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 붕정만리(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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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던 머리가 반백이 되어도 국주의 실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구료· 내가 졌소이다· 하하하·”
백군악은 별일 아니라는 듯 통쾌하게 웃었다·
그는 권모술수를 통한 싸움조차도 일종의 승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 뻔뻔함에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종산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 모습이 바람 앞에 버티고 선 고목처럼 믿음직스러웠다·
한바탕 웃던 백군악이 돌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기호지세인 건가?”
“어쨌거나 표행단은 복마산으로 들어왔고 이렇게 된 이상 나나 국주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물러날 수는 없게 되어 버렸소이다·”
“원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무림인들이 결국 분쟁을 해결하는 마지막 방식은 하나밖에 없지요· 천룡표국이든 도화곡이든 무공으로 흑두산장을 넘으시오· 하면 표마차도 복마산을 무사히 넘을 수 있을 것이오·”
“그리하시지요·”
“생사결이 아닌 단순한 비무로 하되 방식은 연승제로 하고 가장 마지막에 남는 쪽이 이긴 걸로 합시다· 이참에 우리 아이들이 도화곡과 천룡표국의 무공이나 실컷 견식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겠소이다·”
“그렇게 하지요·”
“표행단이 이긴다면 복마산을 무사히 통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성도에 도착할 때까지 녹림맹 산하 그 어떤 산채의 방해도 받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겠소· 그러나 만약 본 맹이 이긴다면 표행단은 왔던 길을 되돌아 가거나 합당한 비용에 대해 나와 다시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이종산은 모든 걸 예상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한 번의 딴지도 없이 모두 수용했다·
천룡표국의 표사와 도화곡의 제자들은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연승제는 대결을 할 때마다 몇 번이 됐든 이긴 사람이 남아 다음 도전자를 계속해서 상대하는 방식을 말한다·
지극히 간단해 보이지만 대진의 순서를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온갖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 사실은 고도로 복잡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오백여 명이나 되는 녹림도들이 작심하고 지연작전을 펼치면 몇 날 며칠이고 흑두산장에 머물면서 먹고 싸우기를 반복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종산이 이렇게 승낙을 한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도화곡의 구대제자들이 앉아 있는 탁자 한 곳이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소란이 일어난 곳을 보니 다들 눈동자를 이글거리는 가운데 한 명이 고개를 떨군 채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어젯밤 내게 우리 중 몇 명이나 죽을 것 같냐고 물었던 바로 그 제자였다·
열예닐곱 살 정도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용모가 워낙 빼어나서 아까부터 녹림도들의 탐욕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던 터였다·
이막하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대답은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대신했다·
“저자가 아까부터 계속 예홍에게 추파를 던지더니 급기야 손을 탁자 밑으로 넣어 차마 입에 담지 못 할 짓을 하며 희롱했습니다·”
그러면서 녹림도 진영의 가장 가까운 탁자에 앉아 있던 키 작은 중년 사내를 가리켰다·
왼쪽 눈 밑에서 시작해 오른쪽 뺨 아래까지 이어지는 검상을 얼굴에 새긴 자였는데 안 그래도 흉악한 인상이 더욱 섬뜩해 보였다·
이막하는 탁자 밑으로 무슨 입에 담지 못 할 짓을 했다는 건지까지는 묻지 않았다·
그걸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한번 치욕스러운 상황이 될 테니까·
한데 지목을 받은 사내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저는 단지 사타구니가 가려워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몇 번 긁었을 뿐입니다· 탁자로 가려져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보시고···· 난감하군요·”
“탁자 밑이 보이지 않아도 일부러 충분히 유추할 수 있도록 행동했잖아요· 긁고 나서는 보란 듯이 눈까지 마주치며 손톱 밑 냄새도 킁킁 맡고요·”
“내가 내 사타구니 냄새 맡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나?”
사내의 한 마디에 녹림도들이 참았던 웃음을 왁자지껄 터뜨렸다·
도화곡의 제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약이 올라서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러자 구대제자들 중 가장 맏언니랄 수 있는 섭부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이막하에게 두 손을 모아쥐며 말했다·
“허락해 주시면 제가 저 자에게 예의를 가르쳐 주겠습니다·”
이막하가 이종산을 보며 그래도 될는지 눈빛으로 물었다·
이종산이 백군악을 돌아보며 말했다·
“피차 첫 대결의 상대가 정해진 것 같습니다만·”
시커먼 녹림도들이 사는 산중에 삼백 명의 여자들이 찾아왔다·
그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엄청난 미녀가 있다고 치자·
그녀의 얼굴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리는 과연 어떤 자가 앉을까?
볼 것도 없이 체면을 따지지 않아도 될 정도급의 녹림도들 중 가장 높은 서열의 고수가 앉지 않을까?
