 뭘 주워 먹은 겐가?”
“주워 먹다뇨?”
“안력(眼刀)과 경공술은 내공과 직결되는 법·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자네의 내공은 결코 내 아래가 아닐세·”
“과찬이십니다·”
“고작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그만한 내공을 지니려면 영약의 기연을 얻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지· 그것도 인세에 보기 드문·”
“원래가 허약하게 태어나는 바람에 어려서부터 벌모세수(伐毛洗髓)한 후 이런저런 영약들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무림세가의 후기지수들치고 어려서부터 벌모세수에 영약을 꾸준히 복용하지 않은 이가 몇이나 있을 것 같은가?”
“저는 특별히 약발이 잘 받았던 것 같습니다·”
“약발을 받아도 정도껏····”
순간 나는 왼발을 바닥에 찍으며 질주를 멈추었다·
하마터면 부딪힐뻔한 세 사람이 서둘러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무슨 일인가?”
“저기!”
내 손가락을 따라 모두가 시선을 던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저 멀리에서 수십 개의 횃불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그 빛무리 속으로부터 깡깡 쇳소리와 함께 새파란 불똥이 작렬하듯 번쩍이고 있었고·
“저긴 바닷가 쪽인데·”
“앞서간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긴 듯하군·”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달리겠습니다!”
호리독사와 석불원과 내가 차례로 한 말이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무사들의 숫자는 어림잡아도 삼십여 명 하나같이 숨통이 끊어졌는지 요동조차 없었다·
어떤 자는 배가 쩍 갈라친 채 하늘을 향해 누웠는데 시뻘건 핏물과 함께 창자가 주르륵 쏟아져 나와 있었다·
좌우로 깎아지른 절벽 사이의 외길에다 이런 참혹한 지옥도를 만들어 놓은 사람은 다름 아닌 미나모토였다·
피를 얼마나 뒤집어썼는지 그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전부 붉은색이었다·
아래로 축 늘어뜨린 칼자루에서는 아직 굳지 않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의 뒤쪽엔 남궁소소가 역시나 피가 튀었지만 미나모토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깨끗한 상태로 왕자의 앞을 막고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왕자는 움푹 팬 절벽 틈새에 들어가 새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남궁소소가 최후의 보루가 되어 왕자를 지키는 사이 미나모토가 사실상 혼자 적들을 썰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세옥과 맞서는 수준이라더니 과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족히 백여 명은 될 것 같은 칼잡이들이 길을 막고 서 있었다·
우리가 나타나자 남궁소소와 왕자가 반색을 했다·
특히 왕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모모카!)”
“(왕자님!)”
나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남궁소소에게 물었다·
“저것들은 다 무엇이오?”
“지난번 길에서 만났던 그 떠돌이 낭인무사들이 동료들을 데리고 왔어요· 아무래도 본진이 따로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이리로 올 줄 어떻게 알고?”
“쓰루마루성 밖에서 대여섯 명이 몇 날 며칠 동안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가 나오자 뒤를 밟는 한편 인근에서 대기 중인 동료들을 부른 것 같아요·”
“다친 곳은?”
“덕분에 살았어요·”
범상치 않은 대답에 자세히 남궁소소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맞았는지 배 부분의 겉옷이 한 뼘 정도 잘려나간 상태였다·
왜국으로 들어오기 전 용린신갑을 벗어 주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녀의 시체를 대륙으로 싣고 갈 뻔했다·
생각만해도 아찔했다·
“어떤 놈이 그랬소?”
“저기 왼쪽 절벽에 매달려 있는 자가 그랬어요·”
나는 대번에 왼쪽 절벽으로 고개를 꺾었다·
백여 명의 적들 중 일부는 박쥐처럼 좌우의 절벽에 매달려 있었는데 한 손에는 기다란 사슬낫을 추려 잡은 상태였다·
모모카가 내 등 뒤로 바싹 다가와 말했다·
“인자(忍者)들이에요·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무사들인데 은신술을 통한 기습공격에 특히 뛰어나요·”
그때 낭인무사들 중 몇 놈이 칼끝으로 나를 찌를 듯이 가리키며 무어라고 소리쳤다·
“(저놈이다!)”
“(저놈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저놈이 타키히로를 속여 우릴 죽이게 했다!)”
채앵!
