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사천구룡방(7) >
모래섬 위에서 사천구룡방의 결사대 이백을 맞아 싸우는 도화곡 제자 삼백의 상황은 딱 두 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다·
백척간두(百尺羊頭)·
건곤일척(乾神一鄕)·
대별산을 내려온 이후 아니 평생을 통틀어 사실상 첫 번째인 이 집단전의 결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건 뇌정갑을 비롯한 이백의 결사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죽어도 사천구룡방은 냉목풍의 지도아래 여전히 이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통천방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이처럼 각자의 사활이 걸린만큼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고 목숨을 건만큼 싸움은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이라면 이골이 난 흑도들에게 초전부터 화끈한 불맛을 볼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도화곡의 제자들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그들은 무질서하게 하나로 뒤섞여 혼전을 펼치는 대신 삼백이 똘똘 뭉쳐 수성전을 치르는 방식을 택했다·
평소의 습관대로 고함을 지르며 도화곡 제자들의 진영을 향해 뛰어들던 선두의 흑도 다섯 명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난도질을 당해 죽어버렸다·
“어· 저 저거!”
“생각보다 잘 싸우는데요!”
이견과 삼견의 말이었다·
그러나 목표를 위해서라면 동료들의 시체를 밟고서라도 나아가는 것이 흑도들의 방식·
다수인 도화곡 진영을 헤집어 놓기 위한 놈들의 무자비하고도 집요한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단 적들을 흩뜨려 놓아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처음엔 흑도들의 살벌한 기세에 도화곡 진영의 외곽 한 곳이 허물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흑도들이 들어오는 순간 사방에서 검이 날아들어 벌집을 만들어 버렸다·
그 바람에 잠깐 사이 흑도들 다섯 명이 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에 양쪽 강변에서 지켜보던 수천의 사람들은 모두 입이 쩍 벌어졌다·
당주들을 인질로 잡고 있던 나와 객원표사들 그리고 당군백과 두소부도 하나같이 어안이 벙벙해졌다·
같은 방식이 두 번이나 반복되면 그건 우연이 아니다·
그때 남궁소소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멸살구곡대진 (減殺九曲大陣)!”
“그게 뭐요?”
“할아버지께 들었어요· 도화곡에 구대문파와 어깨를 견줄만한 세 가지 공부가 있는데 첫 번째가 도화비검이고 두 번째가 천금풍이고 세 번째가 멸살구곡대진이라는 검진이라고요·”
“이름 한 번 살벌하군·”
“위력은 더욱 살벌하다고 하셨어요· 다른 검진들과 달리 적게는 열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이 동시에 펼칠 수 있는데 마치 분신술을 쓰는 거대한 괴물과도 같아서 함부로 뚫고 들어 가려 했다가는 몰살을 당하기 십상이라고·”
사승의 관계로 이어진 무림문파와 개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뭉친 흑도방파의 본질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무림문파는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다시 그 제자에게서 제자에게로 무맥이 면면부절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뿌리며 줄기가 되는 무맥은 점차 검법으로 신법으로 합격진으로 가지를 뻗게 된다·
문파의 역사가 오래될수록 가지 또한 풍성해지는데 천년고찰 소림사의 칠십이종절예(七十그種絶藝)가 그 좋은 예이다·
소림 칠십이종절예의 역사가 달마역근경이라는 전설적인 무맥에서 시작되었음을 모르는 강호인은 없다·
반면 제각각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 모인 흑도방파에서는 무맥이 있지도 않고 가지를 뻗을 수도 없다·
당연히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합격진이 존재할 리가 없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공부를 익혔을 리도 펼칠 수도 없고·
한데 수백 명이 함께 싸우는 전투에서 합격진의 위력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열 명이 백 명을 상대하고 백 명이 천 명을 막아내는 것이 바로 합격진이었다·
도화곡의 합격진은 멸살구곡대진이라는 검진이었다·
그 위력은 도화곡의 패배를 조심스레 예상하고 있던 모든 사람의 뒤통수를 몽둥이로 세차게 후려치는 것과도 같았다·
그 중심에 여종매를 비롯한 오대장로들이 있었다·
여종매가 진의 한 가운데서 전체적인 상황을 살피며 빠르게 명령을 내리면 사방의 중요 방위를 점하고 있던 오대장로들이 그 명령을 받아 일사불란하게 변화를 이끌었다·
그런가 하면 진의 외곽에는 중년의 팔대제자들이 견고한 성벽처럼 혹은 든든한 갑옷처럼 버티고 서서 상대적으로 약한 구대제자들을 지켜 주었다·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해 얼마나 수련을 했는지 삼백 명의 제자들 전부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정교하게 움직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검진이 갈라졌다!”
