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 표사들을 모으는 고수(8) >
대결은 왜인무사가 충분히 먹고 몸을 풀 수 있도록 사흘 후로 미루어졌다·
덧붙여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는 내원의 가주부에 딸린 소연무장에서 조용히 치루기로 했다·
한데 당일 아침이 되고 보니 연못가에 고급스러운 의자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가운데 쉰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 중 절반은 소가주인 남궁중백 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으며 아예 남궁유룡처럼 백발인 노강호도 여럿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명도 기도가 출중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마치 산중에 숨어 지내던 은둔 고수들이 갑자기 몰려온 것 같았다·
대결이 시작되기 전 남궁소소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저분들은 누구요?]
[장로님들과 각 당의 당주님들 그리고 인근에 사시는 일가친척 어른들이세요· 지난번 할아버지의 팔순잔치 때도 오셨는데 그땐 손님들이 워낙 많아서 제대로 못 보셨으려나·]
[그분들이 왜 저기 계신 거요?]
[할아버지께서 초청하셨어요·]
[가주님께서 왜?]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으니 와서 보시라고요·]
[···!]
슬쩍 석불원을 돌아보았다·
손님에 대한 예우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선지 그는 남궁유룡의 바로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 역시도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딱히 비밀로 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시작하시오!”
총관 좌고학이 외쳤다·
마침내 비무가 시작되었다·
나는 주먹을 말아 쥔 후 허공을 두어 번 획휙 내질렀다·
이어 왼쪽 어깨를 살짝 낮춘 채 비스듬히 서서 왜인무사를 노려보는 자세를 취했다·
천룡표국의 비전 권법인 박룡수의 기수식(起手式)이었다·
귀영무의 보법과 어우러진 십초박이 워낙 빠르고 강렬해서 그렇지 박룡수 역시 결코 만만한 권법이 아니었다·
왜인무사는 수도(手刀) 즉 손날로 허공을 두어 번 썰더니 갑자기 ‘하잇!’ 하고 날카로운 기합성을 내질렀다·
이어 뒤로 뻗은 오른발에 체중을 실은 상태에서 왼발 끝을 세워 딛고는 두 다리 모두 살짝 무릎을 굽혔다·
동시에 양손은 손가락을 쫙 펼쳐 들고 나를 찢어 죽일 것 같은 자세로 노려보았다·
그 모습이 꼭 천적을 만난 사마귀 같았다·
“그게 기수식이냐?”
“카캇테코이 코조오!”
“대륙에 왔으면 대륙 말을 해!”
“요와무시메·”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모르는 인간들 같으니라고·”
“빠가야로!”
“내 오늘 너에게 공맹의 도리를 가르쳐 주마·”
팡!
보법을 펼치자 석 장의 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질풍처럼 전권을 파고든 나는 왜인무사의 가슴을 향해 좌권을 빠르게 뻗어갔다·
왜인무사는 ‘고작 이 정도냐?’ 하는 표정과 함께 상체를 오른쪽으로 가볍게 비틀었다·
순간 나는 과감하게 한걸음 깊숙이 내디디며 우권을 벼락처럼 뻗었다·
그 궤적에 왜인무사의 턱주가리가 있었다·
그야말로 기습적인 일격이었기에 나는 이 한 방으로 왜인무사를 거꾸러뜨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내 주먹은 그의 턱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헛되이 허공을 격했다·
문제의 상황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놀라서 나를 밀치려는 줄 알았던 그의 손과 발이 내 몸 여기저기에 착착 달라 붙었다·
무얼 어떻게 해볼 틈도 없었다·
갑자기 내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붕 뜨더니 체중까지 실어 주먹을 내지르던 방향 그대로 허공을 쭉 날았다·
애초 턱을 노리느라 비스듬히 내질렀기 때문에 체공 상태에서 의지와 상관없이 회전력까지 실렸다·
그게 낙법을 펼칠 수 없게 만들었다·
쿠당탕탕!