내가 칼을 뽑으며 말했다·
“선공은 제가 하겠습니다·”
“기꺼이 양보하지·”
놈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발을 살짝 비틀었다·
석불원 미나모토 남궁소소 모모카도 각자의 병기를 뽑아 쥐며 싸울 준비를 했다·
백여 명의 낭인무사들 역시 칼날을 번뜩이며 살기를 있는대로 끌어 올렸다·
일촉즉발의 순간 앞쪽에 버티고 선 낭인무사들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기 시작했다·
왜 그러나 싶어 뒤를 돌아본 우리는 모두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저 멀리 어둠 속 산모퉁이로부터 횃불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컹컹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뒤를 이었다·
시마즈 가문의 기마무사들이 번견들을 앞세우고 우릴 추적해 온 것이다·
횃불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잠깐 사이에 수백 개를 넘기더니 무려 천여 개에 이르고서야 비로소 꼬리가 끊어졌다·
“미친!”
“제기랄!”
“빌어먹을!”
나와 남궁소소와 호리독사가 차례로 한 말이었다·
일백의 낭인무사들도 우리 못지 않게 동요했다·
그들은 시마즈 가문의 무사들로부터 타키히로를 노리고 온 암살자로 몰리기까지 한 터였다·
서둘러 남궁소소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통역하시오·”
“알았어요”
“시마즈 가문의 기마무사들 오면 너희는 몰살이다! 억울한 마음은 이해한다만 더 늦기 전에 피차 갈 길을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자 일백 낭인무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칼을 품고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던 애꾸눈이었는데 한쪽 눈알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안광을 폭사했다·
놈이 두령이었던 것이다·
그가 우렁우렁한 소리로 말했다·
“보아하니 쓰루마루성에서 큰 사고를 치고 도망쳐 온 것 같은데 너희를 잡아 저들에게 넘겨주고 오해를 씻겠다···· 라고 하네요·”
“···!”
“···!”
나도 석불원도 합죽이가 되어 버렸다·
듣고 보니 시마즈 가문의 가병이 되길 원하는 놈들로서는 지금이야말로 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였다·
‘묘수네· 젠장·’
아니나 다를까 낭인무사들의 동요가 뚝 그쳤다·
오히려 사기가 충천해서는 두 다리를 벌리고 상체를 숙였다·
궁지에 몰린 우리가 무리를 해서라도 돌파할 것에 대비하는 것이다·
모두가 당황해하는 그때 석불원이 또다시 단호한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
“여자들은 왕자를 지킨다· 호리독사는 미나모토와 함께 낭인무사들 쪽을 맡고 나와 이정룡은 기마무사들 쪽을 맡는다· 왜국에 와서 아직 제대로 된 칼맛을 못 보고 가나 했더니만 잘 됐군·”
“어쩌시려고요?”
“첫 번째 계획을 다시 실행하세·”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할 수 있겠나?”
“무조건 해야죠·”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이 뻔뻔한 노인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될 것도 같다·
두두두두두····
잠시 후 시마즈 가문의 기마무사 일천여 명이 절벽 사잇길의 입구에 도착했다·
사나운 번견들이 컹컹 짖어대는 가운데 뿔투구를 쓴 타키히로가 수하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그는 다짜고짜 우릴 제쳐두고 뒤쪽의 낭인무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는 누구인가?)”
“(며칠 전 시마즈 가문의 기마무사들이 길에서 저희의 동료들을 열네 명이나 죽였다고 들었습니다· 타키히로님을 노렸다는 이유로요·)”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 모든 게 저 대륙놈들의 농간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놈들을 추적해 온 길입니다·)”
“(나를 도와주겠는가?)”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아무도 나서지 마라· 다만 목숨으로 길목을 지켜라· 하면 오늘 밤 너희는 나와 함께 쓰루마루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시마즈 타키히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낭인무사들의 우두머리가 우렁차게 외치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백여 명의 낭인무사들이 똑같이 허리를 숙이며 복창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제야 타키히로가 나를 노려보았다·
눈동자 가득 뭐라 말할 수 없이 강렬한 살기가 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가 으르릉거리며 무언가를 말했다·
남궁소소가 재빨리 통역했다·
“정체가 무엇이냐?”
“성주는 살아있소?”
“누구의 사주를 받았지?”
“별채의 첩과 자식들은?”
“왕자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이냐?”
“천수각이 화마에 휩싸이는 걸 보았는데 그 정도 규모면 사흘은 족히 탈 것이오· 일상에 지친 영주민들에겐 간만에 재밌는 구경거리가 되겠군·”
“모조리 사로잡아 한 명씩 유황불에 던져주마!”
말과 함께 타키히로가 오른손을 들어 앞쪽으로 내질렀다·
그의 뒤쪽에 있던 기마무사들이 일제히 말에서 뛰어내려 우릴 향해 신형을 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흡사 메뚜기 떼가 습격해 오는 것 같았다·
“내 뒤에 붙게!”
석불원이 일성을 내지르며 뛰쳐나갔다·
순간 그의 신형이 흐릿한 잔영으로 변했다·
동시에 섬광이 어지럽게 번뜩이는가 싶더니 피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왜인들의 손과 팔과 목이 뚝뚝 떨어져 날아다녔다·
‘환검(幻劍)!’