“저놈들이 기어이!”
멸살구곡대진이 흑도들의 집요한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둘로 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흑도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갈라진 틈으로 쏟아져 들어가며 전세의 흐름을 바꾸어 놓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허물어졌던 검진의 외곽이 갑자기 입구처럼 닫혔다·
화들짝 놀란 흑도 십여 명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십여 명 정도가 검진 속에 갇혀 버렸다·
그와 동시에 검진 전체가 돌연 회오리바람처럼 오른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검진 속에서 의도치 않게 왼쪽과 오른쪽의 경계를 이루며 서 있던 이십여 명의 흑도들이 진력에 떠밀려 휘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검진 전체가 태극 모양으로 바뀌었다·
검진은 계속해서 돌았고 태극의 경계를 이루던 이십여 명의 흑도들은 점점 동료들과 떨어지고 고립되더니 이내 점이 되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나로 합쳐졌던 검진은 돌연 네 개로 쪼개지며 확 퍼졌다·
동시에 네 방향에서 근접전을 펼치고 있던 흑도 대여섯 명씩을 순식간에 집어삼켜 버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처절한 살육의 비명들·
“와아아아!”
그야말로 엄청난 구경거리에 모래사장 뒤쪽 언덕배기의 일만 군중들에게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싸움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언제나 그렇듯 낮은 서열의 흑도들은 앞에서 사실상 칼받이가 되어 죽어갔다·
그들의 희생은 높은 서열의 닳고 닳은 고수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무엇보다 이들 결사대는 과거 성도의 여덟 마리 용을 상대로 통일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었다·
“반 장 간격으로 늘어서라!”
쉰 살가량에 날카로운 안광을 지닌 장년 검수가 변화를 도모했다·
칼놀림이 예사롭지 않은 삼십여 명의 고수가 오른쪽으로 늘어섰다·
창처럼 뾰족하게 돌진하는 대신 개개인의 역량에 기대어 약한 고리를 찾겠다는 의도였다·
몇 번의 실패로 검진이 아무 데서나 열리고 닫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낸 것이다·
“차륜(車輪)!’’
삼십여 명의 고수들이 돌연 왼쪽으로 돌며 미친 듯이 도검을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삼십 명으로 백 명이 공격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장년 검수의 예상은 적중했다·
검진의 외곽 곳곳이 허물어지며 속살이 드러났다·
상대적으로 약한 구대제자들 중 칼에 맞는 여자들이 속출했다·
어떤 여자들은 어깨를 베이고 어떤 여자들은 팔을 베였다·
그리고 어떤 여자들은 가슴과 배와 허리를 베였다·
심지어 격전을 벌이다 등을 베이는 여자들도 있었다·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지고 옷자락이 서늘하게 잘려나갔다·
젊은 여자들의 뜨거운 피가 암녹색의 장포를 붉게 적셨다·
“저런 쳐죽일!”
“저런 찢어 죽일!”
