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문파를 옮겨라(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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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직예성 하고도 서쪽 대별산 깊은 곳에 도화곡이라는 천혜의 골짜기가 있었다·
이름처럼 봄이 되면 복숭아 꽃이 만발하는 도화곡은 옛날부터 약초꾼들을 통해 아름다운 여자들이 숨어 사는 곳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이런 소문만 믿고 못된 상상을 하며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수가 있다·
도화곡은 단순히 화전민들이 모여 사는 산간마을이 아니었다·
도화비검(桃花飛劍)이라는 신비한 검맥이 전해 내려오는 무림문파였다·
도화곡이 본격적으로 무림에 알려진 것은 5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노파가 일곱 명의 젊은 여자들을 이끌고 합비에 나타나 육경방(穴度常)을 하룻밤 만에 쑥대밭으로 만들고 사라졌다·
방주를 비롯해 170여 명에 달하는 육경방의 흑도들 중 살아남은 자는 단 세 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똥통에 숨고 스스로 배를 찔러 죽은 척했고 실제로 반쯤 죽었다가 운 좋게도 살아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살아 남은 자들의 입을 통해 그 무시무시한 노파가 대별산 도화곡의 곡주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도회지로 나갔다가 필요한 물품을 사서 돌아오던 어린 제자 열두 명이 뒤를 밟아온 육경방의 흑도들에게 당한 짓에 대해 복수를 하기 위해 하산 했다는 것도·
그때부터 강호인들은 하늘 아래 꽃의 이름을 따서 지은 두 개의 검법이 있는데 하나는 화산의 매화검이고 다른 하나는 대별산의 도화비검이라고 했다·
동시에 대별산 도화곡은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되는 절대금역이 되었다·
“바로 그 도화곡이 문파를 통째로 옮기고 싶다는구나· 그것도 더욱 깊은 산중의 골짜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사는 큰 도시로·”
늦은 밤 회동 장소로 가면서 이종산이 내게 해준 말이었다·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전생의 기억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아는 건 소문으로만 전해 들은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들에 불과했다·
궁금한 것 투성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것은 무려 이백 년 동안이나 은둔의 문파였던 도화곡이 갑자기 속세로 나오려고 하는 이유였다·
“왜요?”
“돈 때문이다·”
“예?”
“현재 도화곡의 제자는 무려 삼백여 명에 달한다는구나· 척박한 산중에서 입이 많다 보니 지난 십 년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굶은 일도 허다했다고·”
사람이 어디 먹고만 사나·
입을 옷도 있어야 하고 집도 있어야 한다·
그 외 살아가는데 필요한 세간들도 한둘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돈이다·
무공이 밥 먹여 주지 않는다·
무림문파도 돈이 있어야 꾸려나갈 수 있다·
소위 말하는 화산파나 무당파 소림사는 종교에 기반한 문파이기에 참배객들이나 발복을 염원하는 부호들의 막대한 후원을 받는다· 그걸로도 모자라 속가문파들을 통해 광산 농장 상방 등을 운영하고 경영한다·
그렇게 들어오고 벌어들이는 돈 덕택에 중이며 도사들이 다른 일은 하지 않고 평생 수도나 무공수련에만 매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화곡은 종교문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광산이나 농장이나 상방을 경영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여자들끼리 산중에서 화전을 일구며 먹고 살았다·
수십 명일 때는 그게 가능했는데 입이 삼백 개로 늘어나고 보니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제자들을 속세로 내려보내 돈을 벌어오게 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요·”
“암암리에 그렇게 한 것으로 안다· 천룡표국의 정보망에 의하면 대리인을 내세워 상방을 운영한 적도 수차례 있었고·”
“잘 안됐군요·”
“상방은 망하거나 대리인들에게 사기를 당하기 일쑤였고 관리 감독을 위해 내려보낸 제자들은 흑도의 고수들에게 욕을 본다거나 사내와 눈이 맞아 파문을 당하는 경우가 속출했지·”
“그럴 바에야 아예 하산을 해 속세로 터전을 옮기겠다는 뜻이군요· 늘어나는 제자들을 굶기게 할 수는 없으니·”
“일단 겉으로 파악하고 있는 정황은 그렇다·”
“이백 년을 이어져 온 은둔의 산중문파가 본래의 정체성을 버리고 속세의 문파로 거듭나려는 이유가 고작 돈 때문이라는 게 씁쓸합니다·”
옆에서 가만히 대화를 들으며 걷던 곽석산이 한 말이었다·
그러자 손지백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말을 받았다·
“여자들이 도를 닦는 것도 아닌데 반드시 산중에 있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이오? 그리고 ‘고작돈’이라니· 천하에 수천만 개의 도리가 있지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오·”
“가난의 고단함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여자들끼리 산중에 살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인데 다른 것도 아니고 호구를 위해 하산한다는 게 씁쓸하다는 거지요·”
“아직도 내 말을 못 알아들으시는구려· 세상에 돈 만큼 무서운 것이 없소· 돈이 있으면 서른 살에도 어르신 소리를 듣지만 돈이 없으면 쉰 살에도 수레를 밀며 뛰어야 하는 법이오· 하물며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라면 당장에 내려오는 것이 맞지·”
곽석산의 말에도 공감이 되고 손지백의 말에도 수긍이 갔다·
천룡표국에 그런 사람 많다·
전생의 나도 그랬고·
하지만 나는 왠지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겉으로 파악하고 있는 정황’이라는 단서를 단 걸 보면 이종산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다시 이종산에게 물었다·
“한데 무림문파들은 왜 이 일에 뛰어드는 겁니까?”
