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소나기는 종일 내리지 않는다(4) >
예상했던 대로 표왕부는 발칵 뒤집혀 있었다·
이종산의 집무실까지 들어갈 것도 없었다·
넓은 정원과 앞마당을 백여 개의 횃불로 대낮처럼 밝힌 상태에서 이백여 기의 말과 표사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선 번견 오십여 마리가 한곳에 잔뜩 쌓여 있는 옷가지들을 킁킁대며 냄새 맡고 있었다·
이병룡과 실종된 표사들의 옷가지일 것이다·
천룡표국에서 기르는 번견은 아무 데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개들이 아니었다·
쟁자수들 사이에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천룡표국의 삼(三) 대 국주였던 선조께서 서장의 고산족들로부터 구해온 종견 열 마리를 번식시킨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길거리에 돌아 다니는 족보 없는 개들보다 후각이 몇 배나 발달한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덕분에 열흘이 지났건 스무날이 지났건 실종자들의 체취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반드시 찾아낸다·
사납고 싸움도 잘해서 다섯 마리만 있으면 늑대를 물어 죽이고 열 마리가 있으면 웬만한 호랑이와도 백중세를 이루었다·
이백여 명의 표사에 말에 번견들까지·
평소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표왕부는 소위 말하는 용혈과 칠당의 당주들 조차도 허락 없이는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었다·
다른 넓은 장소가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곳에 추적대를 집결시킨 이유는 표사들의 실종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항상 있어왔던 전통이기 때문이었다·
표왕부에서 직접 챙긴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실종된 표사들의 동료와 가족들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안심을 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나저나 사람이 이렇게까지 모였는데도 불구하고 내게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처음이 아니다·
인사권과 경영권을 가진 채 비룡당으로 독립을 하고 난 이후 표왕부의 무사가 직접 알려오는 소식이 아니라면 항상 한 박자씩 늦었다·
어지럽고 무질서한 가운데에도 경장 차림에 무장까지 갖춘 곽석산과 이갑룡과 이을룡이 보였다·
세 사람은 이십여 명의 표두들에게 둘러싸인 채 통나무 탁자 위에 커다란 지도를 펼쳐 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의논하는 중이었다·
뒤쪽으로 나머지 세 당의 당주들 그리고 이종산과 세 명의 부인들도 보였다·
비록 자신의 배로 낳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실종됐으니 속마음은 어떨지언정 다들 얼굴이라도 비추어야 하지 않겠나·
이병룡의 친모인 청화부인은 마치 혼백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그도 삼십 년 가까이 천룡표국에 살았기에 이런 경우 십중팔구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잘 아는 것이다·
나는 이종산을 비롯한 세 부인에게 다가가 차례로 포권지례를 올렸다·
이종산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뿐 세 부인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대충 인사가 끝나자 청룡당주 유지평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천룡표국 내에서 머리가 가장 비상한 사람이니 상황파악도 빠를 것 같아서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어디까지 알고 있나?”
“실종된 지 닷새가 지났다고 들었습니다·”
“딱히 달라진 상황은 없네·”
“추적대는 어떻게 꾸리기로 한 겁니까?”
“합비로 가는 길이 워낙 여러 갈래로 흩어지고 모이는 데다 시간까지 지체되어 아무래도 추적대를 몇 개로 쪼개야 한다는 것이 모두의 생각이네·”
“추적대의 대주는요·”
“총표두님 강룡당주 복룡당주· 현재로선 이렇게 셋이네·”
“의뢰를 한 자는 밝혀졌습니까?”
“배석했던 표사들이 모두 함께 표행을 떠나는 바람에 현재로선 정확히 알 수가 없네· 남은 유일한 목격자라고는 처음 지명표를 받았던 천룡각의 장궤인데 그가 본 사람은 자신을 복건성에서 온 상인이라고만 밝힌 칠순의 노인이었다고 하네·”
“그 노인부터 찾아야겠군요·”
“남은 표사들이 총출동해 항주 시내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네· 국주님께서 지부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시어 정용과 포쾌까지 수백 명이 동원되어 길목마다 검문검색을 하고 있는 상태이고·”
“아직 소식이 없나 보군요·”
“아직도 항주에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 암표의 특성상 전달자에 불과한 장궤에게 진짜 신분을 밝혔을 가능성도 낮고·”
“물건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걸 알면 어떤 식으로든 먼저 연락을 취해오지 않을까요?”
