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황금을 칼처럼 휘두르다(1) >
대마장(大馬場)은 천룡표국의 정문을 열고 들어서면 만나는 광장으로 무림문파로 치면 대연무장쯤 된다·
표행을 떠나고 돌아오는 모든 표마차들이 이곳에서 집결하기 때문에 이름도 대마장이었다·
지부대인 왕인탁이 두 번이나 찾아와 향시와 회시의 장원급제 소식을 알렸고 비룡당의 표사와 쟁자수들을 증원하기 위해 이천여 명을 모아놓고 시험을 치렀던 장소도 바로 이곳이었다·
대마장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온 천룡표국의 모든 표사와 쟁자수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늘따라 표행을 나간 사람들이 적은 지 어림잡아도 일천 명은 될 것 같았다·
이병룡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천둥 같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와아아!”
이병룡은 처음엔 얼떨떨해하다가 점차 상기된 표정으로 사람들을 향해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환호성 사이로 모깃소리 같은 음성들이 무질서하게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은 까맣게 모르겠지만 나는 백 년 공력 덕분에 어느 정도 들을 수가 있었다·
“저런 답답한 인사를 봤나·”
“고개를 숙여도 모자랄 판에 손을 흔들다니·”
“누가 보면 개선 장군이라도 돌아온 줄 알겠군·”
이종산이 탁월한 혜안을 지니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이런 것인가 보다·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여론을 듣는 것 말이다·
그때 내 머릿속으로 황자충의 전음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건 묵룡당주의 무사 귀환을 기뻐해서가 아닐세· 자네가 마교를 상대로 싸워서 삼공자를 구출해 온 것이 자랑스럽기 때문이지·]
[뭘 그렇게까지나요·]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닐세· 이는 천룡표국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이고 나아가 표사와 쟁자수들로 하여금 더욱 자긍심을 가지도록 하는 일이라네· 마치 무당파나 화산파의 제자들이 가지는 자긍심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예에?]
[어딜 가서도 천룡표국의 표사라고 하면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는 그런 기분을 처음부터 표왕의 아들로 태어난 자네들은 알 리가 없지· 후후·]
왜 모르겠나·
전생에서 무려 삼십 년을 천룡표국의 쟁자수로 살았다·
길에서 만난 타 표국의 쟁자수들이 ‘천룡표국의 쟁자수들은 다른 표국들의 쟁자수들보다 월급을 열 냥씩은 더 받는다면서요?’라고 물어 올 때의 그 우쭐한 기분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번에 고생한 비룡당의 표사들에게 포상금으로 금전 열 냥씩 쫙 뿌려야겠다· 열 냥은 너무 많나? 다섯 냥씩만 할까?’
대마장을 중간쯤 가로질러 갔을 때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얼른 말에서 내려야 했다·
이종산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청화부인이 오른쪽에는 대장궤 손지백과 총표두 곽석산 외 당주들 모두가 마중을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갑룡과 을룡도 그들 중에 있었다·
“묵룡당주!”
청화부인이 달려 나오더니 이병룡을 와락 껴안았다·
이병룡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부기도 죄다 빠지고 옷도 비단무복으로 갈아입은 상태라 납치되었다가 풀려 난 직후의 궁색함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다친 곳은 없느냐?”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모두 부처님께서 돌보아 주신 덕이다· 이 어미는 너를 영영 못 보게 되는 줄 알고 밤마다 가슴을 졸였느니라·”
“죄송합니다· 어머니·”
“나보다는 아버지와 형님들께 용서를 구하거라· 네가 실종되고 난 후 형님들이 표사들을 잔뜩 이끌고 합비까지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왔느니라·”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청화부인의 말에서 이갑룡과 을룡을 살짝 멕이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차후에 있을 이갑룡과 을룡의 공세를 사전에 물타기 하려는 듯·
마치 너희도 그리 썩 도움이 되는 인간들은 아니라는 식으로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갑룡과 을룡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사이 이병룡이 이종산에게 정중히 포권지례를 올렸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네 잘못을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잘 못 했느냐?”
“천룡각의 허락 없이 함부로 암표를 받아 표행을 떠났습니다· 그 바람에 여러 사람에게 걱정을 끼친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마터면 천룡표국에도 큰 손해를 안길 뻔했습니다·”
“실종된 너를 찾기 위해 삼백오십 명의 표사들이 동원되었다· 덕분에 강룡당과 복룡당은 보름을 황룡당은 무려 한 달 동안 새로운 의뢰를 거의 받지 못했느니라· 이런데도 손해를 안길 뻔했다고 말할 참이더냐?”