나는 무려 석 장이나 날아간 끝에 내팽개쳐진 것으로도 모자라 맨땅을 대여섯 번이나 데굴데굴 굴렀다·
구르는 힘을 이용해 마지막 순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벌떡 일어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미 당한 망신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비단 무복은 흙으로 범벅이 되었고 그에게 잡혔던 옷자락은 살짝 찢어져 앞가슴이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꼴사납기 짝이 없는 모습·
그에 반해 왜인무사는 뒤짐을 진 채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장포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오연하게 서 있었다·
의자를 삼렬로 세워 놓고 앉아서 구경하던 쉰여 명의 고수들이 일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앞줄에 앉아 있던 남궁유룡·남궁중백·남궁소소·석불원은 그대로 석상이 되어 버렸다·
‘이게 무슨!’
권법가인 내가 검술가에게 권법으로 싸우자고 해놓고 단 이 초식 만에 그것도 한차례의 공방도 없이 일방적으로 나가떨어져 버리다니·
왜인무사가 다시 조금 전의 그 기수식을 취했다·
이어 앞으로 쭉 내민 손바닥을 홱 뒤집더니 다가오라는 듯 까딱까딱했다·
‘소원대로 해주마!’
팡!
분기탱천한 나는 신형을 쭉 쏘았다·
앞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번엔 충분한 거리를 두고 정면에서 그의 면상을 향해 정권을 찔러 들어갔다·
순간 그가 갑자기 뒤로 홱 돌아서며 주먹을 피하는 한편 엉덩이를 내 쪽으로 쭉 밀어 넣었다·
적을 눈앞에 두고 등과 뒤통수를 보이다니 이는 상리를 완전히 벗어난 움직임이었다·
‘이런 미친!’
동시에 그의 왼손은 허공을 격한 내 손목을 끌어 잡고 오른손으로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어 나를 통째로 제 어깨에다 걸머지더니 살짝 띄워 올렸다가 허공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린 다음 도리깨질하듯 땅바닥에다 패대기 쳐버렸다·
철퍼덕!
“끕!”
등줄기부터 시작된 고통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오장육부가 진탕 당하는 충격과 함께 숨이 턱 막히며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이어지는 공격에 당하지 않기 위해 몸을 벌떡 뒤집고 일어나며 세 걸음을 물러났다·
하지만 몸과 정신에 전해진 충격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한편 구경을 하고 있던 쉰여 명의 내외 귀빈들(?)에게서 ‘오오!’ 하는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뒤통수와 등을 보이면서도 상대를 메다꽂아 버리는 왜인무사의 저 기이막측한 수법에 보내는 찬사였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 저들은 왜인무사를 남궁세가에 갇혀 있는 왜구가 아니라 한 명의 무인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남궁유룡·남궁중백·남궁소소·석불원은 아까부터 굳은 표정이 좀처럼 풀리질 않고 있었다·
볼 것도 없이 단 일 합의 공방도 펼치지 못하고 나가떨어져 버리는 나 때문에 크게 당황한 것이다·
‘대체 무슨 무공이지?’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걸 보면 소문으로만 들어본 태극권의 사량발천근과 비슷하고 전권을 뚫고 들어온 손이 옷과 위팔을 감아 잡는 건 금나수와 비슷하다·
그러면서도 타격은 하지 않고 사람을 잡아다 냅다 던지고 메다꽂아 버리기만 한다·
이런 종류의 무공에 대해선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제야 왜 주먹을 말아쥐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가 펼치는 무공은 타격을 목적으로 하는 권법이 아니었다·
나는 삭신이 쑤시는데 그는 이번에도 멋들어지게 서서는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다 남궁소소를 돌아보며 뭐라뭐라 지껄였다·
남궁소소가 내게 통역을 해주었다·
“고작 그 정도 실력으로 내게 도전을 한 것이냐· 아니면 대륙의 무인들은 검이나 칼을 쥐지 않으면 모조리 바보가 되는 것이더냐· 라고 하네요·”
“네가 펼치는 무공의 이름이 뭐지?”
남궁소소가 나를 대신해 다시 물었고 두 사람이 잠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왜인무사가 한 손을 내뻗었다·
남궁소소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돌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휙 던져 주었다·
검은 왜인무사의 발치에 꽂혀 낭창낭창 흔들렸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맨 뒷줄의 일부 고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쏟아져 나오기까지 했다·
왜인무사가 만약 불손한 생각이라도 품는다면 남궁세가의 혈족들을 호위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대로 화들짝 놀라서는 서너 걸음을 후다닥 물러났다·
남궁중백이 차분하지만 강한 어조로 남궁소소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더냐?”
