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문파를 옮겨라(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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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용초를 따라간 곳은 수서루(水西樓)라는 현판이 붙은 기루였다·
한눈에 봐도 돈을 물 쓰듯 쓰는 자가 아니라면 함부로 들어 갈 수 없을 만큼 으리으리한 곳이었다·
나와 남궁소소는 아무렇지도 않게 문턱을 넘었다·
한데 섭부용은 잠시 망설이다가 넘었다·
속세로 나와 본 적도 많지 않은 데다 여자의 몸으로 기루까지 들어가 보려니 어색하고 멋쩍은 것이다·
어쩌면 도화곡 제자들이 싸워야 할 가장 큰 적은 세상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안으로 들어가자 작고 아담한 정원이 나타났다·
곳곳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비파 소리가 듣기 좋았다·
주변을 둘러보며 매용초의 뒤를 따랐다·
어느 순간 왼쪽 전각에서 술 취한 사내 한 명이 툭 튀어 나왔다·
잠시 오줌보라도 비우러 나온 모양이었다·
문사풍의 청건에 온몸을 비단으로 휘감은 것이 딱 봐도 고관대작의 자제 같았다·
그는 눈앞에서 지나가는 남궁소소와 섭부용을 발견하고는 눈이 그만 동그래졌다·
”너희는 누흐냐?“
“···?”
“···?”
“아이 이어케 예쁜 기녀들이 어디서 나왔····”
“이런 씨발놈이!”
불현듯 화가 솟구친 나는 일단 놈의 아가리부터 찢어 놓으려고 했다·
남궁소소가 번개처럼 팔짱을 끼며 꽉 붙들어 매지 않았다면 말이다·
“참아요!”
“놓으시오!”
“우리가 왜 왔는지 기억하세요·”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오· 비키시오!”
“섭 향주님도 참고 있어요·”
옆을 돌아보니 섭부용이 두 주먹을 옆구리에 딱 붙인 채 힘을 주고 있었다·
문파의 안전한 이전과 도화곡에서 기다리는 300명의 제자를 생각해 최선을 다해 참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화가 나도 그녀만큼 화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또 뭐냐? 기둥서방히냐? 너 내가 누훈지 알아? 엉?”
“입을 막아라!”
타탁 탁!
매용초의 한마디에 호위무사가 달려들어 번개처럼 마혈을 짚었다·
픽! 하고 쓰러지는 사내를 다른 호위무사가 부축했다·
정말 고관대작의 자제라면 건드려서 결코 좋을게 없다·
그러나 매용초의 입장에서는 이렇게라도 해서 입을 막는 게 나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남궁세가의 영애가 수모를 당해서는 곤란하니까·
그때 또 한 명의 사내가 전각을 나오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
그는 앞뒤로 비틀거리며 한참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다·
“이게 지금 므하는 짓이햐?”
“용 공자님 술이 조금 과하신 듯합니다· 술값은 받지 않을 테니 오늘은 천 공자님을 모시고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떠할는지요·”
“돌아가? 어딜?”
“댁으로요·”
“왜?”
“술이 좀 과하신 것 같습니다·”
“누가? 내가?”
“그렇습니다·”
“왜?”
“천 공자님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라고 친우분들과 함께 오셔서 밤새 술을 드셨습니다·”
“천 고자가 생힐이라고?”
얼마나 처 마셨는지 이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인사불성이었다·
게다가 이 인간도 앞서 놈처럼 남궁소소와 섭부용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얘들은 누흐야? 와하 예쁜 기녀들이····”
타타탁!
이번에도 호위무사가 마혈을 짚더니 픽 쓰러지는 놈을 부축했다·
그때 다른 칼잡이 서너 명이 후다닥 달려와서 매용초에게 허리를 숙였다·
“마차를 준비해 공자님들을 전부 댁으로 모셔 드려라· 책 잡히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알겠습니다·”
칼잡이들이 술 취한 놈들을 업고 사라지자 매용초가 얼른 남궁소소와 섭부용을 돌아보며 말했다·
“두 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남궁소소가 말했다·
“천운비 공자의 생일인가요?”
