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 표두가 되다(1) >
항주에 돌아왔을 때는 봄이 한창이었다·
저잣거리는 온통 도화곡과 천룡표국에 관한 소문들로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이종산이 녹림도왕 백군악을 꺾고 새로운 천하십검의 반열에 오른 것이 단연코 화제였다·
천룡표국이 탄생한 이후 가주가 천하십검의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표왕이라는 칭호에 이어 또 하나의 대기록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성도 입성을 코앞에 두고 이종산이 표행의 중단을 선언한 것도 대단한 화제였다·
표왕의 역사상 처음 있는 표행의 실패였으니까·
하지만 이종산과 천룡표국의 신뢰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줄 거라는 일부의 우려와 달리 그의 명성은 오히려 더욱 하늘을 찌를 듯했다·
강호인들은 말했다·
표행의 완벽한 성공을 위해 자신의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기는 것도 서슴지 않았으니 이는 오직 표왕만이 할 수 있는 판단이자 가장 아름다운 실패였다고·
여파는 컸다·
귀환을 했더니 표행 의뢰가 그야말로 물밀 듯이 몰려들고 있었다·
덕분에 천룡표국은 유례가 없는 대호황을 누리는 중이었다·
“전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십칠각을 찾는 의뢰야 끊임없이 들어오지만 대부분 장거리 표행에 관한 것입니다· 한데 아시다시피 아직까지 우리는 표행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전립성이 한 말이었다·
현재 십칠각의 표사는 나를 포함해 가불염과 십칠왕삼 뿐이었다·
‘십칠왕삼’은 십칠각의 왕씨 성을 쓰는 표사 세 명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들은 내가 백발노성을 호위해 무림맹으로 떠나기 직전 뽑은 신입 표사들로 현재는 항주시내의 주루를 보호하는 일에 집중 투입되고 있었다·
“대신 오당십육각에서 의뢰를 싹쓸이 해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당이 다시 그중에서도 강룡당과 복룡당이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고요·”
이갑룡과 을룡이 당주로 있는 두 당은 가장 많은 표사와 쟁자수를 거느렸다·
일거리가 없을 때에는 표사들 많은 것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호황일 때는 그만큼 많은 의뢰를 처리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꿀을 빨았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곧 대형 상단들이 보리를 비롯한 미곡을 본격적으로 유통하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전쟁이 벌어진다·
“오당 전부 표사들을 적게는 열 명에서 많게는 쉰 명까지 증원했습니다· 열여섯 개의 각에서도 서너 명씩이라도 뽑아 증원을 했고요·”
“쉰 명이라고요?”
“강룡당과 복룡당의 이야깁니다·”
강룡당과 복룡당은 지금도 표사들의 숫자가 백여 명을 헤아린다·
여기에 쉰 명씩을 더 증원했다면 거의 오(五) 할의 성장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뭐가 있습니까?“
”대장궤께서 말씀하시길 몰려드는 의뢰를 감당하기 위해 열일곱 개의 각 중 한 곳을 당(堂)으로 승격해야 할 거라셨습니다·“
“손 백부께서요?”
“대장궤께서 무언가를 말씀하시면 항상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만약 이번에도 그렇게 된다면 무려 삼십 년 만에 여섯 번째 당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천룡표국이 한 걸음 더 도약하는군요·”
“그런 셈이지요·”
“한데 표정이 어째 그렇습니까?”
