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 황금을 칼처럼 휘두르다(2) >
보유금은 각각의 당과 각이 가지고 있는 운영자금을 말한다·
이 돈으로 표사와 쟁자수들 월급도 주고 표행 중 누가 죽거나 불구가 되면 충분한 위로금도 지급한다·
표마차를 교체하거나 인원을 증원할 때도 쓰고 표물을 잃어버려 배상을 해야할 때도 쓴다·
한마디로 보유금이 많은 당과 각은 그 만큼 큰 건을 맡거나 덩치를 불릴 수가 있다·
그나마 다른 당과 각은 반드시 표왕부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비룡당은 독립적인 운영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해도 상관이 없었다·
이갑룡과 을룡은 사람들 틈에서 흙빛이 된 얼굴로 쏟아진 보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무사 귀환을 보고하는 의미로 가볍게 묵례를 올렸다·
이갑룡은 억지로나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꼭 다문 입술 속에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이을룡은 그나마 인사도 받아주지 않았다·
풍이라도 맞았는지 윗입술과 눈까풀을 파르르 떨더니 홱 돌아서 가 버렸다·
뒤이어 이갑룡도 수하들을 이끌고 떠났다·
손지백은 언제 다가왔는지 부서진 수레 앞에 쭈그리고 앉아 황금 술잔을 하나 집어 들고는 이리저리 살펴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누구도 뭐라고 하질 못했다·
왕대표와 중표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그냥 내버려 두라는 뜻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황자충은 사실 피곤해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이종산을 보고서 도저히 그냥 처소로 가서 쉴 수가 없었다·
커다란 대리석 탁자를 가운데 두고 이종산의 왼쪽에는 곽석산과 좀 전에 막 도착한 손지백도 함께 자리했다·
시비들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지시한 후 이종산이 ‘험험’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곽석산이 냉큼 물어왔다·
“아까 그 많은 포댓자루에 든 게 전부 금과 은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동은 전혀 없고요?”
“예?”
“놋그릇도 많이 쓰이잖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전부 확인하신 겁니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누구에게서요?”
“호리독사를 아십니까?”
“공령신투의 제자가 아닙니까? 지금 비룡당에서 객원표사로 머물고 있고요·”
“오는 동안 그 친구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들었습니다· 다행히 술만 주면 무엇이든 조잘조잘 풀어 놓더군요· 나중엔 일부러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깜빡 잊고 어제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다면서요·”
“그래서요?”
“그 친구의 말이 마총은 음양쌍교의 것이었고 훗날 교의 재건을 위해 쓰라고 남겨둔 금과 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교주의 무공비급을 담은 정확하게는 그렇게 짐작되는 목함도 있었고요·”
이후로도 황자충은 호리독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중간중간 곽석산과 손지백이 번갈아 질문을 했고 이종산은 가만히 귀 기울여 듣기만 했다·
그러나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흥분한 사람은 이종산이라는 걸·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들은 직급이 어찌 되었든 그저 월급을 받는 처지에 불과하지만 이종산은 이정룡이 가져온 보물 절반의 주인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가 굳이 밖에서 보물에 관해 묻지 않은 이유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당주들 특히 이갑룡과 을룡과 병룡을 배려해서였다·
“지하동굴에서 의뢰를 받았다고요?”
“그랬다더라고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인사를 봤나· 큭큭큭·”
“나를 움직이려면 협박을 하지 말고 의뢰를 하라고 소리쳤을 때 이천오백에 달하는 흑도와 사파인들의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더군요· 껄껄껄·”
“그래서 또 어떻게 되었답니까?”