“천운비 공자를 아시나요?”
“명성이 자자하더군요·”
“좀 그런 편이시지요·”
“억지로 마차에 태워 보내면 틀림없이 나중에 찾아와 강짜를 놓을 거예요· 더이상 마주치는 일만 없다면 우리는 괜찮아요·”
“사정을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안 그런가요?”
남궁소소의 의미심장한 말에 매용초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 다시 앞장을 섰다·
가는 길에 남궁소소가 전음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욕을 잘하시네요·]
[나도 모르게 그만·]
[되게 자연스럽던데·]
[다음부턴 조심하겠소·]
[조심할 것 없어요· 욕은 그럴 때 하라고 조상님들께서 만드신 거 아니겠어요? 앞으로도 누가 내게 모욕을 주면 대신 욕하고 때려줘야 해요·]
[물론이오·]
[그건 그렇고 루주와는 어떤 사이였어요?]
[벌써 다 온 모양이오·]
[아직 멀었거든요· 10년 전에 처음 만났다던데 도대체 몇 살 때부터 기루를 들락거린 거예요? 그때도 뭘 알기나 하고 들락거린 거예요?]
우리는 수서루 중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호화로운 객방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엔 이미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술과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우리가 올 줄 어떻게 알고?
나는 남궁소소와 조용히 눈빛을 나누었다·
“우선 제 술부터 한 잔씩 받으셔요·”
매용초는 나와 남궁소소와 섭부용에게 일일이 술을 따라 주었다·
맑은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꽃향기가 콧구멍과 입안 가득히 퍼졌다·
남궁소소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게 무슨 술인가요?”
매용초가 웃으며 물었다·
“마실만 한가요?”
“마실만 하다마다요· 정말 좋아요·”
그러면서 남궁소소는 섭부용을 돌아보며 물었다·
“향주님은 어때요?”
“이런 술은 처음 마셔봐요· 음식들도 처음 보고요·”
술도 술이지만 그녀는 음식이 더 신기한 모양이었다·
산중에서 투박하고 거친 음식들만 먹다가 기루의 화려한 음식들을 보니 눈이 휘둥그레질밖에·
살짝 어색해진 듯하자 매용초가 얼른 말했다·
“칠채화주예요· 이름처럼 일곱가지 빛깔의 꽃으로 빚어 만든 수서루만의 술인데 숙성될 때까지 화향(華香)이 날아가지 않도록 잡아두는 것이 관건이죠· 두 분 아가씨들이 계셔서 준비를 해보았답니다·”
“칠채화주의 명성은 저도 들었어요· 한 병에 은전 두 냥씩이나 하는 귀한 술이라던데 이렇게 흔쾌히 내주셔서 감사해요·”
“술과 음식은 얼마든지 있으니 편하게 드세요· 필요하시다면 돌아가실 때 몇 병 싸드릴까요?”
“정말인가요?”