“무공의 이름을 알고 싶다면 잠시 제 검을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다고 함부로 검을 빌려주었다고?”
“고작 검 하나 빌려주는 일로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표사로 쓰려면 우리 쪽에서 먼저 신뢰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알겠다· 허나 검사에게 있어 검은 분신과도 같은 것· 다음에는 더욱 신중을 기하도록 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남궁유룡과 남궁중백이 서로를 바라보며 미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석불원도 다소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남궁소소를 바라보았다·
남궁소소의 말이 백번 맞다·
지금 이 자리에 어떤 인물이 있는데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고작 왜인무사 한 명에게 검을 빌려주는 일로 호들갑을 떨어서야 되겠나·
그건 천하십검의 수좌를 다투는 뇌검 남궁유룡에 대한 모독이며 나머지 사람들 또한 무시하는 처사였다·
벌떡 일어나 옆으로 쏟아져 나왔던 뒷줄의 고수들이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서너 걸음이나 물러난 성급함을 탓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사이 왜인무사는 남궁소소가 던져 준 검을 뽑아 바닥에다 유술(柔術)이라는 두 글자를 쓱쓱 써 갈겼다·
그리고는 검을 바닥에 꼭 찍으며 말했다·
“주우주츠!”
이어 밑에다가 다시 유생심안류(例生心眼流)라는 다섯 글자를 추가로 쓰더니 또 검으로 콕 찍고는 말했다·
“야규신간류!”
남궁소소가 무언가를 물었고 왜인무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왜인무사는 어쩐지 남궁소소와 대화하는 걸 즐기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사흘 전 뇌옥을 찾아갔을 때 그가 눈을 번쩍 뜬 것도 남궁소소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설마!’
구경하는 사람들은 구경하는 사람들대로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왜인무사가 펼친 이국적인 무공과 바닥에 쓴 글자들의 의미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건 솔직히 나도 궁금했다·
이윽고 대화를 끝낸 남궁소소가 통역했다·
“그가 주우주츠라고 부르는 ‘유술’은 병장기를 쓰지 않는 모든 무공의 총칭이래요· 타격보다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서 잡아 던지거나 관절을 꺾거나 조이는 초식들이 주를 이루고요· 그리고 야규신간류 그러니까 유생심안류라고 쓴 것은 자신이 익힌 유술의 유파라고 하네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했을 때 사람들은 그제야 왜인무사가 펼친 그 기묘한 수법의 초식들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매우 흥미를 보였다·
다들 다시 왜인무사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또 어떤 기묘한 동작과 초식을 펼쳐 나를 던지고 메다꽂을지 궁금한 것이다·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왜인무사가 검을 도로 홱 던져 주었다·
검은 남궁소소의 발끝에서 딱 한 뼘의 거리에 떨어져 꽂혀 낭창거렸다·
이어 나를 향해 돌아서서 아까와 같은 기수식을 취하고는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말했다·
“카캇테코이· 코조오!”
“덤벼라· 애송이! 라고 말하네요·”
여기저기서 피식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다시 박룡수의 기수식을 펼쳤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주먹을 말아쥐지 않았다·
대신 왜인무사처럼 손가락을 활짝 펼쳤다·
“이번엔 네가 와라!”
남궁소소가 그대로 통역을 했고 왜인무사가 ‘훗!’ 하고 웃더니 상체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상태에서 두 발을 빠르게 놀리며 다가왔다·
그 모습이 흡사 수면 위를 미끄러져 오는 것 같았다·
이어 지척에 이르자 돌연 보법을 바꾸어 나를 앞에다 두고 차륜전(車輪戰)을 펼치듯 옆으로 뱅뱅 돌았다·
‘이건 또 뭐야?’
