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 바다 건너 동쪽으로(4) >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삼나무 숲과 푸석푸석한 땅과 해안을 따라 늘어선 이국적인 집들은 이곳이 왜국임을 실감케 했다·
우리는 미나모토를 앞세우고 부지런히 북쪽으로 걸었다·
무작정 가는 것이 아니었다·
석불원의 머릿속에 새겨진 지도를 따라 특정한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넓은 소매 좌우의 섶을 겹친 상의 치마 두 개를 붙여 만든 것 같은 바지까지·
왜국 무사의 복장은 어색한 건 둘째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을 괴롭히는 건 신발이었다·
나무 판때기에다 가죽끈을 몇 개 묶어 놓고 엄지발가락 사이로 끼워 신게 만든 신발은 정말 미치도록 불편했다·
그나마 버선을 신고 그 위에다 신발을 신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발가락 사이에서 피가 철철 났을 것이다·
참고로 버선도 엄지발가락과 다른 발가락들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돼지 발굽 같다며 호리독사는 한식경째 투덜댔다·
“미개한 놈들 같으니라고·”
“그런 건 상대적이지 않을까요?”
“예?”
“왜국의 물건들 중에서도 분명 우리 것보다 발전된 것들이 많으니까요· 당장 칼만 봐도 그렇잖아요· 강도가 다른 두 개의 철을 접합해 만든다는 왜국의 칼은 얇고 가볍고 날카로우면서도 잘 휘지 않아 검과 도의 장점을 모두 갖고 있기로 정평이 높죠·”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렇게 질 좋은 칼을 만드는 놈들이 신발은 왜 이따구로 만들어서 신고 다니는지· 싸울 때는 대체 어쩌는지 모르겠습니다·”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예요·”
“그때까지 있으려고요?”
“그것도 그렇네요·”
호리독사와 남궁소소가 나누는 대화였다·
다행히 마주치는 사람들이 없었기에 석불원도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길이 넓어지고 마을을 지날 때는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이마에 흰 수건을 두른 농민들이 계속해서 눈에 띄었다·
체격이 눈에 띄게 작다는 것 외에는 대륙이나 왜국이나 농민들의 부지런함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무사들을 두려워하는 것도 똑같았다·
칼을 옆구리에 찬 우리가 보일 때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특히 젊은 여자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아예 여자들을 데리고 도망치거나 어딘가에 숨기기 바빴다·
시간이 흐를수록 농민들이 무사들을 두려워하는 정도가 조금 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이 점을 이상하게 여길 즈음 미나모토가 뭐라고 했다·
남궁소소가 다시 물었고 뜻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지 비슷한 단어를 가지고 확인하듯 몇 번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우리를 로닌(辛人)이라고 생각한대요·”
“그게 뭐요?”
“전쟁으로 주군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자신들을 고용해줄 새로운 주군을 찾아 떠도는 ‘사무라이’들 그러니까 직업 무사라는 뜻이에요·”
“낭인을 말하는 건가?”
“떠돈다는 측면에서 비슷하긴 한데 이곳은 대륙처럼 관과 무림이 별개의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딱 들어맞지는 않아요·”
“한데 왜 저렇게 두려워하는 거요?”
“잠깐만요·”
남궁소소가 다시 미나모토에게 물었고 미나모토가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저 자식은 나와 호리독사를 대할 때는 욕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은 말투를 썼다·
한데 남궁소소와 대화할 때만큼은 마치 어린 누이를 대하듯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대화를 끝낸 남궁소소가 설명해 주었다·
“십여 년 전 왜국 전체가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큰 전쟁을 벌였대요· 그때 동군이 승리하면서 서군에 속해 있던 수많은 제후의 가문들이 풍비박산 났대요·”
“그래서?”
“그때 그 가문에 속해 있던 칼잡이 수십만 명이 한꺼번에 직업을 잃고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범죄가 끊이질 않는다고요· 특히 젊은 여자들을 상대로 한 범죄가·”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그때 미나모토가 뭐라고 했다·
남궁소소가 통역했다·
“하지만 모든 로닌이 그러는 건 아니래요·”
미나모토는 같은 무사로서 자기 나라 무사들의 치부를 보인 것 같아 불편한 모양이었다·
자기도 남의 나라 양민들을 상대로 노략질을 했으면서 무슨 헛소리를·
범죄자로 전락한 무사들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런 일로 미나모토가 그토록 자긍심을 가지는(?) 무사도까지 조롱할 생각은 없었다·
“대륙의 무림인들도 모두 칼밥을 먹지만 흑도와 백도가 있고 심지어 사마외도와 좌도방문도 있다고 전해 주시오· 우리는 너희와 규모 부터가 다르다고·”
“사마외도와 좌도방문을 어떻게 설명하죠?”