절벽 아래에서 또 한 번의 위기가 있었고 거기서 모두 꺼내 주는 조건으로 다시 보물의 절반을 표비로 받았다는 대목에선 이야기를 들려주던 황자충은 물론 이거니와 곽석산과 손지백까지 배꼽을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웃지 않은 사람은 이종산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건 체면 때문에 사력을 다해 참는 것일 뿐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할 때마다 술잔을 가져가 입을 가린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언젠가 사고를 한번 크게 칠 줄은 알았지만 마총의 보물을 탈탈 털어 올 줄이야· 그것도 삼개 세력의 삼천여 명을 따돌리고 말이지· 껄껄껄·”
“엄밀히 말하면 털어 온 건 아니지요· 정당하게 표행을 해주고 대가로 받은 것이니까 말입니다· 단지 흑도와 사파인들의 뒤통수를 치는 것으로 표행을 시작했을 뿐· 하하하·”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 손지백과 곽석산이 한 말이었다·
술 한 잔 하자며 사람을 초대해 놓고 여태 대화를 듣기만 하던 이종산이 그제야 한 마디 물었다·
“그러니까 문제가 없는 물건이다라는 말씀이군요·”
“가불염을 불러다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고지식 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의 대답도 똑같았습니다· 마교의 물건이라는 것을 문제 삼으면 모를까 그 취득 과정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말입니다· 심지어 마지막에 헤어질 땐 음양쌍교의 교도들에게 개평을····”
“···?”
“죄송합니다· 호리독사로부터 들은 말을 그대로 옮기려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만 교양 없이· 하여간 보물의 주인이랄 수 있는 음양쌍교의 교도들과도 웃으며 헤어졌다고 합니다·”
이종산이 손지백에게 물었다·
“보물은 보셨습니까?”
“그걸 보느라고 늦게 왔지요·”
“어떠셨습니까?”
“직접 보시겠습니까?”
“가져오셨습니까?”
“어찌나 까다롭게 구는지 암기를 던져 수레를 부순 다음 보물이 쏟아지는 틈을 타 하나 슬쩍 빌려 왔습니다· 정확히 감정하려면 아무래도 자세히 보아야 하니까요·”
손지백이 소맷자락 속에서 황금으로 만든 술잔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척 올려놓았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에 용을 새겨 넣은 황금잔은 수백 년의 세월 때문인지 광택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무려 오백 년 전에 만든 물건입니다· 세공의 수준과 조형미가 탁월하거니와 금의 순도 또한 매우 높습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극상품의 보물입니다·”
“양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확실한 건 모두 꺼내 보아야 알겠지요· 금으로 만든 것과 은으로 만든 것들의 비율도 따져 보아야 하고요· 반반이라고 놓고 구태여 예측을 해보자면····”
“···?”
“···?”
“···?”
“절반을 표왕부에 상납하고도 비룡당의 보유자금은 다른 여섯 개 당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다섯 배는 많을 것입니다·”
“그 정도입니까?”
“이것도 최대한 보수적으로 잡은 것입니다·”
많다는 건 알았으나 이 정도까지 일 줄 몰랐던 이종산 곽석산 황자충은 입이 쩍 벌어져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나는 소수의 인원만 데리고 포댓자루에서 꺼낸 보물들을 분류하는 중이었다·
배석자는 장궤 전립성 표두 가불염 상자수 용소백 비룡왕삼이 전부였다·
비룡왕삼이 금과 은으로 분류하면 용소백과 가불염이 일일이 저울에 무게를 달아 꼬리표를 붙였다·
그러면 전립성이 하나씩 정밀한 감정을 통해 보물의 명칭과 무게를 장부에 적어 넣었다·
정오 무렵부터 시작한 작업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끝이 났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 전립성이 말했다·
“이제 표왕부에 상납할 절반을 추려야 합니다·”
“물론이지요·”
“어떻게 나눌까요?”
“어떻게 나누다뇨?”
“금과 은의 무게를 따져 현 시세에 따라 정확하게 나누는 방법이 있고 보물들이 가진 실제 가치를 따져 나누는 방법이 있습니다·”
“실제 가치라뇨?”
“이건 단순히 금식기 은식기가 아닙니다· 짧게는 이백 년에서 길게는 오백 년 전 음양쌍교에서 사용하던 유물들이지요·”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말씀은 알겠습니다만 그게 따로 계산을 해보아야 할 만큼 차이가 있겠습니까?”
전립성은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는 황금잔 열한 개를 한 줄에 쭉 세워 놓고 말했다·
“오백 년 전부터 음양쌍교의 교주들이 대대로 사용하던 술잔입니다· 단순히 금의 무게로 따지면 팔십 냥에 불과합니다만 임자를 만나면 그 다섯 배인 사백 냥은 받을 수 있습니다·”
“예에?”
