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다시는 표사들을 무시하지 마라(1) >
이병룡과 조영영은 처음엔 당황했고 다음엔 놀랐으며 마지막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주님이 오셔서 다행이에요·”
조영영이 말했다·
짧은 한마디에서 지난 이틀 동안 그녀가 겪었던 두려움이 그대로 전해졌다·
만금전장을 장악하고도 모자라 천룡표국의 삼공자와 수향문의 후예인 조영영까지 납치한 걸 보면 보통 대범한 자들이 아니다·
원하는 걸 손에 넣은 후에는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을 죽여 없애버릴 것이 분명했다·
이젠 나까지 셋이다·
그러니 놈들이 원하는 걸 손에 넣기 전에 무사히 탈출 해야 한다·
지금쯤 호리독사와 비룡당의 신입 표사들이 추적해 오고 있을 테지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나도 나름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구타와 폭력의 후유증 때문인지 이병룡은 병든 닭처럼 구석에 온몸을 기대고 있었다·
“얼굴은 뭘로 맞은 겁니까?”
“약 올리는 거냐?”
“알아볼 게 있어서 그럽니다·”
이병룡은 조영영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주먹으로 맞았다·”
“역시 그랬군·”
“알면서 왜 물어!”
“묶어 놓고 때렸습니까?”
“지금 뭐 하자는 거냐?”
“조 소저와 저도 언제 형님처럼 불려가서 두들겨 맞을지 모르잖습니까·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있어야죠·”
“묶을 필요도 없었다· 마혈을 짚어 놓고 권법을 수련하듯이 닥치는 대로 팼다· 최소한 공방을 주고받다가라도 맞았으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을····”
마혈을 짚히지 않는 것도 실력이다·
자기가 모자라서 붙잡혀 놓고 무슨 딴소리를·
조영영 앞에서 어떻게든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건 알겠다만 속이 다 보인다·
“저들이 누군지는 알고 있고요?”
“전혀·”
“짐작가는 곳은요·”
“없다·”
“숫자는 몇 명이나 됩니까?”
“몰라·”
“아시는 게 뭡니까?”
“밥은 매일 해가 진 뒤에 한 끼만 준다· 양은 딱 굶어 죽지 않을 정도고· 그마저 조금만 반항을 해도 건너뛰어 버린다· 나로 하여금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야· 기운을 차리면 아무래도 그만큼 탈출할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까·”
“똥오줌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뭐?”
“많이 먹이면 똥오줌을 자주 쌀 테고 그때마다 뒷간으로 데려가거나 요강을 비워줘야 하니 더럽고 귀찮아서 그러는 겁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표사 열 명을 순식간에 때려눕힌 자들입니다· 아무렴 형님이 기력을 차리는 게 무서워서 그랬을라고요· 똥오줌도 하루에 한 번 밥 먹을 때만 싸게 해줬죠?”
“그건····”
“그거 보십시오·”
뒤늦게 현실을 자각한 이병룡은 상실감에 눈동자가 풀리고 어깨가 물 먹은 솜이불처럼 주저앉았다·
“또 뭐 아시는 거 없습니까?”
“없어!”
“보름이나 붙잡혀 있었으면서 알아내셨다는 게 밥때가 전부라고요?”
“밥때가 언제냐고부터 물은 사람이 누구더라?”
“장보도는 뭡니까?”
“그건 왜 물어?”
“장보도를 캐보면 놈들이 누군지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도 본 적이 없다·”
“만금전장으로부터 언질을 받았을 것 아닙니까?”
“암표의 표물이다· 정확히 알지도 못하지만 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어· 네 눈엔 내가 한심해 보일지 모르지만 나도 엄연한 표사다·”
“지금 이게 표행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이미 비적들에게 죄다 발각되어 장보도를 빼앗긴 것으로도 모자라 잡혀가기까지 하면서 같은 편끼리만 무슨 얼어 죽을 비밀· 그리고 조 소저는 무슨 죕니까?”
이병룡은 퉁퉁 부은 얼굴로 다시 조영영을 돌아보았다·
그나마 어려서부터 항주에서 함께 자란 정으로 자신의 뒤를 밟아 보겠다고 왔다가 얼떨결에 잡힌 여자다·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잠시 갈등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천하대광명종(天下大光明宗)이라는 게 있었다·”
“그게 뭔데요?”