“죄송합니다·”
“너의 그릇된 판단으로 함께 암표행을 떠났던 일급 표사 열 명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한 건 아느냐? 아무 잘못도 없이 봉변을 치른 조영영과 수향문에는 어떻게 보상을 할 것이더냐?”
“여보 모두 무사히 돌아왔으니 이제 그만 노여움을 푸셔요· 묵룡당주라고 어디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요· 수향문에는 제가 적당한 선물을 마련해 따로 찾아뵙고····”
“부인께서 나설 자리가 아니오!”
이종산의 싸늘한 한 마디에 청화부인이 움찔 놀라서 물러났다·
지금은 아버지가 아들을 나무라는 게 아니다·
천룡표국의 국주가 무책임한 당주를 질책하고 있었다·
이종산이 다시 이병룡에게 말했다·
“감당할 수 없는 자리라면 내려놓는 게 당연한 법· 그만 묵룡당주직에서 내려오너라·”
“여보!”
“아버지!”
“여기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이종산의 한 마디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이렇게까지 큰 벌을 내릴 줄 몰랐던 사람들은 다들 표정이 굳었다·
청화부인은 사색이 되어 말했다·
“여보· 이건 너무 지나친 처분입니다· 세상에 모든 표행을 성공시키는 표사가 어디에 있으며 한 번이라도 표국에 손해를 끼치지 않는 표사가 또 어디에 있답니까? 부디 재고를····”
“가 호위!”
“하명 하십시오·”
“부인을 청화각으로 모시게·”
“존명!”
표왕부의 호위장 가뢰압이 무서운 눈으로 청화각의 시비들을 노려보았다·
청화부인은 자신을 붙드는 시비들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가겠다!”
그녀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했지만 가까스로 삼켰다·
결국 후계자는 이종산이 정하는 것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의 체면을 깎아 보아야 결코 이병룡에게도 좋을 리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청화부인이 사라지자 이종산은 묵룡당의 표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묵룡당의 다음 서열이 누구인가?”
건장한 체구의 장년인이 얼른 튀어나와 이종산의 앞에 섰다·
팔에 부목을 대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함께 암표를 떠났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 풀려 난 일급 표사 같았다·
“표두 간소립입니다·”
“직위는?”
“일각주입니다·”
“천룡표국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나?”
“올해로 꼭 이십 년째입니다·”
“총표두·”
이번엔 곽석산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며 허리를 숙였다·
“하명하십시오·”
“오늘부터 표두 간소립을 대표두로 승진시키고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묵룡당을 맡기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모든 표국에는 직책과 직위가 있다·
직책은 하는 일의 성격이나 책임에 따른 분류이고 직위는 순수한 서열을 말한다·
표사 일급표사 표두 일급표두는 모두 직책이다·
반면 각주와 당주는 직위다
대표두는 당(黨) 내에서 오직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직책으로 다른 표두들을 모두 호령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따로 대표두를 임명하지 않은 당은 당주가 곧 대표두인 셈이었다·
이병룡이 징계받은 틈을 타 졸지에 대표두가 된 간소립은 대놓고 좋아하지도 못하고 연신 허리만 숙여댔다·
이종산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이병룡에게 말했다·
“할 말이 있느냐?”
“없습니다·”
“처소로 돌아가 근신하도록 하거라·”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이병룡은 꾸뻑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이종산의 시퍼런 서슬에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이 이어지길 잠시 이종산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내게 보고도 않고 작전을 펼쳤다지?”
이종산은 상벌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터라 다섯 개의 수레에 억만금이 실려있음을 알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잘못에 대한 확실하고도 정확한 처벌이 조직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잘 아는 것이다·
그간의 관례를 깨고 천룡표국의 모든 표사와 쟁자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병룡을 당주직에서 끌어내린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제는 내 차례다·
한 달 전 나는 항주 홍등가에서 벽안귀와 이병룡의 죽마고우들로부터 정보를 입수 곧장 만금산장으로 향했다·
이어 남궁소소에게 부탁해 비룡당의 표사들 전원으로 하여금 뒤를 추적케 했으면서 이종산에게는 어떤 보고도 하지 않았다·
이건 확실히 경솔한 측면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일에는 순서가 있음을 몰랐더냐?”
“알고 있었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그랬느냐?”
“첫 번째는 한시가 급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모든 게 추측에 불과했던 터라 혹여라도 혼선을 줄까 봐 함부로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내게 보고해야 할 의무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고?”
비룡당은 다른 당들과 달리 완벽하게 독립성을 보장받았다·
그 때문에 얼마든지 독자적인 작전이 가능했다·
“그것 때문에 보고를 드리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자식을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은 보이지 않더냐?”