“막대한 이사비용도 문제거니와 평생을 산중에서만 산 탓에 속세의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 도화곡주께서 문파를 가장 안전하게 옮겨주는 곳에 비급 하나를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비급이라고요?”
“무림인들은 도화비검이야말로 도화곡을 대표하는 무공이라고 하지· 그러나 천금풍(千金風)이라는 경공술 또한 도화비검 못지않다·”
“그렇게 대단한 경공술입니까?”
“개방과 하오문에서는 현 도화곡주인 일추천리(一追千里) 여종매를 무림에서 가장 빠른 열 명의 고수들 중 한 명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데도 그는 천금풍을 구성밖에 익히지 못 했다고 하더구나·”
일정 공간 안에서 무공을 펼치기 위해 신형을 움직이는 공부를 보법 혹은 신법이라고 부른다·
경공은 경신공의 줄임말로 몸을 가볍게 만들어 원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는 공부다·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말보다 빠르며 눈 위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풀잎 위를 밟으며 바람처럼 달릴 수도 있다·
이틀 전 비무를 할 때 양조창과 남궁소소가 물 위에 뜬 연잎을 밟으며 달려간 것도 바로 경공술이었다·
나는 아직 충분히 익히지 못해 배를 타고 열심히 노를 저었지만·
“무림문파에게 비전 무공은 일종의 혼(魂)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요? 그걸 이렇게 함부로 주어도 괜찮은 것입니까?”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겠지· 그래도 아무 곳에나 흘러 들어가는 건 바라지 않았던지 지원한 문파들 중에서도 나름 명망 있는 곳들만 추려서 오늘 만날 기회를 주었다더구나·”
“다른 곳은 그렇다고 쳐도 남궁세가는 왜 뛰어드는 겁니까? 천하의 남궁세가에 쓸만한 경공술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요·”
“육경방의 일이 있고 난 후 뇌검께서 도화곡을 찾아 정중하게 비무를 청했다고 한다· 신비로운 검공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참을 수가 없으셨던 게지· 그는 현재의 도화곡주와 칠주야 동안 대별산을 종횡무진 누비며 모두 다섯 번을 겨루었는데 그중 세 번을 이기고 두 번을 졌다고 한다·”
“예에?”
“한데 패배한 두 번이 바로 도화곡주께서 천금풍의 경공과 함께 도화비검을 펼쳤을 때라고 하더구나·”
50년 전이면 까마득한 일이기는 하다·
그때의 남궁유룡은 마흔 언저리였고 아직 뇌검이라는 별호조차 얻기 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훗날 천하십검 중 한 명이 될 희대의 검사가 심산 골짜기의 젊은 여검객에게 두 번이나 패했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비로소 도화곡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뇌검께서는 엉뚱하게도 도화곡의 경공술인 천금풍에 남궁세가의 제왕검을 파해(破解) 하는 묘리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더구나·”
보법도 아니고 경공술에 그런 묘리가 깃들어 있다는 게 엉뚱하게 들리긴 했다·
하지만 남궁유룡이 그렇다면 분명 그럴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남궁세가에서는 천금풍이 다른 문파로 흘러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천금풍을 손에 넣고 익힌 다음 제왕검의 약점을 보완하고 발전시킬 수도 있다·
어떤 무공들은 단점 하나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비약적으로 발전한다는 얘길 어디선가 들은 적 있었다·
이제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대충 알겠다·
재정 상태가 사실상 알거지인 도화곡에서는 간단히 말해 이사비용으로 천금풍이라는 무공비급을 내놓았다·
그러자 천금풍을 원하는 무림문파들이 이사비용을 대신 대는 조건으로 표국을 고용한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인적이 없는 후원의 어느 전각 앞에 도착했다·
오늘 밤 도화곡의 이전을 놓고 비밀 회동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
“어서 오시오· 국주·”
기다란 탁자의 가장 오른쪽 상석에 앉아 있던 남궁유룡이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그의 소개를 시작으로 잠시 인사가 오고 갔다·
넓은 전각엔 남궁세가를 비롯해 일곱 개 문파와 일곱 개 표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남직예성에서 내로라하는 무림문파와 표국의 수장들이었다·
그러나 내 신경은 온통 탁자의 왼쪽 끝 상석에 앉은 칠순 가량의 노파에게 꽂혀 있었다·
격식을 갖춰 입은 듯한 자줏빛 장포와 단정하게 쪽을 지어 올린 은발의 머리카락 그리고 젊은 사람 못지않은 꼿꼿한 허리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노파였다·
‘일추천리 여종매!’