“이 공자님의 친구분들이시라면 제게도 귀한 손님들이시랍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다시 한 잔을 더 마시고 젓가락으로 음식도 몇 개 집어 먹었다·
섭부용은 무얼 어떻게 먹는지 몰라 남궁소소가 하는 대로 따라만 했다·
다시 남궁소소가 물었다·
“두 분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열아홉 살 때였나? 어떤 봄날 기루의 뒤꼍 길가에 홀로 앉아 울고 있었어요· 그때 열두세 살가량의 잘생긴 공자님이 하인과 함께 지나가시다가 제게 묻더군요· 뭘 잃어버려서 그렇게 울고 있냐고요·”
“어린 공자가 맹랑하네요·”
“제 고향은 원래 산동 소요현이라는 곳인데 이맘때면 화전을 일구느라 고생하실 어머니와 동생들이 생각나서 운다고 했지요·”
“고향이 산동이셨군요·”
남궁소소는 그녀가 항주까지 흘러들어와 기녀가 된 사정은 묻지 않았다·
나는 왠지 매용초가 처음부터 기루로 온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서 표행 중 만난 화전민들은 대부분 딸이 열서너 살쯤 되면 도회지의 가난한 사내들에게 팔아 버리듯 시집을 보냈다·
입을 하나라도 줄이고 딸도 시집을 가면 최소한 배는 곯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후에 팔려간 딸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못 봤다·
부모도 자식도 까막눈인 데다 연락할 방법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10 년 정도 흐르면 아예 서로 생사조차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공자님께서 소요현 어디에 살았으며 동생들의 이름이 어찌 되는지 꼬치꼬치 캐물으시더라고요·”
“왜요?”
“저도 궁금했었는데 그땐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석 달 후 한밤중에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서는 기루로 절 찾아오셨지요· 손에는 편지 세 통을 들고요·”
“편지라고요?”
“공자님께서 산동 소요현 인근으로 표행을 가는 쟁자수들에게 부탁을 해서 저의 고향집을 찾아보게 하셨나 봐요· 그리고 어머니와 동생들이 불러주는 말을 받아 적어 제게로 가져다준 것이었어요·”
“그날 밤 편지를 품에 안고 자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글을 아는 기녀에게 부탁해 하루에도 몇 번씩 읽어 달라고 했어요· 그때 마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옆에서 제게 말을 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저도 글을 익히기 시작했고요·”
남궁소소와 섭부용이 동시에 깜짝 놀라서는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한데 사실 두 사람보다 내가 훨씬 더 놀랐다·
‘이정룡이 그런 짓을 했다고?’
멋쩍어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더욱 놀라운 말이 매용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때 이후로 공자님은 다른 어린 기녀들의 고향도 물었다가 소식을 알려주곤 했어요· 그렇게 몇 년이 흐르자 자주 찾는 기루의 기녀들 중에서는 공자님의 신세를 한 번이라도 지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지경이 됐죠·”
“하면 뻔질나게 기루를 드나든 이유가····”
“기녀들을 돕기 위해서죠·”
“하지만 소문엔····”
“호구 등신에 반푼이라고들 했죠· 하지만 누구도 방탕한 화화공자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사실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일을 그렇게 오랜 시간 해주었으니 반푼이라는 말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요·”
“혹시 내가 안 보이는 건 아니시지요?”
내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죄송해요·”
매용초가 활짝 웃었다·
섭부용은 이런 얘기들이 다 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남궁소소는 얼마나 놀랐는지 나를 바라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때 인기척과 함께 호위무사가 들어와서는 매용초에게 무언가 눈짓을 보냈다·
호위무사가 돌아가고 나자 매용초가 말했다·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오늘 제가 이 공자님을 만난 건 우연이 아니랍니다· 이 공자님께서 양주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꼭 뵙고 싶어 하는 분의 부탁으로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어요· 한데 그분이 지금 막 도착을 하셨다는군요·”
“그가 누구요?”
“실례지만 이 자리에서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두 분 아가씨께서 기다려 주시면 이 공자님을 잠시 다른 곳으로 모실까 합니다·”
“누군지 모르나 우리는 앞으로 최소 한 달 동안 함께 여정을 해야 하는 사이오· 시작도 하기 전에 비밀부터 만들 수는 없····”
“그렇게 하세요·”
갑자기 끼어든 사람은 남궁소소였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루주님의 사정도 헤아려 주셔야죠· 그리고 귀하에게 비밀이 있다고 해도 우리의 신뢰가 깨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절대로요·”
남궁소소는 섭부용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안 그런가요? 향주님·”
“물론이죠·”
“두 분 아가씨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나는 남궁소소를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겠소?”