그러다 갑자기 쌍수를 뻗으며 성난 멧돼지처럼 달려들었다·
그의 좌수는 내 오른손을 막듯이 틀어쥐고 우수는 왼쪽 어깨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왼쪽 발바닥으로 발목을 힘차게 걷어차 왔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
한편 나는 싸움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이능력을 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왜국에는 없는 것 같은 개념인 공력을 육성이나 끌어 올렸다·
공력을 담아낸 초식은 위력도 위력이지만 속도 면에서 감히 범인들이 따라올 수가 없다·
백 년 공력을 지닌 내가 육성을 담아내면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고서는 두 눈을 멀쩡히 뜨고도 보지 못한다·
나는 먼저 오른발로 그의 왼쪽 발등을 찍어 밟아 걷어차기를 뚝 멈추게 만들었다·
이어 내 어깰 잡은 그의 오른팔을 금나수의 수법으로 휘어감았다·
왼쪽 발과 오른쪽 팔을 동시에 옴짝달싹 못 하게 되면서 그는 그대로 나무토막이나 다름없었다·
그 상태에서 오른쪽 팔꿈치로 그의 턱주가리부터 사정없이 깠다·
뻑!
다음엔 올라간 팔꿈치를 그대로 끌어당기며 가슴골의 전중혈 찍고·
쩍!
감았던 오른팔을 풀어주면서 왼쪽 팔꿈치로 다시 한번 그의 턱을 올려 깠다·
뻑!
이어 가슴과 복부 이곳저곳을 쌍수로 대여섯 차례 난타한 다음·
뻑! 뻐버버버벅!
그의 멱살을 잡고 안쪽으로 파고드는 한편 질풍처럼 뒤돌아서며 어깨에 걸어 멨다·
다음엔 허릿심을 이용해 그를 올려 띄우고 공중으로 날아가려는 그를 끌어당겨다가 한 바퀴를 뱅글 돌린 다음 땅바닥에다가 거꾸로 메다꽂아 버렸다·
철퍼덕!
“커억!”
박룡수의 여러 초식에 이어 마지막에는 그에게 당했던 수법을 그대로 흉내 내 본 것이었다·
동작은 형편없었지만 그 위력은 그가 내게 펼친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먼지를 풀썩 날리며 패대기쳐진 그는 하늘을 향해 대(大) 자로 누운 상태에서 두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회까닥 까무러쳐 버렸다·
단순히 까무러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한참 숨이 가쁠 텐데도 불구하고 기도가 막혔는지 가슴이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
나는 쓰러진 그의 오른쪽 위팔 옷자락을 잡고는 반 바퀴를 돌려 힘을 축적한 다음 대여섯 장 밖에 있는 연못에다 냅다 던졌다·
이번엔 그에게 첫 번째로 당한 수법을 그대로 흉내 낸 것이었다·
그는 풍덩 소리와 함께 차가운 물 속에 그대로 빠져 버렸다·
연못은 물이 허리까지 차오를 정도로 그리 깊지는 않았다·
하지만 물을 뒤집어쓸 정도로는 충분히 깊었다·
“쿨럭! 쿨럭!”