단지 앉아 있기만 했을 뿐인데도 뭐라 말할 수 없이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남궁유룡과 같은 남자 노강호를 대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녀의 뒤쪽에는 암녹색 장포에 유건을 쓴 젊은 여자 일곱 명이 허리에 협봉검을 한 자루씩 찬 채 시립해 있었다·
남장까지는 아니었지만 여성성을 최대한 절제한 복장에서 중성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철저하게 실용성을 추가하는 가풍이 느껴졌다·
“천룡표국주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철산문(鐵山門)의 문주 유종명이 물었다·
갑작스러운 이종산의 등장에 그는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다른 문파의 문주들과 표국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궁세가주님의 초대를 받고 왔습니다·”
“남궁세가에서는 창해표국(治海鏡局)을 고용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남궁유룡의 바로 왼쪽에 앉아 있는 창해표국주에게로 쏠렸다·
창해표국주는 자신이 대답할 내용이 아니라는 듯 남궁유룡에게로 다시 시선을 넘겨 버렸다·
남궁유룡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모두 아시다시피 천룡표국주께서 마침 노부의 팔순 잔치에 오셨기로 잠시 고견을 들어볼까 해서 모신 것이외다·”
“그런 말씀은 없으셨잖습니까?”
“무슨 문제가 되오이까?”
“하나의 문파에서 한 명의 표국주만 모셔 오기로 한 것이 아니었던가요? 한데 남궁세가에서는 두 곳의 표국주를 모셨으니 이러면 공정한 경쟁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시는 철산문에서도 여러 장로들을 대동하신 것 같소이다만 다른 문파와 표국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각각의 문주와 표국주들 뒤에 서너 명씩 시립해 있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문파도 표국도 워낙 큰 먹잇감이 걸려 있다 보니 경험 많고 머리께나 쓴다는 장로급 인사들을 최대한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이들은 저와 표국주를 보좌하기 위해 온 참모일 뿐입니다 이 자리에 앉지도 않을 것이며 발언할 기회도 없을 것입니다· 가주님께서 천룡표국주를 모신 것과는 사정이 다르지요·”
“마찬가지외다·”
“예?”
“철산문주께서 문 내의 장로들을 참모로 데리고 오셨듯 노부는 천룡표국주를 모신 것이외다· 천룡표국주께서는 오직 노부에게만 조언을 줄 뿐 이 자리에 앉지도 발언을 하지도 않을 것이니 안심하시오· 껄껄껄·”
그러고 보니 남궁유룡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문파들 중 표국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한 성(省)을 대표하는 무림세력이기도 한 곳은 오직 천룡표국 밖에 없다· 거기다 국주인 이종산은 표왕으로 불리는 그야말로 표국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 중대한 자리에서 앉지도 발언을 하지도 않을 거라는 말에 모두가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창해표국은 남경에 총타를 두고 중원 전역에 무려 일곱 개의 분타를 거느린 대형 표국이었다·
창해표국주는 이 상황이 누구보다 불쾌할 만도 할 텐데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남궁유룡이 창해표국주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창해표국을 앞세워 경쟁자들의 관심과 견제를 유도한 것이거나·
자세한 건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알 일이었다·
철산문주는 옆에 있는 화양표국주 노흉관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나누었다·
화양표국주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믿고 맡겨 보라는 뜻이다·
철산문은 얼굴과 이름을 빌려줄 뿐 배후에 양가장이 있음을 뻔히 아는 나는 저들의 수작이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다·
흑도라고 전부 개자식들이 아닌 것처럼 백도라고 해서 모두가 공명정대하거나 협의지사인 것도 아니다·
철산문과 화양표국뿐만 아니라 모두 긴장하고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도화곡주는 오히려 호기심을 드러냈다·
아무리 산중에 은둔했어도 천룡표국과 표왕이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테니까·
“오늘 모인 이유는 모두 알 것이고 각자 돌아가며 도화곡을 사천까지 어떻게 옮길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설명하도록 하지요·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 아쉬움이 남지 않게 충분히 쓰시길 바랍니다·”
남궁유룡이 서두를 열었다·
이종산과 나와 두 분의 숙백부가 남궁유룡의 뒤쪽에 시립한 상태에서 많은 이들의 운명을 결정할 회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