‘확인해 보면 되겠지·’
이제야말로 망혼소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망혼소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난 후 나는 오며 가며 적지 않은 사람들의 단전을 더듬었다·
그 결과 나름의 기준이 생겼다·
단전의 크기가 메추리 알만하면 십중팔구 무공을 수련한 지 10년 안팎의 사람이었다·
달걀 정도 크기면 2~30년 오리 알 크기면 3~40년 거위 알 크기면 4~60년 된 고수들이었다·
참고로 거위알 큰 것은 오리알의 두 배나 된다·
인세에 보기 드문 영약을 먹거나 전이대법을 통해 비정상적으로 큰 알을 뱃속에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극히 드물기에 기연이라 부르는 것이고 아직까지는 보지 못했다·
섭부용과 마주하고 선 사내의 뱃속엔 작은 달걀이 들어 있었다·
사내의 나이가 서른 중후반 정도임을 감안하면 열대여섯 살 때부터 죽어라 내공을 수련해야 겨우 만들 수 있는 크기였다·
게다가 녹림맹의 본산이랄 수 있는 흑두산장에서조차 상당한 수준의 서열이라면 싸움은 그야말로 이골이 났을 것이다·
그런 고수를 이제 겨우 스물여덟 살에 불과한 섭부용이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의 상황을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이종산뿐이었다·
녹림도들의 수준과 도화곡의 무공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한데 그는 태연했다·
“적쌍겸(赤雙錄)이라고 하오·”
“섭부용이예요·”
“조심하시오· 나는 본래 아름다운 여자는 아까워서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지만 내 쌍겸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못하니 말이오·”
“말 섞고 싶지 않으니 덤비기나 하세요·”
적쌍겸이 히죽 웃더니 두 팔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무얼 어떻게 했는지 등에 차고 있던 시퍼런 쌍겸 즉 낫 두 자루가 툭 떨어지며 그의 양손에 쥐어졌다·
그러자 좀 전의 변태 새끼는 온데간데없고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맹수 한 마리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위험하다!’
나는 놈이 살수를 쓴다면 언제든 개입할 수 있도록 비격쌍뇌창 한 자루를 뽑아 소맷자락 속에 숨겨 두었다·
그리고 팔을 적쌍겸을 향하도록 해서 탁자 위에 슬그머니 놓았다·
적쌍겸이 말했다·
“선공을 양보하겠소· 귀하와 같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에게 먼저 공격을 했다가는 녹림의 형제들이 두고두고 나를 놀릴 것····”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번쩍하며 섭부용이 신형을 쏘았다·
적쌍겸은 한 발을 가볍게 뒤로 빼면서 두 자루 낫을 힘차게 휘둘렀다·
좌겸은 앞으로 뻗어 섭부용의 오른쪽 어깨를 찍어가고 우겸은 뒤로 한 바퀴 크게 돌려 위에서 아래로 머리통을 찍어갔다·
망할 놈이 처음부터 살수를 쓰고 자빠졌다·
마침내 두 개의 그림자가 격돌하는 순간·
까깡!
적쌍겸의 얼굴 앞 한 자쯤 되는 위치에서 격렬한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놀랍게도 두 자루 낫이 그대로 바깥을 향해 튕겨 나갔다·
동시에 섭부용의 신형이 돌연 솟구쳐 오르더니 적쌍겸의 머리 위에서 질풍처럼 한 바퀴를 돈 후 뒤쪽으로 뚝 떨어졌다·
발작적으로 돌아서며 반격에 대비하는 적쌍겸의 오른쪽 귀가 사라지고 없었다·
귀가 사라진 자리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고·
“이런 쌍!”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적쌍겸이 자신의 귀를 붙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만약 섭부용이 협봉검을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더 왼쪽으로 깊이 휘둘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잘린 것은 적쌍겸의 귀때기가 아니라 오른쪽 얼굴이었을 것이다·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단 일합에 그것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승부가 날 줄 몰랐기에 적아를 구분할 것 없이 모두가 입이 쩍 벌어져서는 한동안 다물지를 못했다·
침묵을 깬 것은 남궁소소의 중얼거림이었다·
“별호가 짝귀로 바뀌겠네·”
뒤이어 도화곡의 구대제자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
산을 내려와 벌어진 사실상의 첫 번째 싸움에서 녹림의 고수를 상대로 멋지게 첫승을 거둔 것이다·
처음 녹림의 소굴로 들어왔을 때의 불안감은 어느새 씻은 듯 사라지고 얼굴엔 투지와 자신감이 가득했다·
“모두 자중하거라!”