“대충 설명하면 알아들을 거요· 무림은 없다고 해도 왜국에도 분명히 그런 놈들이 도처에 널렸을 테니까·”
남궁소소가 통역을 하자 미나모토가 의외라는 듯 잠시 나를 빤히 보았다·
대륙에도 그런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게 아니었다·
내가 대륙의 예를 들어 자신의 말을 인정하고 공감해 주는 게 뜻밖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문득 왜국의 무공에 대해 너무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국의 무공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번 물어 봐주시오·”
“주로 검술이 발달했고 수많은 검술유파가 있다고 해요· 그중에서도 이곳 사쓰마를 다스리는 시마즈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지겐류(示現流)는 서해도 일대에서 적수가 없다고요·”
“지겐류?”
“상대를 죽이는 걸 첫 번째 목표로 하는 강검 중의 강검인데 시마즈 가문에 도전을 해온 수많은 무사들이 발도와 함께 펼쳐지는 첫 번째 초식에 목숨을 잃었다고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검술유파 중 한 곳이래요·”
“···!”
“···!”
나와 호리독사는 눈이 동그래졌다·
남궁세옥과 세 번을 싸워 두 번이나 동수를 이루었다는 미나모토가 가장 두려워한다는 것도 그렇고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심상치 않은 검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슬쩍 석불원을 돌아보니 그는 시종일관 주변을 살피기만 할 뿐 이렇다 할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미 알 만큼 안다는 뜻이다·
그때 미나모토가 씨익 웃으며 뭐라고 했다·
“‘너희는 이제 엿된 거야·’라고도 하네요·”
***
이국적인 풍경은 도시로 들어서자 절정에 달했다·
주변에 울창한 산과 아름드리 삼나무가 많아서인지 대부분의 민가는 삼나무로 벽체를 쌓고 이엉이나 기와로 지붕을 얹은 것이었다·
재료는 대륙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모양들은 확연하게 달랐다·
일단 크기가 작았고 지붕은 뾰족했으며 대륙의 처마는 높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간 데 비해 왜국의 그것은 그냥 뚝 끊어졌다· 그런가 하면 칼찬 무사들도 부쩍 자주 눈에 띄었다·
그들은 대부분 삼삼오오 무리를 짓고 돌아다녔는데 어떤 때는 십여 명이나 되는 무리와 마주치기도 했다·
무사들은 하나같이 변발에 허리를 감은 요대 사이로 길고 짧은 칼 두 자루를 비스듬히 찔러 넣은 차림새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변발의 모양도 복색도 제각각이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대동소이했다·
특히 칼을 두 자루씩 차고 다니는 게 무척이나 신기했다·
어쨌거나 우리도 칼을 차고 있으니 왜인들이 함부로 말을 걸지 않아서 좋았다·
일단 말을 걸면 신분이 노출될 우려가 컸으니까·
반대로 같은 처지의 칼잡이들로부터는 오히려 시선을 끌었다·
아무래도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고 다섯 명 모두 칼을 하나밖에 차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골목길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이십여 명의 칼잡이들과 하마터면 그대로 부딪힐 뻔했다·
지금까지 만난 무리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앞서가던 미나모토는 절정의 고수답게 그대로 멈추었고 아무렇지도 않게 오른쪽으로 돌아서 가려 했다·
한데 하필 놈들도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나모토가 다시 재빨리 왼쪽으로 옮기자 놈들도 똑같이 그랬다·
일부러 길을 막아선 게 아니라 정말 우연의 일치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자 상대방 쪽에서 대번에 욕설이 튀어 나왔다·
“(멍청한 자식!)”
“(죄송합니다·)”
미나모토가 고개까지 숙이며 다시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상대방 쪽 선두에 있던 근육질에 날카로운 인상의 애꾸눈이 따라서 똑같이 오른쪽으로 옮겨 디뎠다·
이번엔 우연이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일부러 막아선 것이었다·
그리고 욕설이 분명한 한마디·
“(이 바보 같은 놈들은 뭐야?)”
뒤쪽에 있던 놈들에게서 왁자지껄한 웃음보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놈들로부터 짙은 술 냄새가 확 풍겨 왔다·
미나모토의 눈동자에서는 살기가 번뜩였다·
일촉즉발의 순간 석불원과 남궁소소의 입술이 차례로 미세하게 달싹거렸다·
석불원이 남궁소소에게 전음을 보내고 그걸 다시 남궁소소가 미나모토에게 전음으로 통역을 하는 것이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조용히 보내라는 경고가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미나모토는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한데 놈들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리의 숫자가 고작 다섯 명 밖에 되지 않는 데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모습이 어리바리하게 보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앞을 막아선 근육질의 애꾸눈이 손가락으로 미나모토를 가슴을 쿡쿡 찌르며 계속해서 뭐라고 했다·
“(건방진 자식· 사람을 칠뻔하고 그냥 도망가겠다는 거냐? 어디에서 굴러먹던 개뼈다귀들인지 모르겠다만 내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면 용서해주겠다·)”
또다시 왁자지껄하게 웃음보가 터졌다·
모두가 같은 부류는 아니었는지 몇몇 칼잡이들은 정색하고 애꾸눈을 만류하는 듯한 말을 했다·
하지만 한참 흥이 오른 애꾸눈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아무리 뭐라고 해도 미나모토가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상대를 해주지 않자 갑자기 턱을 덥석 잡고는 들어 올리려고 했다·
그때였다·
스캉!