뒤늦게 정신을 차린 왜인무사가 손발을 허우적대면서 일어났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그는 자신이 어떻게 연못 속에 들어와 있는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그러다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밖으로 나왔다·
이어 가슴을 부여잡고는 털썩 주저앉아 고통스러워했다·
전정혈을 팔꿈치로 맞았으니 지금쯤 가슴에 창이 꽂혀 있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낄 것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데굴데굴 구르며 죽겠다고 비명을 질러야 하는 상황·
한데도 그는 끝까지 앉아서 버티는 독기를 보여주었다·
‘지독한 놈·’
나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화들짝 놀란 그가 앉은 상태에서 뒤로 게걸음을 치며 뭐라고 소리쳤다·
남궁소소가 빠르게 통역했다·
“그만하자· 그만!”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다음 왼손으로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아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이어 오른손으로 가슴의 혈도 서너 군데를 타다닥 짚었다·
자신을 공격하는 줄 알고 잔뜩 긴장했던 왜인무사가 한순간 살짝 당황해했다·
잠시 후 고통이 씻은 듯 사라진 것을 확인한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점혈법이란 것이오·”
남궁소소가 그대로 통역을 했다·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자 왜인무사가 무언가를 말했다·
“왜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지 않았냐고 물어요·”
“당신은 나를 쓰러뜨리기 위해 싸웠는지 모르지만 난 당신에게서 왜국의 권법을 배우기 위해 싸웠소· 우리는 이걸 비무(比武)라고 하지·”
비무가 끝난 직후부터 나는 말투를 하대에서 평대로 바꾸었다·
왜국에도 그런 구별이 있는지 모르겠다만 남궁소소가 그대로 통역을 했다·
그러자 나를 바라보는 왜인무사의 표정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라졌다·
나는 아직도 주저앉아 있는 그에게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여전히 싫어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하지만 당신의 그 유술이라는 무공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소· 기회가 닿으면 꼭 배우고 싶을 만큼·”
남궁소소의 통역이 끝나자 그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그를 힘차게 끌어당겼고 그는 그대로 일어나 나와 마주하고 섰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나는 미나모토 히카루다·”
“이정룡이오·”
그가 또 무언가를 말했고 남궁소소가 통역했다·
“약속대로 한 달 동안 정룡 공자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다고 해요· 설사 그것이 무사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일이 끝나면 이천 냥을 꼭 달래요·”
돈은 내가 주는 게 아니지만 석불원은 분명히 약속을 지킬 것이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때까지 잡고 있던 미나모토의 손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을 때 크게 웅성거리는 쉰여 명의 고수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과는 십여 장 이상 떨어진 데다 작은 소리가 뒤죽박죽으로 섞였지만 백 년의 내공을 지닌 내게는 또렷이 들렸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더니·”
“표왕이 자식을 제대로 가르쳤군·”
“천룡표국의 박룡수가 저 정도였을 줄이야·”
“고작 스물세 살이고 보면 장차 중원을 떨어 울리는 권사로 성장할 가능성이 다분해 보입니다·”
“깊고 신중한 성품은 또 어떻고요· 다른 후기지수들이었다면 우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처음부터 공력을 과도하게 담아냈을 것인데 두 번이나 땅바닥에 패대기쳐지는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왜국의 권법을 견식하려 했다니·”
“후기지수다운 후기지수는 세옥이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군· 암 그래야지· 그게 무인의 진짜 기개이지·”
“게다가 부자라고 합니다· 저 녀석이 나이는 어려도 표사로서의 수완이 대단해 벌써 금전 십만 냥 정도로 추산되는 재산을 모았다고 하더군요·”
“항주의 해룡선방을 통해 범선도 다섯 척이나 건조 중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조운을 개척할 모양인 것 같습니다·”
“정말 마음에 쏙 드는 녀석입니다·”
“이 정도면 소소의····”
“커험!”
마지막 헛기침은 남궁유룡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자 웅성거리던 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석불원은 왜인무사를 표사로 고용할 수 있게 되어서 그런지 입가에 웃음을 감추지 못 했다·
나는 눈빛으로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래도 제가 쟁자숩니까?’
이제 금전 이천 냥짜리 전표를 받을 차례였다·
이러면 쟁자수로 고용된 내가 사천 냥을 벌고 표사로 고용된 왜인무사가 이천 냥을 벌게 되는 셈이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이 까맣게 모르는 이 자리에서는 오직 나와 남궁유룡과 남궁중백만 아는 비밀이 한 가지 있었다·
이번 싸움에서 나는 성명절기인 북해투왕의 귀영무와 십초박은 단 일초식도 펼치지 않았다·
그 무공의 예사롭지 않음을 알아볼 고수가 지금 이 자리에는 너무나 많았다·
자칫하다간 북해투왕의 흔적을 남길 수도 있었다·
이런 나의 의도를 아는 남궁유룡과 남궁중백은 눈이 마주치자 더할나위 없이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도 간단한 묵례로 마주 인사를 올렸다·
한편 남궁소소는 하얀 치아까지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전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잘했어요·]
[잇몸 보이오·]
[그쪽은 코에서 피나요·]
깜짝 놀란 나는 얼른 손등으로 코밑을 훔쳤다·
그러자 정말로 시뻘건 피가 한 줄로 쭉 그어진 채 묻어 나왔다·
‘이런 왜구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