“그 역시 아직까진 소식이 없네· 일반적인 암표의 경우에 비춰 보자면 아직 상황을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지· 하지만 우리로선 무작정 기다릴 수가 없는 노릇이고·”
암표가 이래서 위험하다·
애초 추적을 할 수 없게 하려고 만들어진 표행 방식인 만큼 중간에 문제가 생겨 버리면 도무지 핵심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
물론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느라 거액의 표비를 받기는 하지만·
이윽고 논의를 끝낸 세 사람이 이종산과 수뇌부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이을룡이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는 대뜸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나타나는 것이냐?”
“비룡당에서 무공을 수련 중이었습니다·”
“지금 한가하게 무공이나 수련할 때냐?”
“조금 전에서야 알았습니다·”
“일부러 늦게 온 건 아니고?”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뭐?”
“그만들 해라· 어른들 앞이다·”
이갑룡이 나직이 나무라고서야 이을룡의 입이 닫혔다·
누가 보면 자기는 평소에 이병룡을 잘도 챙겨준 줄 알겠네·
곽석산이 이종산에게 보고했다·
“일단 세 개의 대(隊)로 나누어 관도와 산길과 수로를 따라가며 추적하겠습니다· 뭐라도 발견하는 즉시 표국으로 전서구를 날리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표사들을 찾지 못한다면 흉수들이 누구인지라도 반드시 알아 오게·”
이종산은 이 와중에도 병룡이라고 하지 않고 표사들이라고 하는 담대함을 보였다·
덧붙여 흉수의 정체를 알아 오라는 건 피의 복수를 준비하고 있겠다는 뜻이다·
“존명!”
“존명!”
“존명!”
세 사람을 필두로 스무 명의 표두들과 중무장을 한 이백여 명의 표사들이 전부 말에 올랐다·
이어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이백여 기의 인마가 썰물처럼 표왕부를 빠져나갔다·
두두두두두두·······
지금은 세 개 대(隊)지만 여정 중에라도 갈림길이 나오면 더 쪼개졌다가 다시 합쳐지길 반복할 것이다·
물론 쪼개진 사람들끼리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십 리 밖에서도 볼 수 있는 폭죽도 잔뜩 챙겼을 것이고·
그러나 아무리 철저히 준비해도 이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다·
운 좋게 작은 단서를 찾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한없이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실종된 사람들의 목숨은 배가해서 위험해진다·
매우 높은 확률로 이미 끝났을지도 모르고·
이종산이 내게 물었다·
“무공을 수련하던 중이었다고?”
“죄송합니다· 미처 소식을 듣지 못하여·”
“무슨 무공을 수련하던 중이었더냐?”
“도화곡에서 받은 잠백비행술이라는 은잠술을 수련 중이었습니다·”
“성취는 좀 있었고?”
“아직은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한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아라· 너도 보았겠지? 표행 중 죽을 지도 모르는 위기가 닥쳤을 때 믿을 건 오직 일신에 지닌 무공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만 가 보거라·”
말을 끝낸 이종산이 돌아섰다·
세 명의 부인들과 그때까지 남아 있던 당주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모두가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마지막 순간 보았던 이종산의 눈동자가 너무나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못났다고 해도 자식은 자식이다·
문득 환생을 하고 난 후 처음으로 이종산과 독대하던 날이 생각났다·
이종산은 내 몸의 원래 주인이었던 이정룡도 항상 저런 눈빛으로 지켜보았을까?
만약 진짜 이정룡이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평생 자신을 괴롭힌 이병룡이니 죽든 말든 그대로 내버려 두었을까?
아니면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어떻게든 찾을 수 있도록 한 팔을 보탰을까?
진짜 이정룡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선택은 이미 정해졌다·
나는 호리독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저는 훔치는 쪽이지 강탈하는 쪽이 아닙니다· 하지만 표사들까지 실종되었다면 십 중 십 강도나 비적들의 소행입니다· 그쪽은 우리와 노는 세계가 달라요·”
“귀하도 수채에 몸 담았던 것으로 아오만·”
“잠시 의탁을 한적이 있었지요· 적극적으로 앞장 서서 노략질을 하고 다니진 않았습니다· 설사 노략질을 해도 대부분 말로 끝냈지 사람을 실종시켜 버리는 일은 없었습니다·”
“쥐도새도 모르게 나를 없애버리려고 한 걸로 아오만·”
“죄송합니다·”
“됐고· 내 말은 추적이 가능할 것 같은지를 묻는 거요· 과거 귀하의 사부이신 공령신투 선배께서는 천리추종술(天里追從術)에도 대단한 조예를 지니셨다고 들었소·”
“무림일절이셨지요· 목표로 삼은 물건과 그것을 가진 사람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추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래서 가능하겠소?”