“그나마 한 개가 어디론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열두 개 전부 온전한 상태였다면 팔백 냥까지도 가능했을 겁니다·”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서 돈벼락 떨어지는 소리란 말인가·
나도 용소백도 가불염도 비룡왕삼도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기 있는 은대야는 사백 년 된 수관자(水滿子)라는 것으로 교주들이 손을 씻던 것이고 이쪽에 보이는 기이한 모양의 황금수저 한 쌍은 짐작건대 삼백 년 전 화북 출신인 칠대 교주가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들 전부 단순한 금과 은의 무게 보다 열 배 이상의 가치를 지닙니다·”
좌중의 공기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고요해졌다·
모두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침만 꼴딱꼴딱 삼켰다·
한참 만에야 내가 물었다·
“그 돈을 주고 사려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이미 세 곳의 전장에서 대행수들이 제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음양쌍교의 보물이 도착하면 가장 먼저 자신들에게 좀 보여 줄 수 있겠느냐고요·”
“그들이 어떻게 알고요?”
“강호에 보물이 등장하면 그들이 가장 먼저 알아챕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던 마총의 장보도를 만금전장이 먼저 손에 넣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지요·”
이래서 모든 분야에는 전문가가 있는 것이다·
전립성이 없었으면 그냥 골동품 값으로 조금 더 받고 팔아 치울 뻔하지 않았나·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다시 물었다·
“여기 있는 보물들은 전부 그런 가치를 지닙니까?”
“황금 식기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주로 제례에 쓰였던 것들입니다· 법구들도 그렇고요· 이런 것들은 많아야 두 배 이상을 받기 어렵습니다· 반면 교주들의 손때가 묻은 것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가진 거라곤 돈밖에 없는 늙은 수집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겁니다· 고관대작들에게 뇌물을 바치려는 대상들도 줄을 설테고요·”
“금과 은의 무게를 따져 정확히 반으로 나누되 한쪽에는 실제의 가치가 비교적 적은 것들로만 다른 한쪽에는 반대로 높은 것들로만 구성한다면 그 차이가 대략 어느 정도 될까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전립성은 지금까지 기록한 장부들을 놓고 주판을 한참이나 튕기더니 말했다·
“대략 삼 대 칠 정도 되겠군요· 쉽게 말해 실제로는 한쪽이 두 배 조금 넘게 가져가도록 만들 수 있···· 아무튼 그렇습니다·”
정리를 좀 해보자·
그러니까 내가 가져온 보물이 본래 금과 은이 지닌 무게보다 훨씬 높은 가치가 있고 그 덕분에 머리를 조금만 굴리면 표왕부에 절반을 상납하면서도 실제로는 모두를 팔아 치운 것보다 두세 배 이상의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에 이런 횡재수라니·
“장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글쎄요·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이어서 말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무게를 재어 나눈 것을 상납한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다고 봅니다· 여타의 물건들과 달리 금과 은은 그 자체로 이미 화폐의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지요·”
용소백이 물었다·
“철전 닷 냥으로 열 냥짜리 국수를 사 먹으면서 송나라 때 돈이니 만두와 돼지고기도 몇 접시 더 달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참고로 비룡당은 품목을 공개할 의무가 없거니와 표왕부로부터 따로 감사를 받지도 않습니다·”
마지막 말은 가불염이 한 것이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말에 나와 전립성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불염이 겸연쩍은 듯 말했다·
“혹시나 잊어버리셨을까 봐서요·”
거액이 눈앞에 있으니 다들 머리가 아주 팽팽 돌아간다·
나는 가만히 비룡왕삼을 돌아보았다·
세 사람은 꼭 다문 입술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전립성에게 말했다·
“이번 표행에 참석한 비룡당의 표사들 전원에게 금전 열 냥씩을 포상금으로 내리십시오· 특히 큰 공을 세운 독고완과 탁중로에게는 열다섯 냥씩을 하사하십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비록 함께하지는 못했으나 항주에서 마음 졸이며 기다렸을 쟁자수들과 삼각의 표사들에게도 은전 열 냥씩을 하사하십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여섯 분께는 저 물건들을 처분하는 즉시 특별 포상금으로 금전 스무 냥씩을 하사하겠습니다·”
“추웅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