“여긴 양주에요· 단언컨대 양주에서 내게 해코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향주님도 함께 계시고요· 걱정 말아요·”
매용초과 함께 밖으로 나온 나는 회랑을 따라 한참을 걸어갔다·
어느 순간 갑자기 시야가 트이며 호수와 연결된 통나무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 아래에는 평범한 나룻배가 한 척 매어져 있었다·
사공은 봄볕을 피하고자 커다란 죽림을 썼는데 팔다리가 빠짝 마른 데다 비정상적으로 길어서 꼭 사마귀 같았다·
배에 올라타자 사공이 죽립 두 개를 건네주었다·
매용초가 먼저 받아 쓰고 내게도 하나를 권했다·
“공자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요·”
순간 이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매용초 자신을 위해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직업이 직업인 만큼 그녀를 알아본 사람이 함께 탄 나를 궁금해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내 얼굴을 알아본 사람이 있다면 함께 탄 매용초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공이 삿대를 힘껏 찍자 배는 빠르게 호수 위를 미끄러져 갔다·
한참이 지나도록 매용초는 말이 없었다·
단지 볕을 즐기고 바람을 즐기고 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를 즐길 뿐이었다·
이윽고 호수의 중간쯤 갔을 때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저를 전혀 기억 못 하시죠?”
“예?”
“솔직히 말해 주세요·”
“그렇소·”
“서호에서의 일이 있고 난 후부터인가요?”
“아마도·”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나와 지금 내 행동들이 아귀가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걸 내가 서호에 뛰어들었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후 기억의 일부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눈치가 보통 빠른 게 아니었다·
“혹시 아까 한 얘기들 죄다 지어낸 것이오?”
“그것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요?”
“그렇소·”
“대체 어디까지 기억을 못 하시는 건가요?”
“유흥가와 관련된 건 전부·”
“기분이 묘하네요· 제게 공자님은 아주 특별한 사람인데 공자님께 저는 그냥 기녀 출신의 처음 보는 루주인 거잖아요·”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오·”
“알고 있어요·”
매용초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아까 제가 한 말들은 한 치의 거짓도 없어요· 다만 아가씨들이 계셔서 말을 하지 않은 게 조금 있을 뿐·”
“그게 무엇이오?”
“방탕하게까지는 아니지만 음주가무도 꽤나 즐기셨어요· 돈도 많으셨고 공자님을 흠모하는 기녀들이 많았거든요·”
“하면 나에 대해 소문이 안 좋게 난 이유가?”
“허구헌 날 기녀들과 어울리니 당연하죠· 밤을 꼴딱 새는 건 예사고 사흘이고 나흘이고 기루에서 뒹굴다가 술취해 댁으로 실려간 적도 많아요·”
“호옥시 우리가····”
“같이 잤냐고요?”
“꿀꺽·”
“지금 제가 말하면 그게 그대로 사실이 되어 버리는 상황인 건가요?”
“잤소?”
“훗·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일은 없었으니까·”
“휴우····”
“그렇게까지 다행인 일인가요?”
“내가 지금 겪고 있는 혼란스러움을 소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오· 아무튼 어린 내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잘 이끌어 주어서 고맙소·”
”천만에요·“
“그리고 지금 나눈 얘기들은 전부 비밀로 해주면 좋겠소·”
“일부러 말할 리야 없겠지만 조금만 조사해 보면 금방 드러날 거예요· 항주 유흥가의 오래된 기녀들은 웬만큼 알 테니까요·”
“그거면 충분하오·”
“필요하시면 과거를 전부 바꾸어 드릴 수도 있어요·”
“어떻게 말이오?”
“기존의 소문들을 헛소문으로 만들어 버리고 새로운 소문들을 오래전부터 떠도는 것들인 것처럼 퍼뜨리는 거죠·”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요?”
“제가 이래뵈도 하오문주의 제자거든요·”
“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