나는 전날 곤륜노들을 운송하던 흑수표국의 표두 난혼사검 백몽추가 환검을 휘두르는 걸 본 적 있다·
한데 지금 석불원이 펼치는 환검은 감히 백몽추의 검 따위와 비교할 게 아니었다·
이건 그냥 지옥에서 튀어나온 악귀가 칼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 정도였어?’
그가 미나모토에게 한 번만 더 허락 없이 칼을 뽑았다간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고 경고했을 때 나는 속으로 ‘그건 싸워봐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다·
미나모토는 단순한 왜구가 아니라 남궁세옥과 세 번을 싸워 두 번이나 무승부를 이끌어 냈던 고수가 아닌가·
한데 지금 보니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단언할 수 있다·
남궁세옥까지는 모르겠으나 미나모토의 손목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자르고도 남을 것 같았다·
깡깡까가가강!
“으악!”
“아악!”
“크악!”
석불원의 돌파력은 놀라워서 눈 깜짝할 사이에 무려 십여 장이나 나아갔다·
부나방처럼 다가오는 왜국 무사들 수십을 베어 넘기며 길 속에 또 다른 길을 낸 것이다·
이토록 압도적인 존재감이라니!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지금일세!”
말과 함께 석불원이 갑자기 옆으로 돌아서며 기마보(驗馬步)의 자세를 취했다·
나는 그대로 달려가며 그의 무릎과 어깨를 연달아 밟으며 솟구쳤다·
이어 십여 장을 질풍처럼 날아간 다음 체공 상태에서 마상에 있는 타키히로와 맞닥뜨렸다·
나보다 먼저 그리고 내 칼보다 먼저 비격쌍뇌창의 바늘이 놈의 왼쪽 눈알을 뚫고 들어가 박혔다·
푹!
원래대로라면 정수리에 있는 마혈 이른바 천중구곡혈(天中九谷穴)을 노렸을 것이다·
한데 놈이 전신 갑옷에다 뿔투구까지 쓰고 있어서 달리 쑤셔 박을 만한 곳이 없었다·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놈은 눈알에 바늘이 박히는 충격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섬전처럼 칼을 뽑았다·
일전에도 보았던 그 기가 막힌 발도술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스캉!
나는 피하지 않고 그의 칼을 힘차게 내리쳤다·
구성의 내공이 담긴 일도로 상대의 칼을 찍어 누르며 가슴팍까지 쪼개버릴 참이었다·
깡!
격검의 순간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내가 휘두른 칼이 손잡이 바로 위에서부터 반 토막으로 터져나가 버렸다·
‘이게 무슨!’
놀랄 사이도 없이 옆에서 목을 쳐 오는 타키히로의 칼을 상대해야 했다·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허리를 비틀고 목을 꺾었다·
사실상 시간을 느리게 흐르도록 하는 이능력이 없었다면 나는 오늘 여기서 목을 잘려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일망정 그의 칼을 피했고 덕분에 반격의 기회까지 얻었다·
의도치 않게 놈의 왼쪽으로 피한 나는 그대로 우수를 뻗어 투구의 뿔을 덥석 잡아당겼다·
얼마나 단단하게 고정해 놓았는지 놈의 머리통이 홱 꺾이며 몸 전체가 곤두박질쳤다·
그대로 마상에 있던 그를 땅바닥에다 머리부터 거꾸로 처박아 버렸다·
쿵!
타키히로는 지독하고 빠를 뿐만 아니라 머리도 비상했다·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 몸을 재빨리 굴려 말 아래를 통해 건너편으로 도망가 버린 것이다·
‘나려타곤?’
나는 말의 앞다리를 발로 거는 한편 양손으로 옆구리를 힘 차게 밀었다·
커다란 말이 막강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타키히로가 굴러간 방향으로 쓰러졌다·
타키히로는 그 와중에도 기어이 말을 피하며 튀어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러다 말을 타고 넘은 내가 펼친 십초박의 작렬하는 권망에 걸려들었지만·
퍼버벅! 터더더더덩!
선 세 방은 얼굴 정면을 후 다섯 방은 투구를 맞추었다·
그 바람에 놈의 얼굴이 만신창이로 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강철로 만든 뿔투구까지 퍽퍽 찌그러졌다·
나는 피칠갑이 되어 휘청거리는 놈의 뒤로 재빨리 돌아가 양손을 쓰지 못하도록 팔을 어깨에서 뚝뚝 뽑아 버렸다·
이어 한 손으로 다시 투구의 뿔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칼을 빼앗아 목에 들이댔다·
그리고 통역이 필요 없을 만큼 큰소리로 외쳤다·
“야이 캐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