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 다시는 표사들을 무시하지 마라(5) >
당연한 말이지만 앞쪽에서 길을 막고 선 자들은 일종의 선발대고 뒤쪽에서 나타난 자들이 본대였다·
잠시 후 본대의 적 진영이 쩍 갈라지더니 건장한 사내들이 사인교를 메고 나타났다·
귀한 흑단으로 만든 사인교 위에는 백발에 쭈글쭈글한 노인이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아 있었다·
‘뇌천자!’
틀림없다·
지난날 무림맹의 죽간본을 무당파로 옮기던 중 천중산 칠량 협곡에서 맞닥뜨렸던 천마성교의 마지막 군사 삼뇌 뇌천자가 분명했다·
그때 그가 끌고 왔던 천마성교의 잔당들 혹은 추종세력 삼백여 명은 무림맹주인 설산신검 장초풍이 이끌고 온 오백의 타격대에 의해 사실상 궤멸적 타격을 입고 사로잡히거나 도주했다·
한데 아직도 저렇게 많은 잔존 세력이 있을 줄이야·
게다가 칠량 협곡에서 만났던 잔당들은 어딘지 모르게 여기저기서 끌어다 모은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타난 자들은 오랜 시간 훈련한 정병들 같았다·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던 나는 뒤늦게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앞줄의 수뇌부로 보이는 자들 중 곰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체구에 등에는 두 자루 판부를 가로질러 멘 장년이 있었다·
‘흑산적웅!’
칠량 협곡에서 삼뇌가 나타나기 전 먼저 모습을 드러내고 무림맹 군사 사마옥과 잠시 설전을 벌였던 고수였다·
한데 주변엔 흑산적웅과 비슷한 수준의 기도를 뿜어내는 자들이 무려 다섯 명이나 더 있었다·
아무래도 지난날 칠량 협곡에서 만난 것과 같은 규모의 세력 다섯 개가 합쳐진 것 같았다·
그때와 달리 하나같이 군기가 바짝 들어 보이는 것은 정예의 고수들만 골라서 왔기 때문이고·
전생에서도 마교 부흥을 위한 잔당과 추종세력들의 시도는 꾸준히 있어왔다·
내가 죽을 무렵에는 그 세가 최고조에 달해 수백 명이 죽는 큰 싸움도 여러 차례 일어났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무렵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지금처럼 남만에서의 일들은·
삼뇌가 연소교를 향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백골시마(白骨屍魔)의 제자더냐?”
“선배님을 뵙습니다·”
“선배라 감히 허락할 수 없는 호칭이구나· 앞으로는 군사부주님이라 부르거라·”
“저희는 천마성교의 교도가 아닙니다만·”
“매화 나무에 열리는 것은 결국 매실일 수밖에 없는 법· 네가 누구인지는 처음부터 이미 정해진 것이다· 이제 그만 운명을 받아들이거라·”
“진작에 가지를 꺾어 다른 곳에 옮겼습니다·”
“옮겨 심었다고 매화 나무에 살구가 열린 다더냐?”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요·”
“시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네 사부가 배교(背敎)의 대가가 무엇인지는 가르쳐 주진 않은 모양이지?”
“십만대산의 매화나무는 수십 년 전에 이미 태풍과 벼락을 맞고 쓰러져 생명이 다한 줄 압니다· 고목의 그루터기에서 잠시 새순이 날 수는 있으나 가지가 되어 다시 기둥감으로 자랄 수는 없는 법· 선배님이야 말로 이제 그만 헛된 욕망을 버리고 초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떨는지요”
천하의 뇌천자를 상대로 훈수질을 하다니·
아니나 다를까· 흑산적웅이 발끈하고 나섰다·
“저런 무엄한!”
“물러서라!”
“복명!”
삼뇌의 짧은 일갈에 흑산적웅이 움찔 놀라서 물러났다·
삼뇌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깊어졌다·
잠시 쥐죽은 듯한 침묵이 이어지는 틈을 타 이병룡에게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백골시마가 누굽니까?]
[나도 모르지·]
[그런 것도 모릅니까?]
[그러는 넌 알아?]
[전 당연히 모르죠·]
[그게 무슨 무논리야!]
[조 소저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이미 물어봤다·]
[그녀도 모른답니까?]