“불가능에 가까울 겁니다·”
“어째서요?“
”지난 보름 동안 이곳 항주에만 비가 세 차례나 내렸습니다· 다른 지역이라고 비가 오지 않았을 리 없지요·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번견들을 오십 마리나 동원해도?”
“갈림길에서 도움이 될 수는 있겠죠· 운이 좋아 실종된 사람들과 사흘 이내로 가까워진다면 그땐 매우 높은 확률로 번견들이 찾아 낼 겁니다· 하지만 역시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시간이 생명인데·”
“결국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는 소리군·”
“천룡각의 장궤가 목격했다는 그 노인에서부터 시작하셔야 합니다· 당장 보기에는 느려터진 것 같아도 가장 빠른 길이 될 겁니다· 다만 그 노인을 찾는 게 문제겠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면 항주 시내 어디에선가는 밥을 먹고 누군가와는 말을 섞었을 것이오· 운이 좋다면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나는 품속에서 청홍색의 실로 정교하게 매듭을 묶어 장식한 수실을 꺼냈다·
전날 양주에서 하오문주의 칠 제자인 소수옥녀 매용초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이어 수실을 검의 손잡이 끝에 매단 다음 통째로 장삼에게 건네주었다·
“지금 당장 이걸 어깨에 차고 항주 유흥가를 열심히 뛰어다녀라· 기녀들이나 도둑 소매치기 점소이 등이 많은 곳 위주로· 하면 누군가 접근해 수실에 관해 물을 거야· 그때 너의 신분을 밝히고 내가 백선객점에서 당신들의 향주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해·”
“향주요?”
“그렇게만 전하면 그쪽에서 알아들을 거야· 다른 손님들과 마주 칠 수도 있으니 역용을 하고 오시라는 말도 전하고·”
“알겠습니다·”
나는 호리독사에게도 말했다·
“하 표사는 지금 당장 서쌍교방으로 가서 서호삼절 선배들을 모시고 역시 백선객점으로 오시오· 비용 이야기를 꺼내면 만나서 나랑 직접 얘기하라 그러고·”
“저기····”
“왜 그러시오?”
“기왕 손님들을 바깥에서 보실 거면 은하루(銀河樓)로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거기 소흥주가 기가 막힙니다·”
“은하루는 항주에서 가장 비싼 주루 중 하나인데 귀하가 무슨 돈으로 거기 가서 술을 마신 거요? 설마····”
“절대 표사나 쟁자수들의 전낭에 손을 댄 적 없었습니다· 다만 남궁 소저께서 이따금 저를 은하루로 불러다가 술을 사주시면서 이것 저것 물어 보시····”
“어디서 접선을 하나 했더니만 은하루였군·”
“죄송합니다· 남궁 소저의 꾐에 빠져 저도 모르게 그만· 하지만 아무리 취했어도 맹세코 당주님께 크게 해가 될 얘긴 한 적이 없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선이 있습니다·”
“아는 바가 없었겠지·”
“그것도 그렇고요·”
“그리고 선은 누가 정하는 거요?”
“앞으로는 당주님께서 정해주시는대로 따르겠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움찔 놀란 독사가 일장 밖으로 후다닥 떨어졌다·
“이 얘긴 나중에 따로 합시다·”
“그럼 은하루에서 뵙겠습니다·”
“닥치고 백선객점으로 오시오·”
“존명!”
장삼과 호리독사가 떠나자 나는 곧장 비룡당의 신입 쟁자수들이 묵고 있는 접객당의 임시 거처로 달려 갔다·
그곳에서 위소방이라고 하는 젊은 쟁자수를 불러냈다·
그는 화방(晝房)에서 십 년 넘게 일하다 수전증 때문에 잘린 친구였다·
“혹시 화구를 가지고 있나?”
“한 벌 있기는 합니다만·”
“당장 챙겨서 나를 따라와라·”
위소방을 데리고 천룡각을 찾았을 때는 유(西)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거기서 손지백의 도움을 받아 다시 정체불명의 노인을 목격했다는 장궤를 만났다·
“어떤 상황인지는 아시지요?”
“물론입니다·”
“우선 이 친구에게 그 노인의 인상착의를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이 친구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노인과 나누었던 대화를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제게 얘기해 주시고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너는 장궤님의 진술을 근거로 지금부터 한 식경 안에 용모파기 두 장을 그려야 한다· 장궤님께서 지켜보시며 세세하게 바로잡아 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해보겠습니다·”
“그럼 모두 시작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