발끈한 이견과 삼견이 목구멍을 쥐어짰다·
끓어 오르는 분노를 어쩌지 못한 그들은 인질로 잡은 당주들이라도 죽여버릴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그 바람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당주들의 수하들이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그때 당군백이 외쳤다·
“한데 왜 아무도 쓰러지지 않죠?”
당군백의 말이 맞았다·
도화곡의 제자들은 피를 흘리며 재빨리 뒷사람들과 위치를 바꿀지언정 흑도들처럼 쓰러져 나뒹구는 사람이 없었다·
남궁소소가 외쳤다·
“팔! 팔에 칼을 맞은 사람들만 피를 흘리고 어깨나 몸통에 맞은 사람들은 어쩐 일인지 피가 나지 않아요!”
남궁소소의 말도 맞았다·
흑도들의 공격은 대부분 몸통에 집중되었는데 몸통에 칼을 맞은 여자들은 단 한 명도 피를 흘리지 않았다·
그래서 뒤쪽의 사람들과 위치를 바꿀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세 번의 칼을 맞고도 끄떡없이 버티고 선 여자도 있었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장년 검수가 한 여자에게 벼락처럼 달라붙더니 일장을 내지르는 한편 옷자락을 사정없이 잡아 뜯었다·
촤악 하고 뜯겨 나가는 그녀의 암녹색 장포 안에서 은빛 호신갑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전 크기의 비늘을 잉어의 가죽처럼 겹쳐 만든 호신갑은 어깨와 위팔은 물론 사타구니까지 가리고 있었다·
심지어 허리에는 가죽으로 만든 요대를 두르고 있어서 장삼만 걸치면 전혀 표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보인명갑(保人命評)!”
내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 같은 한마디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향했다·
남궁소소가 사람들을 대신해 물었다·
“아는 물건이에요?”
“천룡표국에서 중요 인물들을 호위할 때 쓰는 호신갑이오· 강철 비늘 삼천 개를 두들겨 만든다고 해서 삼천철린갑(三千鐵織評)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천룡표국의 보물이었군요!”
“보인명갑은 그리 대단한 기물은 아니오· 다만 강철을 두들겨 만든만큼 어지간한 도검 정도는 충분히 막아낼 수 있소·”
“만약을 대비해 국주님께서 상대적으로 약한 구대제자들 전부에게 미리 입혀두신 거예요· 적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우리에게까지 비밀로 하신 거고요· 맙소사· 어떻게 그런 생각을!”
“그게 그렇지가 않소· 보인명갑은 장인들이 하나를 만드는데 한 달도 넘게 걸리오· 항주의 총타에는 고작 쉰 개 정도를 구비하고 있을 뿐이고· 그것마저도 가져온 걸 보지 못했고·”
“분타에는요?”
갑자기 치고 들어온 사람은 당군백이었다·
“무슨 뜻이오?”
“천룡표국은 중원 각지에 분타를 거느리고 있잖아요· 분타에서도 독자적으로 표행 의뢰를 받는 걸로 아는데 그렇다면 분타에도 보인명갑을 구비하고 있지 않나요?”