[아는 게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욕을 먹었겠냐?]
그래도 소득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대화로 미루어 연소교나 그녀의 사부는 과거 천마성교의 교도였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탈교를 했고 지금은 자신들만의 길을 가려 하고 있었다·
‘마교가 다시 분파한 건가?’
그때 뇌천자가 갑자기 시선을 내게로 옮겼다·
“네가 풍운비룡이더냐?”
순간 연소교 일당은 물론 이병룡과 조영영까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이병룡과 조영영은 저 노인을 처음보니 그렇다고 쳐도 연소교 일당이 나와 삼뇌의 관계를 모른다는 건 좀 의외였다·
무림맹의 죽간본을 운송할 당시 기문진에 갇힌 무림맹의 무사 수십 명을 내가 구해준 건 이미 강호에 소문이 자자한 일····
‘이런 미친!’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단 대화부터 해봐야 한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포권지례를 올렸다·
“무림 말학 이정룡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우린 구면이지?”
“칠량 협곡에서 한번 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땐 많은 후기지수들 중 한 명에 불과했던지라 미처 인사를 드릴 틈이 없었습니다·”
“그 많은 후기지수들 중 한 명에 불과했던 표사가 쉰 명의 고수들을 이끌고 구곡미혼진을 뚫었다지?”
천만다행이다·
내가 낱가지로 존재하던 죽간본의 순서를 모두 꿰맞추었다는 건 까맣게 모르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자신들이 목숨 걸고 찾던 죽간본의 순서를 맞춘 것으로도 모자라 그 공능까지 흡수했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표정은 모르겠으나 나를 잡아다가 죽을 때까지 고문하면서 복각본을 만들라고 할 것이다·
다 만들면 만드는 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것이고·
“운이 좋았습니다·”
“구곡미혼진은 운으로 뚫고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내가 다시 여기다 새로운 진(陣)을 펼칠 터이니 다시 한번 실력을 발휘해 보겠느냐?”
“잠깐만요! 무언가 크게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저희는 이 자들과 한패가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인질로 사로잡혀 끌려가는 중이지요· 장보도도 진작에 빼앗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양손에 묶여 있는 수갑과 쇠사슬을 철거렁 철거렁 흔들어 보였다·
이병룡과 조영영도 얼른 나를 따라 했다·
“여기까지 길 안내를 하느라 수고했다· 남은 길은 우리가 알아서 찾아갈 것이니라· 그러려면 먼저 너희를 잡아 장보도 부터 회수해야겠지·”
“저희 세 사람은 무조건 항복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삼뇌와 삼백의 마교도들이 있는 쪽으로 미친 듯이 말을 달렸다·
이병룡과 조영영도 얼떨결에 나를 따라왔다·
그러자 ‘척척척’ 소리와 함께 수십 명이 화살을 시위에 재고 겨누었다·
나와 이병룡과 조영영은 절반쯤 달려가다가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땡그렁~!
뒤쪽으로부터 익숙한 소리가 울렸다·
황급히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요사스러운 복장을 한 열두 명의 술법사들이 어린 아이 머리통만 한 요령을 신나게 흔들어댔다·
일전에 칠량 협곡에서 구곡미혼진을 펼쳤을 때보다 요령도 크고 술법사도 세 명이나 더 많았다·
땡그렁~!
땡그렁~!
땡그렁~!
구곡미혼진의 무서움을 온몸으로 겪은 나는 몸서리가 쳤다·
더구나 지금은 용린신갑도 입고 있지 않아 더욱 불안했다·
내공을 끌어 올려 근육을 강철처럼 딴딴하게 만드는 호신강기와 어떤 보검으로도 뚫을 수 없는 진짜 강철은 천지차이니까·
“미치겠네·”
“강마진(降魔陣)을 펼쳐서 돌파한다!”
연소교의 짧은 일갈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의 아홉 수하가 술법사들을 향해 말을 달렸다·
고작 아홉 명이 말을 타고 달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기세가 무슨 산이 밀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웬걸·
뻐엉!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거대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아홉 명을 집어 삼켜버렸다·
동시에 연기 속에서는 천둥번개가 꽝꽝 쳐댔다·
석 달 전 칠량 협곡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다만 그때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했다·
또한 연기 덩어리가 한 곳에 멈춰있지 않고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며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제기랄!”