“오백 년전 대설산을 본산으로 삼고 천하무림을 발아래로 굽어보았던 초거대 마도 세력이에요· 황제조차도 두려워했던 천하대광명종은 전란을 방불케 하는 내분에 휩싸여 여덟 개의 종파로 쪼개졌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천마성교의 전신인 천성교(天星敎)였죠·”
조영영의 설명이었다·
이병룡에게 먼저 들어서인지 유력한 무림세가의 후예로서 이미 아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힘들어하는 이병룡을 돕기 위해 말을 조금 나누어 해주려는 것 같았다·
천마성교는 몇 달 전 무림맹의 죽간본을 호송할 때 나타났던 자들이 부흥을 하려던 마교다·
우리가 흔히 마교라고 부를 때의 그 마교·
천마성교라는 이름만으로도 침이 꼴깍 넘어갈 지경이다·
한데 그런 마교가 일곱 개나 더 있었고 심지어 그것들 전부를 합친 것과 맞먹는 힘을 지닌 초거대 마도 세력까지 존재했었다고?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규모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한편 조영영이 끼어들자 이병룡은 조금 기운이 나는지 보다 적극적이고 자세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후 마교 분파의 시대가 무려 삼백 년 동안이나 이어졌지· 그러던 어느 해 마신의 경지에까지 오른 천성교 교주가 돌연 ‘마교통일대전’을 선언했다· 그리고 무려 삼십 년 동안이나 이어진 전쟁 끝에 마침내 마교를 일통하는 데 성공했지·”
“그는 천성교의 이름을 천마성교로 바꾸고 자신을 천마(天魔) 대종사라 칭했다고 해요· 한데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었어요·”
“일곱 종파의 마교는 천마성교에 의해 멸망하기 직전 모든 성보(聖實)와 금은보화들을 천하각처에 봉인한 다음 장보도를 남겨 훗날을 기약했다·”
“강호인들은 이를 가리켜 일곱 마교의 영혼이 묻혀 있다고 해서 칠마총(七魔域)이라 불렀죠· 이들 일곱 마교의 교맥과 성물을 손에 넣지 못한다면 천마는 결코 진정한 마도 대종사로 인정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천마는 수많은 교도들을 풀어 칠마총을 찾아다니게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다음 세대의 천마도 그다음 세대의 천마도· 그리고 수십 년전 천마성교는 무림맹을 중심으로 한 천하무림인들의 총공격을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
무슨 이유에선지 조영영이 다음 말을 받지 않았다·
몰라서라기보다 자신이 할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아감과 물러남을 확실히 아는 여자였다·
잠시 숨을 고른 이병룡의 말이 이어졌다·
“그때 봉인된 칠마총 중 한 곳의 장보도로 추정되는 고대 지도를 만금전장이 손에 넣었다·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까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충격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단지 이번 건을 무사히 끝내는 것만으로도 금전 일만 냥을 손에 쥘 수 있다고 해서 평범한 장보도가 아닌 줄은 알았다·
하지만 천마성교와 버금가는 고대 마교의 장보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보도가 진짜고 전설이 사실이라면 보물의 전체 양은 금전 십만 냥이 아니라 백만 냥이 될지도 모른다·
“그걸 형님에게 맡긴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모종의 세력으로부터 철저한 감시를 받아 가내무인들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장보도의 특성상 믿고 맡길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세 번째는 외손이 공을 세울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칠마총 중 한 곳을 이병룡이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면 그야말로 전 무림에 이병룡이라는 이름 석 자가 진동을 했을 것이다·
“천마성교와 버금가는 마교의 보물들을 모아 놓은 거라면 그 양이 어마어마할 텐데 고작 표사 열 명으로 옮길 생각이셨습니까?”
“합비까지 간 다음 분타의 표사들을 동원하려고 했다· 닷새 이후부터는 어떤 의뢰도 받지 말라고 전서구까지 보내 놓았었고·”
나는 백발노성을 호송해 무림맹으로 가던 중 만났던 합비 분타주를 떠올렸다·
장비를 연상케 하는 방초산과 그가 직접 훈련한 수하 삼십 명이 가세하면 표사만 무려 사십여 명에 이르게 된다·
보물의 양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그 정도면 결코 적은 전력이 아니었다·
그래도 모자라면 보물을 발견한 후 가까운 남경과 회안의 분타에 급히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이병룡도 나름대로 꽤 머리를 짠 흔적이 보인다·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다·”
“짐작 가는 곳이라도 있나요?”
이병룡과 조영영은 마지막으로 한마디씩을 해놓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우릴 납치한 세력의 정체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아뇨·”
“···!”
“···!”
두 사람 모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시원한 대답이라도 나올 줄 알았나 보다·
조영영이 다시 말했다·
“삼뇌 뇌천자를 중심으로 천마성교를 부흥시키려는 세력이 있다던데 혹시 그들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요·”
“아닐 수도 있고요·”
그래도 웬만한 궁금증은 다 해결이 됐다· 남은 건 저들이 누구인지와 목적지가 어디인지만 파악하면 된다·
만금전장이 그 엄청난 장보도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저절로 알게 되면 아는 거고 아니면 말고·
“느릿느릿 서두르지 않는 걸 보면 일단 저들이 장보도를 손에 넣은 건 확실한 것 같소· 그렇다면 지금은 장보도에 표시된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겠군·”
“그걸 어떻게 알죠?”