미나모토가 한 걸음을 물러나고 그의 칼집에서 한 줄기 빛이 뽑혀 나오고 쇳소리가 울리고 턱을 잡던 애꾸눈의 손목이 뎅겅 떨어지고 잘려나간 손목의 단면에서 피가 솟구치는 게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정적을 깨는 비명·
“으아아악!”
비명을 신호로 이십여 명의 칼잡이들이 파편처럼 흩어지며 우리를 동그랗게 에워쌌다·
이어 일제히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았다·
채채채채채채채챙···!
이 머나먼 왜국 땅까지 와서 그냥 서서 죽을 수야 있나·
우리도 모두 칼을 뽑았다·
채채채챙!
우리는 서로에게 등을 맡기고 원을 그린 채 놈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나와 호리독사는 입으로 계속해서 ‘빠가야로!’를 연발했다·
신분을 숨겨야 하기 때문에 우리 말로 욕을 할 수가 없으니 그나마 아는 왜국 욕 한 가지만 주야장천 반복하는 것이다·
물론 욕을 하는 대상은 미나모토였다·
석불원은 석불원대로 화가 머리끝까지 난 표정이었다·
시비의 원인은 물론 놈들에게 있었지만 미나모토에게도 융통성 있게 처리를 못 한 책임이 분명히 있었다·
아무래도 그런 주변머리가 없는 것 같았다·
주군 외에는 평생을 누구에게 머리 숙여 본 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이 놈들에게서는 온갖 사나운 기세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시비 한번 잘 못 걸었다가 졸지에 불구가 되어버린 애꾸눈은 제 손목을 쥐어 잡은 채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댔다·
‘쌍욕을 하는 것이 분명한데 알아듣지를 못하니 그렇게 화가 나지도 않네· 제기랄·’
한편 갑작스러운 칼잡이들의 싸움과 대치에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은 행여라도 불똥이 튈까 봐 후다닥 물러났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게 되자 더는 도망치지 않고 서서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가던 사람들 역시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지켜보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대로를 따라 늘어선 객점에서는 손님들이 우르르 튀어 나왔다·
그들 중에는 우리처럼 칼찬 무사들도 적지 않았다·
잠시 미나모토와 놈들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네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조용히 물러나는 게 좋을 것이다·)”
“(길바닥에 창자를 쏟게 만들어 주마!)”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어느 순간 설전이 뚝 그쳤다·
대신 팽팽한 기 싸움이 이어졌다·
눈빛과 눈빛이 부딪히고 기세와 기세가 얽혔다·
누군가 먼저 빈틈을 발견하고 공격하면 그 즉시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비켜라! 비켜라!)”
어디선가 우렁찬 외침과 함께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애꾸눈 쪽 칼잡이들도 우리도 모두 대치를 유지한 채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한 무리의 말 탄 무사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며 나타났다·
족히 쉰 명은 될 것 같았는데 가장 앞줄에서 십여 명 정도는 세로로 긴 깃발을 등에 꽂은 상태였다·
붉은색 깃발에는 도진(鳥津)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고 흰색 깃발에는 동그라미 안에 십(十)자를 그려 놓은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깃발의 뒤로는 커다란 투구에 요란 뻑적지근한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길고 짧은 칼 두 자루를 찬 기마무사들이 뒤따르는 중이었다·
기마무사들 중 절반은 겨드랑이 아래의 가죽집에 활을 꽂아 놓은 채 고삐를 잡고 있었다·
무슨 놈의 활이 시위를 건 상태에서도 사람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컸다·
거기다 밑장과 윗장의 대칭도 맞지 않았다·
왜도는 많이 봤어도 왜궁은 처음 본 나는 어리둥절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과연 저걸 입고 싸울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크고 과장되고 무거워 보이는 갑옷이라니·
한데 그들이 나타나자 평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칼잡이들까지 앞다투어 길가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심지어 우리와 대치하고 있던 칼잡이들도 일제히 칼을 도갑에 꽂아 넣고는 도망치듯 길가로 물러났다·
미나모토가 보이지 않아서 두리번거렸더니 어느새 반대쪽 길가의 건물 벽에 찰싹 달라붙어서 우리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빠가야로!”
욕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빨리 이리로 오지 않고 뭐하냐는 호통으로 들렸다·
나와 석불원과 남궁소소와 호리독사는 영문도 모른채 후다닥 달려가 미나모토의 옆에 나란히 섰다·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아 저들이 싸움을 멈추게 만든 것 같았다·
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칼잡이들은 물론이고 미나모토조차 이처럼 몸을 사리게 만드는 걸까·
그때 미나모토의 입에서 신음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남궁소소가 우리만 들을 수 있도록 작은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시마즈 가문의 사무라이들이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