갑자기 뒤쪽으로부터 깡깡 쇳소리가 울렸다·
황급히 돌아보니 언제 신형을 쏘았는지 연소교가 적 진영에서 홀로 악전고투를 펼치고 있었다·
“저긴 언제!”
“저길 대체 왜!”
“수하들에게 시간을 벌어주려고 그런 거예요!”
나와 이병룡과 조영영이 차례로 목구멍을 쥐어짰다·
조영영의 말처럼 수하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기 위해 자신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을 한 것 같았다·
한데 턱없이 무모한 작전도 아니었다·
기문진에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그녀의 주변엔 무려 십수 명이나 되는 마교도들이 쓰러져 나뒹굴고 있었다·
암기를 쏘아 적들을 마비를 시킨 모양이었다·
암기술과 점혈 공부도 대단했지만 도법은 더욱 예사롭지 않았다·
가느다란 칼 한 자루를 뽑아 들고 홀로 적진을 종횡무진 하는데 그 속도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이능력을 펼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칼의 궤적을 제대로 쫓기가 어려웠다·
내가 이럴진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나·
아마도 벌새가 날갯짓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삼백 명이 둘러싸고도 감히 그녀 하나를 어쩌지를 못했다·
“무슨 도법이···!”
“저게 인간의 속도라니····”
조영영과 이병룡이 또 목구멍을 쥐어짰다·
잠깐 사이에 일곱 명이 그녀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
가만 보니 그녀는 단순히 적진을 헤집어 놓고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적들과 싸우면서 조금씩 삼뇌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인질로 잡을 생각이야!’
하지만 적진영에도 사람은 있었다·
그녀의 주변이 점점 더 강한 고수들로 채워지더니 칼이 둔해지고 걸음도 느려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칼 부딪히는 소리가 뚝 그쳤다·
그녀의 가늘고 하얀 목에 사방에서 뻗어온 칼 수십 자루가 꽃받침처럼 달라붙은 것이다·
“허억···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와 함께 그녀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땀으로 젖은 얼굴에선 잠깐의 격전에 얼마나 많은 진기과 공력을 쏟아부었는지 알 수 있었다·
빠른 속도만큼 공력은 두 배로 소모되는 모양이었다·
쨍그렁!
그녀가 결국 칼을 버렸다·
“장보도는 제 머릿속에 있어요· 순순히 내어드릴 테니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이제 그만 진 속의 수하들을 전부 풀어 주세요·”
삼뇌가 한 손을 들었다·
누군가 삼뇌의 명령을 전달하듯 호각을 길게 불었다·
그러자 요령 소리가 뚝 그치면서 천둥벼락을 품은 거대한 연기 덩어리가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나타난 광경은 놀라웠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앞서 길 한복판을 막아섰던 스무 명의 무인들 전부가 기문진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한데 그중 열 명 정도가 피를 뿌리며 쓰러져 뒹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설표를 비롯해 아홉 명이 피가 뚝뚝 흐르는 각자의 병장기를 꼬나 쥔 채 저승사자와 같은 모습으로 숨을 헐떡이는 중이었다·
비록 압도적인 숫자와 기문진에 밀렸지만 저들도 보통 인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홀로 적진으로 뛰어든 연소교의 목에 수십 자루의 칼이 붙어 있음을 확인한 그들이 하나둘씩 무기를 버리기 시작했다·
***
화전민들이 떠난 산속 마을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삼뇌가 이끄는 삼백의 마교도들은 마을 한가운데서 모닥불 수십 개를 피워 놓고 멧돼지를 잡아 와 신나게 구워댔다·
연소교 일당과 나는 화전민들이 공동 창고로 썼을 것 같은 크고 튼튼한 통나무 구조물 속에 갇혀 있었다·
쇠사슬로 손은 물론이고 서로의 등까지 붙여 꽁꽁 묶어 놓은 상태였다·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니까· 아니 나를 납치해가던 놈들과 함께 붙잡혀 이렇게 밤을 새울 줄을 누가 알았겠냐고·”
“닥쳐!”
“너나 조용히 해· 원숭이 새끼야·”
“죽고 싶어?”