이막하가 구대제자들을 조용히 나무랐다·
그러자 소나기 그치듯 함성이 뚝 그쳤다·
이막하는 아는 것이다·
천 걸음 만 걸음 중의 한 걸음으로 이렇게 기뻐하면 언젠가 만나게 될 실패한 한 걸음의 충격 또한 그만큼 커진다는 것을·
섭부용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도전자를 맞았고 그때마다 최대 삼십 초식을 넘기지 않고 쓰러뜨렸다·
도화곡의 무공을 처음 견식하는 나는 그제야 도화비검을 일컬어 비정하고 잔인하고 무서운 검공이라했던 이종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도화비검은 극쾌를 추구하는 동시에 필살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검공 같았다·
초식 하나하나가 중요 근골이나 급소를 노리거나 혹은 그것을 위한 포석처럼 보였다·
마치 최소한의 동작으로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는 살수문파들의 무공들처럼·
다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약간씩 어긋나게 공격을 했다·
문득 도화곡의 뿌리와 아무도 말해준 적 없는 개파조사의 내력이 궁금해졌다·
이런 무서운 초식들 때문에 보기만 해도 피 냄새가 철철 나는 녹림도들 조차 몇 번이고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그나마 나는 한층 강력해진 이능력으로 살폈기에 모든 동작을 볼 수 있었다·
장담하건대 양쪽 각 오십 명 이내의 일류 고수들을 제외하고는 섭부용이 펼친 극쾌의 검초를 전부 다 보지 못했을 것이다·
여섯 명과 싸우는 동안 섭부용은 한 명의 귀를 잘랐고 두 명의 어깨에 상처를 냈으며 세 명의 허벅지와 배에 구멍을 뚫었다· 중상까지는 아니었지만 모두 한동안은 치료를 해야 할 것이다·
“혈부투귀(血洋關鬼)라고 하오·”
일곱 번째 녹림도가 등장했다·
마흔 살가량에 체구도 크고 어깨며 팔뚝 근육도 저게 과연 사람인가 싶을 만큼 남달랐다·
다른 걸 떠나 혈부투귀라는 별호가 이미 그의 모든 걸 말해주었다·
혈부투귀는 나도 익히 아는 자였다·
재물을 훔쳐 달아난 맹의 배신자들을 홀로 형주까지 추적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오십여 명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도끼로 모조리 도륙한 사건은 강호에 유명했다·
성명병기는 제 팔과 같은 길이의 선화부(宣花洋) 두 자루·
싸움이 벌어지면 도끼가 반드시 피로 물든다고 해서 이름도 혈부투귀다·
혈부투귀를 알아본 천룡표국의 표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반면 그가 누구인지 알 리 없는 도화곡의 제자들은 어리둥절해 하기만 했다·
“시작해도 되겠소?”
“물론이죠!”
“갈!”
혈부투귀의 좌부(左菜)가 섭부용의 오른쪽 어깨를 찍어갔다·
섭부용은 깃털처럼 가볍고 바람처럼 빠른 신법을 펼치는 한편 협봉검으로 도끼를 쳐냈다·
깡!
새파란 불똥이 터지며 협봉검이 그대로 튕겨 나가 버렸다·
앞서 내공을 담아 내려친 협봉검으로 상대의 병기를 꺾어 떨어뜨리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섭부용은 허리를 비틀며 옆으로 두 걸음을 급박하게 옮겨 디뎠다·
그때 혈부투귀의 우부(右菜)가 도망치는 그녀를 쭉 따라가며 옆구리를 찍었다·
그와 동시에 쭉 당겨진 좌부는 놀랍게도 그녀의 왼쪽 가슴을 찍어갔다·
그 속도가 지금까지 상대한 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대경실색한 섭부용은 발작적으로 물러나는 한편 톱니바퀴처럼 번갈아 날아드는 쌍부를 협봉검으로 다급하게 막아내기 바빴다·
까깡! 깡! 깡! 깡깡!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보법은 순식간에 흐트러지고 도화비검은 어느새 예리함을 잃어 갔다·
적에게 흔들리지 않는 거력과 번개처럼 빠른 초식 그리고 상대의 움직임을 정확히 읽는 눈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이래서 무공은 칼보다는 발이고 발보다는 눈이라고 하는 것이다·
검과 발과 눈은 결국 무수한 실전을 통해서만 단련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러던 어느 순간 섭부용의 보법이 빠르게 중심을 되찾아갔다·
도화비검도 예리함을 조금씩 되찾기 시작했다·
‘놀라운 적응력!’
그때였다· 혈부투귀의 좌우 쌍부가 또다시 섭부용의 양쪽 가슴을 찍어갔다·
여자들과 싸울 때 중요 부위를 공격하는 건 무림의 금기였다·
‘저런 개자식이!’
아니나 다를까 당황한 섭부용의 보법이 또다시 흐트러져 버렸다·
그 틈을 타고 혈부투귀의 좌부가 우부를 막기 위해 향해 쭉 뻗은 섭부용의 왼팔을 찍어갔다·
위협이 아니라 정말로 팔을 잘라버릴 속셈이었다·
‘지금!’