“돌아가는 분위기도 그렇고 서열로 봐도 그렇고· 여섯 번째 당은 병룡 공자께서 이끄는 칠각이 가장 유력합니다·”
그럴법한 일이다·
이병룡의 나이 이제 스물여섯 슬슬 당을 만들어 줄 때도 되었다·
외가에서 인맥을 동원해 표행을 몰아준 덕분에 지난 몇 년 동안의 실적도 매우 좋다고 들었다·
거기에 의뢰가 넘쳐나고 있으니 지혜가 뛰어나다는 그의 어머니 청화부인이 이때다 싶어 이종산에게 적극적으로 요청을 했을 것이다·
나는 전립성이 떨떠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열심히 밭을 일군 사람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사람들이 추수를 하고 있으니 점잖기 이를데 없는 그도 살짝 배알이 뒤틀리는 모양이었다·
한데 전혀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당과 각을 키워서 얻을 수 있는 건 이종산으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지금보다 좀 더 큰돈을 만지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종산으로부터 충분히 인정을 받았다·
돈도 강룡당이 지난 일 년 동안 벌어들인 것의 절반에 육박하는 액수를 사실상 혼자 벌었다·
그리고도 모자라 지금 그 돈을 다시 몇 배로 부풀리기 직전이었고·
”목장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나와 이종산이 도화곡을 호송해 대파산맥을 넘을 때쯤 북방에서 대규모 전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전선이 인접한 북방 삼성에 소금과 철에 이어 말의 개인 간 거래를 금지하는 금매령(禁賣令)이 내려졌다·
말값을 안정시켜 전마의 수급에 차질이 없도록 하려는 조치다·
전쟁이 나도 백성의 삶은 계속되고 천하의 수많은 상단과 표국 등은 말을 필요로 한다·
남선북마라는 말도 있거니와 말이 주요 교통수단인 강북은 특히 수요가 많았다·
해서 처음엔 북방 삼성 아래에 있는 하남성과 산동성의 말값이 폭등했다·
다음엔 그 아래 호광성과 남직예성의 말값이 폭등했다·
그리고 한 달여가 지난 지금 파도는 기어이 장강을 넘어 절강성에까지 미쳤다·
”전쟁이 장기화 될 거라는 소문이 돌자 발 빠른 산서상인들이 목장들을 찾아다니며 말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고 찾아오는 산서상인들 때문에 천목산 목장주가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휘주상인이 강남에서 일어나 대륙의 상계를 주름잡는 거대 상인세력이라면 산서상인은 강북에서 일어나 거만의 부를 축적한 상인세력이었다·
강호인들은 이들 두 곳을 일컬어 대륙의 양대 상인세력이라고 했다·
산서상인의 전설은 본래 전쟁터에 군량과 물자를 공급하는 일로 큰돈을 벌면서 시작되었다·
그런 산서상인들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가격은 어떻습니까?”
“수말은 반년 전에 비해 두 배 암말은 세 배 새끼를 밴 암말은 무려 다섯 배까지 치솟은 상태입니다·”
“오를만큼 올랐군요·”
“혹시 전쟁이 날 걸 알고 계셨습니까?”
“우연히 시기가 맞았을 뿐입니다·”
전립성의 표정이 살짝 시무룩해졌다·
내가 제대로 말을 해주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북방 이민족들을 상대로 하는 관무역에서 관부와 조정의 패악질이 점점 심해진다고 들었습니다· 약속을 어기고 물건값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 일도 허다하고요· 이대로 가면 호전적인 기마민족들이 무슨 일을 내도 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군요· 실로 대단하십니다· 덕분에 엄청난 시세 차익을 얻게 됐습니다·”
천목산 목장을 통해 지금까지 내가 사들인 말은 총 삼천여 필 백여 필의 종마를 제외하고는 전부가 언제든 새끼를 밸 수 있는 젊은 암말이었다·
원래 오백 필이었던 것을 한 달 전 백발노성으로부터 받은 금전 일천 냥까지 몽땅 젊은 암말을 사는데 털어 넣은 탓이었다·
그 바람에 천목산의 목장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아 다른 곳에 위치한 목장 세 곳을 임시로 대여한 상태였다·
“전부 팔아 치워 버리세요·”
“전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삼천 필의 말을 한꺼번에 풀면 일시적으로 가격이 크게 떨어질 겁니다· 금방 끝날 전쟁이 아닌 듯한데 서너 달에 걸쳐 나눠 파시는 게 어떠할는지요?”
“조금 떨어져도 상관없습니다· 투자할 곳도 얼마든지 있고요· 걱정하지 마시고 제가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길어도 보름 안에는 전부 처분해야 합니다·”
“그렇게 빨리요?”
“어렵겠습니까?”
“말을 사겠다는 상인들이 줄을 섰으니 마음만 먹으면 열흘 안에도 가능합니다· 한데 목장은 어떻게 할까요?”
“말이 없는 목장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도 전부 팔아 버리십시오· 목장주에게는 조용한 곳에서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을 챙겨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애초 내가 목장에 투자한 액수는 금전 천백 냥·
별다른 일이 없다면 나는 이번 일로 세 배인 약 삼천삼백 냥 정도를 손에 쥐게 될 것이다·
거기에 무림맹으로부터 백발노성 및 죽간본 호송건으로 금전 삼백 냥을 받았고 이중 절반을 천룡표국에 상납하고 남은 백오십 냥이 있었다·
이것들을 전부 합하면 금전 삼천사백오십 냥이 된다·
전생에서는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거액이었다·
이 정도 돈이면 이제 표국을 차리고도 남았다·
무슨 일을 꾸미고 벌이든 돈 때문에 답답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검 승부는 이제부터였다·
반년 전 회시에 장원급제한 후 이종산으로부터 십칠각의 열쇠를 하사받으며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주는 건 사양하지 않는 주의라더니?”
“제가 이 열쇠를 받는다면 앞으로 십칠각에서 일어나는 모든 걸 전부 보고 드려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지시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건 온전히 저의 각이 아닙니다·”
“내가 왜 그럴 것이라 생각하느냐?”