“네 목숨이나 걱정해· 등신아· 나보다 네가 먼저 죽을 확률이 열 배는 더 높아· 상황 파악이 그렇게 안 돼?”
이병룡과 야차곤이 나눈 대화였다·
이제 똑같은 처지의 포로가 되어 버리자 이병룡은 더는 저들을 두려워하지도 말을 조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맞은 것에 대해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계속해서 야차곤에게 시비를 걸었다·
조영영이 연소교에게 물었다·
“이제 좀 털어놓아도 되지 않아요?”
“무얼 말이지?”
“당신들은 누구이며 장보도에 표시된 칠마총에는 어떤 보물들이 숨겨져 있는지·”
“우리가 누군지는 대충 짐작을 하지 않았나?”
“역시 천마성교의 분파인가요?”
연소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정을 한다기보다 구태여 설명을 해주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조영영은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왜 분파를 하려는 거죠? 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니면 폭정 때문에?”
“내가 왜 대답을 해야하지?”
“혹시 또 알아요? 우리 중 누군가 한 명이라도 살아서 나간다면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당신의 사부께 전해줄 수 있을지·”
“내 사부님께선 돌아가셨다·”
조영영은 살짝 당황해하더니 김이 빠졌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한데 잠시 후 연소교가 알아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강호의 수많은 세력들이 칠마총의 장보도를 찾으려고 노력했지· 만금전장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마침내 장보도를 찾는 데 성공했어·”
이건 처음 듣는 얘기다·
나도 조영영도 눈동자를 반짝였다·
“만금전장의 엄청난 금력(金刀)이 그것을 가능케 했지· 한데 그래선 안 되는 거였어· 직접 장보도를 찾는 대신 그것을 찾는 세력들을 주시하는 눈이 있었거든·”
“삼뇌!”
“칠마총의 보물이 삼뇌의 수중에 떨어지면 천하무림은 머지 않아 큰 전란에 휩싸일 거야· 최악의 경우 오백년 전 천하대광명종처럼 황실까지 위협할 수도 있어·”
“당신들의 손에 들어가는 건 괜찮고요?”
“우리는 보물을 차지하려고 남만으로 온 게 아니야· 그것들을 찾아 없애버리려고 온 거지·”
“그걸 믿으라고요?”
“믿든 말든 상관없어· 하지만 보물을 챙길 생각이었다면 보물을 싣고 갈 수레도 없이 고작 열 명만 데리고 올만큼 난 멍청하지 않아·”
“···!”
“···!”
조영영과 이병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 나는 진작부터 이 점을 이상하게 여겼었다·
이병룡은 칠마총의 보물을 운송하기 위해 노련한 표사 사십 명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그마저도 부족하면 가까운 분타에 지원요청을 할 수도 있었고·
삼뇌는 무려 삼백 여명을 동원했다·
한데 달랑 열 명으로 보물을 옮긴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보물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호송하는 동안 찾아올 비적과 무림인들이 문제다·
하지만 보물을 찾아서 인근의 세찬 강물이나 깊은 늪에 던져 없애 버리는 건 열 명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앞뒤가 딱 맞아떨어진다·
이병룡 저 개자식 때문에 아무래도 골치아픈 일에 휘말린 것 같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발을 빼기엔 너무나 많은 걸 알고 또 깊이 개입해 버렸다·
내가 말했다·
“아직 표행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쥐죽은 듯한 침묵 속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였다·
연소교를 비롯한 열두 명 전부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애초의 의뢰는 남곤산까지 길 안내를 하는 것이었고 우리는 아직 남곤산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의 표행도 끝난 것이 아닙니다·”
“뭔 헛소리를 하는 거냐?”
이병룡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물었다·
그때였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구로부터 반대쪽 벽체의 바닥에 구멍이 솔솔 뚫리기 시작했다·
이어 두 손이 보이더니 잠시 후에는 제법 구멍이 커졌다·
“저건 또 뭐야?”
이병룡이 목구멍을 쥐어짰다·
밑도 끝도 없는 상황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구멍만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양손이 사라졌다·
잠시 후· 낯익은 얼굴 하나가 거북이 대가리처럼 쓰윽 튀어 나왔다·
모두가 놀라는데 얼굴은 더 깜짝 놀라더니 숨죽여 외쳤다·
“헛 뭔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