나는 비격쌍뇌창을 빗살처럼 쏘았다·
정확히는 쏘다가 뚝 떨어뜨렸다·
눈앞에서 무언가 번쩍하며 치고 나갔기 때문이다·
뻐엉!
이불을 터는 듯한 굉음과 함께 혈부투귀가 대여섯 장을 날아가 녹림도 진영의 탁자 아래로 쿵 처박혀 버렸다·
탁자가 무너지면서 음식이 와르르 쏟아졌다·
조금 전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남궁세옥이 검도 뽑지 않은 채 뒷짐을 지고 오롯이 서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날아들어 각법으로 혈부투귀의 어깨를 차서 날려 버린 것이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도 제대로 보지 못한 남궁세옥의 가공할 신법에 사람들은 또 한 번 입이 쩍 벌어졌다·
남궁세옥이 섭부용에게 물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덕분에 무사해요·”
“그만하면 도화곡의 예의는 충분히 가르쳐 준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남궁세가의 예의를 좀 가르쳐 볼까 하는데 양보해 주시겠습니까?”
일곱 명이나 되는 고수들을 쉬지 않고 상대하느라 섭부용은 사실상 진기가 고갈된 상태일 것이다·
남궁세옥은 마치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섭부용으로 하여금 물러날 명분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구대제자들의 사기를 생각해 도화곡의 무공이 패한듯한 그림을 만들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럼 뒷일을 부탁드려요·”
섭부용이 포권을 쥐고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탁자 밑에서 기어 나온 혈부투귀가 이성을 잃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떤 새끼가 죽으려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궁세옥이 신법을 펼치며 달려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을 떼는 순간 어찌 된 영문인지 대여섯 장의 거리가 반 장 정도로 좁혀졌다·
뒤이어 들리는 둔중한 타격음·
뻐억!
남궁세옥의 다리가 정확히 어떻게 궤적을 그렸는지 사람들은 이번에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그의 신형이 살짝 떠올랐고 체공 상태에서 한 바퀴를 옆으로 돌았고 다시 원위치로 떨어졌을 때 혈부투귀가 나가떨어지는 것만 보았을 뿐·
대(大) 자로 뻗은 혈부투귀의 입은 누군가 누워 있는 그를 향해 돌덩이로 내려 찍은 것처럼 함몰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목숨에 지장은 없겠지만 이제 고기는 다 먹었다·
녹림도 대여섯 명이 후다닥 달라붙어 혈부투귀를 업고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남궁세옥과 혈부투귀의 실력 차가 이렇게까지 날 줄 몰랐던 나는 살짝 당황했다·
남궁세옥은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선 채 좌중을 쓸어보며 냉혹하게 외쳤다·
“양주의 남궁장에서 온 남궁세옥이라고 하외다· 어느 분께서 제게 녹림의 도를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감히 함부로 나서는 이가 없었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검술의 천재이자 서른 살에 이미 초절정의 반열에 올랐다는 그를 누가 선뜻 상대하겠다고 나서겠나·
게다가 남궁세옥은 단 이 초식 만에 혈부투귀를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는 자신의 체력을 빼놓을 목적으로 어중이떠중이 덤벼들었다가는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주겠다는 경고였다·
남궁세옥은 딱 적절한 시기에 나서 주었다·
그 바람에 수백 명의 고만고만한 고수들을 모두 건너뛰게 되었으니까·
내가 볼 때 일반 녹림도들 중에선 남궁세옥을 상대할만한 자가 없다·
그를 상대하려면 장로급은 되어야 가능했다·
장로급 중에서는 아주 많아 보였다·
그때 정말 뜻밖의 인물이 나섰다·
“파산신권 종추악이외다·”
산 아래로 표행단을 마중 나왔던 삼당주였다·
백군악의 의제이자 녹림맹 서열 3위의 고수·
설인탁과도 사실상 친구처럼 지낸다던 사내·
하지만 그는 권사였다·
남궁세옥은 검사고·
맨주먹과 검을 든 사람이 싸우면 당연히 검을 든 사람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하물며 그 상대가 창룡검 남궁세옥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한데 종추악은 지금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대체 왜?
남궁세옥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귀하는 권사인 걸로 압니다만·”
“맨주먹으로 창룡검의 검을 어떻게 받겠습니까? 하여 저도 검을 한 자루 준비해 보았습니다·”
그런 질문이 아니었다·
종추악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남궁세옥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녹림도와는 길게 말도 섞기 싫다는 듯 검을 뽑았다·
스르릉!
오 척의 장검이 검신에서 뽑히는 순간 남궁세옥의 주변은 절대 사지로 변해 버렸다·
그 가공할 기세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남궁세옥의 입에서 나직한 한 마디가 흘러 나왔다·
“들어 오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