“형들이 모두 그러고 있으니까요·”
“네 눈에는 형들이 불쌍해 보였느냐?”
“부럽진 않았습니다·”
“상금으로 받은 금전의 용처 역시 내게 가르쳐 줄 생각이 없겠구나·”
“외람되지만 그렇습니다·”
“금전 백 냥이 얼마나 큰 돈인지는 아느냐?”
“항주 시내에서 가장 잘 나가는 기루를 통째로 살 수 있는 돈입니다·”
“설마기루를 살 생각이더냐?”
“물론 아닙니다·”
“용처가 있기는 있나 보군·”
“그렇습니 다·”
“나랑 내기를 해보겠느냐?”
“···?”
“반년 후 내가 금전 백 냥의 행방을 찾아내지 못하면 그땐 십칠각에 대한 그 어떤 간섭도 영구적으로 하지 않을 것이다· 너 또한 아무리 큰일이라도 내게 보고할 필요가 없느니라·”
“그러나 만약 내가 금전의 행방을 모두 찾아낸다면 너는 앞으로 형들처럼 십칠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내게 보고하고 회계장부까지 감사를 받아야 하느니라·”
“좋습니다·”
그리고 지금 딱 반년이 흘렀다·
이종산이 이기면 나는 지금까지 키운 십칠각과 금전 백 냥을 고스란히 바쳐야 한다·
반대로 내가 이기면 형들과 달리 천룡표국 안에서 또 하나의 독립된 나만의 표국을 갖게 된다·
성공만 한다면 이것 또한 유례가 없는 천룡표국의 전설이 될 것이다·
***
천룡표국으로 돌아온 지 보름째 되는 날 아침 나는 십칠각의 앞마당에서 홀로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현재 내 공력은 꽉 찬 백 년이었다·
이제 내 몸에서 천지령의 진기는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화조신옹은 천지령의 천년진기를 백년공력으로 바꾸기까지 족히 이십 년은 걸릴 거라고 했다·
그걸 단 반년 만에 끝내버렸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대신 천지령의 진기가 모두 녹아버렸으므로 이제부터는 그런 비약적인 내공 증진은 없을 것이다·
다른 평범한 무인들처럼 조석으로 운기행공을 통해 차곡차곡 공력을 쌓아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현재 천룡표국 안에서 단순히 공력으로만 따졌을 때 나를 능가하는 사람은 이종산이 유일했다·
이런 가공할 공력에 어울리지 않게 내가 익힌 천무십검 박룡수 귀영무 십초박 등의 숙련 정도는 고작 몇 년 안팎에 불과했다·
시간을 느리게 흐르도록 하는 이능력으로 모자라는 숙련도를 보완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데 이 능력으로도 보완이 되지 않는 무공들이 있었다·
도화곡에서 받은 무공비급은 모두 세 권이었다·
첫 번째는 그 유명한 천금풍이라는 경신공이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잠백비행(潛魂秘行)이라는 은잠술과 잠백지둔(潛魂地適)이라는 지둔술이었다·
지둔술은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가 사흘이고 나흘이고 숨어 있는 공부를 말한다·
은잠술이야 그렇다고 쳐도 지둔술이 왜 도화곡에 있는지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곡주인 이막하도 잘 모른다고 했다·
다만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잠백비행 또한 천금풍 못지않게 고절한 무공인데 잠백지둔과 쌍을 이루는 공부라 함께 준다고 했다·
그리고 닷새 동안 내게 세 가지 무공의 묘리를 촌각까지 아껴가며 전수해 주었다·
일단 가르쳐 준 것들만 깨우쳐도 일성의 성취를 이룰 거라고 했다·
그러면 도화곡을 조금 안정시키고 난 후 쓸만한 제자 몇 명을 보내 수련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노라고도 약속했다·
나는 우선 천금풍과 잠백비행부터 익혔다·
잠백비행은 한 곳에 몸을 숨기는 은형술과 몰래 움직이는 잠행술을 하나로 합친 공부였다·
성도에서 배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보름 그리고 다시 이곳에 도착한 후 보름·
도합 한 달 동안 나는 천금풍과 잠백비행에 매달렸다·
그 결과 천금풍은 대체 이게 무슨 귀신의 조화인가 싶을만큼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이 괴현상에 대해 총표두 곽석산에게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경신공은 본래 공력이 칠 할이다· 그러나 나머지 삼 할의 묘리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나지·”
천무십검과 십초박 그리고 귀영무가 이능력의 덕을 크게 본다면 천금풍은 공력의 덕을 크게 보는 것이다·
남은 것은 잠백비행이었다·
이건 공력도 이능력도 크게 도움이 되질 않았다·
오로지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실력을 배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지금 내가 처마의 그늘 속에 박쥐처럼 거꾸로 달라붙어 있는 이유였다·
은신의 첫 번째는 주변의 경물에 자신을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만들어 사람들의 눈을 희롱하는 것이었다·
이막하는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며 자신을 관조할수 있어야 비로소 은신의 묘(妙)가보이고 이(理)가 보이다가 끝내 술(術)이 보일 거라고 했다·
그래서 한식경째 이러고 있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고 사지가 달달 떨렸다·
특히 나무를 움켜쥐고 있는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풀릴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나는 지금 어느 정도의 경지에 와 있을까?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은 과연 몇 명이나 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공자님 거기서 뭐 하십니까?”