“그래서 목숨 걸고 병룡 형님을 구하러····”
“네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명심하거라· 네가 비록 비룡당의 모든 인사권과 작전권을 가졌다지만 내게는 아직 당주를 갈아치울 권한이 있음을·”
뒤통수가 얼얼했다·
비룡당을 빼앗길까 봐 그런 게 아니다·
이종산이 이병룡을 걱정할 것만 생각했지 나 때문에 가슴을 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이 양반이 좀 전엔 여기 어디에 네 아버지가 있느냐고 호통을 치시더니만 지금은 또 낯간지럽게시리 부자간의 도리를 들이 미시네·
나로서는 딱히 나쁠 게 없지만서도·
“소자가 잘 못 했습니다·”
이종산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이나 뚫어지게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이내 가슴 속에서부터 길어 올린 것이 분명한 한 마디를 툭 꺼내 놓았다·
“잘했다·”
“예?”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거라· 집 안에서는 서로 으르렁거릴지라도 바깥에서 한 명이 피를 흘리고 있다면 이번 일처럼 앞뒤 재지 말고 달려가 같은 편이 되어 싸워야 한다· 그게 형제니라·”
“명심하겠습니다·”
이종산은 이어 이갑룡과 을룡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도 마찬가지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종산은 마지막으로 황자충에게 말했다·
“이 몸의 못난 자식들 때문에 당주께서 고생이 많으셨소이다·”
“애석하게도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남만까지 달려 갔다가 비룡당주와 묵룡당주를 호위해 돌아왔을 뿐이지요· 껄껄·”
“피곤하지 않으시다면 표왕부로 가서 나와 술이나 한잔 하시겠소이까?”
“마침 술 생각이 간절하던 참이었습니다·”
이종산은 황자충과 함께 홀연히 가버렸다·
곽석산과 표왕부의 호위무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다섯 대의 수레에 잔뜩 싣고 온 보물은 한번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까지 남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장궤 손지백이 쓰윽 다가와서는 물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신가?”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일랑 집어치우고 마교놈들이 숨겨 두었다는 보물이나 좀 구경시켜 주시게· 듣자 하니 이게 다 금과 은이라지?”
“지금 여기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
“사람들이 너무 많잖습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일세· 이 많은 사람이 설마 자네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고 식전 댓바람부터 이렇게 나와 기다렸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쓰윽 돌아보니 과연 천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 전부가 마른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긴장된 표정으로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런가 하면 손지백의 뒤쪽에는 아직 떠나지 않은 이갑룡과 을룡도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실로 복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니 왜?”
“비록 표행의 대가로 받은 것이긴 하나 한때는 일교(一敎)의 교도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인데 한낱 눈요깃거리로 전락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어디로 갖고 가려고?”
“그야 당연히 비룡당으로 갖고 가야죠·”
“천룡각에서 보관해 줄 수도 있네만·”
“사양하겠습니다·”
“절반을 표왕부에 바쳐야 하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분류는 어떻게 하려고?”
“이제부터 생각을 해봐야죠·”
“내가 좀 도와줄거나?”
“그것도 사양하겠습니다·”
“감정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닐세·”
“비룡당에도 솜씨 좋은 장궤가 있습니다·”
진작부터 대기하고 있던 전립성이 가장 앞줄에 있던 수레의 포댓자루를 보란 듯이 손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손지백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대화를 끝낸 나는 가불염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불염이 다시 출발 명령을 내렸고 다섯 대의 수레가 비룡당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대여섯 장 정도 갔을 때였다·
우지끈!
무언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에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다섯 번째 수레의 바퀴축이 부러진 모양이었다·
그 바람에 한쪽이 주저앉으면서 포댓자루들이 모조리 떨어져 있었다·
그중 몇 개가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닿은 것처럼 쭉 찢어져서는 금과 은으로 만든 식기며 법구 등을 와르르 쏟아낸 상태였다·
순간 수백만 마리의 벌떼가 웅웅거리는 듯한 소리가 대마장 가득히 피어올랐다·
깜짝 놀란 비룡당의 표사들이 얼른 달라붙어 금식기 은식기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세상에 진짜잖아!”
“나머지 포대에도 전부 저런 것들이 들었다고?”
“돈으로 환산하면 저게 다 얼마야 도대체!”
“금전 만 냥? 십만 냥? 아니면 백만 냥?”
“휴우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군·”
“이렇게 되면 올해 매출은 비룡당이 일등인가?”
“지금 올해 매출이 중요한 게 아니야· 비룡당의 보유금이 나머지 다섯 개 당을 압도하게 될 거란 말이지·”
“이거 이러다가 후계 구도의 판이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