“만약 한 달 전 출발할 당시 명령을 내려 그것들 전부를 성도에 도착하기 하루 전 약속된 장소로 집결하게 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나와 당군백을 번갈아 보던 남궁소소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천룡표국은 중원 전역에 열일곱 개의 분타를 거느렸다·
각각의 분타에는 대략 열 개 정도씩의 보인명갑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것들 전부를 한 곳으로 모으면 도화곡의 구대제자 이백여 명을 모두 무장시키기고도 남았다·
아무래도 이종산은 지금의 이 상황을 처음부터 머릿속에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천 리 밖의 상황과 한 달 후의 사정을 꿰뚫어 보는 그의 통찰력에 나는 온몸에서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보인명갑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인데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호신갑의 위력을 깨달은 도화곡의 제자들은 더욱 자신감을 가졌고 반대로 사천구룡방의 흑도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호신갑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머리와 팔꿈치 아래 그리고 두 다리를 집중적으로 노리긴 했다·
하지만 골라가면서 공격을 해야 한다는 그러고도 한칼에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없다는 조건은 아무래도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팔다리에 상처를 입은 여자들은 재빨리 진의 안쪽으로 위치를 옮겼고 거기서 다시 뒤쪽의 강가로 달려갔다·
스스로 걷지 못하는 부상자들은 사형제들이 옮겼다·
강가에서는 대기하고 있던 천룡표국의 표사들이 재빨리 그녀들을 업거나 짊어지고 강 건너 기슭으로 후송했다·
그러면 기다리고 있던 사천당문의 늙은 의원들이 재빨리 달라붙었다·
의원이 쉰 명이나 되다 보니 기다릴 필요도 없이 곧장 응급처치와 치료가 시작되었다·
한마디로 이종산이 준비한 보인명갑과 내가 준비한 당문의 의원들이 자칫 죽을 수도 있었던 도화곡 제자들의 목숨을 최대한 살려내고 있었다·
만약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지금쯤 최소 서른 명 이상이 죽거나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 쓰러져 뒹굴었을 것이다·
마지막 방어선이 되어 생존율을 비약적으로 높여준 것이 호신갑과 의원들이라면 흑도들을 베어 넘기는 것은 온전한 도화곡 제자들 개개인의 무공과 가공할 검진이었다·
한 식경쯤 지나자 이백 명에 달했던 사천구룡방의 결사대는 백여 명 정도로 줄어 버렸다·
그에 반해 도화곡 제자들은 오십여 명의 크고 작은 부상자들만 나왔을 뿐이다·
순식간에 250대 100의 비율이 되었다·
전투 경험 없는 도화곡의 제자 세 명이 노련한 흑도 두 명을 상대해야 하는 조건에서 두 명이 한 명 정도만 상대하면 되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그때부터 멸살구곡대진이 크게 요동치며 변하기 시작했다·
검진의 안쪽에서 상대적으로 힘을 비축해 두었던 구대제자들이 함성과 함께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와 적들을 쓸어갔다·
“이야아아!”
그야말로 완벽한 전술!
전술에도 예술이 있다면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한 명의 천재가 만든 검진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또 죽일 수 있는지 뻣속 깊이 체감했다·
모든 게 순탄하게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적들이 백여 명으로 줄었다지만 그만큼 고수들만 남았다는 말도 된다·
그들 중에는 검진이나 호신갑이 통하지 않는 고수들도 많았다·
팔대제자며 구대제자를 구분할 것 없이 치명상을 입는 여자들도 속출했다·
호신갑을 피해 칼로 목덜미를 베거나 허벅지를 뚫어버리거나 육중한 타격병기로 몸통을 찍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인질이고 뭐고 당장에 뛰어 들어가 놈들을 도륙해 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서호삼견과 호리독사도 남궁소 당군백 두소부도 주먹을 말아쥐고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격쌍뇌창이라도 쓸 수 있었더라면····’
이견의 말처럼 전쟁에 교전규칙이 어디 있나·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비격쌍뇌창을 날려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실력으로는 십여 장이 한계였다·
지금까지 예닐곱 명의 도화곡 제자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녀들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재빨리 강기슭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부상이 커서 몇 명이나 살릴 수 있을지 솔직히 두려웠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흑도의 고수들 중에서도 최강자라고 할 수 있는 흑갈자 노청봉과 각주급 고수 네 명의 발목을 오대장로가 일찌감치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저 미친 개 같은 인간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도록 놔두었다면 도화곡 제자들의 희생은 걷잡을 수 없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괴수나 다름없는 초강자 만세노조 뇌정갑은 여종매가 상대해 주고 있었다·
각자의 명운을 건 두 사람의 격투는 집단전이 벌어지는 모래섬의 바깥 얕은 강물 위에서 절정을 향해 치닫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