장삼이었다·
빗자루를 들고 쭐레쭐레 오더니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가 나를 딱 발견하고는 저렇게 물으면서 빤히 쳐다보았다·
“운동 중이다·”
“무슨 운동을 처마에 거꾸로 달라붙어서 하십니까?”
“악력을 기르는 중이다·”
“그러시군요·”
그때였다·
“각주님을 뵙습니다·”
“각주님을 뵙습니다·”
“각주님을 뵙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세 명이 전각 모퉁이를 돌며 나타났다·
속칭 십칠왕삼이라 불리는 세 명의 신입 표사· 왕대표 왕중표 왕소표였다·
그들의 뒤에는 가불염과 객원표사 신분인 호리독사도 서 있었다·
호리독사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거기서 무얼 하십니까?”
“악력을 기르는 중이시랍니다·”
장삼이 대신 설명을 해주었다·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거기서 뭐 하냐?”
이번엔 뜻밖에도 이병룡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십칠각의 표사들과 장삼은 일제히 포권지례를 하고는 양떼처럼 흩어져 버렸다·
이른 아침부터 이병룡이 십칠각을 찾았을 때는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털썩·
나는 한 손을 바닥에 짚으며 멋지게 떨어져 내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오래 매달려 있었던 탓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떨어지는 순간 나려타곤의 수법을 펼치며 옆으로 한 바퀴 데구르르 구른 후에야 비로소 손바닥을 툭툭 털며 일어날 수 있었다·
“뭘 하고 있는 거냐?”
“낙법을 수련하고 있었습니다·”
이병룡은 내가 떨어져 내린 땅바닥과 조금 전까지 붙어 있던 처마 밑을 한참이나 번갈아 보았다·
“형님께서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너도 내가 이끄는 칠각이 당으로 승격할 거라는 얘기는 들었겠지? 아무래도 오늘 밤 열리는 장로회의에서 최종 결정이 날 것 같다·”
“축하드립니다·”
“늦었지만 너도 축하한다·”
“예?”
“도화곡의 제자가 된 것 말이야·”
이 인간이 오늘따라 왜 이러시나·
나라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을 하던 분께서 축하한다는 말을 다 해주시고·
“그래봐야 속가제자일 뿐일걸요·”
“그러니까 더 잘 됐지· 의무는 없고 무공만 전수받으면 되니까· 벌써 천금풍이라는 경신공의 비급을 손에 넣었다지?”
“경신공은 천룡표국에도 있습니다·”
“천룡표국의 여러 무공 중 천무추영(天武超影)이 가장 보잘 것 없다는 건 강호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에 비하면 천금풍은 가히 신공절학이지·”
안타깝지만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이종산의 말에 따르면 개방과 하오문에서는 얼마 전에 작고한 여종매를 무림에서 가장 빠른 열 명의 고수들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고 했다·
그래서 별호도 일추천리(一追千里)였다·
한데도 그녀는 천금풍을 전체 십이성 중 구성밖에 익히지 못했다고 들었다·
구성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무림에서 가장 빠른 십인의 고수 중 한 명이 될 수 있을만큼 천금풍은 가공할 경신공이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따라 이병룡이 매우 이상했다·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
“제게 무슨 부탁하실 거라도 있습니까?”
“그렇게 보여?”
“솔직히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빙빙 돌리지 말고 시원하게 말씀을 해보세요· 도와 드릴만하면 도와 드리겠습니다·”
“정말이냐?”
“물론입니다·”
“하면 십칠각을 나에게 다오·”
“예?”
“칠각에서 십칠각을 흡수해 여섯 번째 당으로 만들려고 한다· 대신 너의 지분은 확실히 챙겨주지· 이대로 두면 어차피 형님들에게 빼앗길 각 너도 그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나는 하마터면 이병룡의 입에 두 손가락을 넣어 쫙 찢어버릴 뻔했다·
십칠각에 들인 공이 얼마인데 그걸 날로 처먹겠다고?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고 말했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