“장보도를 찾으러 가는 길이라면 이렇게 여유를 부리진 못할 테니까· 지금 이들의 목표는 사람들의 시선을 최대한 끌지 않고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오·”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만이라도 알았으면·”
“한나절 내내 남서쪽으로 가고 있소·”
“그건 또 어떻게···?”
조영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병룡도 부어오른 눈을 억지로 뜨고 나를 보았다·
쇠창살 바깥쪽에 빽빽하게 붙은 널빤지로 말미암아 밖에서는 안을 볼 수가 없고 안에서는 밖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병룡과 조영영의 얼굴이 모두 식별되는 것은 천장 쪽 널빤지 사이가 약간 떴고 그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는 시간에 따라 길이와 방향이 바뀐다·
마차의 바닥에 선처럼 길게 찍힌 햇빛 자국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치를 옮기고 있었다·
해가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진다는 건 불변의 법칙이니 햇빛의 자국이 이동하는 방향은 반대로 서쪽에서 동쪽이다·
다시 말해 이 마차는 지금 남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이병룡과 조영영은 그만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다 조영영이 먼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천룡표국의 추적대는 합비로 갔지 않았나요?”
“그렇소·”
합비는 북쪽이고 곽석산을 비롯해 이갑룡과 을룡이 이끄는 이백여 명의 추적대 역시 북쪽으로 말을 달려갔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이병룡도 얼굴이 노래졌다·
잠깐 남서쪽으로 가는 것이면 지형상의 문제겠거니 하겠다·
하지만 한나절 내내 남서쪽이라면 목적지가 명백히 합비가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이 모든 건 이병룡이 표사들에게 합비까지 표행을 다녀오겠다고 해서 생긴 일이었다·
조영영은 돌연 이병룡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노인이 가져온 표물의 밀어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고! 합비로 가서 장보도를 찾으라고 말이야!”
“아무래도 만금전장주께서도 장보도를 완전히 손에 넣지는 못한 상태에서 형님께 의뢰를 하셨던 것 같군요·”
나는 그제야 저들이 이병룡을 보름 가까이 이곳 항주에 억류하고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누군가 합비까지 가서 장보도를 찾아오는데 보름이 걸렸던 것이다·
조영영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정룡 오라버니가 잠입을 해오지 않으셨다면 우린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었겠군요·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
“···!”
나도 이병룡도 한순간 표정이 굳었다·
조영영이 여태 나를 당주라고 부르다가 부지불식간에 그만 옛날처럼 오라버니라고 부른 탓이다·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조영영의 얼굴이 노래졌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볼의 솜털까지 죄다 곤두섰다·
이병룡과 결혼을 할 게 아니라면 오라버니라는 호칭도 더는 실례가 아니다·
그런데 사실상 파혼을 한 게 아니었었나?
아니다· 따지고 보면 혼담만 오가다 말았을 뿐 약혼을 한 적도 없다·
나야 약혼을 하든 혼인을 하든 상관없지만·
잠시 어색한 침묵이 마차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어느 순간 덜컹하더니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천장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던 햇빛도 사라지고 없었다·
빛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불덩어리처럼 선명한 햇빛이 아니었다·
어디 그늘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저녁 밥때가 되려면 아직 먼 셈이다·
한데 잠시 후 멀지 않은 곳에서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비린내가 솔솔 풍겨왔다·
자기들끼리 점심을 처먹는 모양이었다·
“이건 노루고기 같은데·”
“그걸 어떻게 알죠?”
“노루 특유의 노린내가 있소·”
“그렇군요·”
“설마 날로 먹는 건가?”
“그건 또 어떻게 알죠?”
“날고기 특유의 비린내가 있소·”
“흥 개코가 따로 없군·”
위기감을 느꼈는지 이병룡은 어떻게든 나를 깎아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조영영은 이미 무슨 괴물 쳐다보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냄새만으로 고기의 종류를 알아맞히는 건 오래된 쟁자수들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혹시 오늘 아침 비가 왔었소?”
“한 식경 정도 소나기가 내렸어요·”
“그래서 그랬군·”
“어제도 한 차례 내렸고요·”
“지금쯤 죽을 맛이겠군·”
“그런데 저렇게 날고기를 먹어도 되나요?”
“신선하기만 하다면야 문제가 되질 않소· 물론 구워 먹으면 더 맛있겠지만· 말이 나온 김에 좀 얻어먹어 볼까?”
순간 조영영과 이병룡이 동시에 눈을 반짝이며 마른 침을 꿀떡 삼켰다·
이병룡은 보름째 조영영은 사흘째 하루 한 끼씩만 그것도 죽지 않을 만큼만 먹었으니 지금쯤 뱃속에서 회충들조차 밥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